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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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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공부'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1.06.03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
  2. 2011.06.03 그리스도인의 죽음
  3. 2011.06.03 평신도 사도직
  4. 2011.06.03 준성사와 축복예절들
  5. 2011.06.03 성품성사
  6. 2011.06.03 병자성사
  7. 2011.06.03 혼인성사
  8. 2011.06.03 견진성사
  9. 2011.06.03 고해성사
  10. 2011.06.03 성체성사
2011. 6. 3. 23:21 교리공부
1. 소명에의 생활
모든 사람들은 소명을 갖고 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소명,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소명,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소명 등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소명을 갖고 있고 그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께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현재의 우리의 소명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가정과 사회에서 우리가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장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직장에서 우리가 맡은 다양한 일에 대하여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임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때 바로 즉시 응답을 하여야 한다.
이 응답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응답을 할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2. 기도의 생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분이셨다. 그분은 매일매일 선교여행을 하셨으며 그분의 그러한 여행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 늘 기도하셨다. 그분이 기도하신 것은 시간이 있으셔서가 아니었다. 그분의 주위에는 항시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녔고 사방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항시 장터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소란스럽고 분주한 선교의 여행 속에서도 항시 스스로 시간을 내셔서 하느님의 뜻을 항시 살피셨다. 루가 복음은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 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루가 5. 16)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현대를 바쁘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기도의 시간을 내어야 함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그분 자체를 만나고 그리고 그분과 기도 속에서 일치를 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러한 신앙생활은 한 겨울날의 추운 날씨처럼 차차 굳어질 것이고 급기야는 신앙에 대하여 맹숭맹숭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어렵게 얻은 신앙을 등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3. 감사와 순명의 생활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축복을 주셨다. 창세기는 이 축복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리라"(창세 1, 28).
그러나 태초의 인간은 하느님께 불순명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망각하였다. 그 이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기 위하여 너무나도 힘든 일을 하여야 했다. 이러한 일은 최초의 인간에게만이 한정된 것이 아니라 원죄로 이어져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금의 우리에게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을까? 그것은 교만한 마음, 즉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겸손하지 못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 한 연못가에 갈대가 서 있었다.이 갈대는 조그만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나부꼈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떡갈나무가 갈대를 보며 동정어린 눈길로 바로 보며 말했다.
"이봐요, 갈대. 자네는 바람이 조금만 불거나 물위에 여울이져도 머리를 숙여야 하니 자네의 가냘픈 몸집이 자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되겠는걸!" 그리고 이어서 "내 건강한 머리를 좀 보게, 햇빛을 멈추게도 하고 강한 폭풍까지도 힘차게 맞설 수 있지 삭풍이 자네에게는 폭풍이지만 나에겐 미풍만도 못하네. 자네가 내 몸 밑에라도 태어났던들 나의 그늘을 은신처로 삼아 고생이 없었을 텐데. 내 생각으로는 자연은 불공평한 것 같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갈대가 대답했다. "나를 동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다지 걱정은 마시게나. 모든 바람은 나에게보다 당신에게 더 위험스러운 것 같은데. 바람이 불어도 나는 굽혀지기는 해도 그러나 꺾이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이 말을 듣고 떡갈나무는 갈대를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얼마후 지평선 저쪽에서 북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떡갈나무는 몸을 굽히지 않고 바람에 맞섰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왔다. 가냘픈 갈대는 당장쓰러질 것같아 보였다. 그러나 갈대는 바람이 부는 대로 뭄을 기울일 뿐 아무 괴로움도 없었다.
한편 떡갈나무는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쳐들고, 발을 땅에 붙이고 서 있었다.
그러나 끝내 뿌리 채 뽑히고 말았다.
하느님 앞에서 불완전하기만 한 인간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영유하려면 겸손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신 성모님께서는 매우 겸손하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겸손되게 순명하실 수 있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모친이 되시는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모님에게서 겸손과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순명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모범을 본받아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명하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4. 공동체 생활
인간은 비록 하느님의 뜻을 거슬려 이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하였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지상 위의 모든 생물들의 주인으로서 남아있게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가운데서 구속사업을 계속 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음식과 옷, 집 그리고 그 밖의 것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땅의 주인으로 남아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이익)에 이바지하고, 이웃을 도우며 서로 사랑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하느님은 바로 지금 세계공동체, 국가공동체, 가정공동체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삶을 충실히 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사도 4 32). 지금의 우리들이 이러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하느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 더욱 완전한 공동체를 건설하여 주실 것이다.
5. 결단의 생활
우리가 만약에 어떤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위치가 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선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그 단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결단을 하나씩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이외에도 우리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앞 길에 대해 결정하는 중요한 일까지 수많은 결단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그 가르침과 실천에 있어서 의미있는 것으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 결단은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결단을 우리가 잘 내릴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되고 동시에 삶에 무한한 기쁨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올바르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때는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라는 것이 부끄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그리고 동시에 짐으로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 둘 중에 어느 곳에 우리가 속하게 되는 가는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렇게 살기로 삶 속에서 끊임없이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명하므로써 성장하는 하느님 공동체의 수많은 사람들 안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게 할 것이다.

6. 사랑의 생활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하고 사랑하고 싶어한다. 사랑은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이며 가장 깊은 갈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말로 간단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러운 것이며 동시에 우주에 가득찬 하느님의 숨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 4, 16).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구세주를 약속하셨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의 두 발로 먼지가 펄펄 날리는 땅을 디디며 걸어 다니셨고 또 당신의 두 손으로 지치고 소외된 이들을 쓸어주셨으며 그들과 함께 머물러 계셨다. 그분의 그러한 행동은 그분을 선동자로 몰리게 하였고 결국 그 죄목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하여졌다.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말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활 속에 가득찬 인간에 대한 넘치는 그분의 사랑에 근거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의미에 합당하게 살아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던 많은 성인들의 삶을 볼 수 있다. 이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신 분들이다. 우리도 이분들의 모범을 따라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생활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산상설교(마태오 5,3-10)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산상설교의 한 절 한 절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자.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은 다 가난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점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놓고 하느님만을 애타게 목말라 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부를 누리게 할 것이다.
(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마음의 근심과 가혹한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자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데 대한 비탄과 소외 당함과 그로 인한 억울함의 눈물, 그리고 실의와 "잔인한 운명"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이면에는 더욱 커다란 슬픔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헛되고 황폐한 세상에 대한 애통해함, 하느님과 하느님의 법이 지배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애통함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온갖 역경으로 점철된 자신의 운명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슬픔, 고통당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전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주위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외면한다. 그 외면하는 것이 내 자신에 해당되는 것일 때도 있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일 때도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로 작정한 이상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안에서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예수님 앞에 펼쳐놓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고통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 위로를 받으며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두번째로 하신 말씀의 뜻이라 할 수 있다.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여 불평불만을 품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람은 불만스러운 환경을 극복한다. 온유한 사람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솔개가 그 높은 하늘에서도 먹이를 금방 찾아내듯이 이러한 사람을 금방 알아보고 그 사람에게 몰려와 평화 속에 휴식을 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 동안에 항상 자신에게 와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으셨고 반기셨다. 바로 온유한 사람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옳은 일이란 정의, 거룩함, 완전함을 뜻하고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옳은 일을 갈망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주의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듯이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열심히 열망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이세상에 도래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 가득히 넘쳐흐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하염없는 만족에 젖게 될 것이다.
(5)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가진 자이고, 가진 바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남에게 물질, 힘, 시간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힘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마음 먹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힘인 것이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할까?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지향되어 있고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더 재미있어 하고 또 거기에 더욱더 마음을 두게 된다.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이 관심있어 하는 것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기울이느냐, 아니면 세상 일에 더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찰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으로 가득 찰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정의 삶을 끊어버리고 은총의 삶을 살기 위하여 침묵 가운데서 열심히 기도를 하여야 한다.
(6)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참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이 일치될 때 이루어진다. 평화는 우리 스스로 이룩하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지 평화를 바라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평화를 이룩하려 는 노력을 게을리하기 때문에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바로 그 평화를 나누어 주기 위하여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7)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어떠한 역경도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은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러나 세상의 정의는 자신의 이권에 손해가 되지 않는 범위까지만이고 그것이 그 범위를 넘을 때는 늘 힘의 논리가 지배를 하고 그것이 정의라고 강요된다. 그리고 그러한 거짓된 정의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고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참된 정의를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늘 박해를 당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꼭 승리를 하고 만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인 103위 순교 성인들은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라는 오해를 사서 모두 고향을 등지고 도망 다녀야 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관원에게 붙잡혀서 비참한 최후를 고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분들이 그렇게 무참하게 돌아가신지 200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 누구도 그분들을 박해하던 높은 관직의 조정 대신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지금은 힘없이 죄인으로 죽어갔던 사형수들의 이름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이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을 증언하는 정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분들의 삶은 십자가에서 신성모독과 반란죄로 죽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몸으로 따라 가신 것이다.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우리는 순교성인들처럼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7.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기울이고 사랑으로 응답을 하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며 동시에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은 우리가 속하여 있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가장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순간은 뭐니뭐니 해도 기도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경건하게 성체 앞에 앉아서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 혹은 길을 가며 잠깐 동안 바치는 화살기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그분의 이끄심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명하여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결단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누구도 결단을 쉽게 내리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한가지를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 외의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결단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열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충만한 은총을 주실 것이다. 우리들 은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한 순간도 하느님을 선택할 수가 없으며 또한 그분의 뜻에 맞게 살 수도 없다. 이러한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결단을 내려 응답하는 삶은 사랑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이웃과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를 할 수 있고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따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무엇이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신자생활이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자기를 통해 흘러 넘치는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요한 15, 12)라고 말씀하신 계명의 완성인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사랑 자체라고 믿고 있다(1 요한 4,8).
사랑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조건 없이 남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 아니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상대편에게 내어준다. 그는 상대편의 운명에 전적으로 동참하고 자신이 바로 그가 되어 필요하다면 상대편을 대신하여 기꺼이 죽으려고 까지 한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는다. 영악하고 타산적인 인간의 눈에는 이 사랑이 어리석은 바보짓으로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다. 강생한 성자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남에게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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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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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20 교리공부
1. 죽음을 극복하는 희망의 삶
죽음은 단지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안에서 현재의 삶을 의미있게 해주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교우 여러분,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 (1데살. 4,13-14) -
죽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인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과 죽음의 상황들이 내 생활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면에서 이러한 문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사랑하던 가족이나 친척, 아니면 절친한 친구분의 죽음을 경험했다면 그분들의 죽음을 통해 슬픔과 함께 과연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인간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며 자문해 보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들의 죽음뿐 아니라 매일 집으로 배달되어오는 신문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대하고 있다. 오히려 너무도 자주 그리고 일상적인 죽음에 대한 사건 보도속에서 무감각해져버린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에워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을 철저하게 의문에 처하게 한다.
