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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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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공부'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11.06.03 고해성사
  2. 2011.06.03 성체성사
  3. 2011.06.03 세례성사
  4. 2011.06.03 성모 마리아
  5. 2011.06.03 교회
2011. 6. 3. 23:15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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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해성사란?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신해서 사제의 성사집행의 선언으로써 세례 받은 후에 범한 죄를 참회할 때 그 죄를 사해 주는 성사가 고해성사이다.
그리하여 이 고해성사는 세례의 재생과 쇄신이라는 관점에서 세례성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고해성사를 구원의 두 번째 가능성이 있는 성사로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고해성사의 설정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것으로 구세주 예수께서는 사도와 그 후계자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어서 죄인에게 은총을 회복하여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도록 하셨다.
2. 죄의 개념과 구분
1) 죄의 개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란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 분의 사랑을 배반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웃과 함께 이룬 인간공동체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 거역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가) 죄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임무와 목적을 세워 주셨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 분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분께 종속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본성 안에 새겨주신 질서와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근본관계를 파괴하게 된다.
나) 죄의 사회적 차원
인간 각자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격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 또한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는 인간을 사랑할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1요한4,20). 그래서 인간은 이웃과 인간 공동체의 존재와 목적에 역행하는 불의를 범함으로써 사회적인 죄를 짓게 된다.
다) 죄의 개인적 차원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써 하느님이 세워주신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과 참된 행복을 거부하게 되고 인간의 참된 본성을 이탈하게 된다. 따라서 죄인은 자기 성숙과 완성을 막아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죄인은 자신을 거슬러 범죄하는 것이고 자기 인격을 병들게 하고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2) 죄의 구분
죄는 크게 원죄(原罪, 인류의 죄)와 본죄(本罪)로 구분되고, 본죄는 대죄(大罪)와 소죄(小罪)로 구분된다.
가) 원죄
원죄는 '인류의 죄'라고도 한다. 원죄는 인류의 원조 아담과 에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렸기 때문에 최초로 생겨난 죄의 원천이란 뜻이다. 성서에서는 선악과의 과일을 따먹은 것으로 설명을 한다(창세 3장).
이 죄로 인해서 하느님과 인간은 등을 지게 되었고, 드디어 인간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모든 은총, 즉 영생과 영복을 잃게 되었다. 그러므로 원죄의 결과로 인간에게는 죽음과 고통이 오게 되었다. 원죄로 불행하게 된 전인간을 다시 새 인간으로 창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주셨다.
원죄는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타고 나는 죄이고, 이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세우신 세례성사를 받아야 한다.
나) 본죄
(1) 대죄
대죄는 하느님과의 초성적인 생명이 완전히 차단되는 영혼의 죽음을 의미한다. 대죄를 범했으면 그동안 쌓았던 모든 공로도 깡그리 없어지고, 성인들의 통공에도 참여할 수 없으며, 그 상태에서 죽으면 지옥직행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대죄를 범했을 때는 즉시 고백성사로 하느님과 화해를 해야 한다.
대죄의 개념은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죄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든지 앙화를 받음이 마땅하다든지 죽어야 마땅하다고 규정된 죄들이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 이런 것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갈라5,20-22).
둘째로, 교회에서 대죄로 규정한 것이다. 그 예로는 십계명을 들 수 있겠다.
세째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극악한 죄들이다. 예컨대 살인, 강간 등등의 죄들이다.
(2) 소죄
소죄는 인간의 나약성과 결함으로 일상 속에서 범하는 사소한 죄들이다. 소죄는 하느님과의 생명이 절단되지는 않는다. 다만 성덕에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 소죄를 가지고는 영성체도 할 수 있고 선행을 해서 공로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소죄가 많이 모인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대죄가 될 수는 없다. 대죄는 대죄이고, 소죄는 소죄이기 때문이다.
3. 고해성사와 그 구성요소
그리스도의 자녀가 범죄한 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고해성사를 받으려 할 때에는 먼저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께로 회두해야 한다. 죄에 대한 통회와 새 생활의 결심을 내포하는 이 깊은 회심은 교회에 고백하고 마땅한 보속을 하고 생활을 개선함으로써 표현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제들의 직무로 일하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신다.
1) 통 회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이 해야 할 의무 중의 첫째는 통회이다. 이것은 범한 죄에 대한 아픔과 미움에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겸한 마음의 자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회개, 즉 전인적(全人的)인 근본 변화가 절대 조건이기 때문이다. 참회의 진실성은 이 마음의 통회에 달려 있다. 회개는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날로 더욱 깊이 비추어 주며 점차로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해주기 때문이다.
2) 고 백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을 참되게 인식하고 죄를 뉘우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죄의 고백이 고해성사의 일부이다. 이같은 마음의 깊은 반성과 외적 고발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고백은 고백자의 편에서는 하느님의 일꾼(사제)에게 자기 마음을 열어 보이려는 의향을 요구하고, 하느님의 일꾼(사제) 편에서는 죄를 풀어주거나 매어놓는 권한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판단을 내리는 영신적 재판을 요구하게 된다.
3) 보 속
참된 회개는 죄의 보속과 생활개선과 끼친 손해의 보상으로 완성된다. 보속의 종류와 양은 각 고백자에게 알맞은 것이라야 한다. 그것은 각자가 파괴한 질서를 회복하고 앓던 병을 반대약으로 고치기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벌은 참으로 죄를 고치고 생활을 개선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같이 고백자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필립3,13) 자신을 새로이 구원의 신비 속에 잠가버리며 미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4) 사 죄
성사적 고백으로 사제에게 자신의 회개를 표시하는 죄인에게 하느님께서는 사죄의 표지로써 당신의 용서를 베풀어 주신다. 이로써 고해성사는 완성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인자(仁者)와 사랑을 인간들에게 볼 수 있게 나타내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디도3,4-5) 하느님께서는 볼 수 있는 표지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파괴된 계약을 갱신하시려 하셨다.
4. 고해성사 양식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해야 한다.
먼저 성당에 들어와서 조용히 앉는다.
그 다음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아내고(성찰), 알아낸 것을 뉘우치고(통회),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 다음에 고백소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은 후 알아낸 죄를 겸손되이 숨김없이 고백하고(고백) 사제의 훈계와 보속, 사죄경을 들은 후에 고백소 밖으로 나온다.
그 다음에 사제가 준 보속을 한다. 보속은 즉시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보속으로 인해 고해성사가 완결되기 때문이다.
고백소 안에서 고해성사를 받는 대표적인 양식은 다음과 같다.
이 양식에서 '+' 표는 사제를 뜻하고, '⊙' 표는 고백자를 뜻한다.
먼저 고백자는 고백소 안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성호경을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러면 사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당신이 범한 죄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십시오.
⊙ 아멘.
그 다음에 고해성사 본지 얼마 되었는지를 말하고, 알아낸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첫 고해성사이면 그냥 "첫고백 입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 죄의 고백 : "첫고백입니다." 또는 "고백한지 몇 일(주일, 달)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알아낸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 고백을 들은 사제가 훈계를 해 주고, "보속으로 ○○ 기도문을 ○ 번 하십시오." 하든지, 어떤 선행을 하라는 보속을 일러 주신다. 이때 고백자는 사제가 보속으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잘 기억해야 한다.
+ 사제는 고백자 머리 위에 손을 펴들고 (혹은 바른손을 펴들고) 사죄경을 외운다. 사죄경은 다음과 같다.
사죄경 :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 아멘
+ 주께서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일어나서 고백소 밖으로 나오면 된다.
나오셔서 성체 앞에 꿇어서 감사의 기도와 보속의 기도를 바친다.
5. 고해성사의 필요성과 유익성
개인이나 단체가 죄로 입은 상처가 여러가지인 것같이 회개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치유도 가지가지이다. 대죄로 하느님의 사랑을 못받게 되었던 사람은 고해성사로써 잃었던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 매일같이 자신의 나약함을 체험하면서 소죄에 떨어진 사람은 고해성사를 반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위한 힘을 회복하게 된다.
(가) 고해성사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대죄를 범한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양심의 성찰로 기억나는 모든 대죄를 낱낱이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
(나) 소죄를 위해서도 고해성사를 성의껏 자주 받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 반복이거나 심리적 수련이 아니라, 세례의 은총을 완성하려는 항구한 노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고린 후 4,10).
이런 고백을 통하여 소죄만을 고백하는 참회자는 특히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으며 성령의 말씀에 순응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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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4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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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체성사란?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으뜸되는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재현을 뜻하기도 하고(제사로서의 미사), 영적 생명으로 우리에게 넘겨 주신 당신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의 제사를 계속하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가운데 당신의 구원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당신 자신이 우리와 일치하는 가운데 우리끼리도 서로 하나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한다. 성체는 단순히 상징이나 예식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님의 구속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성사이다. 바로 이 이유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이고 절정이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시고, 성체는 교회 안에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므로, 성체성사는 교회의 모든 직무와 사도직의 "원천이고 절정"(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신과 노동과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하도록 불리우고 인도된다"(직무 5).
    2. 성체성사와 구약의 파스카 잔치
    구약성서에 나타난 많은 제사에서 거룩한 잔치가 예배의 한 요소였으며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노아(창세 8,20)와 아브라함(창세 15,9)의 경우에도 음식을 바치는 제사 가운데 하느님과의 계약이 맺어진다. 그 후 그들의 후손들이 이 계약 준수를 거절해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출애굽(이스라엘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을 통하여 구약에서 가장 큰 계약을 시나이산에서 맺으셨는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잔치(음식을 나눔)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출애 12,3-5.11-14.17).
    이렇게 식사는 해방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에집트에서 탈출하기 전 가족 단위로 음식을 나누었던 사건이 출애굽 사건 전체를 드러내 주는 상징으로 여겨져, 하나의 예식이 되어 대대손손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를 파스카 잔치라고 한다.
    에집트로부터의 구원사건 전체가, 파스카 양과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이루어진 파스카 잔치 예식을 통하여 계속 기념되었다. 이 잔치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최후만찬 때 이 파스카 예식을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최후의 만찬 : 성체성사를 세우심

