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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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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20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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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을 극복하는 희망의 삶
죽음은 단지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안에서 현재의 삶을 의미있게 해주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교우 여러분,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 (1데살. 4,13-14) -
죽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인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과 죽음의 상황들이 내 생활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면에서 이러한 문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사랑하던 가족이나 친척, 아니면 절친한 친구분의 죽음을 경험했다면 그분들의 죽음을 통해 슬픔과 함께 과연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인간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며 자문해 보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들의 죽음뿐 아니라 매일 집으로 배달되어오는 신문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대하고 있다. 오히려 너무도 자주 그리고 일상적인 죽음에 대한 사건 보도속에서 무감각해져버린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에워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을 철저하게 의문에 처하게 한다.
2. 믿음과 희망은 새로운 삶의 시작
1) 죽음의 체험
죽음과 더불어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인간은 참으로 가련한 존재일 것이다.
죽음의 비극을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죽음이란 인생의 모든 가치들을 부정해 버리는 강력한 허무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쾌락 등과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들뿐 아니라, 예술, 사상, 학문과 같은 '영원한' 정신적 가치라 할지라도 인간을 죽음의 힘으로부터 보호해 주지는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믿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도덕적 헌신과 투쟁도 종국에 가서는 죽음이 가져다 주는 회의와 허무 앞에서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한 손 안에 쥐고자 했던 그 어떤 권력자들, 진시황제, 히틀러, 스탈린 등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고,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경우 제5공화국의 권력자도 잘 차려진 술상 앞에서 마지막 술잔을 들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의 주변을 잘 살펴보면 너무도 억울한 죽음들이 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착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나 암으로 인해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조금 더 누려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외에 자유와 정의를 위해 앞장섰던 사람들이 권력의 총부리 앞에 쓰러졌던 경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아기들의 죽음은 그 어머니의 가슴을 찢는 아픔을 남겨주기도 한다.
죽음이 우리를 아픔과 슬픔 그리고 허무로 몰아세운다고 하지만 죽음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옛 그리이스인들은 인간의 죽음을 다음의 네 가지 범주에서 설명하였는지도 모른다.
첫째로, 누구든지 홀로 죽는다. 같은 죽음은 이 세상 어디도 없다는 것이다. 같이 죽으려고 약을 같이 먹어도 홀로 죽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대신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도 부모가 대신 죽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째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네째로, 반드시 죽는다. 즉, 죽음의 보편성이다.
그러기에 철학자 하이데거(M.Heidegger)는 "인간은 죽음에로의 존재"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죽음은 생명 안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존재의 조건으로 스며들어 있다.
분명 인간은 죽음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전도3,2)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 앞서 인간은 죽음이 지금 까지 가꾸어오고 지켜온 삶의 지속을 단절 시키기 때문에 저항의 몸부림을 치게 된다.
누구든 지금의 삶을 지속하고 싶고 또한 자신이 가꾸어온 노력의 결실들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한다. 죽기 싫은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싫은 것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 또한 두려움을 낳게도 한다.
그밖에 실증적인 죽음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죽음 이후의 사실에 대한 어떤 증인도 접할 수 없다는데서 불안, 혹은 공포는 더해간다. 단지 죽음 뒤에 남는 차고, 굳어진 시체와 그것이 한 줌 흙으로 남는다는 '주검'의 현상이 어떠한지 우리는 알 뿐, 죽은 어떤 생명도 죽음 뒤의 삶의 지속이 어떠하리라고 나에게 증언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의 체험이 과중하고 때로는 고통스런 문제들을 야기시키기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몹시 꺼리며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즉각 거부 반응을 보이기가 예사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간혹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게 되더라도 '나'는 아닌 타인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죽음의 필연성 앞에서 자신을 감추어 버리거나 도피하게도 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회피와 함께 착하고 열심한 많은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의 불의한 죽음, 그리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삶의 회의마저 안겨 준다. 그래서 우리들은 한번쯤 "왜?" 라는 항변과 함께 신(神)은 인간에게
죽음을 허락했는지 신(神)을 미워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곁을 떠났을 때….
그러나 성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지혜서 1,13-14)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루가14,14)라고 약속하셨다.
죽음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답은 그저 위안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으로 말미암아 이미 패배당한 악을 거슬려 투쟁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믿지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패배요, 멸망이며, 허무일 수 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삶의 완성이요 새로운 생명에로의 시작이 된다.