2. 믿음과 희망은 새로운 삶의 시작
1) 죽음의 체험
죽음과 더불어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인간은 참으로 가련한 존재일 것이다.
죽음의 비극을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죽음이란 인생의 모든 가치들을 부정해 버리는 강력한 허무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쾌락 등과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들뿐 아니라, 예술, 사상, 학문과 같은 '영원한' 정신적 가치라 할지라도 인간을 죽음의 힘으로부터 보호해 주지는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믿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도덕적 헌신과 투쟁도 종국에 가서는 죽음이 가져다 주는 회의와 허무 앞에서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한 손 안에 쥐고자 했던 그 어떤 권력자들, 진시황제, 히틀러, 스탈린 등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고,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경우 제5공화국의 권력자도 잘 차려진 술상 앞에서 마지막 술잔을 들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의 주변을 잘 살펴보면 너무도 억울한 죽음들이 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착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나 암으로 인해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조금 더 누려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외에 자유와 정의를 위해 앞장섰던 사람들이 권력의 총부리 앞에 쓰러졌던 경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아기들의 죽음은 그 어머니의 가슴을 찢는 아픔을 남겨주기도 한다.
죽음이 우리를 아픔과 슬픔 그리고 허무로 몰아세운다고 하지만 죽음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옛 그리이스인들은 인간의 죽음을 다음의 네 가지 범주에서 설명하였는지도 모른다.
첫째로, 누구든지 홀로 죽는다. 같은 죽음은 이 세상 어디도 없다는 것이다. 같이 죽으려고 약을 같이 먹어도 홀로 죽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대신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도 부모가 대신 죽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째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네째로, 반드시 죽는다. 즉, 죽음의 보편성이다.
그러기에 철학자 하이데거(M.Heidegger)는 "인간은 죽음에로의 존재"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죽음은 생명 안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존재의 조건으로 스며들어 있다.
분명 인간은 죽음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전도3,2)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 앞서 인간은 죽음이 지금 까지 가꾸어오고 지켜온 삶의 지속을 단절 시키기 때문에 저항의 몸부림을 치게 된다.
누구든 지금의 삶을 지속하고 싶고 또한 자신이 가꾸어온 노력의 결실들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한다. 죽기 싫은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싫은 것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 또한 두려움을 낳게도 한다.
그밖에 실증적인 죽음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죽음 이후의 사실에 대한 어떤 증인도 접할 수 없다는데서 불안, 혹은 공포는 더해간다. 단지 죽음 뒤에 남는 차고, 굳어진 시체와 그것이 한 줌 흙으로 남는다는 '주검'의 현상이 어떠한지 우리는 알 뿐, 죽은 어떤 생명도 죽음 뒤의 삶의 지속이 어떠하리라고 나에게 증언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의 체험이 과중하고 때로는 고통스런 문제들을 야기시키기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몹시 꺼리며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즉각 거부 반응을 보이기가 예사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간혹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게 되더라도 '나'는 아닌 타인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죽음의 필연성 앞에서 자신을 감추어 버리거나 도피하게도 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회피와 함께 착하고 열심한 많은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의 불의한 죽음, 그리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삶의 회의마저 안겨 준다. 그래서 우리들은 한번쯤 "왜?" 라는 항변과 함께 신(神)은 인간에게
죽음을 허락했는지 신(神)을 미워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곁을 떠났을 때….
그러나 성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지혜서 1,13-14)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루가14,14)라고 약속하셨다.
죽음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답은 그저 위안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으로 말미암아 이미 패배당한 악을 거슬려 투쟁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믿지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패배요, 멸망이며, 허무일 수 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삶의 완성이요 새로운 생명에로의 시작이 된다.
2) 신앙은 생명의 열쇠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은 거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크다. 죽은 이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끝없는 생명을 향한, 인간이 풀 수없는 열망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죽음의 길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이 희망은 하나의 사건 즉 예수부활 사건을 통해서 증명된다. 그것은 동시에 죽은 자의 소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암시이기도 하다.
부활을 마치 전에 살아 활동했을 때처럼 어떤 방법으로든지 잠에서 깨어나는 것같이 인생살이를 하는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바다로 되돌아가는 물줄기에 비교되듯 불멸의 영혼에 관한 내용도 아니다.
우리가 죽은 이의 부활을 믿는다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예수의 영안에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육체와 더불어 부활하고 영속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게 발생한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완성하시고자 오실 때,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여기서 신약성서의 부활증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것은 상처를 간직하고 계신 예수의 몸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부활하신 분으로서 어떻게 먹고 마시며 드시는지 보도하고 있다. 바로 이사실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전 인간 존재로서의 '몸'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영광 받은 육체로써 하느님의 생명 안에 빛나는 거룩한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우리의 육체적이고 죽어갈 생명은 보호를 받아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안에서 불멸한 것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죽은 이의 부활을 마치 하나의 씨앗처럼 설명하고 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4).
3) 육신의 부활
여기서 하나의 새로운 물음이 제기된다.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믿어 고백하고 있는 '육신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고 또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육신의 부활이란 단지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진 육신이 종말에 가서 새로운 살과 뼈로 재생되어 영혼과 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현세에서 육신의 불구로 말미암아 고통과 소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도 그들의 불편한 육신을 갖고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많은 돈을 들여가며 성형수술로 기껏 얼굴을 고쳐 놨는데 모두가 꽝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영혼과 육신이라는 성서적 이해와 구원은 전인(全人)에 결부된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간과한데 기인한다.
본래 인간을 영혼과 육신이라는 두개의 본질로 양분화하여 표현한 것은 희랍 문화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그리스도교가 희랍 문화권 속에서 적응하며 선교하고자 할 때 결부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성서적인 개념도 그리스도교적인 개념도 아니다.
성서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개 혹은 세 개의 본질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단일체이다. 성서는 '육신', '영혼', '영', 등의 개념을 써서 인간존재의 다양한 면모들을 구별하여 고찰할 때에도 역시 인간존재의 단일성을 고수하였다.
성서에서의 '육신'과 '영혼'은 자연적 차원의 전인을 가리키는데, 육신이 개인에 있어서의 육체적인 면모와 인간이 동물계와 땅과 맺고 있는 관계와 가견적 조건 및 소멸될 인간조건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영혼은 유독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모든 요소를 통틀어 인격으로서의 인간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다."(요한5,25)는 희망은 살이 썩어버린 육신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니며, 또한 육신과는 관계없이 불멸하는 영혼만이 하느님께 귀환하는 것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죽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죽음을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을 선사한다고 희망할 때, 우리는 이제 새로운 생명이 단순한 영혼, 즉 순전히 정신적 주체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 구체적 인격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아마 누가 생명의 완성이란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을 경우, 그가 세상에서 겪는 간난고초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 지상에서의 삶이 새 생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와 부활의 육체와에 대한 신앙은 하나의 놀라운 희망을 안겨 준다. 지나가는 세상은 장차 변화될 것인데, 선의의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 나간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의 의무로 부과된 윤리적 동기를 수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믿고 부활을 희망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최소한 이 세상이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상당한 꼴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힘만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령, 위독한 병을 앓고 있을 때라 하더라도, 단념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이 지상 존재로서의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한계를 견디어 낼 능력이 있다. 그들은 평정을 잃지 않고 고통과 불합리한 것들을 거스려 온 힘으로 저항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의 재난을 보고 눈을 감아버리는, 그리고 그러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와는 다르다.
우리들의 인격체는 세계와의 교제를 통해서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즉,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구조에는 육신과 물질세계가 항상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연로한 얼굴의 주름살 속에 온갖 삶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듯이 인간은 자신이 현세에서 이룩한 '시간의 수확'은 그의 죽음 속으로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다. 육신과 세계와 역사가 죽음 속에서 탈피되지 않고 인간 속에서 내적으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희망은 전인적 부활로써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육신의 부활이란 사멸하는 시체의 이적적(異蹟的) 종말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역사적인 정신적 자아로서 충만에 이를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와 역사가 그의 전체 삶과 함께 하느님께로 귀환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4) 믿는 이들의 죽음
믿는 이들은 진리를 그 자체로 알아듣지만, 그는 인간이 완성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마무리 지으시리라는 것을 희망한다. 노력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시리라는 사실에 대한 명백하고 철저한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어느 시대에나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이 죽지만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란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해서 인생을 뜬 구름 같다느니 하는 허무주의도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이 세상에서 죽으면 다시 다른 생명체로 넘어가게 된다고 주장하는 윤회설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음은 어떤 한 사람이 드디어 완성되는 순간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현대의 가톨릭 신학자들이 많이 쓰고 있다.
각 개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 점차 자라면서 성숙한다. 자라고, 성숙하고, 깨닫고, 결심하고, 그러면서 수 많은 시간을 이어가는 한 인간의 죽음은 결국 그 결과는 완전을 향한 길이어야 한다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삶 자체는 죽음과 연결하여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삶이란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므로 생의 완숙을 이루는 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철학자는 신앙인의 삶이란 '살기 위한 삶, 곧 절대자를 찾는 추구'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면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자기 인간성의 완성 또는 자기실존의 마지막 성숙으로, 이 성숙은 죽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향한 삶 안에서 매 순간순간 나의 모든 태도 여하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인간의 아픔과 꺼져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두려워한다.(사목 헌장 18항)"고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표현하면서 가톨릭 교리는 이 죽음의 문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요한 11,25)' 안에서 해결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5) 생명의 하느님
사도들의 설교는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다는 사실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그들을 파견하시는 분도 부활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 예수의 부활에 있다. 예수의 부활이야 말로 그분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보증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고린 15,14-17)라고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당신 스스로를 죽음을 쳐 이기는 힘이시요,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으로 증명해 주신 것이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보장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이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을 위해서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시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요, 무(無) 자체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더불어 새로이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초대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각자도 내 인생이 죽음으로써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내가 겪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어 누리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3.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아픔과 꺼져 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기술의 모든 노력이 제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는 없다.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은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고차적(高次的) 생명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어떠한 상상도 죽음 앞에서는 맥없어지지만, 하느님의 계시를 들은 교회는 인간이 지상 불행의 한계를 넘어서 행복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도 인간이 범죄치 않았던들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죄로 잃었던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세주의 은덕으로 인간이 다시 회복할 때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로써 당신과 영원히 결합하여 당신 불멸의 생명을 나누어 갖도록 인간을 이미 부르셨고, 거듭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 친히 당신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다시 부활 하심으로써 거두신 승리이다.
