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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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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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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4. 09:30 천국기행

2013년 7월 26일 가족들과 휴가 중에 보령에 있는 갈매못 성지를 찾아갔습니다. 
성지 기념관 입구 벽에 붙어 있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의 문구 한 줄에 큰 감동을 받고 가슴에 새겨두기 위해 찍어 둔 사진을 무보정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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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0. 12:30 천국기행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또한 기도 중에 주님의 응답을 듣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름답게 피어나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드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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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설치된지를 몰라서 자세히 안내드리지 못하지만 조형적으로 독특한 디자인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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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 21:00 성령의 은사

겸손과 존중, 침묵

 

지금 미국을 여행하는 중인데,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종교인은 “전 가톨릭 신자”이며, 최근 몇 년 사이 자신이 종교가 없다고 답하는 사람이 5명 중 1명이 넘었다. 물론,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전 가톨릭 신자”다.

유럽과 호주의 교회에서 선례가 있고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는 교회로부터의 “도매급 탈퇴” 때문에, 본당과 교구들은 이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샌프란치스코의 한 교회에는 검은 담벼락에 이들을 초대하는 낡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최근에 끝난 “새복음화와 그리스도 신앙의 전수”를 주제로 로마에서 열린 주교 시노드는 이런 비슷한 노력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직 아시아교회는 이처럼 대규모 신자 감소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청년들이 참여하지 않아 점점 더 많은 수도회가 노쇠해가고 있다.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서구에서 시작된 교회의 쇠퇴는 아시아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아시아교회는 상황이 막바지에 이르기 전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의 교회가 교회를 떠난 이들을 되돌아오게 하려는 노력을 본받아 활용할 수 있을까?

반대로, 아시아교회는 서구교회에 다른 형태의 모범을 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추기경으로 선임된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의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대주교가 주교 시노드에서 밝힌 바 있는 겸손하고, 다른 이를 존중하며, 침묵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 세 가지 덕목이 어떻게 아시아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에서 작용할 수 있을까?

만일 한 치약회사가 많은 광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회사는 소비자에게 왜 자기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싫어하는지를 물어보아, 소비자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교회의 제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광고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분명 제대로 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광고는 “소비자”를 오히려 밀어내고 있다.

이들에게 교회로 다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현수막을 내거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이 현수막은 지나는 사람들은 길 잃은 사람들이고 “똑바로 살기 위해서는” 품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인식이 숨어있다.

대신, 교회는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 떠났나요?” “당신이 떠난 이유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잘못인가요?” “우리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말씀을 잘 표현하지 않았거나, 배반하거나 혹은 잘 전달하지 않았나요?” “우리가 어떤 사과를 해야 할까요?”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 같이 연구할 수 있을까요?” “다시 돌아오기 바라지만 두려운가요?”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 성탄절이나 성 금요일 전례에 우리는 이런 덕목을 강조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결국, 타글레 대주교도 곧 “추기경 전하”가 된다. 하지만, 이런 겸손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교회의 갱생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실패, 적어도 부적절했음을 인정해야 하며, 이는 공허한 말이 아니라 후회하고 회개하는 진정성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이런 겸손한 질문 뒤에, 실제로 대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이들의 대답이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거나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들의 대답에서 정확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떠난 이들을 존중해야 하며, 이들에게서 교회를 떠난 이유뿐만 아니라 이들의 교회 “바깥에서의 경험”까지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각, 또는 우리가 충성하는 단체에 대한 비판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유혹은 바로 이런 비판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고통이나 혼란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하며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고통스런 비판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침묵이다. 침묵은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대한 재빠른 답변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그런 답변이 사실상 필요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또, 침묵은 우리가 배운 것을 가슴 속에 새기고 이것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구도하는 사람들과 일치하려 한다. 침묵은 또 우리를 겸손함으로 이끈다. 타글레 대주교가 “교회는 침묵의 힘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만일 아시아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 특히 지도부에 있는 사람들은 겸손과 존중, 침묵의 가치를 배울 수 있고 이를 실행한다면, 현수막과 프로그램 등으로 교회를 떠난 이를 초대하고 장려하며, 설교하면 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갈구하는 서구 교회에 소중한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회 선교사이자 아시아가톨릭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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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 19:30 성령의 은사