2) 신앙은 생명의 열쇠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은 거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크다. 죽은 이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끝없는 생명을 향한, 인간이 풀 수없는 열망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죽음의 길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이 희망은 하나의 사건 즉 예수부활 사건을 통해서 증명된다. 그것은 동시에 죽은 자의 소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암시이기도 하다.
부활을 마치 전에 살아 활동했을 때처럼 어떤 방법으로든지 잠에서 깨어나는 것같이 인생살이를 하는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바다로 되돌아가는 물줄기에 비교되듯 불멸의 영혼에 관한 내용도 아니다.
우리가 죽은 이의 부활을 믿는다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예수의 영안에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육체와 더불어 부활하고 영속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게 발생한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완성하시고자 오실 때,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여기서 신약성서의 부활증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것은 상처를 간직하고 계신 예수의 몸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부활하신 분으로서 어떻게 먹고 마시며 드시는지 보도하고 있다. 바로 이사실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전 인간 존재로서의 '몸'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영광 받은 육체로써 하느님의 생명 안에 빛나는 거룩한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우리의 육체적이고 죽어갈 생명은 보호를 받아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안에서 불멸한 것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죽은 이의 부활을 마치 하나의 씨앗처럼 설명하고 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4).
3) 육신의 부활
여기서 하나의 새로운 물음이 제기된다.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믿어 고백하고 있는 '육신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고 또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육신의 부활이란 단지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진 육신이 종말에 가서 새로운 살과 뼈로 재생되어 영혼과 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현세에서 육신의 불구로 말미암아 고통과 소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도 그들의 불편한 육신을 갖고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많은 돈을 들여가며 성형수술로 기껏 얼굴을 고쳐 놨는데 모두가 꽝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영혼과 육신이라는 성서적 이해와 구원은 전인(全人)에 결부된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간과한데 기인한다.
본래 인간을 영혼과 육신이라는 두개의 본질로 양분화하여 표현한 것은 희랍 문화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그리스도교가 희랍 문화권 속에서 적응하며 선교하고자 할 때 결부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성서적인 개념도 그리스도교적인 개념도 아니다.
성서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개 혹은 세 개의 본질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단일체이다. 성서는 '육신', '영혼', '영', 등의 개념을 써서 인간존재의 다양한 면모들을 구별하여 고찰할 때에도 역시 인간존재의 단일성을 고수하였다.
성서에서의 '육신'과 '영혼'은 자연적 차원의 전인을 가리키는데, 육신이 개인에 있어서의 육체적인 면모와 인간이 동물계와 땅과 맺고 있는 관계와 가견적 조건 및 소멸될 인간조건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영혼은 유독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모든 요소를 통틀어 인격으로서의 인간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다."(요한5,25)는 희망은 살이 썩어버린 육신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니며, 또한 육신과는 관계없이 불멸하는 영혼만이 하느님께 귀환하는 것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죽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죽음을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을 선사한다고 희망할 때, 우리는 이제 새로운 생명이 단순한 영혼, 즉 순전히 정신적 주체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 구체적 인격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아마 누가 생명의 완성이란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을 경우, 그가 세상에서 겪는 간난고초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 지상에서의 삶이 새 생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와 부활의 육체와에 대한 신앙은 하나의 놀라운 희망을 안겨 준다. 지나가는 세상은 장차 변화될 것인데, 선의의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 나간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의 의무로 부과된 윤리적 동기를 수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믿고 부활을 희망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최소한 이 세상이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상당한 꼴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힘만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령, 위독한 병을 앓고 있을 때라 하더라도, 단념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이 지상 존재로서의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한계를 견디어 낼 능력이 있다. 그들은 평정을 잃지 않고 고통과 불합리한 것들을 거스려 온 힘으로 저항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의 재난을 보고 눈을 감아버리는, 그리고 그러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와는 다르다.