    사람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최후만찬을 하시던 중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으니,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로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계속 행할 것을 명하셨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시기 전에 베푸신 최후만찬 때에 주님은 새로운 기념 제사를 세우셨다. 먼저 예수님은 파스카 예식을 거행하셨다. 이 거룩한 밤에 예수님은 다가올 새 선물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과거의 보배는 새 선물의 그림자나 모형에 불과했다고 하셨다. 그분은 새 계약의 규정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저녁식사 도중에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다가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 그분은 포도주가 든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끝으로 그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명령하셨다.
    파스카 잔치와 마찬가지로 새 계약을 이루는 이 기념 제사(미사)도 제사인 동시에 거룩한 식사이다. 십자가의 제사를 피흘림 없이 재현하고, 그 제사의 구속 은총을 적용하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이 희생으로 바쳐진다.
    4. 초대교회의 성찬례(미사)
    초대 교회생활을 기록하던 당시의 교회 저자들은 성찬예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니, 성찬이 공동체의 기본적 행사였고,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장 잘 표시하고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성 루가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던"(사도 2,42) 예루살렘의 새로운 신자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 신자들은 보통 이웃에 있는 유다인 회당에서 행하던 성서 중심의 예식에 참석하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하여 서로의 집에 모여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복음과 새로운 생활이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사도 2,43-47).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성서 독서의 계획표와 기도문을 작성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은 기념제사 식사와 합류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성찬 예식의 병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지내는 성찬예식에도 계속 남아 있다.
    5. 미사(성찬례)
    미사는 십자가 위에서 바칠 제사를,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식사의 형태를 빌어 행하신 것을 재현하는 제사이니, 이를 통하여 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구원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미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당신 몸과 피로 영적 음식을 취한다.
    미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특히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제사를 성사적으로 거행한 최후만찬의 재현이다. 따라서 미사는 십자가 제사이자 파스카 잔치이다.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시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한 번만 봉헌된 피흘린 제사가 재현되고, 그것의 기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보존되어, 거기에서 나오는 구원의 힘이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악을 용서한다.
    십자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사에서도 예수님이 성부께 끝없이 무한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주례 사제이며 제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사에서는 교회가 예수님과 공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교회는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합쳐서 봉헌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제와 제물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1) 미사의 구조 <앞에서 강의하였으면 간단히 설명>
    미사는 크게『말씀전례』와『성찬전례』로 나눌 수 있다. 미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시작예식(始作禮式)
    사제가 제대 앞으로 나옴
    - 입당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그날 미사의 주제가 드러남)
    ②말씀전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
    - 제1독서(보통 구약에서 뽑으며, 그날 복음과 관계되는 구절)
    - 화답송(성서의 시편으로서, 방금 들은 말씀에 대해 감사, 찬미드림)
    - 제2독서(복음을 제외한 신약에서 뽑음)
    - 복음 환호송(알렐루야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라는 뜻으로,
    복음을 듣기 전에 백성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환호임)
    - 복음 - 강론 - 신앙고백 - 보편지향기도
    ③성찬전례
    주님의 최후만찬을 재현하면서 십자가 제사를 기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서 봉헌노래를 부르고 미사예물(헌금)을 바침
    - 예물기도 - 감사송 - 거룩하시도다 - 감사기도 - 주의기도
    - 평화 예식 - 빵 나눔 - 하느님의 어린 양 - 영성체 전 기도 - 영성체
    - 감사침묵기도 - 영성체 후 기도
    ④마침 예식
    파견
    - 강복 - 파견
    (2) 미사의 집전자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셨다. 미사를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품성사를 통하여 부르시고 날인하여 당신의 대리자로 행동하도록 권한을 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도에 따라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교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축성의 말을 할 때에 신약의 제사가 재현되어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자들도 자신들의 "왕다운 사제직"(1베드 2,9)의 힘으로 봉헌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함으로써 또한 "사제의 손을 빌어서 제물을 봉헌할 뿐 아니라 그 제물을 사제와 함께 봉헌하며, 자기 자신도 제물로 봉헌하면서"(미사경본2, 서론 62), 신비체의 지체로서의 직책을 완전히 이행함으로써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제의(祭衣)의 색(色)
    미사 중에 사용되는 색은 5가지가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 흰 색 무죄함과 환희, 부활의 상징으로서 순교하지 않은 성인들, 성모, 천사 축일과 부활, 성탄시기에 사용.
    - 붉은색: 피(순교)와 사랑을 상징하며, 성령, 순교자 축일에 사용.
    - 녹 색: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상징하며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가 아닌 연중시기에 사용.
    - 보라색: 참회와 겸손의 표시로서, 대림시기, 사순시기에 사용.
    - 검은색: 죽음을 상징하며 장례미사 때 사용.
    이밖에 흰색 대신 노란색을 사용하기도 하고, 대림 제3주일과 사순 제4주일에 참회 가운데 기쁨을 드러내기 위해 장미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4) 미사지향과 미사예물
    사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만인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 백성의 여러 가지 요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성부께 미사를 봉헌한다. 하느님만이 이 완전한 숭배와 찬미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는 하느님에게만 봉헌된다. 미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만인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지내는 것이다.
    신자들이 자기들의 특별 지향,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 어떤 영신적인 또는 현세적 필요,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 등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달라고 청한다. 이런 청을 할 때에 보통으로 금전적 기부를 한다. 이 미사예물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미사성제에 좀더 깊이 참여하고자 한다는 원의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미사예물의 봉헌자는 미사성제에 자신의 제물을 첨부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돕는다. 결국 미사예물을 빌미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신앙 자세라 할 것이다.
    또한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번 돈의 일부(원래는 십분의 일을 바쳤다)를 교회에 바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돕고 사제의 생활을 위해 돈을 희사하게 된다. 교무금(敎務金)은 각 신자가 교회(일반적으로 본당 신부)와 협의하여 매달 얼마씩 내겠다고 약속한 금액이며, 이외에도 매번 주일미사에 참석할 때마다 감사헌금이나 교회의 특별 활동(예: 성전 신축기금)을 위한 헌금을 한다.
    이 모든 헌금 행위는 자기가 번 돈은 자기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모든 재물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6. 성체와 성혈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교회는 미사 중에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니라"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을 받아들여 성체와 성혈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고백한다.
    (1) 영성체