머리말

지난 주 일간신문과 TV방송에 하버드 신학부 교수 캐런 킹(58)이 국제학회에서 예수가 직접 “나의 아내”라고 언급한 4세기 이집트 곱트어 파피루스 조각을 공개하고, 이에 근거해서 “예수에게 부인이 있었다”라는 예수 결혼설을 주장하여 미국 교계를 뜨겁게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예수, 부인 있었다’ vs ‘전혀 신빙성 없다’,” 조선일보, 2012. 9.20. A25). 이러한 주장은 ‘예수는 독신이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다시 오신다’는 성경적 정통 기독교 가르침을 부정하는 신성모독적 견해로, 이미 지난 10여년 전 이래 몇 차례 영지주의(gnosticism) 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역사적 예수 왜곡사(歪曲史)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여기서 필자는 최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영지주의 종교학자들의 왜곡된 주장들을 소개하고, 이러한 주장들이 1세기에 작성된 4복음서나 사도적 증거에 기반하지 않고, 훨씬 후대인 4세기에 작성된 영지주의 문서에 의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왜곡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I.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영지주의적 왜곡 사례

 

1. 예수 신화론

1999년 영국의 종교학자 디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에 의해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란 논쟁적인 책이 2002년 9월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어 논란을 야기시켰다(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지음, 송영조 역, 예수는 신화다, 동아일보사, 2002년 9월, 조선일보 2002년 9월 25일자 A12면 신간 광고). 이 책에 의하면 “‘원래적 예수’(Original Jesus)는 ‘이방 신’(a Pagan God)이었다”는 것이다(Timothy Freke & Peter Gandy, The Jesus Mysteries, Three Rivers Press 1999, 340 p.). 이 책은 서기 3세기의 부적 그림을 제시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이교도 신인(神人)인 오시리스-디오니수스(Osiris-Dioysus)였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결론에 의하면 “기독교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다른 이름에 의한 이방(異邦)종교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이야기는 역사적 메시야의 전기가 아니라 고대 지중해 지역에 수 세기 동안 퍼져 있었던 신인(神人) 오시리스-디오니수스(Godman Osiris-Dioysus) 이방신화를 유대교적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본다. 프리크와 갠디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영지주의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이야기를 역사가 아니라 우화(寓話, allegory)로 이해했고, 심지어 예수를 이방 신인(神人)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영지주의자들이 4세기와 5세기에 로마교회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박멸되었다. 그 후로 공적인 왜곡선전에 의하여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방(異邦)종교로 개종한 위험한 배교자들로 간주되었다. 프리크와 갠디는 “이들 영지주의자들이 본래 기독교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프리크와 갠디는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Josephus)에 의한 예수의 언급은 후대의 위조(forgeries)이며, 역사적 예수의 실존에 관한 증거는 거의 없다고 본다. 이들의 주장은 3-4세기에 나타난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 함마디 문서에 근거하고 있다. 영지주의 문서는 1세기에 작성된 사도들의 서신들과 복음서보다 훨씬 후대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미 초대교회 시 바울과 요한을 비롯한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영지주의를 이단(heretics)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프리크와 갠디의 예수상은 철저히 영지주의적 기독교 시각에 의하여 재구성되고 있다(이에 대한 비판 기고문, 김명혁, “기독교 왜곡 말라- ‘예수는 신화다’ 책의 출판을 보고”, 국민일보, 2002년 9월 26일자, 29면).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들인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터툴리안(Tertullian), 이레네우스(Irenaeus) 등은 당시에 문제로 부상한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 오시리스-디오니수스 신화의 유사성이란 “사단적인 모방술”(diabolical mimicry)의 결과라고 비판하였다.