4.부활 - 생명의 나라
이성적인 인간인 우리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죽음이다. 죽음이나 죽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 혹은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과 죽음에 연관된 모든 것 -고통, 질병, 억압, 가난, 굶주림 등-을 멀리할수록 그만큼 더 좋은 것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인간적 태도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 실존을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 미치지 않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죽음이나 소멸보다 더 강하고 위대하다는 당신 자신의 체험에 바탕하여 보게 하신다.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의 제자였던 글레오파와 그의 친구가 그의 스승의 죽음 뒤에 자신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던 중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이들은 오래동안 고대하던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희망하던 스승이요, 메시아인 예수님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로 자신들의 큰 기대가 깨어졌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채, 비탄에 빠져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허무함을 뚜렸히 실감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겪었던 기이한 사건들도 끝났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별 볼일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 두 제자와 함께 동행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분은 먼저 그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귀 담아 들으신다. 예수님은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그분은 온전히 그들의 처지에, 그들의 실망 상태에 서신다.
그분은 그들이 느끼는 기분에 동참하신다. 그분은 그들이 있는 곳에 함께 계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체험을 통해 인간적 절망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며, 죽음과 무덤을 아시고,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를 아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이 죽으신 후 곧바로 부활하셨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무덤에 사흘간 계셨다. 이것은 그분이 억압의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그분의 몸 또는 여느 사람들처럼 부패의 과정을 거쳤음을 뜻한다. 무덤은 부패의 장소이며 예수님은 사흘간 무덤 속에 계셨으니 부패라는 인간의 절망의 표지를 체험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죽음과 생명체의 소멸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해방에 대한 그들의 염원을 부정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하신 말씀 중에 죽음과 소멸뿐 아니라, 그들의 자유에 대한 염원도 진지하게 가납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 참으로 죽고 묻혔던 예수, 이 예수가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이상하게 여긴 예수의 죽음과 부패는 자유로 가는 길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즉"모든 것이 너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시고 오히려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고통스로우며,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너희가 그다지도 동경해 마지 않는 자유에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이 그들 안에 머물 것이고,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하는 것이 왜 옳지 않은지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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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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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9 교리공부
1. 예언직
교회의 첫째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예수께서는 복음선포를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라"(마태 28,19)고 명하셨다.
이 명령에 따라 사도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고 사도 바울로는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1고린 9,16)이라고까지 말했다.
복음선포의 사명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사명이자 그 지체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각 지체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이 복음의 빛으로 주위를 밝혀야 하며, 복음의 빛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한 증거자의 생활을 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느 보물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혜이다.
이 보물을 지닌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자랑스런 기쁨으로 복음선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크게 두가지로 증거한다.
하나는 말로써 증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행동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1) 말로써의 증거
사도 바울로는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로마 10,17)라고 말하면서 말로서의 증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혔다.
원래 복음선포의 형식은 말로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여 듣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 구성원들은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2) 행동으로써의 증거
한편 가장 힘있는 복음증거는 곧 생활을 통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남의 모범이 되고 복음정신에 맞을 때, 사람들은 그 생활에서 쉽게 하느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은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고 누룩이 빵을 부풀게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맛을 내고 세상을 그리스도 정신으로 부풀어 오르게 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가 머무는 곳이 어디든 주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으로 이끌고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성실성을
보임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3) 교회의 무류성(無謬性)
복음선포의 사명으로 예언직을 수행하고 있는 교회는 그 진리의 선포에 있어 그르칠 수 없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로써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튼튼한 기초로 삼으셨고 당신 교회의 가르침이 틀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의 무류성(無謬性)'이라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각 주교들이 무류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온 세상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일치하고, 또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정을 유권적으로 가르칠 때, 결정적인 한 가지 판단에 의견의 일치를 본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교리를 오류없이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주교들이 공의회에 모여서 세계 교회를 위해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가르치고 판단할 때에, 무류성은 더욱 명백한 것이니 이 결정 사항은 신앙의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교회헌장 35항). 여기서 교회가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은 오직 신앙과 도덕에 관해서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나 신자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일치를 볼 때, 그 진리는 틀릴 수 없다는 것이다.
2. 왕 직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나라의 왕이시다. 그 분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루가 19,38;요한 12,13)이라고 불렀을 때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마르 15,2;요한 18,33-37 참조). 그러나 그 분의 왕국은 지상의 왕국과 대결하여 맞서는 그런 성격의 왕국이 아니라 당신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날 완성될 왕국이라고 말씀하셨다(루가 22,28-30 참조).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어, " 하느님의 아들들의 품위와 자유"(교회헌장 9항)를 누린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신분과 그 행사에, 하느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동참하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 수행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명하셨으므로 성부께 들어 높임을 받으시고(필립 2,8-9) 당신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셨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복종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드디어 당신 자신과 이 모든 피조물을 성부께 복종시키심으로써 하느님을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하실 것이다(1고린 15,27-28).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권한을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어, 그들도 왕다운 자유를 누리며 극기와 거룩한 생활로써 죄가 자신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고(로마 6,12),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겸손과 인내로써 자기 형제들을 그리스도 왕에게로 인도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바로 왕권으로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주께서는 당신 왕국을 또한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확장시키고자 하신다"(교회헌장 36항).
"구원의 계획 자체를 고려해서 신도들은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인간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잘 구별해야 한다. 또한 이 두 가지를 서로 조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어떠한 현세적 일에 있어서나 그리스도교적 양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떠한 인간 행위를 막론하고 현세적 일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이런 구별과 조화가 신도들 행동 태도에 아주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의 사명이 현대 세계의 특수환경에 보다 완전히 응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교회헌장 36항).
그러면 왕직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몸소 말씀과 행동으로 분명한 답을 주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2-45).
실로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겉옷을 벗으시고,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종으로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셨다.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종들이나 노예들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정의한다면 아마도 '발을 씻겨주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세주이자 병을 고치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아픔을 낫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로써 증거해야 한다. 특별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 즉 가난하고 외롭고 감옥에 갇히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마태 25,31-46) 자비를 베풀어 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에 동참하는 자세는 자기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과 모든 이를 섬기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내놓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기분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는 길이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의 자세이다.
3. 사제직
사제직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사람에게 전하고 사람들의 정성을 하느님께 바치는 직책이다. 그리스도는 신약의 중개자인 대사제이며(히브 5,5-10) 그의 신비체인 교회도 이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완전하신 아버지"(마태 5,48)를 본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로마 5,11).
구약성서에도 이미 예고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는 길을 마련하셨으며, 그분이 바로 화해의 길목이 되신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을 대사제라고 한다. 예수의 사제직분은 당신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들인 신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안에서 사제다운 백성으로 한데 뭉치게 하시며, 당신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고자 하신다.
성세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하나의 사제단을 구성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하느님 백성이 참여하는 사제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참여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1) 일반사제직(一般司祭職)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째 편지에서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리십시요"(1베드 2,5)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이 '왕다운 사제단'을 이루고 있다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실상 그리스도의 사제직이란 모든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제직 자격을 말하고, 이로써 지상의 교회는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누구나 성세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왕다운 사제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한은 견진 성사를 받음으로써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더욱 굳세어진다. 또한 하느님의 백성은 죄를 범했을 때라도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다시 하느님과 화해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고, 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도 병자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위로를 받다. 그리고 혼인성사를 통하여 남녀의 결혼이 거룩한 것이 되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나타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여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하는 데 힘을 받는다. 이와같이 신자들은 각자가 성체봉헌에 참여하고 성사를 통하여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를 일반사제직이라고 한다.
2) 교계적 사제직(敎階的 司祭職)
신자들의 일반 사제직과 직분상의 교계적 사제직은 정도의 차이뿐 아니라 본질적 차이로 구별된다고 하지만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각기 특수한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한다. 그러나 "신품성사를 받음으로써 가장 완전하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히브 5,1-10;7,24;9,11-28) 신약의 참 사제로서 복음을 전하고 신도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축성되는 것이다.
사제들은 그 직무의 정도대로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임무를 나누어 수행하여 ...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깨끗한 제물로 성부께 한번 바치신(히브 9,11-28) 신약의 유일한 제사를 주께서 오실 때까지(1고린 11,26) 미사성제를 재현하며 적응시키는 것이다" (교회헌장 28항).
사제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미사성제를 거행한다. 이 제사는 참으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완전한 공경과 흠숭을 드리며 축복을 받고 거룩해진다. 이와같이 교계적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거룩한 권한을 갖고 있기에 모든 하느님 백성과 함께 백성의 이름으로 이 제사를 하느님께 바친다.
교회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께로부터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즉, 평신도와 성직자는 성성(聖性)에로 부름받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우리의 위대함은 우리가 받은 특별한 은총에 있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열렬한가에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기 위해 성성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4.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
교회와 그 성원들의 첫째가는 사명은, 항상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증거자가 되고 기쁜 소식의 전달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그 완성에 이르지 못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의 표양대로 이웃을 섬겨야 한다. 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것이다.
신앙인은 또한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예배를 드림으로써 성화의 길로 매진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사와 전례에 적극 참여하여 각자의 생활을 봉헌하고, 성사와 기도생활에 충실하여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일이다.
이 세 가지 사명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중요시하거나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생활은 조화가 깨져 기쁨이 없는 메마른 삶이 될 것이다. 이 세가지 사명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요, 우리 교회는 그 분 의 모범을 따라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사명이다.
5. 세례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우리의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
교회의 일원으로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 봉사와 섬김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직,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거룩함에로 참여하는 사제직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한 마디로 신자는 이런 사명을 부여 받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뜻이 전달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요, 이 나라는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사랑의 왕국인 것이다. 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의 응답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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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8 교리공부
1. 준성사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영신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성사를 모방하여 교회가 성서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영적이고 현세적인 은총이 내리도록 하는 행위를 준성사라 한다.
준성사의 근본적인 대상은 사람에게 해당되며 성수, 성유를 사용하거나 성호를 긋는 것으로 물건이나 건물에도 사용된다.
그래서 제2차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 60항에서는 준성사를 정의하기를 '이들은 성사들을 어느정도 모방한 거룩한 표징들로서 특히, 영적 효험을 표시하며 교회의 간구의 힘으로 그것을 얻어 준다. 준성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성사들의 그 본래의 효력을 받도록 예비되고 갖가지 경우에 생활이 성화된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준성사는 성사와는 같지 않지만 성사와 같이 어떤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는 이 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기도를 통해서 선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또한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심을 간단한 예식을 통해 간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성사를 통해서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사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고 우리의 생활이 거룩한 생활, 완덕의 생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준성사란 신앙인으로서 성사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성사생활에 도움을 주는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사와 준성사는 차이점이 있는데,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것이고, 준성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한에 의해서 교회가 세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성사는 성사예식 자체(행위)로 은총을 받지만 준성사는 그것을 받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많이 받을 수도 있고 적게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준성사는 교회가 하느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헌신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무엇이나 적용된다.
이러한 준성사에는 축복 또는 강복(사람에게)과 축성(사물과 성물), 구마(악마나 악의 감염을 막아내는)가 있다.