    성체성사(성체와 성혈)를 받는 것을 영성체라고 한다. 영성체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들과도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먹으면서, 말씀전례 때 들은 하느님의 말씀(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대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보통 경우에는 하루 한 번만 영성체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 경우에는 하루에 두 번 영성체하는 것을 허락한다. 성체만 영하거나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우리 안에 모시게 된다. 그리스도는 성체와 성혈 모두에 온전하게 현존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영성체를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에 관한 하느님의 법은 없다. 교회는 신자들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사순절 시작과 부활시기의 끝 사이에 영성체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히 성체를 자주 받아 영하여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깊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주 혹은 매일이라도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교회헌장 42).
    (2) 영성체 준비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받자면, 영세한 가톨릭 신자로서 은총 지위에 있고 성체에 관한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대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영성체 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대죄를 범한 사람이, 영성체를 해야 할 긴급한 사정이 있으나 고해성사를 볼 기회가 없으면 영성체 전에 완전한 통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후에 기회가 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영성체를 합당하게 할 중대한 의무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1고린 11,27-29).
    우리가 영성체하기 전에 한 시간 동안 음식과 술을 먹지 말 것을 교회는 명한다. 이 공복재(空腹齋)는 성체로써 우리가 받는 그분에 대한 외적인 존경의 공동표시이고 참회하는 준비이다. 환자와 노인에게는 15분의 공복재로 넉넉하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복재가 필요없다. 또, 물을 마시거나 약을 먹는 것은 허용된다.
    (3) 영적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가장 자명한 표징은 음식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파스카 잔치에서 사용되던 음식은 구약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식이었다. 서방교회에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후만찬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순수성과 새로움의 상징이라고 보았다(1고린 5,6-8).
    포도주가 사용되는 미사에는 음식의 상징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최후만찬 때에 먹고 마시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음식을 상징하고 있는 것과 잘 맞는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35.55).
    (4) 일치의 성사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가 그 자체로 일치의 상징이다. 많은 밀알이 모여서 빵을 이루고, 많은 포도알이 모여서 포도주를 이루듯이 하느님의 가족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 공동체가 빵을 나누어 먹는 그 자체가 일치를 상징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단일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실현한다". 사랑이 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를 이룩한다.
    영성체가 강조하는 일치는 우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인 것이다(요한 15,4).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 함께 뭉치고 사랑의 활동을 통해서 서로를 위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성체성사가 세 번째로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천상 유산이다. 성찬예식 전체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옥좌 주위에 모여서 하느님 자신을 영원한 보상으로 받을 것이다.
    미사참례는 우리를 지상의 살아 있는 교회와 일치시킬 뿐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신앙으로 표시되어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도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를 봉헌하며, 모든 성인들과 결합함으로써 천상의 예배하는 교회에 매우 밀접히 일치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7.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성체 안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 아래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교회의 신앙은 요한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 자신의 설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요한 6,22-71).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8.51).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이 믿기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불신자들이 떠나갔어도 예수님은 당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당신 말씀에 대한 불신자들의 이해를 바꾸려 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놓고, 당신은 실제로 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이라고 해명하지도 않으셨다.
성체 안의 경이스러운 현존 양식은 독특하다. 교회가 믿고 기도하고, 자선사업과 신앙의 활동을 할 때에, 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성사를 집행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미사 때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의 현존은 참된 현존이라고 묘사될 만큼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 다른 여섯 가지 성사는 신자로 하여금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성체성사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사제가 예물을 들고 봉헌의 말을 했을 때 빵과 포도주는 없어지고, 그때부터 우리 앞에 놓여있는 빵과 포도주의 형체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과 피인 것이다. 예수님은 영성적으로 당신의 지식, 관심, 활동으로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법으로, 전체적으로, 하느님이며 사람으로서, 실제적으로 또 영구히 현존하신다. 봉헌 후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이 남아 있는 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계속 현존하신다.
8. 성체 신심
교회의 초기에 성체를 보존하던 중요 이유는 전례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환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님의 성체를 존경스럽게 모셔가곤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성체에 대한 신심은 깊고 넓혀져 갔다.
성체성사가 있는 곳마다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래서 이 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어디서나 예배드려야 한다. 성체에 대한 예배는 무릎을 꿇거나 절하기, 성체조배 등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가지 신심 행위로써 표현된다. 13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성인들의 힘으로 성체 대축일이 제정되었다. 가끔 성체를 보통으로 모셔두는 감실에서 제대 위로 모셔 내놓고 조배하는 방법(성체현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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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3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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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의 의미와 물로 씻음에 대하여
세상에서 물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 없다. 물은 생명과 직결되고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인간 생명의 발생부터 인간 생명의 유지에까지 물은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류 역사를 통하여 풍습과 종교 속에는 물이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데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어떤 중대한 일을 앞두고 물로 몸을 씻는 풍습이 있다. 즉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과거를 보러 갈 때는 목욕 재개를 하였다. 이는 내적인 정화를 외적인 양식으로 표시한다는 뜻에서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목욕을 함으로써 마음이 정화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씻는 예식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으면 정결한 자가 된다고 믿고 있으며, 부정이나 허물을 씻는다는 의미에서 정결 예식을 행하였다. 이는 물이 지니는 생명의 근원성과 동시에 정화의 능력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여된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시 세례성사, 즉 초자연적인 생명에로의 재생의 표징으로 물을 사용하고 있다.
희랍어의 세례라는 명사는 '잠기다' , '씻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세례는 물에 잠기고 씻음으로 과거의 생활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형제로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성토요일에 세례 성사를 거행해왔고, 그 전례에서는 매우 아름다운 찬미가와 기도로써 성세수를 축성하고 구원사에서 물이 차지하는 역할을 강조하여 왔다.