 

2. 다빈치 코드의 예수론

2003년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역시 나그 함마디 문서의 영지주의적 가설 위에 설계됐다. 『다빈치 코드』의 내용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그 후손이 메로빙거 가문에 흡수되었다. 메로빙거 왕조는 예수의 후손을 비밀리에 보호하기 위해 시온 수도회라는 결사 단체를 만들었고, 이 시온 수도회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위인들이 수장을 맡아 왔다.”로 요약된다. 당시 미국에서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은 아마존 인터넷 판매에서 1위를 점하였고, 32주 동안 뉴욕 타임지 베스트셀러의 리스트에 올랐고 미국 ABC 뉴스 스페셜이 1시간 방영하였다. 이 소설은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과 신학적 발전에 관하여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다빈치 코드』는 기독교 역사의 진로에 있어서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된 아리우스의 주장이 옳다고 본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아리우스에 의해 주도된 아리우스파는 ‘예수는 주목할 만한 지도자였으나 육체에 나타난 하나님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다빈치 코드』는 아리우스를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에 대한 대표자로서 두둔하고 있다. 니케아 회의의 아리우스를 두둔하면서 『다빈치 코드』는 “역사에 있어서 그때까지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유한한 선지자, 위대한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인간(a man) 으로 보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4복음 그리고 사해사본은 물론이고 고대 문헌 어디에도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거나 성적인 관계를 가지거나 아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전혀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한 것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1982년에 나온 책 「성혈, 성배」(예수 후손에 관한 비밀 고문서를 조사하고 메로빙거 왕가와 성당기사단에 대해 조사하여 발표했다는 책)에 의존하고 있고, 이 책의 저자들은 1953년 사기죄로 징역살이를 했던 프랑스인 피에르 플랑타르가 제공한 문서들에 의존하고 있다(다빈치 코드는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ydkim0301/20042707510).

 

3. 콥트 문서의 예수 결혼설

예수가 “나의 아내”라고 직접 언급했다는 4세기 콥트어(語) 문서의 파편이 지난주(2012년 9월)공개됐다. 초기 기독교 연구가인 캐런 킹은 18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 콥트학회에서 이 문서 파편을 공개했다. 고대 이집트 남부에서 쓰였던 콥트어 문장을 해독했더니 “예수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내’… 그녀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내용이 드러났다고 했다. 그녀는 “정확한 입수 경로는 밝힐 수 없다”며 공개한 콥트어(이집트 토착어) 문서 파편에 스스로 ‘예수의 아내 복음(The Gospel of Jesus' Wif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명함 크기의 이 문서의 문구들은 문장으로서 완성되지 않은 형태다. “내게는 아니다. 내 어머니가 내게 생명을 주었다” 등 맥락 없는 단어가 나열된 가운데 “나의 아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는 것이다.(“예수, 부인 있었다” vs “전혀 신빙성 없다”, 이태훈 기자 libra@chosun.com, 입력 : 2012.09.20 03:06, 조선일보, 2012. 9.20. A25). 킹도 이 콥트어파편에 대하여 “예수 사후 수백 년이 지나 만들어진 문서다. 예수가 결혼했다는 결정적 증거로는 볼 수 없다”며 조심스러워했다. 성경 외의 수많은 종교 문헌이 있지만, 예수가 혼인했다는 얘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4세기 콥트어 문서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신약시대와 거리가 너무 멀어 신빙성을 얻기 어렵고, 문서 파편 하나로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

 

II. 영지주의 문서의 이단성: 나그 함마디 문서

 