그리고 강복과 축복의 대상은 사람과 사람에 관련된 사물에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대상은 언제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준성사는 하느님의 사랑이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준성사의 기원
그래서 준성사가 교회에 의해 생긴 것이지만 그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 기원은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구약성서
가) 하느님의 축복에 관한 성서 구절
◐ 창세2,3 :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축복하셨다는 내용.
◐ 창세9,1 :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심.
◐ 창세12,2 : 하느님께서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주심.
◐ 민수6,22-27 :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사제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빌어 주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복을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심.
나) 성조들의 축복에 관한 성서구절
◐ 창세27,27-29 : 이사악이 자기 아들에게 복을 빌어줌.
◐ 창세49,1-29 : 야곱이 열두아들에게 복을 빌어 줌.
◐ 신명 33 : 모세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에게 복을 빌어줌.
다) 사제들에 대한 축복에 관한 구절
◐ 창세14,19 : 영원한 사제라 불리는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십사하고 하느님께 간구함.
◐ 신명 21,5 : 사제는 하느님께 뽑힌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라는 내용.
◐ 2역대 30,27 : 사제들은 백성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하느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내용
또한 만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알려주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의무를 갖고 있음을 알수 있다(다니엘3,57-88:시편 66,8,103,135).
2) 신약성서에서
가) 사람에 대한 축복
◐ 마르10,16 :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심.
◐ 루가24,50 :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해 주심.
◐ 사도 3,26 : 베드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 설명.
◐ 에페 1, 3 :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영적으로 축복해 주셨다는 사실을 언급.
나) 사물(음식물)에 대한 축복
◐ 마르6,41(병행구 참조) :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시기 앞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심.
◐ 마태26,26(병행구 참조) :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기 전에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시는 내용.
◐ 1고린11,23-34 - 사도 바오로가 예수께서 최후만찬에서 행하신 것을 설명.
이렇듯이 신.구약 성서 전체에서 축복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성사가 교회가 정한 것이기는 하나 교회의 창작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성서를 근거로 하여 나온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사람과 관계된 모든 사물을 축복하셨고 교회는 이를 근거로 해서 준성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3. 준성사의 종류
1) 축복(강복)
축복은 사람이나 물건에 하느님의 은혜를 비는 행위이다. 이 축복은 교회가 간구하는 힘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 수단이며 교회가 제정한 것이다.
축복은 보통은 성직자가 오른손으로 십자가 표시를 그으며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전례 중에(성사 중에) 집전자가 참석자들에게 하기도 하고, 전례 밖에서 간단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넓은 의미로는 비전례적인 축복을 신자이면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성직자에게 국한된 것이 대부분이다.
축복의 궁극적인 주체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며, 그 대상은 사람은 물론 사람과 관련된 모든 사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한, 성사와는 달리 축복을 받는 각 사람의 신앙 정도나 진실여하에 따라서 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축성(방사)
축성은 물건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성스럽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축성의 특징은
첫째로, 제단에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킬 때 사용되며,
둘째로, 사제로 축성될 때 또는 주교로 성성 될 때
세째로, 성당에서 쓰이는 미사용 제구, 종, 교회 등을 거룩하게 할 때 이루어진다.
네째로, 축성은 평신도는 할 수 없으며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는 주교와 사제들만이 할 수 있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주교만이 할 수 있다.
다섯째로, 축성된 사람이나 물건들은 오로지 하느님을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이 축성된 물건이 세속적인 목적이나 용도로 사용될 때, 불의적으로 사용될 때는 독성죄라는 것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축성된 물건 또는 축성된 이들은 하느님께 향한 심신을 독톡히 하는데 쓰여야 하며, 사람들은 성화에로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3) 구마
교회의 주교나 사제의 영역 안에 포함된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구마란 사람이나 사물에서 악마 또는 악령이 떠나도록 명령하여 막아내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교회가 인간이 악령에 사로 잡힐 가능성을 인정하고 믿는 이들을 구하기 위함인데, 현대에서는 비교적 드물고 오히려 구마를 그리스교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으나 그래도 이상할 경우는 사제에게 알려야 한다.
구마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구세주 예수께서 죄악에 대해 승리를 거두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약성서 루가 복음 10,17에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였더니 마귀들까지도 저희에게 복종하였습니다"라는 제자들의 보고가 나와 있다. 또한 예수께서도 직접 악령, 마귀들린 사람들에게 명하시어 악마를 추방하신 것을 볼 수 있다.(마태 8,28-34: 마르 1,23-28; 루가9, 37-44)
그러므로 구마는 사람에게서 악령을 추방해 달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형식으로 행해지며 이때 구마식의 집전자는 사제이다. 악령에 사로잡힌 듯한 현상이 심리적인 요인이나 질병에서 오는 것인지 아닌지 신중히 결정하여야 한다.
4. 축복의 종류
축복의 집전자는 일반적으로 성직자이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신자들도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 성사 중에 축복하거나 간략하게 축복을 할 때에도 성직자에게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축복의 종류를 보면
가) 사람에 관한 축복 - 가정, 부부, 어린이, 자녀들, 약혼자들, 출산 전후의 축복, 외출 못하는 노인, 병자, 선교사 파견시, 교리교사, 공익단체 순례자, 여행자.
나) 건물과 활동에 관한 축복 - 새집, 새 신학교와 수도원, 학교, 도서관, 병원, 사무실, 상점, 체육관, 교통수단, 과학기재, 동물, 전답과 목장, 새곡식, 식탁.
다) 신심을 위한 축복 - 가정에서 사용하는 십자가, 성모상과 여러 성인상, 묵주, 성화, 메달 등이 있다.
5. 준성사의 내용 - 사용과 가치
준성사는 신앙인의 신앙과 봉헌의 정신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결코 미신적인 행위의 대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준성사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이 준성사들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권한이 주어진 교회 신비체의 기도를 통해서만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준성사를 올바르게 이용하면 하느님께서 가시적으로 거처하시는 교회의 축복 안에서 우리의 신앙 고백이 가능해지며, 우리의 이 행위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줄 것이다. 즉, 우리가 축성된 십자가나 묵주, 성패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심을 기원하는 것이며, 악마로부터 보호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에 결코 미신적 행위는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준성사를 이용하고 존경하는 것과 교회와 기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은 커다란 효과를 준다. 특별히, 우리가 걱정이나 고통, 위험이나 유혹 중에 있을 경우에 준성사들을 생각해내고 사용하는 것은 커다란 유익을 줄 것이다.
6.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성화
준성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 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향하는 우리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으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우리의 필요한 은총을 하느님께 간구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인 모든 사물들이 축복된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자연적인 모든 사물들이 준성사로 축복될 때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축복 하고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준성사는 우리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이기적이거나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교회는 공의회 문헌인 전례헌장 61항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성사와 준성사들의 효력은 이러하다. 즉, 잘 예비된 신자들에게는 그들 생활의 거의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수난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빠스카 신비에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성화된다. 이 신비에서 모든 성사와 준성사가 그 효능을 얻는다 . 또한 거의 모든 물질은 올바르게 사용되기만 하면 인간의 성화와 하느님의 찬미를 지향할 수 있다'
즉, 준성사는 우리가 하느님께 올바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기에 준성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거룩하게 하는데 있을 것이다. 또한, 준성사가 이단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신앙의 순수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가 인준한 예절과 경문을 정확하게 지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또 예절에 대해 의문이 날 경우가 있을 때는 교회에 물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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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7 교리공부
1. 성품이란 무엇인가?
'성품'이란 교회 내의 신권을 가진 성직계급을 뜻하는 말로써, '질서에 따른 직분'이라는 말이다. 이 성품에는 주교품과 사제품, 그리고 부제품의 세가지 품이 있다.
이러한 품을 받는 예식을 가리켜서 '서품식'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주교와 신부,부제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성품성사를 통해 성직자로 서품된 이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하느님 나라 건설과 확장을 위해 선교의 사명을 각자의 직무에 따라 수행하게 된다.
2. 성품성사의 제정에 관한 성서적 증언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성목요일에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십시오" (루가22,19)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거룩한 신비를 주관할 책임을 사도들에게 주심으로써 성품성사를 제정하셨다. 성품성사를 성목요일에 제정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죄를 용서할 권한을 주셨다(요한 20,22-23).
이밖에도 신약성서의 많은 구절에서(요한 15,16; 사도 6,6; 13,3; 1디모 4,14; 5,22; 2디모 6,1; 히브 5,4 등)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사제직을 설정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3. 사제의 직무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 가운데 "봉사하시는 분"(마태20,27-28)으로 계시면서 권위를 가지고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사도들에게도 당신의 권위를 잇는 대리자로서의 임무를 맡기셨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진정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당신들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8,18)라고 이 직무의 부여를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공동체를 관리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권위로써 사제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성사를 집행하며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1)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
"온 세상에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마르16,15)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사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그러나 사제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2)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
사제는 자기에게 위탁된 권한 내에서 머리이시며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임무를 수행한다. 즉 교회의 이름으로 하느님 백성을 하나로 모으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사제는 교회가 요구하는대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충고도 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다. 이러한 임무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그 일을 계속하며 끝까지 참고 가르치며 책망하고 권고하고 권면하라"(1디모 4,2)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3) 전례와 성사의 관리자
말씀의 선포는 전례를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전례의 집전으로 인간이 맡은 하느님의 능력이 말씀으로 변화.전달되는 것이며, 성사의 거행으로 이것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제는 성세로써 사람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으고, 고백성사로써 죄인을 하느님과 교회에 화해시키며, 병자성사로써 앓는 이에게 힘을 주고, 특히 미사로써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케 한다.
4. 성직자 :주교, 신부, 부제
'성직자'는 성품성사를 통해 축성된 주교. 신부. 부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모두 독신을 하느님 앞에 약속한 분들이다. 성직자들이 독신생활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과 신자들에게 갈림없는 마음으로 봉사하는데 유익할 뿐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한 제물로 자신을 봉헌한다는 뜻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1) 주 교
주교는 사도의 후계자로서 한 교구를 관장하는 목자이다. 주교는 성품성사의 수여자이며, 견진성사의 집전자이고 고백성사 등을 통제하는 교구의 으뜸가는 교사인 동시에, 교회의 거룩한 사제이며 교회의 행정적 관리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교구에 속해있는 모든 신부와 부제들은 주교의 협조자로서 사목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모든 사도들 중 수위권을 가지고 있던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 세계에 대해 목자권을 행사하시는 주교를 '교황'이라고 한다. 모든 주교들은 교황과 늘 일치해서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2) 신 부
신부는 우리가 흔히 '사제'라고 지칭하는 분들을 일컫는 말이다. 신부는 주교를 도와 일정 지역(본당 관할 지역)을 담당하여 복음을 전하고 사목활동을 하며, 각종 성사를 집전함으로써 본당 신자들의 영신적 사정을 돌보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3) 부 제
부제는 주교와 신부를 도와 복음을 전하며 혼인성사를 주례하고, 세례성사를 집전하며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각종 준성사를 집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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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7 교리공부
1. 구원의 신비에 있어서 인간의 질병과 그 의미
인간의 고통과 질병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가장 큰 난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점에 있어서 같은 느낌과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앙으로써 고통의 고차원적인 신비를 깨달으며 용감하게 그 고통을 참아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질병이란 것이 자신의 구원과 또한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의미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들이 병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 이 세상에서 많은 병자들을 찾아 주시고 고쳐주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질병은, 비록 죄인인 인간의 처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개개인의 죄과에 대한 벌은 아닌 것이다(요한9,3). 특히 죄라고는 전혀 없으셨던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면서 인간의 온갖 상처를 지니셨으며,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셨고, 또 우리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도 함께 고통받고 계시며 괴로워하고 계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통의 고차원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참아받게 되지만,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온갖 질병에 대항해서 용감히 싸우며 건강을 추구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는 사실을 잊어 서는 안될 것이다.
