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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6.03 신약성경의 문화적 배경
  2. 2011.06.03 신약성경의 지리적 배경
  3. 2011.06.03 신약성경의 역사적 배경
2011. 6. 3. 00:08 신약성경
 

신약성서의 문화적 배경


헬레니즘
헬레니즘이란 그리이스의 문화사상으로서 유다인의 문화, 종교사상인 유다이즘과 더불어 유럽문화에 큰 영향을 준 사상이다. 알렉산더대왕(기원전 336-323)의 세력으로 지중해 연안에 만연된 헬리니즘은 당시 유다를 지배한 에집트 및 시리아의 통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다사상을 헬레니즘화 하기 위해 강압적인 통치방법을 쓰고 성전을 모독한 사건(기원전 169)은 유다인들로 하여금 마카베오 일가를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 결과 유다는 잠시나마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하스모네 왕조의 정권다툼은 기원전 65년에 이미 시리아를 점령한 로마의 개입을 불러 들였다. 이를 기회로 로마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다인들의 종교적 특권만을 인정한 채 속국으로 만들었다.
헬레니즘의 주요 공헌은 무엇보다도 로마제국의 언어를 희랍어로 통일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희랍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빠르게 효과적으로 "세상 끝까지" 선포될 수 있었다. 또한 헬레니즘은 진선미를 추구하고 여러 지방의 문화와 종교를 탐구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교의를 쉽게 받아들이게 했다.


유다이즘
유다이즘은 유다 공동체의 모든 생활양식을 총칭하는 것으로 유다교와 동일시된다. 유다이즘의 기원은 멀리 아브라함 등 성조들에게까지 소급되지만 보다 의미있는 시작은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해방체험과 시나이산 계약 및 모세의 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유다이즘은 판관시대와 왕정시대의 근간을 이루며 변화 발전되어 오다가 바빌론 유배시대와 유배이후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체제 곧 유다교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메시아 희망, 구원의 길을 제시한 율법 준수등이 특징인 유다이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 들이지 않고 구약성서와 전통만을 열성적으로 고수한다. 그러나 구약성서, 유일신에 대한 희망, 구원추구, 소수의 믿는 자들의 가치, 섭리에 관한 믿음과 종말에 관한 희망등 유다이즘의 긍정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고 마지막 날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장소로 확신하였다. 이 성전에서는 대사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제관들과 레위인들이 엄격한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사제는 유다의 최고 권위자로서 고위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와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최고의회(산헤드린)를 주재하였다.
또한 예수님 시대에는 마을마다 회당(시나고가)이 있어서 유다인들은 이곳에 모여 기도하며 율법의 낭독과 그 해석을 들었다. 이 율법의 주석가들을 율법학자라 불렀는데 이들은 민중들에게 큰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으나 사제 계급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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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00:07 신약성경

신약성경의 지리적 배경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의 지리 변천사를 다음 몇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가. 헤로데 대왕 시대는 팔레스티나 전역이 한 사람에 의해 통치되었다.
나. 헤로데 대왕이 죽은 뒤에는 이 지역이 그의 아들들에 의해(사분영주로서) 3개 지역으로 분할 통치되었다.
다. 기원후 6년 남부지방(유데아, 사마리아)은 로마 총독 관할지역이 되었다.
라. 헤로데 아그립바1세 재위중인 41-44년에는 다시금 전 국토가 통일 관리되었다.
마. 아그립바1세 이후 팔레스티나 전체가 다시 로마 총독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이 상태는 사실상 70년까지 계속됨)



분할지역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는 정치, 경제, 종교 등의 체제가 서로 다른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이두메아
최남단지역으로 원래 에돔인들이 살던 땅이다. 기원전 5세기경에 아랍의 나바데아인들에 의해 정복당하였다가 기원전 2세기에 요한 히르카누스에 의해 이스라엘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그때 이후 이곳 주민들은 유대교를 믿도록 강요받았다. 앞서 살펴 본 헤로데 가문은 모두 이 지역 출신이다. 예수님 시대 이곳 가자, 아스칼론 라피아는 로마의 시리아주에 속한다.