예수의 삶과 관련한 영지주의적 왜곡의 역사는 오래됐다. 도마가 예수의 쌍둥이라고 확언한 ‘도마행전’, 가룟 유다가 예수의 진정한 제자였다는 ‘유다복음’, 깨달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마복음’ 등이 그렇다. 이런 주장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 중동 지역에서 새 문서가 발견될 때마다 불거졌다. 그 바탕에는 예수 사후 이집트 등을 근거로 번졌던 영지주의가 깔려 있다. 영지주의는 유대교, 기독교, 점성술, 그리스·이집트 철학·사상 등이 혼합된 일종의 이단 사상. 교리적으로 정통 기독교와는 큰 차이를 보여 3세기경 이후로는 사라졌다. 대부분의 기독교 영지주의 문서는 3~4세기 정도에 쓰였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며,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등 4대 복음서는 대개 1세기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쓰인 것들이며 기록의 연대로 봐도 복음서가 훨씬 신빙성이 있다.

 

1. 나그 함마디 문서는 영지주의 문서

나그 함마디 문서(the Nag Hammdi library)는 대표적인 영지주의 문서다. 이 문서는 1945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 나그 함마디(Nag Hamma야) 지역의 자발 알 타리프 절벽에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나그 함마디 문서’라고 부른다. 13개의 파피루스 묶음(코덱스·codex)으로 구성된 이 문서에는 ‘도마복음’을 비롯해 진리복음, 빌립복음, 마리아복음, 요한비서, 베드로 행전 등 기독교에서 이단시해 온 영지주의 위경(僞經)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는 4세기의 이집트 상류에 있는 기독교 도서관에 속하는 13개의 파피루스본에 묶여 있는 52개의 콥틱(Coptic)문서이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초기 희랍문서의 번역이며 원래의 언어는 예외 없이 상실되어 있다. 그러나 1977년에는 콥트어(헬라어 알파벳으로 표현된 고대 이집트어)로 기록된 나그 함마디 문서 전체가 영역 출판돼 이제는 누구든지 볼 수 있다. 이 문서는 사해사본(쿰란 문서), 미지 복음서 단편, 비밀 마가복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서로 분류되는데, 그 이유는 영지주의적 시각에서 기독교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주의 문서라고 부른다. 영지주의 문서에 따르면 예수는 삼위일체의 성자가 아니라 신으로 가는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영지주의 교사(현자)’라는 것이다.

2003년 종교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소설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에서는 사해사본이 예수의 선교를 매우 인간적인 용어로 서술한다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사해사본에서 예수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부분은 없다. 『다빈치 코드』에서는 또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고 말하나, 사해사본은 물론이고 고대 문헌 어디에도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거나 성적인 관계를 가지거나 아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수의 결혼설 등은 대부분 전설이나 상상에 근거한 것이다. 영지주의 문서가 재구성하는 역사적 예수는 영지(靈知)의 지혜자로서 복음서에 나타난,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는 인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그러므로 3세기의 교부들, 저스틴, 오리게네스, 이레네우스 등은 그 시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영지주의 종파들을 정통 기독교의 흐름에서 벗어난 이단으로 정죄했던 것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는 이미 초대교회가 정죄한 영지주의 문서로서 이단으로 간주되어 폐기된 문서이다.

 

2. 도마복음도 나그 함마디 문서에서 나옴.

나그 함마디 문서에서 나온 일부 문서인 도마복음(Gospel of Thomas)도 예수의 어록만을 담고 있는 영지주의 복음서이다. 발견 당시 상형 문자와 그리스 문자를 겸용한 콥트어로 쓰여 있었다. 도마복음은 4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삶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예수의 가르침(어록)만을 포함하고 있는 데, 소위 겨자씨의 비유 등의 일부 내용이 복음서에도 나온다.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영지주의적으로 역사적 예수를 왜곡하고 있다. 나그 함마디에서 함께 발견된 문서에는 영지주의 문서 52편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문서들이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도리어 도마복음처럼 4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면서도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영지적 자각으로 인한 영생”으로 왜곡한다면 그러한 문서들은 도움은 커녕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이것들은 초대교회 때 벌써 정죄를 받고 사라진 문서들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문서들이 발굴될 수 있다. 발굴된 문서의 내용이 교회의 전통에 일치하느냐 않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영지주의 문서는 초대교회가 이미 이단으로 정죄한 문서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철저히 배제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사해사본 문서, 미지 복음서 단편, 비밀 마가복음 등은 우리들에게 외경적 가치를 가지고 복음서에 대한 배경적 설명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맺음말: 역사적 예수는 신화가 아니라 성육신한 말씀