2. 세례란 무엇인가?
1) 세례의 성서적 배경 고찰
① 구약에서의 세례 예표
- 창세 7, 17-24 : 세상의 죄악을 물로써 멸망시키다.(세례수로 낡은 사람을 파괴함을 의미한다.)
- 에제 36, 25-26 :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주고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주리라.
② 신약에서의 세례 예표
- 요한 3, 3-5 :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마태 28, 19-30 :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물에서 모든 생명이 나왔으며, 요한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세 때 물을 사용하는 이유는 성세가 재생의 성사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중요성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노아의 홍수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노하심으로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멸망되었으나,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예외적 존재인 노아의 가족은 깨끗하게 된 땅에 새로운 인류를 번성시키게 된다. 여기서 물은 악으로 가득한 세계를 멸하고 새로운 인류의 새 생명의 탄생을 뜻하고 있다. 물로 성세를 받음도 이와같이 우리 안에 악의 요소를 멸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2) 요한의 세례
세례는 회개의 행위이다. 달리 말하면 세례는 겸손과 진리의 행위인 것이다. 세례 성사의 설정자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지만, 복음서에서는 세례에 대한 기사를 예수님 전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요르단강에서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고, 몰려왔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다.
이 세례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해 회개를 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드러내는 외적 표시이며, 세례를 받기 전에 진정한 자기 속죄가 요구되며,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분께 용서를, 빌 때 비로소 세례의 참뜻이 있음을 알아들을 수 있다.
3)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보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고, 또한 물 가운데에 들어감은 우리 자신이 세례의 결과 얻게 되는 승리의 시초적 행동이며, 성서의 완성이다.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라고 하느님께서 장엄하게 선언하셨는데, 여기서 세례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며, 그분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게 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 죄인을 개별적으로 속량하고 새롭게 할 뿐 아니라, 홍해 바다에서처럼 새로운 민족, 하느님의 백성을 낳고 노아의 홍수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재생된 인간을 창조해주는 것이다.
4) 세례의 효과
①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
우리는 세례를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죄악과 헛된 욕망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물의 의미에서 살펴보았듯이, 세례 때 물에 잠기는 것은 이러한 죽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또한 세례를 '신앙의 성사' 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례를 받을 때 크리스찬 공동체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오로지 주 예수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의탁의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받는 이는 온전히 예수님과 결합하여 자기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쳐 이기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할 새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례의 이런 차원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세례전