우리들의 인격체는 세계와의 교제를 통해서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즉,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구조에는 육신과 물질세계가 항상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연로한 얼굴의 주름살 속에 온갖 삶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듯이 인간은 자신이 현세에서 이룩한 '시간의 수확'은 그의 죽음 속으로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다. 육신과 세계와 역사가 죽음 속에서 탈피되지 않고 인간 속에서 내적으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희망은 전인적 부활로써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육신의 부활이란 사멸하는 시체의 이적적(異蹟的) 종말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역사적인 정신적 자아로서 충만에 이를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와 역사가 그의 전체 삶과 함께 하느님께로 귀환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4) 믿는 이들의 죽음
믿는 이들은 진리를 그 자체로 알아듣지만, 그는 인간이 완성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마무리 지으시리라는 것을 희망한다. 노력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시리라는 사실에 대한 명백하고 철저한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어느 시대에나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이 죽지만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란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해서 인생을 뜬 구름 같다느니 하는 허무주의도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이 세상에서 죽으면 다시 다른 생명체로 넘어가게 된다고 주장하는 윤회설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음은 어떤 한 사람이 드디어 완성되는 순간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현대의 가톨릭 신학자들이 많이 쓰고 있다.
각 개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 점차 자라면서 성숙한다. 자라고, 성숙하고, 깨닫고, 결심하고, 그러면서 수 많은 시간을 이어가는 한 인간의 죽음은 결국 그 결과는 완전을 향한 길이어야 한다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삶 자체는 죽음과 연결하여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삶이란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므로 생의 완숙을 이루는 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철학자는 신앙인의 삶이란 '살기 위한 삶, 곧 절대자를 찾는 추구'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면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자기 인간성의 완성 또는 자기실존의 마지막 성숙으로, 이 성숙은 죽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향한 삶 안에서 매 순간순간 나의 모든 태도 여하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인간의 아픔과 꺼져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두려워한다.(사목 헌장 18항)"고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표현하면서 가톨릭 교리는 이 죽음의 문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요한 11,25)' 안에서 해결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5) 생명의 하느님
사도들의 설교는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다는 사실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그들을 파견하시는 분도 부활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 예수의 부활에 있다. 예수의 부활이야 말로 그분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보증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고린 15,14-17)라고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당신 스스로를 죽음을 쳐 이기는 힘이시요,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으로 증명해 주신 것이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보장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이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을 위해서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시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요, 무(無) 자체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더불어 새로이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초대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각자도 내 인생이 죽음으로써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내가 겪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어 누리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3.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아픔과 꺼져 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기술의 모든 노력이 제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는 없다.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은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고차적(高次的) 생명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어떠한 상상도 죽음 앞에서는 맥없어지지만, 하느님의 계시를 들은 교회는 인간이 지상 불행의 한계를 넘어서 행복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도 인간이 범죄치 않았던들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죄로 잃었던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세주의 은덕으로 인간이 다시 회복할 때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로써 당신과 영원히 결합하여 당신 불멸의 생명을 나누어 갖도록 인간을 이미 부르셨고, 거듭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 친히 당신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다시 부활 하심으로써 거두신 승리이다.
4.부활 - 생명의 나라
이성적인 인간인 우리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죽음이다. 죽음이나 죽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 혹은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과 죽음에 연관된 모든 것 -고통, 질병, 억압, 가난, 굶주림 등-을 멀리할수록 그만큼 더 좋은 것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인간적 태도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 실존을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 미치지 않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죽음이나 소멸보다 더 강하고 위대하다는 당신 자신의 체험에 바탕하여 보게 하신다.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의 제자였던 글레오파와 그의 친구가 그의 스승의 죽음 뒤에 자신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던 중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이들은 오래동안 고대하던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희망하던 스승이요, 메시아인 예수님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로 자신들의 큰 기대가 깨어졌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채, 비탄에 빠져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허무함을 뚜렸히 실감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겪었던 기이한 사건들도 끝났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별 볼일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 두 제자와 함께 동행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분은 먼저 그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귀 담아 들으신다. 예수님은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그분은 온전히 그들의 처지에, 그들의 실망 상태에 서신다.