요한일서에 사도요한은 1세기에 벌써 역사적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미혹의 영들이 교회 내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요일]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가 육체로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였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당시에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 유사한 것으로 부상한 오시리스-디오니수스 신화란 “사단적인 모방술”(diabolical mimicry)의 결과라고 비판하였다. 교부들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조하였다. 3-4세기에는 예수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건 대중적 관심이 높아서 가짜 문서가 만들어졌다. 사단은 이러한 대중적 호기심을 이용하였다. 이미 초대교회에서도 바울과 요한을 비롯한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영지주의를 이단(heretics)으로 간주하였다. 사도 요한은 말씀의 성육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육신으로 오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눈으로 보았고 손을 만져보았다고 역사적 예수의 가시성과 구체적인 실존을 강조하였다. 영지주의 학자들은 영지주의의 영에 사로잡혀서 신약성서 및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가 그린 역사적 예수상을 영지주의적으로 왜곡하였다. 이번 캐런 킹이 발견한 “예수의 아내”를 시사하는 콥트어 단편도 영지주의 문서 가운데 하나의 자료일 뿐이다.

 

김영한 교수(기독교학술원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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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적 외경에 대한 참고자료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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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9. 21:00 신약성경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 형식으로 된 이 책은 요한복음, 요한 ⅠㆍⅡㆍⅢ서와 함께 요한 공동체에서 쓰여진 성서로, '요한계 문헌'으로 분류된다.

누가 썼는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1,1.4;22,8). 초대교회 교부들 대부분은 이 요한이 네 번째 복음서와 요한 서간들도 쓴 사도 요한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디오니시오 교부는 묵시록의 문체나 성격이 복음서나 서간들과 현저히 차이가 나므로, 한 사람이 요한계 문헌 전체를 쓰진 않았다고 했다. 복음서와 서간을 쓴 사람이 묵시록까지 썼는지. 아니면 묵시록의 저자는 다만 요한공동체(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요한 21,24)'의 영향을 받은 초대 교회공동체)에 속한 또 다른 사람인지 오늘날까지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지만 묵시록 저자가 구약성서의 묵시문학과 예언 양식을 잘 알고 있고, 구약성서를 폭넓게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시 교회에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을 것(참조 1,1.4.9)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가 사도 요한은 아니지만, 편의상 요한이라 부른다.

 언제 쓰여졌는가?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 재위)의 박해로 유배당한 요한이 파트모스 섬(1,9)에서, 황제의 치세 말기인 95-96년경에 썼다고 본다.

 왜 쓰여졌는가?
   로마 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스스로 '신이요 황제'라 자처하면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곳곳에 황제 신전을 지어 참배하도록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도미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이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문을 받고, 사형에 처해져 순교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배교하거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흔들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스도인들이 맞은 최대의 시련기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여준 환시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받는 어린 양, 죽음을 통해 부활을 이루신 분임을 일깨워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함께 하신 하느님은 새로운 당신 백성과도 함께 하시는 분이며, 그분은 모든 악의 세력을 부수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전한다. 이를 바탕으로 고통과 시련을 넘어서는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러니, 이 묵시록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일러주는 책이 아니라, 환시를 통하여 교회로 하여금 역사 속의 하느님 계획을 깨닫게 하는 성서이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요한묵시록은 모두 22장이다. 환시(幻視)를 바탕으로 상징적인 짐승과 숫자, 신비스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 오늘날 가장 이해하기 힘든 성서로 손꼽힌다. 하지만 유대 묵시문학과 예언 전통을 따르고 있는 요한은 모진 역경과 수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은 완성된다는 희망을 확신에 찬 어조로 힘있게 전해 주고 있다. 내용에 따라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dot1_ora.gif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1,1-3.22)
   요한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시련을 함께 겪는 형제로 소개하면서,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일러주신 바를 그대로 증언한다고 밝힌다. 박해받아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전하고,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일깨워 비추어, 구체적인 격려와 칭찬, 훈계와 경고, 약속 등을 전한다. 일곱 교회에 하시는 말씀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임을 강조하면서, 교회 밖에서 오는 시련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문제를 인식하고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하라고 권고한다. 특별히 '7'은 '충만과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로 이 편지가 전 교회에 보내진 것이며, 편지를 받는 수신인 '천사'는 그 교회의 지도자를 뜻한다.

