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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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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21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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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에의 생활
모든 사람들은 소명을 갖고 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소명,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소명,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소명 등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소명을 갖고 있고 그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께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현재의 우리의 소명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가정과 사회에서 우리가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장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직장에서 우리가 맡은 다양한 일에 대하여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임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때 바로 즉시 응답을 하여야 한다.
이 응답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응답을 할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2. 기도의 생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분이셨다. 그분은 매일매일 선교여행을 하셨으며 그분의 그러한 여행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 늘 기도하셨다. 그분이 기도하신 것은 시간이 있으셔서가 아니었다. 그분의 주위에는 항시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녔고 사방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항시 장터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소란스럽고 분주한 선교의 여행 속에서도 항시 스스로 시간을 내셔서 하느님의 뜻을 항시 살피셨다. 루가 복음은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 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루가 5. 16)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현대를 바쁘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기도의 시간을 내어야 함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그분 자체를 만나고 그리고 그분과 기도 속에서 일치를 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러한 신앙생활은 한 겨울날의 추운 날씨처럼 차차 굳어질 것이고 급기야는 신앙에 대하여 맹숭맹숭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어렵게 얻은 신앙을 등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3. 감사와 순명의 생활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축복을 주셨다. 창세기는 이 축복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리라"(창세 1, 28).
그러나 태초의 인간은 하느님께 불순명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망각하였다. 그 이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기 위하여 너무나도 힘든 일을 하여야 했다. 이러한 일은 최초의 인간에게만이 한정된 것이 아니라 원죄로 이어져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금의 우리에게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을까? 그것은 교만한 마음, 즉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겸손하지 못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 한 연못가에 갈대가 서 있었다.이 갈대는 조그만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나부꼈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떡갈나무가 갈대를 보며 동정어린 눈길로 바로 보며 말했다.
"이봐요, 갈대. 자네는 바람이 조금만 불거나 물위에 여울이져도 머리를 숙여야 하니 자네의 가냘픈 몸집이 자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되겠는걸!" 그리고 이어서 "내 건강한 머리를 좀 보게, 햇빛을 멈추게도 하고 강한 폭풍까지도 힘차게 맞설 수 있지 삭풍이 자네에게는 폭풍이지만 나에겐 미풍만도 못하네. 자네가 내 몸 밑에라도 태어났던들 나의 그늘을 은신처로 삼아 고생이 없었을 텐데. 내 생각으로는 자연은 불공평한 것 같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갈대가 대답했다. "나를 동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다지 걱정은 마시게나. 모든 바람은 나에게보다 당신에게 더 위험스러운 것 같은데. 바람이 불어도 나는 굽혀지기는 해도 그러나 꺾이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이 말을 듣고 떡갈나무는 갈대를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얼마후 지평선 저쪽에서 북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떡갈나무는 몸을 굽히지 않고 바람에 맞섰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왔다. 가냘픈 갈대는 당장쓰러질 것같아 보였다. 그러나 갈대는 바람이 부는 대로 뭄을 기울일 뿐 아무 괴로움도 없었다.
한편 떡갈나무는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쳐들고, 발을 땅에 붙이고 서 있었다.
그러나 끝내 뿌리 채 뽑히고 말았다.
하느님 앞에서 불완전하기만 한 인간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영유하려면 겸손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신 성모님께서는 매우 겸손하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겸손되게 순명하실 수 있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모친이 되시는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모님에게서 겸손과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순명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모범을 본받아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명하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4. 공동체 생활
인간은 비록 하느님의 뜻을 거슬려 이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하였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지상 위의 모든 생물들의 주인으로서 남아있게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가운데서 구속사업을 계속 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음식과 옷, 집 그리고 그 밖의 것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땅의 주인으로 남아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이익)에 이바지하고, 이웃을 도우며 서로 사랑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하느님은 바로 지금 세계공동체, 국가공동체, 가정공동체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삶을 충실히 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사도 4 32). 지금의 우리들이 이러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하느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 더욱 완전한 공동체를 건설하여 주실 것이다.
5. 결단의 생활
우리가 만약에 어떤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위치가 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선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그 단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결단을 하나씩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이외에도 우리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앞 길에 대해 결정하는 중요한 일까지 수많은 결단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그 가르침과 실천에 있어서 의미있는 것으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 결단은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결단을 우리가 잘 내릴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되고 동시에 삶에 무한한 기쁨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올바르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때는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라는 것이 부끄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그리고 동시에 짐으로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 둘 중에 어느 곳에 우리가 속하게 되는 가는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렇게 살기로 삶 속에서 끊임없이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명하므로써 성장하는 하느님 공동체의 수많은 사람들 안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게 할 것이다.