    세례후

    낡은 인간(묵은 인간)

    새로운 인간

    자연적 생명의 죽음

    초자연적 생명의 탄생

    죄와 벌의 파괴와 소멸

    은총의 부여

    그리스도 무덤에 묻힘과 같이 죄에 대하여 묻힘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에 동참

② 하느님의 자녀, 상속자가 된다.
우리들은 세례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일원이 되고,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
이는 로마서 8,1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을 이루는 우리들은 상호간에 깊은 사랑과 신뢰로서 생활하며, 함께 하느님의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세례 성사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항상 무한한 신뢰감으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우선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은총으로써 하느님의 영광과 크신 사랑을 알고 굳게 믿어야 하며, 그리스도 부활로 인한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을 향하는 이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깨끗해진 우리 마음을 보호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5) 세례 예식
- 첫 질문 ; 세례자의 진정한 의도를 확인하는 질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확실한 믿음을 확인한다.
- 구마 기도 ; 진리와 사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온갖 악으로의 경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 끊는 예식과 신앙 고백 ; 세 번에 걸쳐 " 끊어 버립니까?"와 "믿습니다" 의 질문이 주어진다. 이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즉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겠는가, 아니면 죄와 악의 지배를 받으며, 죽음의 길을 가겠는가를 최종적으로 결단하는 질문이다.
- 물로 씻음 ; 세례에서의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성삼위의 능력으로 원죄와 이전에 실제로 범한 죄를 씻어낸다.
- 기름 바름 ; 새로운 생명의 부패를 방지하도록 하는 거룩한 신분(왕직,예언직, 사제직)으로 축성됨을 뜻한다.
- 흰옷과 촛불 ; 새로이 받게 된 생명의 결백함을 뜻한다.
- 세례명 ; 예비신자가 세레를 받을 때 성인 성녀의 이름을 가짐으로써 그 성인 성녀의 생활을 본받기 위함이며, 따라서 자신의 신앙 생활을 한층 드높이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새로이 영성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그 이름을 가진 성인 성녀의 도움과 전구를 청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을 때 유명한 성인 성녀들의 이름만 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보다 특성있는 성인 성녀의 생활을 알아보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의 이름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또한 자신이 택한 세례명의 축일이 바로 그 성인 성녀의 축일이므로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 대부모 ; 견진 성사를 받은 사람으로서 세례를 줄 때 참석하여 세례받는 자를 영성적으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는 사람으로 그 직무는 예비신자에게 복음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과 사회 생활로 친절히 보여주고, 고통에서 도와주고, 예비신자를 보증하며 세례 성사 생활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6) 세례의 종류
① 어른들의 세례
성인들의 세례는 예비신자 시기라는 긴 시간을 두고 준비하게 된다. 여기에는 예비신자의 세례 요청이 성숙하고, 또 그의 원의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교리로 밝혀질 수 있을 만큼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이 교리는 점점 더 밀도 있게 행해지는 단계적 준비의 절차를 따른 예식을 수반한다. 이 예식은 모든 사람들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회개한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하여 보통 사순절 시작 때,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참회예식 중에 거행된다.
② 유아 세례
세례성사로 부터 그리스도 교육은 시작되기에, 부모들은 자녀가 교회 안에 받아들여지고, 교회 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린이가 정신적 기능의 부족으로 아직 귀의와 신앙의 헌신이 불가능해서 세례의 특성인 개심과 신앙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어린이는 어른에 의존하여 그 표징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린이들은 세례받을 때, 그들나름대로 은총과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께 결합되며, 그들나름으로 구속적 봉사를 위하여 구속적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축성된다. 이 모든 것은 이후의 그리스도 교육으로 개발되어야 하고, 세례 성사는 그 정신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교육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③ 대 세
일반 성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몇 개월간 교리 강습을 받아서 신앙이 무엇이며 세례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죽을 위험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 사람처럼 교리를 배울 수는 없다. 그런 경우 비상 조치로 주는 세례를 '대세'라고 하는데, 이 대세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기본 교리를 일러주고 그것을 믿는다는 표시를 받아야 한다.
- 천주 존재, - 상선 벌악, - 삼위일체 교리, - 강생 구속.등이다.
이상 네 가지 교리를 다 가르칠 수 없고 벌써 환자가 의식을 잃었을 경우에는 그분이 옛날에 하느님을 믿을 뜻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조건부로 임종 비상 세례를 주어야 하는데, 조건부 세례는 이렇게 한다. "만일 당신이 세례를 받을만 하면,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④ 혈 세
피로써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순교하는 숭고한 행동이다. 순교는 생명을 바치면서 신앙을 증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물로써 수세를 받지 못했어도 순교하면 즉각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⑤ 화 세
자기의 뜨거운 열성으로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죽음이 임박하여 영세할 시간이 없고 그런 조건이 되어 있지 못할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상등 통해를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3. 세례의 필요성과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김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이른 것과 같이 우리도 헛된 욕망과 세상적 삶에 너무 집착하는 나쁜 습성을 끊고 오직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며, 이세상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새로운 영적 생명으로 재생되는 은혜를 입는 성사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며,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충실하게, 그리고 이웃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신비체인 교회의 구성원임을 절감함을 뜻하고, 교회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항상 복음에 충실하게 만들려고 노력함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항상 보다 자유로워지고 인간적으로 되고, 보다 책임감 있게 되고, 보다 우정있는 사람들이 되고, 보다 행복한 사람들로 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함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시기와 질투와 분노와 증오와 우월감을 버리고, 사회적 갈등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보존하면서,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살아감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에로 건너감을 뜻하고, 다시 태어남을 뜻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의 실현을 위해 노력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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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2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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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사에서 성모 마리아의 위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서 하와는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하였고, 그 결과 죽음이라는 벌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원죄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약성서는 이 원죄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자 하느님께서 구세주와 그의 어머니가 될 한 여인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뱀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이 약속되었고(창세3,15), 그 여인은 처녀로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주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로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를 가리킨다(이사7,14참조). 때가 차니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는데(갈라4,4-5참조), 그 여인이란 바로 악마의 머리를 밟아 죄악의 세력을 멸하고 승리할 구원자 그리스도의 모친이다.
루가복음 1장 26-38절을 보면 천사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한다. 마리아는 과연 은총을 가득하게 받으신 분이다. 이에 대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마리아는 대답한다. 마리아는 이 대답을 통하여 메시아를 잉태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부와 본질이 같은 성자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인성(人性)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여 하느님의 구속사업을 수행하게 된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와 역할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구원사에서 마리아는 특이하고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리아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대망(待望)사상과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성취(成就) 사이에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인류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2.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협력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시 여기며, 마리아의 자유로운 동의를 구한다.
마리아의 동의없이 하느님은 자신의 구원사업을 이루실 수 없다. 하느님의 계획과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마리아의 순명은 곧 하느님께 향한 자신의 온전한 '동정봉헌'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대로 '정녕 복되신 분'(루가 1,35)이다. 복되신 마리아의 순명으로 아담과 하와로 부터 멀어진 하느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이어지게 되고 인류 구원의 역사는 마리아의 순명을 통하여 새롭게 전개되어 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셨기에 원조의 죄를 '복된 죄'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인류에게 주셨다.
하느님은 한 여인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원죄로 잃었던 인류의 생명을 다시 찾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을 한 인간(마리아)의 순명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인류에게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다. 즉,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구원의 매듭은 엉클어졌다. 하와의 불순명의 매듭은 마리아의 순명을 통해서 풀어졌다. 하와가 자신의 불신앙을 통해서 얽어 맨 것을 동정녀 마리아가 자신의 신앙을 통해서 풀어낸 것이다.