     어린 양과 일곱 개의 봉인(4,1-15) 제사(4,14-10,31)
   환시를 통해 하늘의 하느님 옥좌(왕이나 황제의 세상 권좌는 비교도 안되는)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펼쳐 보여주면서, 만물의 참 주재자이신 하느님과 당신의 피로 구원을 이루신 살해당한 어린 양, 그리스도를 찬미한다. 이 찬미를 통해, 구약으로부터 이어져 온 하느님 백성의 역사가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새로운 역사로 전환되고 있음을 일깨운다. 이 어린 양이 하느님께서 지니신 두루마리를 받아 일곱 개의 봉인을 하나씩 떼어 냄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낸다. 이 세계의 운명은 온전히 하느님께 달렸으며, 하느님의 종들은 인장(표)을 받아 악의 세력과 폭력 속에서도 하느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며, 환난을 이겨낸 선택된 백성들은 천상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내용으로 힘과 용기를 북돋운다.

     일곱 나팔(8,6-11.19)
   천사들이 부는 나팔소리와 함께 땅과 바다, 물, 태양과 별들 위에 재앙이 덮치고, 악마의 세력을 대변하는 파괴자(아바돈, 아폴리온)를 왕으로 받드는 메뚜기떼와 반신세력을 상징하는 네 천사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다. 이 재앙들은 탈출기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멸망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사람들은 보호받을 것이며, 이 재앙과 시련은 일시적이라고 밝힌다. 드디어 일곱째 나팔소리가 울려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계약의 궤가 나타나 하느님의 신비가 완성되며, 예언자들이 전한 기쁜 소식이 이루어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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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2. 11. 8. 07:00 신약성경

  신약성서 27권 중 26번째 성서이다. 특정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 보낸 편지로 베드로 전ㆍ후서, 야고보서, 요한 ⅠㆍⅡㆍⅢ서와 함께 '공동서간'이라 불리운다.

누가 썼는가?
   편지의 서두에 "야고보의 동기인 유다"(1절)가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 유다는 예수님과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마르 6,3; 마태 13,55)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유다가 이 편지를 썼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예수님의 형제 이름을 빌어 이 편지의 권위를 높이려 했을 뿐이라고 본다. 이 책의 저자는 사도들보다 후대의 사람으로(17-18절 참조).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여겨지는데, "에논서"와 "모세의 승천"과 같은 유다교의 묵시문학과 전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6,9.11.14절).

 언제 쓰여졌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1세기말에 쓰여졌다고 본다. 2세기초에 쓰여진 베드로 후서가 유다서의 내용(4-19절)을 거의 다 인용하고 있다는 점, 이 편지를 쓴 사람이 1세기 후반에 쓰여진 야고보서를 알고 잇다는 점, 1세기 후반에 형성된 '초기 가톨릭적인'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점(3. 20절), 이 편지에서 비판하는 이단자들은 요한묵시록에서 이야기하는 니콜라오스파(묵시 2,6)와 비슷하다는 점 등 때문이다.