그분은 그들이 느끼는 기분에 동참하신다. 그분은 그들이 있는 곳에 함께 계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체험을 통해 인간적 절망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며, 죽음과 무덤을 아시고,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를 아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이 죽으신 후 곧바로 부활하셨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무덤에 사흘간 계셨다. 이것은 그분이 억압의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그분의 몸 또는 여느 사람들처럼 부패의 과정을 거쳤음을 뜻한다. 무덤은 부패의 장소이며 예수님은 사흘간 무덤 속에 계셨으니 부패라는 인간의 절망의 표지를 체험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죽음과 생명체의 소멸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해방에 대한 그들의 염원을 부정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하신 말씀 중에 죽음과 소멸뿐 아니라, 그들의 자유에 대한 염원도 진지하게 가납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 참으로 죽고 묻혔던 예수, 이 예수가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이상하게 여긴 예수의 죽음과 부패는 자유로 가는 길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즉"모든 것이 너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시고 오히려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고통스로우며,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너희가 그다지도 동경해 마지 않는 자유에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이 그들 안에 머물 것이고,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하는 것이 왜 옳지 않은지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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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9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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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언직
교회의 첫째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예수께서는 복음선포를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라"(마태 28,19)고 명하셨다.
이 명령에 따라 사도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고 사도 바울로는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1고린 9,16)이라고까지 말했다.
복음선포의 사명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사명이자 그 지체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각 지체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이 복음의 빛으로 주위를 밝혀야 하며, 복음의 빛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한 증거자의 생활을 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느 보물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혜이다.
이 보물을 지닌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자랑스런 기쁨으로 복음선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크게 두가지로 증거한다.
하나는 말로써 증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행동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1) 말로써의 증거
사도 바울로는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로마 10,17)라고 말하면서 말로서의 증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혔다.
원래 복음선포의 형식은 말로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여 듣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 구성원들은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2) 행동으로써의 증거
한편 가장 힘있는 복음증거는 곧 생활을 통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남의 모범이 되고 복음정신에 맞을 때, 사람들은 그 생활에서 쉽게 하느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은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고 누룩이 빵을 부풀게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맛을 내고 세상을 그리스도 정신으로 부풀어 오르게 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가 머무는 곳이 어디든 주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으로 이끌고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성실성을
보임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3) 교회의 무류성(無謬性)
복음선포의 사명으로 예언직을 수행하고 있는 교회는 그 진리의 선포에 있어 그르칠 수 없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로써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튼튼한 기초로 삼으셨고 당신 교회의 가르침이 틀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의 무류성(無謬性)'이라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각 주교들이 무류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온 세상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일치하고, 또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정을 유권적으로 가르칠 때, 결정적인 한 가지 판단에 의견의 일치를 본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교리를 오류없이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주교들이 공의회에 모여서 세계 교회를 위해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가르치고 판단할 때에, 무류성은 더욱 명백한 것이니 이 결정 사항은 신앙의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교회헌장 35항). 여기서 교회가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은 오직 신앙과 도덕에 관해서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나 신자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일치를 볼 때, 그 진리는 틀릴 수 없다는 것이다.
2. 왕 직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나라의 왕이시다. 그 분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루가 19,38;요한 12,13)이라고 불렀을 때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마르 15,2;요한 18,33-37 참조). 그러나 그 분의 왕국은 지상의 왕국과 대결하여 맞서는 그런 성격의 왕국이 아니라 당신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날 완성될 왕국이라고 말씀하셨다(루가 22,28-30 참조).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어, " 하느님의 아들들의 품위와 자유"(교회헌장 9항)를 누린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신분과 그 행사에, 하느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동참하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 수행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명하셨으므로 성부께 들어 높임을 받으시고(필립 2,8-9) 당신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셨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복종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드디어 당신 자신과 이 모든 피조물을 성부께 복종시키심으로써 하느님을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하실 것이다(1고린 15,27-28).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권한을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어, 그들도 왕다운 자유를 누리며 극기와 거룩한 생활로써 죄가 자신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고(로마 6,12),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겸손과 인내로써 자기 형제들을 그리스도 왕에게로 인도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바로 왕권으로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주께서는 당신 왕국을 또한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확장시키고자 하신다"(교회헌장 36항).
"구원의 계획 자체를 고려해서 신도들은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인간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잘 구별해야 한다. 또한 이 두 가지를 서로 조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어떠한 현세적 일에 있어서나 그리스도교적 양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떠한 인간 행위를 막론하고 현세적 일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이런 구별과 조화가 신도들 행동 태도에 아주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의 사명이 현대 세계의 특수환경에 보다 완전히 응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교회헌장 36항).
그러면 왕직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몸소 말씀과 행동으로 분명한 답을 주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2-45).