3. 마리아의 순명의 의미
마리아의 순종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죄 많은 인간들과 충만한 연대성을 맺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은 것(봉헌)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순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어머니,
구세주의 모친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대답인 것이다. 자신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도 오직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과 결코 그르칠 수 없는 인도하심을 믿고 오로지 당신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마리아의 대답이었으며, 거기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하느님의 인류구원에 협력하였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내어놓는 신앙이기에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마지 못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것처럼 기쁘게 순종하는 자세를 배워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준 잃어버린 생명을 마리아의 응답으로 되찾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마리아에게서 배워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생명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명하여, 그동안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여야겠다.

4. 교회의 어머니요, 신앙인의 모범이신 마리아
아브라함은 오직 하느님께 순종하여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지상 여정을 걸음으로써 그 결과 그에게서 큰 민족이 이루어졌다(창세12.1-4참조). 하느님을 향한 그의 여정은 하나의 큰 백성을 이룬 시조가 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시공을 초월하여 '신앙의 아버지', 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곧 바로 아브라함을 지칭한다. 이 귀한 호칭이 그에게 주어지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기포기를 통하여 전 생애를 하느님께 의탁한 결과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아드님이 가신 그 길을 온전히 함께 걸어감으로써,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앙인이 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분이며, 언제나 아드님 곁에 머물러 계셨다.(우리들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어머니들은 한결 같이 자신이 낳은 자녀의 행동을 잊지 못한다.)
또한 마리아는 아드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셨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운명을 지켜 보고 시신을 끌어 안으신다. 마리아는 아드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참하였다.
어머니가 가신 그 길은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인생의 여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마리아가 우리 모두의 어머니임을 분명하게 말씀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6-27).

우리에게 나타나는 마리아의 모습은 하느님과 같은 자태, 기적의 아가씨 또는 초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한 한 인간, 한 여인의 본연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이때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제 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한 사람의 참 인간상을 볼 수 있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이 어떠한가를 항상 마리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은 인간으로서 가장 가깝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신 분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 공경은 흠숭과는 다르다. 흠숭은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만 드리는 것이지만, 공경은 모든 성인들에게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테스탄스 제교회에서 말하는 마리아께 대한 우상 숭배는 아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따르고 그 말씀을 지켰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모든 신앙인은 최초의 신앙을 가진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며, 교회의 어머니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가장 완전하게 따른 분이 마리아이다.)
구세주의 모친이 가신 길 즉, 자신의 봉헌과 사랑, 봉사와 희생, 고통과 즐거움 등 인생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서 살아간 마리아의 모습이 곧 우리들이 배워야 할 모델이며 과제가 되는 것이다.

5.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
성서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는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정통 신앙으로 고백하며 받아들여져(사도신경)왔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동정성은 단지 생물학적인 동정성(동정녀 잉태(單性生殖)란 고등생물체에서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나 자연과학적 입장(이 입장에 대해서는 말할 때 하느님은 어느 때라도 새로운 상황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자연발생 안에 삽입시킬 수 있다. 창조 개념으로부터 기적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연과학적 입장에서의 정당한 반론이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또는 신화론적 입장(한 인간의 여인과 신의 성적결합 또는 기적적 탄생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녀의 잉태와 탄생의 의미는 그리스도로 인한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것임을 드러내는 징조이다. 또한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출생과 함께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역사를 통해서 이미 약속되었던 바로 그 아기였다는 것을 동정녀 잉태는 말해주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보통 인간의 탄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탄생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였다'라는 신조의 깊은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동정녀 출생을 상징적 의미로 가르친다거나 동정녀 잉태의 사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마리아의 자유로운 신앙결단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조건없이 신뢰하고, 진심으로 사랑한 모습을 신앙인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하여 마리아처럼 "예"라고 응답하여야 한다.
이것이 평생 동정성의 핵심이며, 마리아의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선사하며, 그래서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고, 하느님은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마리아가 받아들임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며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듯이 우리 자신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마리아는 신자들의 모친, 그리고 교회의 원형이 되며 모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문제는 과학적이며 생물학적인 동정성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관건이 되는 것은 성(性)이 아니라 마리아의 신앙이다.
바로 마리아의 신앙에서 동정성을 찾아야 하며, 마리아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대답 즉,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 라고 한 대답 -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라고 순종한 대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개신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형제와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한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현세의 인간적 부친을 가지지 않았다는 정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생명과 존재의 창시자요 원천이신 성부께서 바로 예수의 인간적 실존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동정녀 출산을 거스르는 반론을 제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의 온전한 인간임이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성을 성부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에 안전하고 충만하게 받았다.

