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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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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6. 12:30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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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이다. 코린토 교우들이 처한 문제들이 다양하게 실려있어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아는 데에 중요한 성서로 꼽히고 있으며,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송가'가 실려 있다.

 ● 누가 썼는가?
   사도 바오로가 썼다.

● 언제 쓰여졌는가?
   
사도 바오로가 3차 선교여행을 하는 중 에페소에서 머무를 때(54-57년쯤) 쓰여졌다. 바오로가 2차 선교여행 때 1년 6개월 동안 머무르면서(사도 18,11)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코린토 교회가 성도덕의 문란과 분쟁으로 심각한 혼란에 빠졌음을 전해 듣고 에페소에서 편지를 썼다.

왜 쓰여졌는가?
   코린토 교인들이 적어 보낸 문제들(1고린 7,1)에 대해 답하고 코린토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고자 쓰여졌다. 코린토 교인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제기되는 분열과 음행은 결코 바오로가 전한 '십자가 복음'의 내용이 아님을 상기 시키면서 한 분 하느님 안에서 서로 일치하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일깨우고 있다.
   자유, 결혼, 우상숭배 등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도 함께 일러줌으로써 참된 교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애쓸 것을 사랑 안에서 호소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코린토전서는 모두 16장이다. 분쟁과 윤리적인 폐단, 결혼, 공동체 예배시 지켜야 할 자세, 부활 신앙 등 코린토 교인들이 부딪친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이 바오로의 사상, 열정적인 신앙과 어우러져 담겨 있다. 코린토 전서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1,1-4,21)
   코린토 교회가 서로 편을 갈라서 싸우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갈라지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같은 정신과 같은 사상으로 일치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능력에 믿음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사도 바오로 자신이 말하는 내용 역시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배웠으며 오직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만을 선포하고 있다고 한다. 오로지 복음을 위해 목마르고 헐벗고 박해를 당하면서도 견디어내는(4,11-13) 선교사의 참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5,1-6,20)
   신자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근친 상간의 음행과 교만에 대해 꾸짖고 있다. 음행을 하는 자, 우상 숭배자, 간음을 하는 자 등은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비행과 악습이라는 묵은 누룩에서 벗어나 누룩 없는 빵, 즉 순결과 진실을 지키라고 권고한다. 몸은 음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일깨우면서 음행을 피하고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라고 한다. 또한 송사가 있을 때 이교도들에게 가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지적하면서 형제 사이의 시비를 이교 법정에서 해결하는 일을 옳은 일이 아니며 더욱이 형제가 형제를 고소하는 것은 큰 잘못임을 역설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7,1-11,1)
   결혼은 죄가 아니니 서로 자유롭게 결혼을 택할 수 있지만 결혼을 했건 독신이건 현재상태에 충실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제 의무를 다하라고 한다. 또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에 있어서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느님만 계시기에 우상은 없다고 판단하여 먹을 수 있지만, 그 행동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라면 그 형제를 위해서 하지 말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우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몸으로 한 몸이 되어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11,2-14,40)
   만찬시에 드러나는 분열과 욕심을 지적하면서 성찬례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주고 있다. 최후의 만찬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전하는 것이니만큼 먼저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참여하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시면 주님의 몸과 피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준 고유한 은사는 모두 공익과 교회를 키우는 데에 이바지해야 하므로 예언이나 이상한 언어를 할 때에는 예의와 질서를 지키라고 당부한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은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은 바로 사랑의 실천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 복음의 핵심(15,1-16,24)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흘만에 일으켜지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선포도, 믿음도 모두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바오로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지시하면서 늘 깨어 믿음 안에서 굳게 서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이루라고 당부하면서 사랑의 인사로 끝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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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2. 10. 26. 10:58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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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믿음에 의한 새로운 의'를 주장한 유명한 책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리 형성에 크게 기여한 성서이다.

누가 썼는가?
바오로의 친필로 바오로 특유의 어휘들로 이루어져 있고, 초대교회 이후의 시대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다. 여러 교부들과 초대 문헌들도 바오로가 저자임을 증언하고 있다.
이는 오늘까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16,25-27(영광송)은 후대의 편집자가 첨가했다고 본다. 로마에서는 이미 교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살았었지만 49년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해 신자들이 대부분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이야기하듯이 편지를 썼다.

언제 쓰여졌는가?
바오로가 고린토에서 지낸 시기를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57-58년 겨울에 썼다고 본다.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다 전한 뒤(15,19)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15,25), 고린토에서 석달 간 체류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사도 20,2의 '그리스'는 그리스의 고린토를 말한다).