실로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겉옷을 벗으시고,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종으로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셨다.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종들이나 노예들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정의한다면 아마도 '발을 씻겨주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세주이자 병을 고치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아픔을 낫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로써 증거해야 한다. 특별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 즉 가난하고 외롭고 감옥에 갇히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마태 25,31-46) 자비를 베풀어 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에 동참하는 자세는 자기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과 모든 이를 섬기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내놓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기분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는 길이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의 자세이다.
3. 사제직
사제직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사람에게 전하고 사람들의 정성을 하느님께 바치는 직책이다. 그리스도는 신약의 중개자인 대사제이며(히브 5,5-10) 그의 신비체인 교회도 이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완전하신 아버지"(마태 5,48)를 본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로마 5,11).
구약성서에도 이미 예고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는 길을 마련하셨으며, 그분이 바로 화해의 길목이 되신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을 대사제라고 한다. 예수의 사제직분은 당신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들인 신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안에서 사제다운 백성으로 한데 뭉치게 하시며, 당신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고자 하신다.
성세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하나의 사제단을 구성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하느님 백성이 참여하는 사제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참여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1) 일반사제직(一般司祭職)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째 편지에서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리십시요"(1베드 2,5)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이 '왕다운 사제단'을 이루고 있다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실상 그리스도의 사제직이란 모든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제직 자격을 말하고, 이로써 지상의 교회는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누구나 성세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왕다운 사제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한은 견진 성사를 받음으로써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더욱 굳세어진다. 또한 하느님의 백성은 죄를 범했을 때라도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다시 하느님과 화해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고, 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도 병자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위로를 받다. 그리고 혼인성사를 통하여 남녀의 결혼이 거룩한 것이 되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나타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여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하는 데 힘을 받는다. 이와같이 신자들은 각자가 성체봉헌에 참여하고 성사를 통하여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를 일반사제직이라고 한다.
2) 교계적 사제직(敎階的 司祭職)
신자들의 일반 사제직과 직분상의 교계적 사제직은 정도의 차이뿐 아니라 본질적 차이로 구별된다고 하지만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각기 특수한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한다. 그러나 "신품성사를 받음으로써 가장 완전하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히브 5,1-10;7,24;9,11-28) 신약의 참 사제로서 복음을 전하고 신도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축성되는 것이다.
사제들은 그 직무의 정도대로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임무를 나누어 수행하여 ...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깨끗한 제물로 성부께 한번 바치신(히브 9,11-28) 신약의 유일한 제사를 주께서 오실 때까지(1고린 11,26) 미사성제를 재현하며 적응시키는 것이다" (교회헌장 28항).
사제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미사성제를 거행한다. 이 제사는 참으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완전한 공경과 흠숭을 드리며 축복을 받고 거룩해진다. 이와같이 교계적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거룩한 권한을 갖고 있기에 모든 하느님 백성과 함께 백성의 이름으로 이 제사를 하느님께 바친다.
교회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께로부터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즉, 평신도와 성직자는 성성(聖性)에로 부름받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우리의 위대함은 우리가 받은 특별한 은총에 있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열렬한가에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기 위해 성성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4.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
교회와 그 성원들의 첫째가는 사명은, 항상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증거자가 되고 기쁜 소식의 전달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그 완성에 이르지 못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의 표양대로 이웃을 섬겨야 한다. 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것이다.
신앙인은 또한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예배를 드림으로써 성화의 길로 매진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사와 전례에 적극 참여하여 각자의 생활을 봉헌하고, 성사와 기도생활에 충실하여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일이다.
이 세 가지 사명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중요시하거나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생활은 조화가 깨져 기쁨이 없는 메마른 삶이 될 것이다. 이 세가지 사명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요, 우리 교회는 그 분 의 모범을 따라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사명이다.
5. 세례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우리의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
교회의 일원으로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 봉사와 섬김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직,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거룩함에로 참여하는 사제직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한 마디로 신자는 이런 사명을 부여 받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뜻이 전달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요, 이 나라는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사랑의 왕국인 것이다. 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의 응답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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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8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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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준성사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영신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성사를 모방하여 교회가 성서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영적이고 현세적인 은총이 내리도록 하는 행위를 준성사라 한다.
준성사의 근본적인 대상은 사람에게 해당되며 성수, 성유를 사용하거나 성호를 긋는 것으로 물건이나 건물에도 사용된다.