6. 사랑의 생활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하고 사랑하고 싶어한다. 사랑은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이며 가장 깊은 갈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말로 간단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러운 것이며 동시에 우주에 가득찬 하느님의 숨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 4, 16).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구세주를 약속하셨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의 두 발로 먼지가 펄펄 날리는 땅을 디디며 걸어 다니셨고 또 당신의 두 손으로 지치고 소외된 이들을 쓸어주셨으며 그들과 함께 머물러 계셨다. 그분의 그러한 행동은 그분을 선동자로 몰리게 하였고 결국 그 죄목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하여졌다.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말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활 속에 가득찬 인간에 대한 넘치는 그분의 사랑에 근거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의미에 합당하게 살아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던 많은 성인들의 삶을 볼 수 있다. 이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신 분들이다. 우리도 이분들의 모범을 따라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생활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산상설교(마태오 5,3-10)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산상설교의 한 절 한 절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자.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은 다 가난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점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놓고 하느님만을 애타게 목말라 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부를 누리게 할 것이다.
(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마음의 근심과 가혹한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자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데 대한 비탄과 소외 당함과 그로 인한 억울함의 눈물, 그리고 실의와 "잔인한 운명"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이면에는 더욱 커다란 슬픔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헛되고 황폐한 세상에 대한 애통해함, 하느님과 하느님의 법이 지배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애통함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온갖 역경으로 점철된 자신의 운명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슬픔, 고통당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전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주위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외면한다. 그 외면하는 것이 내 자신에 해당되는 것일 때도 있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일 때도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로 작정한 이상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안에서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예수님 앞에 펼쳐놓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고통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 위로를 받으며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두번째로 하신 말씀의 뜻이라 할 수 있다.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여 불평불만을 품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람은 불만스러운 환경을 극복한다. 온유한 사람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솔개가 그 높은 하늘에서도 먹이를 금방 찾아내듯이 이러한 사람을 금방 알아보고 그 사람에게 몰려와 평화 속에 휴식을 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 동안에 항상 자신에게 와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으셨고 반기셨다. 바로 온유한 사람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옳은 일이란 정의, 거룩함, 완전함을 뜻하고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옳은 일을 갈망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주의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듯이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열심히 열망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이세상에 도래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 가득히 넘쳐흐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하염없는 만족에 젖게 될 것이다.
(5)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가진 자이고, 가진 바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남에게 물질, 힘, 시간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힘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마음 먹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힘인 것이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할까?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지향되어 있고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더 재미있어 하고 또 거기에 더욱더 마음을 두게 된다.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이 관심있어 하는 것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기울이느냐, 아니면 세상 일에 더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찰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으로 가득 찰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정의 삶을 끊어버리고 은총의 삶을 살기 위하여 침묵 가운데서 열심히 기도를 하여야 한다.
(6)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참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이 일치될 때 이루어진다. 평화는 우리 스스로 이룩하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지 평화를 바라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평화를 이룩하려 는 노력을 게을리하기 때문에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바로 그 평화를 나누어 주기 위하여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7)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어떠한 역경도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은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러나 세상의 정의는 자신의 이권에 손해가 되지 않는 범위까지만이고 그것이 그 범위를 넘을 때는 늘 힘의 논리가 지배를 하고 그것이 정의라고 강요된다. 그리고 그러한 거짓된 정의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고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참된 정의를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늘 박해를 당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꼭 승리를 하고 만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인 103위 순교 성인들은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라는 오해를 사서 모두 고향을 등지고 도망 다녀야 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관원에게 붙잡혀서 비참한 최후를 고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분들이 그렇게 무참하게 돌아가신지 200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 누구도 그분들을 박해하던 높은 관직의 조정 대신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지금은 힘없이 죄인으로 죽어갔던 사형수들의 이름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이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을 증언하는 정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분들의 삶은 십자가에서 신성모독과 반란죄로 죽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몸으로 따라 가신 것이다.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우리는 순교성인들처럼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7.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기울이고 사랑으로 응답을 하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며 동시에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은 우리가 속하여 있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가장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순간은 뭐니뭐니 해도 기도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경건하게 성체 앞에 앉아서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 혹은 길을 가며 잠깐 동안 바치는 화살기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그분의 이끄심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명하여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결단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누구도 결단을 쉽게 내리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한가지를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 외의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결단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열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충만한 은총을 주실 것이다. 우리들 은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한 순간도 하느님을 선택할 수가 없으며 또한 그분의 뜻에 맞게 살 수도 없다. 이러한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결단을 내려 응답하는 삶은 사랑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이웃과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를 할 수 있고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따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무엇이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신자생활이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자기를 통해 흘러 넘치는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요한 15, 12)라고 말씀하신 계명의 완성인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사랑 자체라고 믿고 있다(1 요한 4,8).
사랑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조건 없이 남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 아니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상대편에게 내어준다. 그는 상대편의 운명에 전적으로 동참하고 자신이 바로 그가 되어 필요하다면 상대편을 대신하여 기꺼이 죽으려고 까지 한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는다. 영악하고 타산적인 인간의 눈에는 이 사랑이 어리석은 바보짓으로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다. 강생한 성자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남에게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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