2. 병자성사의 설정
병자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성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겪는 모든 상황들을 통해서 인간을 성화시키신다. 우리가 비록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할 때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병고를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고, 또 그것을 계기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들의 구원을 위해 병자성사를 세우셨다. (마르 6,12-13)
특히 야고보서에서는, 초대교회 안에서 병자성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여러분 중에 앓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는 병자를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야고5,14-15).
3. 병자성사의 필요성
병자성사는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사는 아니다. 그러나 병으로 생명이 위독한 신자에게는 병자성사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환자는 병자성사로써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병고와 죄악으로부터 오는 나약함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특별한 위로와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또 혹시 환자에게 죄가 있었다면 환자는 그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내적인 기쁨과 안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께 합당하도록 정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병자성사의 대상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죽음에 임박한 신자이다. 병자가 이 성사를 받은 후에 건강을 회복하였다가 다시 병들었을 경우든지, 동일한 증세가 계속되다가 중태에 빠지는 경우에도 병자성사를 반복해서 받을 수 있다. 또 대수술을 앞두고 있는 병자라도 수술 전에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고, 노환으로 기력이 많이 쇠진한 노인들도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다.
과거에 병자성사라는 용어 대신에 '종부성사'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꼭 죽을 사람만이 받는 성사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어왔지만, 우리는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받을 수 있는 성사라는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겠다.
5. 대 세
라틴어로는 밥티스무스 심플렉스(Baptismus simplex)라고 하는데, 이는 '단순한 세례'라는 뜻이다. 대세는 세례성사의 정식 집전자인 사제나 부제를 대신해서 평신도가 주는 세례로써, 죽음 등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만 행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예식은 생략한 채 세례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물로 씻기는 예식'만을 거행하게 된다. 우리들도 신자로서 생활하는 중에 대세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으므로, 대세를 주는 방법에 대해 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대세를 베푸는 이는 대세를 받는 이의 이마에 세 번 물을 부으면서 "나는 성부와(첫 번 물을 붓고) 성자와(두번째 물을 붓고) 성령의 이름으로(세번째 물을 붓고) (아무) OOO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대세를 베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병자가 의식을 잃어서 세례를 받겠다는 원의가 분명치 않을 때나 생사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조건부 대세'를 주게 되는데, 이 때에는 "만일 당신이 세례를 받을만 하면"이라는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하는 물은 깨끗한 물이면 어느 것이나 가능하며 대세받을 이의 본명(세례명)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좋겠으나, 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임의로 정할 수 있다.
또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어떤 분이든 후에 대세를 주게 되거든 이 사실을 반드시 본당의 주임 사제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여러분들로부터 대세를 받은 분이 후에 건강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면, 그는 대세를 보충하는 교육을 받고 보례를 받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례는 대세를 보충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만 후에 고백성사와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고 견진성사와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대세받은 이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대세의 사실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 대세를 받은 이가 사망하게 되는 경우에도, 장례절차상 대세 사실의 확인은 필요한 것이다.

6. 요 약
병자성사가 비록 인간구원에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성사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약해진 병자에게 그리스도의 고통과 부활에 참여케 함으로써 위로와 희망을 주며 임종을 잘 준비하게 하는 성사의 은총을 생각한다면 대단히 유익한 성사인 것이다.
우리가 병자들을 돌볼 때, 신비체의 고통받는 지체들 안에서 고통받고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섬겨드리는 것이며, 또한 두루 다니시며 모든 이를 낫게 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병든 이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다(마르16,18).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각자의 형편대로 병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를 주며 정성껏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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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6 교리공부
1. 혼인성사란 무엇인가?
혼인성사는 가톨릭 신자인 한 남자와 여자가 본당신부와 증인들 앞에서 자유로이 사랑의 원의를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성사는 다른 성사와는 달리 부부 자신이 성사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교황 레오13세께서는 혼인성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혼인은 하느님이 제정하신 제도요 시초부터 어느 의미에서 그리스도 육화의 모형이었으므로 혼인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기원에 의해서 거룩하고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혼인성사란 남편과 아내의 유일하고 영원한 관계를 성화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설정하신 성사인 것이다.
혼인성사의 유대는 그리스도가 교회와 맺은 신비스런 혼인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일치를 표현한다. 이 유대로 말미암아 부부는 죽기까지 신의를 지키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혼인제도는 비록 하느님이 제정한 것이지만 혼인이 의무로 강제되는 것은 아니므로 동의가 혼인계약의 필수요건이 된다. 중요한 것은 혼인성사는 다른 성사와는 달리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이 성사 집전자이자 성사 수령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혼인성사란 합법적인 남녀 그리스도 교인과, 그들이 주고받은 혼인동의를 통하여 하느님이 혼인유대를,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일치를 상징하는 영원한 표지로 승격시키는 성사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2. 거룩한 성사로서의 혼인
세례받은 사람들의 혼인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참된 상징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 부부의 유대는 하느님께서 당신 성자의 육화를 통하여 사람들과 맺고자 하신 완전무결한 유대를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만들고 이웃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의 성사이듯이 그리스도교회 안에서의 혼인은 그 자체가 성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정성되이 묵상하면서 교회는 세례받은 자의 혼인이 신약의 일곱 가지 성사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가르쳐 왔고 계속 가르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성세성사로써 참으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부부다운 은약(恩約)안에 확실한 자리를 차지한다. 바로 이 불멸의 삽입으로 말미암아 창조주가 세운(사목헌장 제48항) 부부 생활과 사랑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부부적 사랑으로 들어 높여지고 그분의 구원의 힘으로 유지되고 풍요롭게 된다.
혼인의 성사성으로 말미암아 부부는 결코 풀릴 수 없는 정도로 매어지는 것이며, 그들의 상호 유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자체에 대한 성사적인 징표인 동시에 참된 표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 부부들은 그들의 십자가 위에서 일어날 일들을 교회에 계속 상기시킨다.
그들은 서로에게나 자녀들에게 구원의 증인이며, 성사는 그들을 구원의 참여자로 만든다.
혼인은 고유한 양식으로 구원 사건의 참된 상징이다. 부부는 함께 구원사건에 참여하기 때문에 혼인의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효과는 초자연적인 은혜가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자 부부의 유대, 즉 두 사람의 그리스도적 일치이다. 왜냐하면 혼인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와 계약의 신비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혼인성사도 다른 성사들이 그러하듯이 볼 수 없는 초자연적인 효과를 주는 볼 수 있는 표지로서의 구조를 지닌다. 부부쌍방의 출석과 혼인 동거의 표현은 혼인 유대(인연)의 상징적 실재 와 부부화합의 성사은총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낸다. 혼인 제도가 비록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나 혼인이 의무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므로 쌍방의 동의가 혼인 은약의 필수 요건이 된다.
그러므로 부부는 성사를 베푸는 사람인 동시에 성사를 받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혼인성사란 아무에게나 어느 것에나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남녀 그리스도교 신자와 그들이 주고 받는 혼인 동의를 통하여 하느님이 혼인 인연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일치를 상징하는 영원한 표지로 들어 높이는 성사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기까지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신의를 지킴으로써 갈리지 않음과 충실을 증거해야 한다.
3. 혼인의 특성
혼인에는 여러가지 특성이 있다. 이를 이해함으로써 부부의 의미를 수행할 수 있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1) 혼인은 너와 나의 신성한 계약이다(혼인의 단일성)
사랑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혼인의 계약 역시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상대에게 주고 상대의 몸에 대한 권리를 자기가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 제3자가 끼여 들 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끼여 든다면 부부의 일치는 불가능하게 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기거나 배우자에게 주어야 할 것을 제3자에게 줌으로 배우자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는 것이다.

2) 혼인은 영속성을 지닌다(혼인의 영속성)
합법적 예식을 치르고 성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완결된 혼인이라고 하는데 이 완결된 혼인은 영속성을 갖는다. 즉 배우자의 죽음으로써만 그 인연이 풀린다는 뜻이다.
혼인생활을 가능케 하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영원을 지향하고 있으며 부모를 떠나 배우자와 한 몸을 이루는 신비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마태19,6)고 하시면서 인간은 혼인을 풀 수 없다고 하셨다. 만일 이혼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혼인의 신성성과 신비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배우자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더 나은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고 잠시의 미운 감정은 영원한 이별을 낳게 되고 자녀들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불행을 겪게 되고 사회는 수 많은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성사의 은총은 서로 용서하고 일치를 위해 노력할 때마다 전보다 더 깊은 친밀감을 맛보게 해준다.

3) 혼인은 신성한 것이다(혼인의 신성성)
혼인은 개인과 인류사회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세말까지 존속되는 제도이다. 부부 사이에는 가려진 것도, 숨겨진 것도, 이해득실도 없는 오직 하나되고자 하는 사랑의 관계만이 있다. 즉 의존관계나 공존관계가 아닌 부모와의 관계보다 더 강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일치에 참여하고 자녀를 낳게 해주시는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게 된다.
4) 혼인은 신비로운 것이다(혼인의 신비성)
수많은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혼인이다. 각각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고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인격이 만나 서로 배우자의 단점을 보충하며 자기배우자가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랄 뿐 아니라 실제로 자기 배우자가 자기에게 제일 맞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힘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로써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힘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혼인하는 부부에게 사랑을 선물로 주시지만 부부는 이 선물을 길러가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키우지 않고 방치해두면 시들어버리고 말지만 기르면 기를 수록 무한히 성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인격이 성장하는 비례대로 사랑도 성장한다. 더 나은 인간 즉 지성, 품위, 학식, 건강, 명예, 아름다움, 성실, 양순함, 선함 등을 풍부히 소유한 인간이 될 수록 더 사랑받기 쉽고 더 사랑하기 쉬어진다. 배우자를 길러주는 동시에 자신을 성장시킬 때 사랑은 성장하고 부부는 더 큰 일치를 이루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4. 가톨릭 교회의 혼인법
교회는 혼인성사의 단일성, 영속성, 신성성, 신비성과 혼인하는 당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우에 따라 혼인을 금지하고 또 혼인을 했을 경우 이를 무효로 간주한다. 이를 혼인의 무효장애(혼인조당)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연령장애
남자는 만 16세, 여자는 만 14세 이전의 혼인은 무효이다(교회법 1083조)
우리나라 민법상의 혼인 적령은 남자는 18세, 여자는 16세부터이므로 이를 따라야 할 것이다.