그래서 제2차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 60항에서는 준성사를 정의하기를 '이들은 성사들을 어느정도 모방한 거룩한 표징들로서 특히, 영적 효험을 표시하며 교회의 간구의 힘으로 그것을 얻어 준다. 준성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성사들의 그 본래의 효력을 받도록 예비되고 갖가지 경우에 생활이 성화된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준성사는 성사와는 같지 않지만 성사와 같이 어떤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는 이 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기도를 통해서 선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또한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심을 간단한 예식을 통해 간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성사를 통해서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사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고 우리의 생활이 거룩한 생활, 완덕의 생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준성사란 신앙인으로서 성사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성사생활에 도움을 주는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사와 준성사는 차이점이 있는데,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것이고, 준성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한에 의해서 교회가 세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성사는 성사예식 자체(행위)로 은총을 받지만 준성사는 그것을 받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많이 받을 수도 있고 적게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준성사는 교회가 하느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헌신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무엇이나 적용된다.
이러한 준성사에는 축복 또는 강복(사람에게)과 축성(사물과 성물), 구마(악마나 악의 감염을 막아내는)가 있다.
그리고 강복과 축복의 대상은 사람과 사람에 관련된 사물에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대상은 언제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준성사는 하느님의 사랑이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준성사의 기원
그래서 준성사가 교회에 의해 생긴 것이지만 그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 기원은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구약성서
가) 하느님의 축복에 관한 성서 구절
◐ 창세2,3 :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축복하셨다는 내용.
◐ 창세9,1 :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심.
◐ 창세12,2 : 하느님께서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주심.
◐ 민수6,22-27 :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사제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빌어 주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복을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심.
나) 성조들의 축복에 관한 성서구절
◐ 창세27,27-29 : 이사악이 자기 아들에게 복을 빌어줌.
◐ 창세49,1-29 : 야곱이 열두아들에게 복을 빌어 줌.
◐ 신명 33 : 모세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에게 복을 빌어줌.
다) 사제들에 대한 축복에 관한 구절
◐ 창세14,19 : 영원한 사제라 불리는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십사하고 하느님께 간구함.
◐ 신명 21,5 : 사제는 하느님께 뽑힌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라는 내용.
◐ 2역대 30,27 : 사제들은 백성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하느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내용
또한 만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알려주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의무를 갖고 있음을 알수 있다(다니엘3,57-88:시편 66,8,103,135).
2) 신약성서에서
가) 사람에 대한 축복
◐ 마르10,16 :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심.
◐ 루가24,50 :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해 주심.
◐ 사도 3,26 : 베드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 설명.
◐ 에페 1, 3 :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영적으로 축복해 주셨다는 사실을 언급.
나) 사물(음식물)에 대한 축복
◐ 마르6,41(병행구 참조) :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시기 앞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심.
◐ 마태26,26(병행구 참조) :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기 전에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시는 내용.
◐ 1고린11,23-34 - 사도 바오로가 예수께서 최후만찬에서 행하신 것을 설명.
이렇듯이 신.구약 성서 전체에서 축복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성사가 교회가 정한 것이기는 하나 교회의 창작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성서를 근거로 하여 나온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사람과 관계된 모든 사물을 축복하셨고 교회는 이를 근거로 해서 준성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3. 준성사의 종류
1) 축복(강복)
축복은 사람이나 물건에 하느님의 은혜를 비는 행위이다. 이 축복은 교회가 간구하는 힘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 수단이며 교회가 제정한 것이다.
축복은 보통은 성직자가 오른손으로 십자가 표시를 그으며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전례 중에(성사 중에) 집전자가 참석자들에게 하기도 하고, 전례 밖에서 간단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넓은 의미로는 비전례적인 축복을 신자이면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성직자에게 국한된 것이 대부분이다.
축복의 궁극적인 주체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며, 그 대상은 사람은 물론 사람과 관련된 모든 사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한, 성사와는 달리 축복을 받는 각 사람의 신앙 정도나 진실여하에 따라서 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축성(방사)
축성은 물건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성스럽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축성의 특징은
첫째로, 제단에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킬 때 사용되며,
둘째로, 사제로 축성될 때 또는 주교로 성성 될 때
세째로, 성당에서 쓰이는 미사용 제구, 종, 교회 등을 거룩하게 할 때 이루어진다.