6. 마리아에 대한 신앙교의에 대하여
1) 마리아의 모성
오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문들은 한결같이 마리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교의는 413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대하게 교의로 선포 되었으며, 하느님을 낳으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다. 그러므로 '천주의 모친'이라는 호칭은 성자와 마리아의 밀접한 관계에서 분명하게 연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의 모성에 대하여 성모님은 몸으로보다 정신으로 먼저 잉태하였다. 마리아는 일차적으로 그녀의 절대적인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모친이 되었고 그 다음에 비로서 육체적으로 모친이 된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성전에서 성부께 바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며,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세주의 구세사업을 도와드렸다. 이 때문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모친이 되시었다"라고 선포한다.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닌 만큼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된다.
2)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
마리아의 무염시태란 마리아가 처녀로 잉태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영원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미리 구원사업에 참가하도록 선택된 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일체의 죄의 세력에서 구원받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을 낳으실 어머니가 원죄에 물들었다면 태어나는 아들 또 한 죄의 세력에 물들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죄의 세력에 물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1830년 7월 18일에 프랑스 파리의 까리따스 수녀원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당신이 원죄없이 잉태되었음을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잉태 되시는 첫 순간,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미리 내다 보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특은을 베푸시어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셨다"고 선포하고 이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다.
마리아는 다른 이들이 세례 때 받는 은총을 출생 이전에 미리 입음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도록 불림받았다. 이 교리가 선포된지 4년 후에 성모님께서는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발현하시어 이를 다시 알려주셨다.
3) 성모몽소승천(蒙召昇天)
성모님의 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가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은 것,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약속된 영원한 생명의 영광에 맨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승천에 참여하게 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승천은 스스로 하늘에 오르신 것이지만 마리아는 스스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구별을 하기 위하여 몽소(蒙召)라는 말을 사용한다. 몽소승천은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 즉, 마리아의 인격이 전적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와 일치함을 뜻하는 것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11월 1일 일찍부터 교회가 믿어오던 마리아의 승천을 신조(信條)로서 선언하였다.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모친은 지상생애를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잠든 자들의 첫 열매요"(1고린15,20)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장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로서 누릴 종말적 구원이 마리아의 몽소승천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마리아는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일 뿐 아니라 지상에서 천상도성(天上都城)을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지막 날에 성모님과 같이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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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1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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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삶의 공동체적(共同體的) 성격
우리 속담을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없다"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인간이면 누구나 날 때부터, 어느 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할 수밖에 없는 인간본성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생각된다.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결단하고 그 결단에 대한 책임성 있는 행위로써, 한 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려는 열망을 갖고 그곳에 개인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이상(理想)과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고자 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나 욕구가 공동체의 그것과 맞지 않을 때, 그로부터의 알력이나 긴장이 나타나기 때문에 독립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한편으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기를 열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독립하려는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려는 열망이 이탈하려는 열망보다 강한 듯하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체계화된 사회에서는 협력과 봉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 삶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단"이나 "단체"라는 표현보다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어떠한 공동체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특성이 있다.
먼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요소로서, 신념의 하나됨과 그 목적의 일치, 그리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방편을 쓰겠다는 의견의 일치가 그것이다. 즉, 가급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다면 짧은 시간 안에 자기들이 믿는 것을 전달하여 공동체로서 커져야겠다는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의 일치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단순히 공생(共生) 그 자체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어떤 신념의 일치에서 나온 귀결로서, "같이 나누는 삶"이라는 성격을 띄는 공동체를 말한다.
공동체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자신들이 맡은 것과 그 맡은 것에 대하여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을 "교회"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을까? 답변은 다양할 것이다. 이는 교회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1) "교회"의 어원과 그 유래
우선 '교회'(Ecclesia)라는 어원에 대하여 보자. 이 단어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이 아니었다가 점차 성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적인 용어가 된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원래 희랍어인 이 단어는 정치적인 의미로서 '민족 집합체'를 의미했다. 이 단어를 2세기에 라틴어 성서(70인역)로 번역하면서, 어의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Contio' 혹은 'Comitio'(정치적 집단으로서의 '집회')로 쓰지 않고, '유대인의 회당'(Syagogue), '예식단체', '하느님 백성의 전체 공동체'라는 의미로 도입함으로써 아직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까지도 통용되는 영어의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공번된', '보편적인'을 뜻하는 'Catholicus'에서 나온 표현으로서,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에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지역을 망라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는 단지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다. "교회"라는 의미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적인 결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공동체이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생활의 실천과 관계있는 것으로서 온 인류의 안녕과 기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 지상 생애 동안의 예수
예수는 마르꼬 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1,15)라는, 간결한 말씀으로 자신의 원의가 무엇인지를 요약하고 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설교와 그의 공적인 활동을 통한 본래의 임무는 "하느님 나라"로서, 이 단어는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 지니는 본래 의미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열 두 사도의 선발(마르 3,13; 6.7-13)을 통해서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선발된 열 두 사도로 하여금 그 자신이 행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세력을 나타내는 징표로, 악신을 몰아내게 하는 힘과 함께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을 준다. 열두 제자의 선발은 예수의 이스라엘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암시한다. 예수는 이 열 둘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고자 하며 길 잃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민족 복고주의적인 면모로서 만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유대 민족으로부터 이 개념을 정화하였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8,11의 이방인들을 상대로 행한 제자들의 선교활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데에 있다. 즉,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의 구원행위 속에서, 그의 구마 행위와 병자치유 속에서, 지금 이미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체적인 한 백성을 관통하게 되며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하느님 나라"와 확고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항상 하나의 백성을 전제로 하고 이 백성을 통해서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가운데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뒤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되면서부터 예수와 함께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해야 할 소임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대강 윤곽이 잡힌 셈이다. 성서학자들이 원칙적인 관점에 일치하고 있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 설교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는 완전히 현실화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말한다.
둘째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신이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는 완전히 자유롭고 충만한 최고의 권능행사를 의미한다.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이 그곳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약속하시며, 인간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하느님 나라"는 지상적인 현세의 민족적 신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충실성, 즉 하느님과 타인들과의 친교에 그 참 뜻이 있는 순수한 종교적 다스림이다.
넷째로, "하느님 나라"는 만민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복음"이며 그 조건이 되는 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는 어떤 도덕적 법 규정에로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배와 현세의 지배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요구, 즉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