 왜 쓰여졌는가?
   당시에는 그릇된 가르침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이단자(거짓교사)들이 교회공동체 내에 들어와 자유분방한 생활로 분열을 일삼고 있었다. 이에 이단자들의 실상과 그들이 받을 심판을 명확하게 제시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과 싸우도록 북돋우고, 소중한 믿음을 굳건히 지키도록 권면하고자 이 편지를 썼다(3-4절). 또한 하느님의 사랑받는 신도들이 이단자들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맡겨진 믿음에 충실하도록 일깨우고자 했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유다서는 모두 25절로 된 짧은 편지이다. '반 이단적 서간'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단자들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내용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단자들에 대항하여(1-16절)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 이단자들의 생활상을 신도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들 스스로는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영을 지니게 되었다고 자처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영을 지니지 못한 이들, 하느님의 올바른 길에서 이탈한 자들로, 하느님의 은총을 빙자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대들며, 불평만 하고 허풍 떨며 아첨하고 분열을 일삼으며, 거룩한 만찬의 진정한 뜻은 모른 채 먹고 마시면서 자기의 욕정만을 채우는 이들이라고 밝힌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인하는 그들은 이미 경건하지 못한 불신앙자로 낙인 찍혔으며,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이로써 신도들로 하여금 그들과 맞서 싸워, 고귀한 믿음을 지키도록 이끌고 있다.

    믿음의 기초 위에 서로를 건설하는 길(17-25절)
   이단자들은 분열을 일삼는 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서로의 믿음을 건설하는 사람임을 일깨우고 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혼란을 예고한 사도들의 말씀을 기억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이끌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탁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도록 권고한다. 때묻은 이단자들에게 물들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이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편지를 끝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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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2. 11. 6. 06:30 신약성경

요한일서와 함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쓴 '공동서간'이다.

누가 썼는가?
   2서와 3서 모두 '원로'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하는데(2요한 1절; 3요한 1절),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제시하고(3요한 4-6절; 7-11) 지역교회에 순회 전도자들을 보내는 역할 등을 한(3요한 5-8절) 것으로 보아 당신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권위있는 지도자였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를 예수님의 애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언제 쓰여졌는가?
   요한 복음서가 쓰여진(90년경) 이후, 영지주의가 퍼져 있었던 약 100년경 쓰여졌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고백하지 않는 영지주의자들(2요한 7절)에 대해 경고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단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2요한 10절) 당부하고 있다.

 왜 쓰여졌는가?
   당시 요한계 교회에는 예수님의 육화를 부인하며(2요한 7절) 신자들을 유혹하는(2요한 10절)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생겨났다(2요한 7절). 또한 어느 지역 교회에서는 원로가 써 보낸 서간을 무시하고(3요한 9절) 원로가 파견한 순회 전도자(선교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등 원로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가 있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육화를 고백하지 않는 '속이는 자', '반 그리스도'(2요한 7절)들을 경계하고(2요한 10절)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잃지 말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 요한 2서를 띄웠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파견된 전도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형제들마저 교회에서 쫓아낸 행동은 잘못임을 지적하고 전도자들을 위해 수고해 주는 진리의 협력자가 될 것을 당부하고자 요한 삼서를 보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간직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이들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이단자들의 그릇된 사상에 동조되지 말고, 언제나 하느님의 계명을 되새기며 사랑과 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일깨우고자 했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요한 2서와 3서는 각각 13절, 15절로 이루어진 짧은 편지이다. 예수님의 육화를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에 대한 경고와 사랑과 선을 행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자세 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머무시오(2요한 1-13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음을 고백하지 않는 이들을 '속이는 자'라고 하면서, 이들을 경계하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무르기를 바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믿고 고백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선을 본받으시오(3요한 1-15절)
   원로가 보낸 순회 전도자(선교자)들을 극진히 대접한 교우 가이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전도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디오드레페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길을 떠난 전도자들의 협력자가 되어 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이러한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 신자들의 의무임을 일깨우면서 악을 본받지 말고 진리 안에서 선을 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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