2) 성불능 장애
결혼하기 전에 발생한 성불능이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남자의 경우든 여자의 경우든, 성기관의 불능이든 성기능의 불능이든 간에 그 장애가 영구적일 경우의 혼인은 무효하다. (교회법 1084조). 이 장애는 관면을 받지 못한다.
3) 혼인유대 존속 장애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합법적으로 결혼을 했을 경우 이 혼인유대가 존속하는 한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 없다(교회법 1085조). 바울로 신앙의 특전인 경우가 아니면 관면되지 않는다.
4) 타종교 장애
가톨릭 교회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 혹은 가톨릭 교회에 받아들여진 사람(개종자)이 비신자와 혼인을 하면 무효이다.(교회법 1086조). 단, 본인의 신앙과 자녀의 종교교육이 보장될 경우 관면을 받을 수 있다.
5) 서품 장애
거룩한 품을 받은 사람(부제, 사제, 주교)은 유효한 혼인을 할 수 없다.(교회법 1087조).
이는 교황청에서만 관면할 수 있다.
6) 수도서원 장애
수도회에서 정결 종신서원을 한 사람은 혼인할 수 없다(교회법 1088조). 수도생활을 원하지 않을 때에는 교황청의 관면을 받을 수 있다.
7) 유괴 장애
유괴한 남자와 유괴한 여자 사이, 또는 결혼할 마음으로 여자를 유치시키고 있는 동안에는 혼인할 수 없다(교회법 1089조). 유괴상태에서 풀려나 안전하고 자유로운 장소에 되돌아간 다음 여자가 자진하여 결혼을 원할 때에는 혼인할 수 있다.
8) 범죄 장애
혼인할 목적으로 상대방의 배우자를 죽였거나 자기 배우자를 죽였을 경우 그 사람과는 혼인할 수 없고,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협력하여 배우자를 죽인 사람들도 서로 혼인할 수 없다(교회법 1090조).
9) 친족 장애
적출이건 비적출이건 피를 나눈 직계 친족간의 혼인은 무효이다. 또한 친족의 방계 4촌, 즉 부계든 모계든 8촌까지는 서로 혼인할 수 없다(교회법 1091조).
10) 인척 장애
인척이란 결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배우자의 직계와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결혼할 수 없다(교회법 1092조). 예컨대 죽은 아내의 전실 딸이나 장모와 결혼할 수 없다.
11) 내연관계 장애
유효한 혼인은 아니지만 동거생활을 한 사람, 또는 축첩관계를 맺은 사람은 상대방의 직계 혈족과 혼인할 수 없다(교회법 1093조).
12) 법정친족 장애
양자 결연에 의해 법적으로 친족관계가 성립되었을 경우 직계내에서는 친족에 관계없이 혼인할 수 없고, 방계에 있어서는 2촌(법정 4촌)간에 혼인할 수 없다(교회법 1094조). 단 양자 결연이 파기되었을 경우에는 장애가 풀린다.
13) 착오 장애
혼인을 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혼인은 무효이다(교회법 1097조 1항).
사람의 품성에 대한 착오는 그것이 혼인계약의 이유가 되었을지라도 이 품성이 직접적이고 주목적이 아니었을 경우 무효가 되지 않는다(교회법 1097조. 2항).
14) 협박 장애
신랑이나 신부가 부모나 타인에 의해 부당하게 협박을 당하여 억지로 혼인하였으면 무효이다(교회법 1103조).

15) 혼인형식 장애
가톨릭 신자간의 혼인이라고 본당신부와 두 증인 앞에서 교회법이 요구하는 형식대로 하지 않는 혼인은 무효이다(교회법 1108조 이하).
16) 그 밖에 혼인이 무효가 되는 경우(교회법 1095조 이하)
(1) 이성(理性)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
(2) 부부가 서로 주고 받는 혼인의 본질적인 권리와 의무에 관해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
(3) 심리적 백치(白痴)이기 때문에 혼인의 본질적 의무를 책임질 수 없는 사람
(4) 상대방의 재물을 탐하여 혼인하려는 사람
이와 같이 좀 복잡해 보이는 교회의 혼인법은 항상 약자를 보호하여 그들의 불행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혼인 당사자가 미처 모르는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는 누구든지 반드시 본당신부에게 알릴 중대한 의무가 있다.

5. 혼인조당과 관면혼배
혼인 조당이란, 혼인을 완벽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법 상으로 결혼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앞의 내용들이 바로 그것이다. 혼인 조당에 걸린 신자는 성사생활을 할 수 없으므로, 우리들이나 혹은 가까운 이웃, 자제분들이 결혼을 할 때에는 본당신부님과 잘 상의해서 결정해야한다.
그러면 관면혼배란 무엇일까?
신앙은 인생의 궁극적인 면을 갖는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끝나는 혼인보다 신앙이 더욱 중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이 신앙 생활에 피해를 주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신앙인 끼리의 혼인을 권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가톨릭이 소수이므로 비신앙인(개신교 포함)과 결혼을 할 때에는 특별한 조건을 갖추고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서명 날인한 다음에 혼인을 하는 것을 관면혼배라고 한다. 이 때 개신교 등과 같이 타교파와 혼인할 경우를 혼종혼이라고 말한다.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신자는 결혼을 하여도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자녀를 입교시키겠다. 또한 비신자는 배우자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고 자녀들을 입교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때 양편 모두 증인이 있어야 하며 증인의 진술을 받는다. 만일 결혼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한다면 사전에 관면혼배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조당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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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5 교리공부
    1.견진성사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세례성사'와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게 되는 '견진성사'는 둘 다 입문성사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견진성사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다.
    '견진성사'는 신앙을 전하는 일을 하는 하느님의 일꾼이 되도록 하는 '성숙의 성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견진성사로 성령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세상에 증거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는 것이다.
    2. 견진성사의 정의
    견진성사의 정의는 '堅振'이라는 한자나, 라틴어 'Sacrametum Confirmationis' 또 영어의 'the Scrament of confirmation'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즉, '견진성사란 교회의 칠성사 중의 하나로,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성령과 그의 선물을 주어 신앙을 성숙시키고 증거케 하는 성사'이다.
    좀더 풀어서 정의한다면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성령강림 날에 받은 성령의 은혜를 전교회와 모든 성원에게 전달하여 세상과 이웃과 교회에 봉사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성사로, 그리스도인은 견진을 받음으로서 자신으로부터 탈피하여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가게 되므로 '그리스도인 성숙의 성사'라 하겠다.
    따라서 견진성사는 세례성사 때에도 받게 되는 성령을 교회를 대신하는 주례자의 안수를 통해 더욱 풍부히 받게 되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3. 견진성사와 세례성사의 차이점
    성세와 견진성사는 그리스도교의 '입문성사'란 면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견진은 성세성사와는 몇 가지의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주례자가 교회법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즉, 세례는 주교님을 비롯한 사제, 부제, 일반신자까지 부득이한 경우라면 가능하지만 견진성사의 주례는 그러하지 않다.
    견진성사의 주례집전자는 정규상 주교이다. 다만 보편법이나 관할권자의 특별허가에 의하여 이 특별 권한을 받은 탁덕 곧, 사제도 이 성사를 유효하게 줄 수 있다. 그러하기에 견진성사는 주교님과 사제만이 줄 수 있는 성사인 것이다.
    둘째는, 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는 성사의 수여자 조건이 성세성사의 자격과 다르다는 것이다.
    즉, 세례성사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 이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견진성사의 수여자는 반드시 세례성사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째는, 성사를 받음으로서 오게 되는 효과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얻게 되는 효과는
    (1)견진은 우리를 成人 사도들이 되게 한다.
    (2)견진은 세례의 완성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한 능력을 부여해 준다.
    (3)견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을 선언하고 또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4. 견진성사의 역사
    우선 견진성사 때에 성령을 받게 해주는 안수에 대한 예절은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약속을 실천하거나, 성령의 은총을 받은 사람에게 베풀던 것으로 야곱이 이사악의 안수로 하느님의 약속의 계승자가 되었는데, 이는 바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대한 축복의 약속으로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축복을 하겠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하여금 복을 얻을 것이다."(창 12,3)고 말씀하심에 기인한다.
    또 성유를 사용한 예는, 성유 바른 자를 축성하고 성령을 받았음을 상징한다.
    즉,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성유를 바름으로 사제로 축성되었고,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이 사무엘에 의해 축성되었다.
    그 후 "다윗왕이 사무엘에 의해 성유로써 축성해 성령이 그를 뒤덮었다"(사무엘 전 16,13)는 말씀에 기인한다.
    그리고 신약성서에 나타난 견진성사에 관한 말씀은 요한복음 4,16-17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르시길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함께 영원히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시면서, 성령을 보낼 것을 약속하시고, 사도들도 성령을 받는 견진성사의 집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셨다.
    사도 8,14-17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거기로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로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 이 사실로 보아서 세례성사를 받은 후,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실은 사도시대부터 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가 이어져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는 세례소, 즉 십자가 성당이나 각인식이 이루어지던 각인소라는 성당에서, 성세소에서 알몸으로 나온 세례자의 전신에 성유를 바르고 흰옷과 촛불을 들려 주어 주교 앞에 가 재차 성유를 바름으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때 주교 앞에서 성유를 바르는 것은 이마에 십자형으로 바르는 것으로 이것이 각인식, 오늘날의 견진성사인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세례와 견진이 따로 구분되어져서 다른 날에 행해지는 것은 특수한 우리나라의 상황과, 주교님들의 사목적인 배려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5. 견진성사의 효과
    첫째, 견진은 우리로 하여금 '성인'(成人) 사도들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는 성사이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적인 연령이나 심리학적 성숙도에 있어서 어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성적인 면에 있어서도 우리의 영적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견진은 세례의 완성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한 능력을 부여해 주고 있다. '견진'은 强化를 의미한다. 즉, 이 성사는 우리가 세례 때에 받는 것, 특히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켜 주고 증대시켜 준다.
    세째, 견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을 선언하고 또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견진성사는 우리의 개인적인 성령강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를 받는 직접적 인 계기가 이루어진다.