유 대 아
구약의 유다왕국과 같은 지역이다. 수도 예루살렘이 위치해 있으며, 사실상 팔레스티나의 심장부이다. 주민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으며 국가 지도자들도 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 해안 도시들은 희랍문명의 영향을 입었다.

사마리아
사마리아라는 명칭은 기원전 9세기 북이스라엘 왕국의 오모리왕이 사마리아시를 수도로 정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사마리아의 남은 잔류민들은 이방 이주자들과 혼합되었다. 이곳의 종교는 처음에는 여러 가지 미신이 성행하여 야훼종교의 세력은 극히 미미하였으나 차츰 야훼종교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구약성경 중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였으며, 그리짐산에 성전을 세워 예루살렘 성전에 맞섰다(기원전 4세기말경). 유대인들은 또한 사마리아인들을 불경한 자로 경멸하였으며, 그로 인해 서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부 유데아와 북부 갈릴래아 그 중간 지점인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서로 내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종 충돌이 있었다(요한 4,9; 루카 9,52-56).

갈릴래아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으로서 북부는 산악지대이다. 주민은 여러 민족으로 혼합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기원전 8세기부터 아라메아인과 페니키아인들이 들어와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희랍시대에는 셀레우쿠스 왕가의 지배를 받다가 시몬 마카베오 때부터 다시금 유다에 귀속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1게기에는 이방 주민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래아에서 보내셨는데 그 당시에는 헤로데 안띠빠스가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갈릴래아의 동북부 지방은 필립보의 영역에 속하였는데 유데아 주민들은 갈릴래아 주민들을 멸시하였다.

베 레 아
요르단 동부지역으로 동북쪽에는 데까뽈리스가 있다. 예수님 시대에 요르단 동부지역 전체는 사실상 이방인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데까뽈리스
헬레니즘화된 10개의 도시가 서로 동맹으로 일치된 지역이다. 이 도시들은 자주권을 지니고 고유 화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 세금을 지불하고 징병의무도 지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는 멀리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다마스커스로서 예수님은 이 지역을 여러 번 다니셨다(마르 7,31;5,1).

가울라니티스, 트라코니티스, 아우라니티스, 아빌레레, 바타네아
이 가운데 아빌레레만 티베리아 호수 북쪽에 있고 그 외엔 전부 호수 동쪽에 있다. 시리아인, 아랍인 및 희랍인들이 거주하였으며 복음서에서는 이 지역에 있는 벳사이다가 자주 언급된다.

유다인들의 거주지역별 분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방
가난한 산간 지방이었으나 신앙을 엄중히 지키는 주민들이 살았다.

사마리아 지방
기원전 721년 아시라아가 북부 이스라엘을 점령한 이래로 이곳에 이주해 온 아씨리아 민족과의 혼혈인이 많았으므로 유다인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경멸하고 증오하기까지 하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면서 동시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 자들이었다. 이 사마리아 지방은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사이에 있었다.

갈릴래아 지방
주민들의 대다수가 아브라함과 모세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충실히 지켜왔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매주의 안식일 집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 한편 이웃 나라들과의 교류가 빈번하여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라는 말도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활동은 바로 이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다.

해외로 이산된 유다인
디아스포라라고 불리는 유다의 이산민들은 주로 지중해의 중요 항구들에서 살았다. 그 중에서 에집트의 알렉산드라 지역에 많았다. 이들은 각기 살고 있는 거주지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신앙을 충실히 지켰으며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 관용주의를 표방한 해외거주 유다인들은 훨씬 쉽게 그리스도교를 받아 들였으며 훗일 선교활동의 거점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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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00:06 신약성경


신약성경의 역사적 배경


예수님 당시 지중해 일대는 로마 제국의 점령하에 있었다. 팔레스티나는 기원전 63년경에 로마 제국에 점령되었다. 에돔(이두메아인)의 혈통은 이은 헤로데는 BC 37년경부터 유대의 분봉왕으로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았고, BC 20년경부터 예루살렘의 재건과 증축공사를 시작하였다.
BC 4년 헤로데가 죽은 뒤 그의 세 아들은 나라를 3분하여 각기 이어받았다. 아르켈라오는 이두메아,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를 차지했다. 데카폴리스는 자치구역으로 남았다.