네째로, 축성은 평신도는 할 수 없으며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는 주교와 사제들만이 할 수 있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주교만이 할 수 있다.
다섯째로, 축성된 사람이나 물건들은 오로지 하느님을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이 축성된 물건이 세속적인 목적이나 용도로 사용될 때, 불의적으로 사용될 때는 독성죄라는 것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축성된 물건 또는 축성된 이들은 하느님께 향한 심신을 독톡히 하는데 쓰여야 하며, 사람들은 성화에로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3) 구마
교회의 주교나 사제의 영역 안에 포함된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구마란 사람이나 사물에서 악마 또는 악령이 떠나도록 명령하여 막아내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교회가 인간이 악령에 사로 잡힐 가능성을 인정하고 믿는 이들을 구하기 위함인데, 현대에서는 비교적 드물고 오히려 구마를 그리스교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으나 그래도 이상할 경우는 사제에게 알려야 한다.
구마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구세주 예수께서 죄악에 대해 승리를 거두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약성서 루가 복음 10,17에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였더니 마귀들까지도 저희에게 복종하였습니다"라는 제자들의 보고가 나와 있다. 또한 예수께서도 직접 악령, 마귀들린 사람들에게 명하시어 악마를 추방하신 것을 볼 수 있다.(마태 8,28-34: 마르 1,23-28; 루가9, 37-44)
그러므로 구마는 사람에게서 악령을 추방해 달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형식으로 행해지며 이때 구마식의 집전자는 사제이다. 악령에 사로잡힌 듯한 현상이 심리적인 요인이나 질병에서 오는 것인지 아닌지 신중히 결정하여야 한다.
4. 축복의 종류
축복의 집전자는 일반적으로 성직자이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신자들도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 성사 중에 축복하거나 간략하게 축복을 할 때에도 성직자에게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축복의 종류를 보면
가) 사람에 관한 축복 - 가정, 부부, 어린이, 자녀들, 약혼자들, 출산 전후의 축복, 외출 못하는 노인, 병자, 선교사 파견시, 교리교사, 공익단체 순례자, 여행자.
나) 건물과 활동에 관한 축복 - 새집, 새 신학교와 수도원, 학교, 도서관, 병원, 사무실, 상점, 체육관, 교통수단, 과학기재, 동물, 전답과 목장, 새곡식, 식탁.
다) 신심을 위한 축복 - 가정에서 사용하는 십자가, 성모상과 여러 성인상, 묵주, 성화, 메달 등이 있다.
5. 준성사의 내용 - 사용과 가치
준성사는 신앙인의 신앙과 봉헌의 정신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결코 미신적인 행위의 대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준성사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이 준성사들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권한이 주어진 교회 신비체의 기도를 통해서만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준성사를 올바르게 이용하면 하느님께서 가시적으로 거처하시는 교회의 축복 안에서 우리의 신앙 고백이 가능해지며, 우리의 이 행위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줄 것이다. 즉, 우리가 축성된 십자가나 묵주, 성패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심을 기원하는 것이며, 악마로부터 보호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에 결코 미신적 행위는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준성사를 이용하고 존경하는 것과 교회와 기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은 커다란 효과를 준다. 특별히, 우리가 걱정이나 고통, 위험이나 유혹 중에 있을 경우에 준성사들을 생각해내고 사용하는 것은 커다란 유익을 줄 것이다.
6.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성화
준성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 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향하는 우리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으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우리의 필요한 은총을 하느님께 간구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인 모든 사물들이 축복된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자연적인 모든 사물들이 준성사로 축복될 때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축복 하고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준성사는 우리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이기적이거나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교회는 공의회 문헌인 전례헌장 61항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성사와 준성사들의 효력은 이러하다. 즉, 잘 예비된 신자들에게는 그들 생활의 거의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수난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빠스카 신비에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성화된다. 이 신비에서 모든 성사와 준성사가 그 효능을 얻는다 . 또한 거의 모든 물질은 올바르게 사용되기만 하면 인간의 성화와 하느님의 찬미를 지향할 수 있다'
즉, 준성사는 우리가 하느님께 올바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기에 준성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거룩하게 하는데 있을 것이다. 또한, 준성사가 이단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신앙의 순수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가 인준한 예절과 경문을 정확하게 지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또 예절에 대해 의문이 날 경우가 있을 때는 교회에 물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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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