    6. 성령 칠은
    견진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일곱가지 은혜를 받게 된다. 이것은 사회에 닥쳐오는 모든 반 그리스도적 사조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즉, 세상의 모든 부정과 부도덕, 불의와 싸워 최후의 승리를 얻고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가 필요한데,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의 일곱가지 은혜를 받는 것이다.
    (1)슬기 :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의향대로 모든 사물을 판단할 수 있게 하고 구원에 필요한 일에 이끌리어 맛들이게 하는 은혜
    (2)통달 : 하느님이 계시하신 것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3)의견 : 우리가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주는, 선악을 분별케 해주는 은혜
    (4)굳셈 : 이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올바른 것을 수행하도록 용기를 주는 은혜
    (5)지식 : 이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될 것을 분별케하는 은혜
    (6)효경 :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과 연관된 사람들이나 사물을 존중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은혜
    (7)두려워함 : 이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과 갈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는 은혜
    이렇게 볼 때 슬기와 통달, 의견과 지식은 믿음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효경과 두려워함은 사랑의 실천과 관련을 맺으며, 굳셈은 주님을 향하는 마음과 관련되는 것으로 희망과 합하여 큰 힘을 내게 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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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5 교리공부
1. 고해성사란?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신해서 사제의 성사집행의 선언으로써 세례 받은 후에 범한 죄를 참회할 때 그 죄를 사해 주는 성사가 고해성사이다.
그리하여 이 고해성사는 세례의 재생과 쇄신이라는 관점에서 세례성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고해성사를 구원의 두 번째 가능성이 있는 성사로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고해성사의 설정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것으로 구세주 예수께서는 사도와 그 후계자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어서 죄인에게 은총을 회복하여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도록 하셨다.
2. 죄의 개념과 구분
1) 죄의 개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란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 분의 사랑을 배반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웃과 함께 이룬 인간공동체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 거역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가) 죄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임무와 목적을 세워 주셨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 분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분께 종속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본성 안에 새겨주신 질서와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근본관계를 파괴하게 된다.
나) 죄의 사회적 차원
인간 각자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격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 또한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는 인간을 사랑할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1요한4,20). 그래서 인간은 이웃과 인간 공동체의 존재와 목적에 역행하는 불의를 범함으로써 사회적인 죄를 짓게 된다.
다) 죄의 개인적 차원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써 하느님이 세워주신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과 참된 행복을 거부하게 되고 인간의 참된 본성을 이탈하게 된다. 따라서 죄인은 자기 성숙과 완성을 막아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죄인은 자신을 거슬러 범죄하는 것이고 자기 인격을 병들게 하고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2) 죄의 구분
죄는 크게 원죄(原罪, 인류의 죄)와 본죄(本罪)로 구분되고, 본죄는 대죄(大罪)와 소죄(小罪)로 구분된다.
가) 원죄
원죄는 '인류의 죄'라고도 한다. 원죄는 인류의 원조 아담과 에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렸기 때문에 최초로 생겨난 죄의 원천이란 뜻이다. 성서에서는 선악과의 과일을 따먹은 것으로 설명을 한다(창세 3장).
이 죄로 인해서 하느님과 인간은 등을 지게 되었고, 드디어 인간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모든 은총, 즉 영생과 영복을 잃게 되었다. 그러므로 원죄의 결과로 인간에게는 죽음과 고통이 오게 되었다. 원죄로 불행하게 된 전인간을 다시 새 인간으로 창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주셨다.
원죄는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타고 나는 죄이고, 이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세우신 세례성사를 받아야 한다.
나) 본죄
(1) 대죄
대죄는 하느님과의 초성적인 생명이 완전히 차단되는 영혼의 죽음을 의미한다. 대죄를 범했으면 그동안 쌓았던 모든 공로도 깡그리 없어지고, 성인들의 통공에도 참여할 수 없으며, 그 상태에서 죽으면 지옥직행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대죄를 범했을 때는 즉시 고백성사로 하느님과 화해를 해야 한다.
대죄의 개념은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죄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든지 앙화를 받음이 마땅하다든지 죽어야 마땅하다고 규정된 죄들이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 이런 것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갈라5,20-22).
둘째로, 교회에서 대죄로 규정한 것이다. 그 예로는 십계명을 들 수 있겠다.
세째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극악한 죄들이다. 예컨대 살인, 강간 등등의 죄들이다.
(2) 소죄
소죄는 인간의 나약성과 결함으로 일상 속에서 범하는 사소한 죄들이다. 소죄는 하느님과의 생명이 절단되지는 않는다. 다만 성덕에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 소죄를 가지고는 영성체도 할 수 있고 선행을 해서 공로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소죄가 많이 모인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대죄가 될 수는 없다. 대죄는 대죄이고, 소죄는 소죄이기 때문이다.
3. 고해성사와 그 구성요소
그리스도의 자녀가 범죄한 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고해성사를 받으려 할 때에는 먼저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께로 회두해야 한다. 죄에 대한 통회와 새 생활의 결심을 내포하는 이 깊은 회심은 교회에 고백하고 마땅한 보속을 하고 생활을 개선함으로써 표현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제들의 직무로 일하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신다.
1) 통 회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이 해야 할 의무 중의 첫째는 통회이다. 이것은 범한 죄에 대한 아픔과 미움에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겸한 마음의 자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회개, 즉 전인적(全人的)인 근본 변화가 절대 조건이기 때문이다. 참회의 진실성은 이 마음의 통회에 달려 있다. 회개는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날로 더욱 깊이 비추어 주며 점차로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해주기 때문이다.
2) 고 백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을 참되게 인식하고 죄를 뉘우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죄의 고백이 고해성사의 일부이다. 이같은 마음의 깊은 반성과 외적 고발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고백은 고백자의 편에서는 하느님의 일꾼(사제)에게 자기 마음을 열어 보이려는 의향을 요구하고, 하느님의 일꾼(사제) 편에서는 죄를 풀어주거나 매어놓는 권한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판단을 내리는 영신적 재판을 요구하게 된다.
3) 보 속
참된 회개는 죄의 보속과 생활개선과 끼친 손해의 보상으로 완성된다. 보속의 종류와 양은 각 고백자에게 알맞은 것이라야 한다. 그것은 각자가 파괴한 질서를 회복하고 앓던 병을 반대약으로 고치기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벌은 참으로 죄를 고치고 생활을 개선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같이 고백자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필립3,13) 자신을 새로이 구원의 신비 속에 잠가버리며 미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4) 사 죄
성사적 고백으로 사제에게 자신의 회개를 표시하는 죄인에게 하느님께서는 사죄의 표지로써 당신의 용서를 베풀어 주신다. 이로써 고해성사는 완성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인자(仁者)와 사랑을 인간들에게 볼 수 있게 나타내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디도3,4-5) 하느님께서는 볼 수 있는 표지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파괴된 계약을 갱신하시려 하셨다.
4. 고해성사 양식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해야 한다.
먼저 성당에 들어와서 조용히 앉는다.
그 다음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아내고(성찰), 알아낸 것을 뉘우치고(통회),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 다음에 고백소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은 후 알아낸 죄를 겸손되이 숨김없이 고백하고(고백) 사제의 훈계와 보속, 사죄경을 들은 후에 고백소 밖으로 나온다.
그 다음에 사제가 준 보속을 한다. 보속은 즉시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보속으로 인해 고해성사가 완결되기 때문이다.
고백소 안에서 고해성사를 받는 대표적인 양식은 다음과 같다.
이 양식에서 '+' 표는 사제를 뜻하고, '⊙' 표는 고백자를 뜻한다.
먼저 고백자는 고백소 안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성호경을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러면 사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당신이 범한 죄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십시오.
⊙ 아멘.
그 다음에 고해성사 본지 얼마 되었는지를 말하고, 알아낸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첫 고해성사이면 그냥 "첫고백 입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 죄의 고백 : "첫고백입니다." 또는 "고백한지 몇 일(주일, 달)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알아낸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 고백을 들은 사제가 훈계를 해 주고, "보속으로 ○○ 기도문을 ○ 번 하십시오." 하든지, 어떤 선행을 하라는 보속을 일러 주신다. 이때 고백자는 사제가 보속으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잘 기억해야 한다.
+ 사제는 고백자 머리 위에 손을 펴들고 (혹은 바른손을 펴들고) 사죄경을 외운다. 사죄경은 다음과 같다.
사죄경 :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 아멘
+ 주께서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일어나서 고백소 밖으로 나오면 된다.
나오셔서 성체 앞에 꿇어서 감사의 기도와 보속의 기도를 바친다.
5. 고해성사의 필요성과 유익성
개인이나 단체가 죄로 입은 상처가 여러가지인 것같이 회개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치유도 가지가지이다. 대죄로 하느님의 사랑을 못받게 되었던 사람은 고해성사로써 잃었던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 매일같이 자신의 나약함을 체험하면서 소죄에 떨어진 사람은 고해성사를 반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위한 힘을 회복하게 된다.
(가) 고해성사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대죄를 범한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양심의 성찰로 기억나는 모든 대죄를 낱낱이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
(나) 소죄를 위해서도 고해성사를 성의껏 자주 받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 반복이거나 심리적 수련이 아니라, 세례의 은총을 완성하려는 항구한 노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고린 후 4,10).
이런 고백을 통하여 소죄만을 고백하는 참회자는 특히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으며 성령의 말씀에 순응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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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4 교리공부
    1. 성체성사란?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으뜸되는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재현을 뜻하기도 하고(제사로서의 미사), 영적 생명으로 우리에게 넘겨 주신 당신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의 제사를 계속하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가운데 당신의 구원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당신 자신이 우리와 일치하는 가운데 우리끼리도 서로 하나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한다. 성체는 단순히 상징이나 예식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님의 구속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성사이다. 바로 이 이유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이고 절정이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시고, 성체는 교회 안에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므로, 성체성사는 교회의 모든 직무와 사도직의 "원천이고 절정"(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신과 노동과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하도록 불리우고 인도된다"(직무 5).
    2. 성체성사와 구약의 파스카 잔치
    구약성서에 나타난 많은 제사에서 거룩한 잔치가 예배의 한 요소였으며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노아(창세 8,20)와 아브라함(창세 15,9)의 경우에도 음식을 바치는 제사 가운데 하느님과의 계약이 맺어진다. 그 후 그들의 후손들이 이 계약 준수를 거절해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출애굽(이스라엘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을 통하여 구약에서 가장 큰 계약을 시나이산에서 맺으셨는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잔치(음식을 나눔)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출애 12,3-5.11-14.17).
    이렇게 식사는 해방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에집트에서 탈출하기 전 가족 단위로 음식을 나누었던 사건이 출애굽 사건 전체를 드러내 주는 상징으로 여겨져, 하나의 예식이 되어 대대손손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를 파스카 잔치라고 한다.