왜 쓰여졌는가?
3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마친 바오로에게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이에 로마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바오로는 로마의 신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을 알리고자 이 편지를 썼다.
이러한 면에서 다른 지역교회에 보낸 편지와 큰 차이가 있다. 다른 편지들은 그 지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또는 질문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쓰여졌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로마서는 모두 16장이다. 율법 중심의 유대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을 권고하고 있다.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 죄에 죽고 생명에로(1,1-8,39)
바오로는 먼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곳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하면서 자신을 이방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불리운 사도로 소개한다. 그리고 주로 신앙과 율법을 대조함으로써 하느님의 의(義)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의는 할례나 율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믿는 이들 모두를 위한 의(義)를 말한다.
아울러 바오로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실증하셨다고 한다. 아담 한 사람에 의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죽음(속량)으로 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부활하신 그분처럼 생명 안에서 거닐 게 된 사람들이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영을 따라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국에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리라고 함으로써 희망을 북돋우고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는가(9,1-11,39)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언약을 받은 민족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에서 나셨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으나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행업에 의존함으로써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언약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직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으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보고 회개한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오로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으로 구원이 이방민족에까지 이를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인자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만하지 말며 엄위하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지 않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새로운 생활(12,1-16,27)
그리스도에 의해 불리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죽거나 살거나 이미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벗어 버린 빛의 자녀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는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며, 사랑 이외에는 빚지지 말라고 강조한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임을 일깨우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존경하며, 다정하고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하는, 심지어 주리고 목마른 원수에게조차 먹여주고 물을 주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와 같은 사랑 실천에, 성서는 인내와 위로를 주어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성령의 능력은 그 희망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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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8. 18:54 천주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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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으며,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팔공 산괴의 주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유교의 전통이 강하였던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상주 등으로 피난하여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잠시동안 외부와 격리된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정부의 관여 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인 을해박해(1815)때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과 형제들이 그들과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839년 4월 정해박해 때에 체포된 신자들이 처형되기 한 해 전인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정을 비롯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850년대 말에는 큰 신자촌이 되었다. 경신박해(1860)때에 한티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박해가 끝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1862년 장 베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신박해로 김현상의 후손들이 대구로 떠난 후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성상돈 아우구스띠노 및 그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씨 가정과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 해 봄 문경 한실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월 19일 순교하니 그 조카 서상돈이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다.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한다.
1868년 음력 4월 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가롤로를 비롯한 30여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현재 한티의 순교자 묘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당시의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1868년 박해의 칼날을 받은 한티 공소는 한줌의 재로 변한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마을에 살던 박만수 요셉은 살아남은 몇몇의 사람들을 모아 공소재건에 앞장선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바람맞이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룬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 토마(당시 12세)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무렵 군위 칫솔에서 김재윤 플로리아노 가정과 김윤하 가정이 들어오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꼬 가정이 들어왔다.
1882-1883년 김보록 로베르또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때 신자수 39명, 고백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니, 김보록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참례하러 갔다. 이후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수가 8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전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공소재건의 의의
첫째, 순교자의 시신을 묻어드리고 이주해 와서 살았다. 이는 순교자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남은 것이 없는 곳에 성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여들었다.
둘째, 바람맞이 땅에 동네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속죄의 마음과 순교자를 따라 순교하겠다는 의지이다. 노출이 가장 심한 곳에 마을을 이룬다는 것은 죽음을 언제나 맞을 준비된 마음이다.
셋째, 조 가롤로 회장의 어린 아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모셨다. 이것은 순교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이며, 순교자들에 대한 예우였을 것이다.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순교자의 묘지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조 가롤로는 상주의 구두실이 고향으로 그의 집안은 1839년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기해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 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티 부락에 열심한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서익순과 서태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 대(代)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주 장원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1857년 상주에 도착한 이들은 2년간 살다가 1859년 장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1866년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리델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대구에 와서 박해에 관한 소식을 전하자 신자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는데, 서태순은 문경 한실로, 그의 형 서익순 가족과 서상돈 가족은 한티로 피난을 갔다. 서태순과 부인 김데레사와 7세된 남자아이는 1866년 문경에서 잡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조카 서상돈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서태순의 옥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한번은 서태순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옥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참혹한 광경에 이후 서상돈은 평생 쌀밥을 먹지 않았다 한다. 서태순 베드로가 1866년 12월 18일에 34세의 나이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형 서익순이 한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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