아르켈라오는 당장 폭군의 정체를 드러내 국민은 견디다 못해 기원 후 6년에 아우구스토 황제에게 탄원을 올렸다. 황제는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를 귀양 보냈다. 그때부터 이 지역은 총독을 파견하여 로마가 직접 다스렸다. 총독은 지중해 연안 도시인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리아에 상주하였다. 이 도시는 갈릴래아 북단에 있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와 혼동되지 말 것이다. 히브리인 대축일들이 다가오면 총독은 갑자기 백성이 대거 운집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직접 도시의 치안을 다스렸다. 기원 후 30년 해방절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본시오 빌라도 총독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기원후 26-36년까지 팔레스티나 총독으로 재임했던 인물이다. 유다인들이 질투 때문에 예수님을 체포하여 선고를 내린 뒤 그에게 끌고 와서 사형선고를 내리게 만든다. 당시 유다인들의 자치적 결정은 로마 당국의 재가가 없으면 효력을 발생치 못했기 때문이다.


34년에 필립보가 죽은 뒤, 그가 다스리던 영지도 로마 총독 관할로 귀속된다. 39년에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파면을 당하고 그의 영지도 총독 관할이 된다. 41년부터 44년까지 팔레스티나는 헤로데 아그리빠 1세의 통치를 받는다. 그는 대 헤로데의 손자였다. 이 인물에 관해서는 사도행전(12장)에도 이야기가 나오는데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거슬러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그때 요한의 형 사도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도 투옥되었다.

아그리빠가 죽자 팔레스티나는 다시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고, 이 상태는 유다 반란(66년)과 예루살렘의 파괴(70년)까지 계속되었다. 예루살렘은 베스빠시안이 지휘하는 로마 군대의 공격을 받았고 그 인물이 로마 황제로 추대되자(68년) 그의 아들 띠뚜스가 군대를 지휘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도시를 영원히 폐허로 만들었다.


로마에 있는 띠뚜스의 개선문을 보면 예수님의 두려운 예언(루카 19,41-44; 21,5-6)이 그대로 이루어진 띠뚜스의 승리가 새겨져 있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는 팔레스티나가 황제 특사의 지배를 받았다. 132년에는 또 한 차례의 무력봉기가 유다를 휩쓸었다. 시메온 바르코케바('별의 아들'이라는 뜻)라는 인물이 영도하였는데 많은 이가 그를 해방자 메시아라고 믿었다. 로마의 반격은 즉각 나타났고 3년후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얼마 뒤에 그 자리에 엘리아 카피톨리나라는 도시가 새로 세워졌으나 히브리인들은 거주가 금지되었다.

두 차례의 반란으로 히브리인들은 분산 수용되었다. 유다 사회라는 것은 끝장이 났다. 그러나 자기네가 어느 특정한 백성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들의 종교의식도 소멸되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의 종교 지도는 스승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벌써 기원 후 90년에는 지중해 연안 얌니아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구약성서 정경(正經)이 확정된 것은 얌니아 종교회의에서였다.

그때부터 유다인 공동체들은 자기네 성서로 돌아가 모세의 율법과 라삐들의 규정에 입각하여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조상들의 땅에서 멀리 떨어졌어도 그들은 자기네 고유한 종교관습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법 질서를 확립하였다. 로마제국은 정복한 각 지방의 풍습이나 신앙은 간섭하지 않는 것을 시책으로 하였으며 새로이 시작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포용력을 보여 주었다. 로마정부의 조직과 규범은 그리스도교회의 조직에 응용되었고 로마로 통하는 길은 선교여행에 편리한 육로와 해로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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