    에집트로부터의 구원사건 전체가, 파스카 양과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이루어진 파스카 잔치 예식을 통하여 계속 기념되었다. 이 잔치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최후만찬 때 이 파스카 예식을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최후의 만찬 : 성체성사를 세우심

    사람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최후만찬을 하시던 중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으니,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로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계속 행할 것을 명하셨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시기 전에 베푸신 최후만찬 때에 주님은 새로운 기념 제사를 세우셨다. 먼저 예수님은 파스카 예식을 거행하셨다. 이 거룩한 밤에 예수님은 다가올 새 선물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과거의 보배는 새 선물의 그림자나 모형에 불과했다고 하셨다. 그분은 새 계약의 규정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저녁식사 도중에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다가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 그분은 포도주가 든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끝으로 그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명령하셨다.
    파스카 잔치와 마찬가지로 새 계약을 이루는 이 기념 제사(미사)도 제사인 동시에 거룩한 식사이다. 십자가의 제사를 피흘림 없이 재현하고, 그 제사의 구속 은총을 적용하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이 희생으로 바쳐진다.
    4. 초대교회의 성찬례(미사)
    초대 교회생활을 기록하던 당시의 교회 저자들은 성찬예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니, 성찬이 공동체의 기본적 행사였고,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장 잘 표시하고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성 루가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던"(사도 2,42) 예루살렘의 새로운 신자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 신자들은 보통 이웃에 있는 유다인 회당에서 행하던 성서 중심의 예식에 참석하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하여 서로의 집에 모여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복음과 새로운 생활이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사도 2,43-47).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성서 독서의 계획표와 기도문을 작성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은 기념제사 식사와 합류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성찬 예식의 병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지내는 성찬예식에도 계속 남아 있다.
    5. 미사(성찬례)
    미사는 십자가 위에서 바칠 제사를,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식사의 형태를 빌어 행하신 것을 재현하는 제사이니, 이를 통하여 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구원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미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당신 몸과 피로 영적 음식을 취한다.
    미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특히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제사를 성사적으로 거행한 최후만찬의 재현이다. 따라서 미사는 십자가 제사이자 파스카 잔치이다.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시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한 번만 봉헌된 피흘린 제사가 재현되고, 그것의 기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보존되어, 거기에서 나오는 구원의 힘이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악을 용서한다.
    십자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사에서도 예수님이 성부께 끝없이 무한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주례 사제이며 제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사에서는 교회가 예수님과 공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교회는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합쳐서 봉헌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제와 제물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1) 미사의 구조 <앞에서 강의하였으면 간단히 설명>
    미사는 크게『말씀전례』와『성찬전례』로 나눌 수 있다. 미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시작예식(始作禮式)
    사제가 제대 앞으로 나옴
    - 입당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그날 미사의 주제가 드러남)
    ②말씀전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
    - 제1독서(보통 구약에서 뽑으며, 그날 복음과 관계되는 구절)
    - 화답송(성서의 시편으로서, 방금 들은 말씀에 대해 감사, 찬미드림)
    - 제2독서(복음을 제외한 신약에서 뽑음)
    - 복음 환호송(알렐루야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라는 뜻으로,
    복음을 듣기 전에 백성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환호임)
    - 복음 - 강론 - 신앙고백 - 보편지향기도
    ③성찬전례
    주님의 최후만찬을 재현하면서 십자가 제사를 기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서 봉헌노래를 부르고 미사예물(헌금)을 바침
    - 예물기도 - 감사송 - 거룩하시도다 - 감사기도 - 주의기도
    - 평화 예식 - 빵 나눔 - 하느님의 어린 양 - 영성체 전 기도 - 영성체
    - 감사침묵기도 - 영성체 후 기도
    ④마침 예식
    파견
    - 강복 - 파견
    (2) 미사의 집전자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셨다. 미사를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품성사를 통하여 부르시고 날인하여 당신의 대리자로 행동하도록 권한을 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도에 따라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교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축성의 말을 할 때에 신약의 제사가 재현되어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자들도 자신들의 "왕다운 사제직"(1베드 2,9)의 힘으로 봉헌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함으로써 또한 "사제의 손을 빌어서 제물을 봉헌할 뿐 아니라 그 제물을 사제와 함께 봉헌하며, 자기 자신도 제물로 봉헌하면서"(미사경본2, 서론 62), 신비체의 지체로서의 직책을 완전히 이행함으로써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제의(祭衣)의 색(色)
    미사 중에 사용되는 색은 5가지가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 흰 색 무죄함과 환희, 부활의 상징으로서 순교하지 않은 성인들, 성모, 천사 축일과 부활, 성탄시기에 사용.
    - 붉은색: 피(순교)와 사랑을 상징하며, 성령, 순교자 축일에 사용.
    - 녹 색: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상징하며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가 아닌 연중시기에 사용.
    - 보라색: 참회와 겸손의 표시로서, 대림시기, 사순시기에 사용.
    - 검은색: 죽음을 상징하며 장례미사 때 사용.
    이밖에 흰색 대신 노란색을 사용하기도 하고, 대림 제3주일과 사순 제4주일에 참회 가운데 기쁨을 드러내기 위해 장미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4) 미사지향과 미사예물
    사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만인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 백성의 여러 가지 요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성부께 미사를 봉헌한다. 하느님만이 이 완전한 숭배와 찬미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는 하느님에게만 봉헌된다. 미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만인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지내는 것이다.
    신자들이 자기들의 특별 지향,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 어떤 영신적인 또는 현세적 필요,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 등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달라고 청한다. 이런 청을 할 때에 보통으로 금전적 기부를 한다. 이 미사예물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미사성제에 좀더 깊이 참여하고자 한다는 원의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미사예물의 봉헌자는 미사성제에 자신의 제물을 첨부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돕는다. 결국 미사예물을 빌미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신앙 자세라 할 것이다.
    또한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번 돈의 일부(원래는 십분의 일을 바쳤다)를 교회에 바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돕고 사제의 생활을 위해 돈을 희사하게 된다. 교무금(敎務金)은 각 신자가 교회(일반적으로 본당 신부)와 협의하여 매달 얼마씩 내겠다고 약속한 금액이며, 이외에도 매번 주일미사에 참석할 때마다 감사헌금이나 교회의 특별 활동(예: 성전 신축기금)을 위한 헌금을 한다.
    이 모든 헌금 행위는 자기가 번 돈은 자기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모든 재물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6. 성체와 성혈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교회는 미사 중에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니라"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을 받아들여 성체와 성혈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고백한다.
    (1) 영성체
    성체성사(성체와 성혈)를 받는 것을 영성체라고 한다. 영성체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들과도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먹으면서, 말씀전례 때 들은 하느님의 말씀(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대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보통 경우에는 하루 한 번만 영성체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 경우에는 하루에 두 번 영성체하는 것을 허락한다. 성체만 영하거나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우리 안에 모시게 된다. 그리스도는 성체와 성혈 모두에 온전하게 현존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영성체를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에 관한 하느님의 법은 없다. 교회는 신자들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사순절 시작과 부활시기의 끝 사이에 영성체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히 성체를 자주 받아 영하여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깊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주 혹은 매일이라도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교회헌장 42).
    (2) 영성체 준비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받자면, 영세한 가톨릭 신자로서 은총 지위에 있고 성체에 관한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대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영성체 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대죄를 범한 사람이, 영성체를 해야 할 긴급한 사정이 있으나 고해성사를 볼 기회가 없으면 영성체 전에 완전한 통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후에 기회가 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영성체를 합당하게 할 중대한 의무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1고린 11,27-29).
    우리가 영성체하기 전에 한 시간 동안 음식과 술을 먹지 말 것을 교회는 명한다. 이 공복재(空腹齋)는 성체로써 우리가 받는 그분에 대한 외적인 존경의 공동표시이고 참회하는 준비이다. 환자와 노인에게는 15분의 공복재로 넉넉하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복재가 필요없다. 또, 물을 마시거나 약을 먹는 것은 허용된다.
    (3) 영적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가장 자명한 표징은 음식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파스카 잔치에서 사용되던 음식은 구약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식이었다. 서방교회에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후만찬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순수성과 새로움의 상징이라고 보았다(1고린 5,6-8).
    포도주가 사용되는 미사에는 음식의 상징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최후만찬 때에 먹고 마시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음식을 상징하고 있는 것과 잘 맞는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35.55).
    (4) 일치의 성사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가 그 자체로 일치의 상징이다. 많은 밀알이 모여서 빵을 이루고, 많은 포도알이 모여서 포도주를 이루듯이 하느님의 가족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 공동체가 빵을 나누어 먹는 그 자체가 일치를 상징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단일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실현한다". 사랑이 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를 이룩한다.
    영성체가 강조하는 일치는 우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인 것이다(요한 15,4).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 함께 뭉치고 사랑의 활동을 통해서 서로를 위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성체성사가 세 번째로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천상 유산이다. 성찬예식 전체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옥좌 주위에 모여서 하느님 자신을 영원한 보상으로 받을 것이다.
    미사참례는 우리를 지상의 살아 있는 교회와 일치시킬 뿐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신앙으로 표시되어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도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를 봉헌하며, 모든 성인들과 결합함으로써 천상의 예배하는 교회에 매우 밀접히 일치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7.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성체 안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 아래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교회의 신앙은 요한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 자신의 설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요한 6,22-71).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8.51).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이 믿기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불신자들이 떠나갔어도 예수님은 당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당신 말씀에 대한 불신자들의 이해를 바꾸려 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놓고, 당신은 실제로 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이라고 해명하지도 않으셨다.
성체 안의 경이스러운 현존 양식은 독특하다. 교회가 믿고 기도하고, 자선사업과 신앙의 활동을 할 때에, 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성사를 집행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미사 때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의 현존은 참된 현존이라고 묘사될 만큼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 다른 여섯 가지 성사는 신자로 하여금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성체성사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사제가 예물을 들고 봉헌의 말을 했을 때 빵과 포도주는 없어지고, 그때부터 우리 앞에 놓여있는 빵과 포도주의 형체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과 피인 것이다. 예수님은 영성적으로 당신의 지식, 관심, 활동으로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법으로, 전체적으로, 하느님이며 사람으로서, 실제적으로 또 영구히 현존하신다. 봉헌 후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이 남아 있는 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계속 현존하신다.
8. 성체 신심
교회의 초기에 성체를 보존하던 중요 이유는 전례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환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님의 성체를 존경스럽게 모셔가곤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성체에 대한 신심은 깊고 넓혀져 갔다.
성체성사가 있는 곳마다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래서 이 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어디서나 예배드려야 한다. 성체에 대한 예배는 무릎을 꿇거나 절하기, 성체조배 등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가지 신심 행위로써 표현된다. 13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성인들의 힘으로 성체 대축일이 제정되었다. 가끔 성체를 보통으로 모셔두는 감실에서 제대 위로 모셔 내놓고 조배하는 방법(성체현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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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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