(1) 하느님 백성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형되고 부활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30-100년)는 일차적으로 부활사건이 발생했던 갈릴레아 지역에서가 아니라 수도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계시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그곳에서 경이적인 성령을 체험하였으며 이로부터 모두가 하느님께 사로 잡히고 공동체 상호간에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와의 연관성하에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 두 지파와 관계있는 사고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였을 때는,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와 벤자민 지파 그리고 레위 지파의 절반만이 존재할 뿐, 더 이상 열 두 지파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기에 열 두 부족이 완전히 재건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여기서 열 두 제자와 같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봉사하는 협력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데 있어서의 조력자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또 하나의 기능이 이들 공동체에 추가되기에 이른다 . 즉, 그들에게 본래 전 이스라엘에서 발생해야만 하는 이들,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전적인 헌신, 새로운 생활 질서에로의 회개, 형제·자매적 공동체에로의 모임 등의 일을 표징적으로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종말론적이며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세계의 일반적 사회질서 속에서 타당성을 인정받고 통용되는 지배구조를 배격하고 상이한 유형의 공동체 구조를 구성해야 하는 소명을 받기에 이른다.
(2) 그리스도의 몸
사도 성 바울로의 서간에서 주로 발견되는 이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 일원간에 일치의 근본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먼저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모든 사람이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 고 있고(갈라 3,23-28), 창녀와의 결합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대조시키면서, 공동체 일원이 그의 몸과 합일되는 지체임을 말하고 있다(1고린 6,15- 17).
한편 바울로 사도는 이 개념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머리이며 세속적인 원리를 벗어버린 그리스도인은 그의 부르심을 받아서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구절들을 보면,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와 공동체와의 관계로 보고 있으며 공동체가 사회적 집단으로서 보다는 구원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천상적 실재로서, 이 안에서 공동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몸"으로 볼 때에, 서로 구별 지을 수 없는 상호관계가 성립되고(에페 1,22-23; 골로 1,18), 그리스도는 공동체가 그리로 향해 나아가는 원천과 목표이며(에페 4,15-16), 그리스도는 몸을 지배하는 머리 역할을 하는 가운데 공동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공동체 상호간에 교제하는 일,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양식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으므로(사도 21,20), 교회의 초기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다. 즉, 어린이들은 할례를 받고 경신례의 규범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쉬는 날로 지켰고, 성전에서 모여 매일 암송하는 기도에 참석하였다(사도 2,4-6; 3,1; 5,21).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그들 자신의 생활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드러나는,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새로운 "성전"(1베드 2,5)으로서, 새롭고
독특한 나름내로의 형태를 지니면서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생활구조를 갖고 살았다.
(1)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안식일에 공동기도에 참석한 다음(20,7), 개인 집에서 그들만의 집회를 가졌음을 전하고 있다(2,46; 12,12; 16,40; 20,8). 그리고 다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42)고 한다.
집회는 흔히 훈시와 예절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훈시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세례 전 예비신자 교리교육과,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강론이 있었다. 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메시아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2,23-26), 그 외에도 신앙과 애덕실천을 위한 훈계(14,22; 16,3) 혹은 용서, 그리고 좀더 친밀한 담화를 담은 권고 및 윤리교육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주로 사도들이 맡았다.
그리고 예절부분은 친교, 빵을 나눔, 기도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부유한 구성원들은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난한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실천은 교육정도, 지방, 신분이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거리감과 여기에 따라오는 상호간의 장벽을 예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에 "성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이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빵과 포도주 위에 손을 펴들고 "최후의 만찬"에서 하셨던 예수의 말씀(1고린 11,23-26)을 빌어 축복하였다는 데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예식을 통해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지고의 사랑을 기억하게 되고,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게 됨으로써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은, 이를 통해서 한데 뭉치고 그리스도의 근본에 공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신강림으로 인하여 그들 안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이후에 계속되는 복음선포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되었고, 이러한 진술의 내용은 곧 복음선포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사도들은 하느님의 업적인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 목격자로 자처하면서(사도 2,32; 3,1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그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증거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종말에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하여 재림하므로, 그동안에 인간의 응답으로서 개인의 속죄와 용서, 그리고 세례를 제시하였다.
또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들은 사도들이 제시한 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산상설교(마태 5 - 7 장)의 여덟가지 행복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 용서와 간음, 이혼과 거짓 맹세에 관한 금령과 보복에 대한 금령, 원수에 대한 사랑, 자선과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 물질에의 초탈,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 등을 권고받았으며, 특별히 마태오 복음 11,28-30의 말씀은 그들이 자주 회고하던 내용이었다.
(2) 공동체 상호간의 친교
공동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원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는 친교로서의 생활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어서, 가난하고 곤궁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다양한 전승들 안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고 있다. 특별히 바울로 사도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벌였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성령강림 이후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줌으로써 얻는 기쁨"을 경험한 사실을 보여준다(사도 2,44이하). 이러한 묘사로써 사도행전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이상적인 공동체상(像)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역시 "애덕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예로 바르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서 받은 돈을 사도들에게 바침으로써(사도 4,26- 27) 사도들의 제자, 더 나아가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교 지도자로서 공동체 활동에 봉사하게 된다.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땅을 팔아 돈의 일부만을 바쳤기 때문에(사도 5,1-2) 죽음의 벌을 받았다(사도 5,5). 물론 이 사건으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재산공유가, "공산주의"나 "집산주의"의 표현으로 보이는 단면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재산의 공동소유는 새로운 신앙의 열정에서 생긴 형제적 사랑의 자의적 원칙으로서 결코 의무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나니아 부부의 죽음은 사도들과 공동체, 무엇보다 하느님을 속인 결과였고(사도 5,4), 성령을 떠보는 죄의 결과(사도 5,9)였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생활은 공동생활의 원형이며 지배관계에서 해방된 성공적인 상호친교의 원형으로서, 무엇보다도 이런 사유재산의 집단의 집착에 따른 공동소유는 강제성이 아니라,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상호부조의 행위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 및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사상과 함께 현세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만 원조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원조받음으로써 서로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자진해서 바치는 구제금이나 헌금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친교를 나누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3) 이웃에 대한 봉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그들의 근본 직능, 직무, 과업, 사명을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봉사"하는 개념을 쓰고 있다. 이 단어는 인간이면 누구나가 즉시 굴종을 연상하게 마련인 하나의 행동, 즉 식사 시중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설교 안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식사시중을 드는 가운데 사람들끼리 존재하는 지배관계, 즉 봉사받는 사람과 시중을 들어 야 하는 사람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루가 17,7-9).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행위를 종 노릇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집니다"(마태 23,13)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인간실존의 가치전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가 하느님의 봉사적 실존의 원형을 친히 비유해 주는 인물로 등장하며 제자들과 공동체에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고(루가 22,24-29), 또한 예수가 봉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 공동체 실존의 척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단순히 식사시중이나 부양과 생계를 돌보는 자선행위만이 아니라 살거나 죽거나 그 어떤 때이던지 간에 "남을 위한 존재", 즉 처음부터 자신의 근본은 자기 인격을 다 바쳐 "타인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발견되는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0,28; 요한 12,25-26).
그러므로 봉사를 통해서 온갖 집단들이 이해관계와 신분의 차별, 성(性)의 우열같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장벽들이 지양되기에 이른다(갈라 3,26-29).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섬기는 일", 즉 "남에 대한 헌신과 사랑 속에서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교회의 본질
지상생애 동안에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그 나라에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고자 의도하였고,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선포와 행적에 입각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갖고 살았다. 그 생활양식이란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예배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의 친교는 공동식사(성찬례)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소명을 기억하면서 자아의식을 새롭게 하였는데, 이런 의식은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자기소유의 개념을 뛰어넘어,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돕는 봉사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였으며, 그들이 구제를 위해서 헌금을 할 때에도 헌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바침으로써 세상을 위한 증거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였다.
물론 이러한 점은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그들의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얻고, 영적 친교의 증진을 통해서 공동체의 친교와 봉사는 세상을 섬기는 데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4. 교회의 특징
1) 하나인 교회(唯一性)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보호하심을 약속하시며(성령강림), 당신이 세우신 교회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세상 방방곡곡에 전파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길 원하셨다. 그런데 천주교회만이 같은 신앙, 같은 전례, 같은 가르침, 같은 제도를 가지고 하나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
즉, 전세계 9억 이상의 천주교회 신자들은 어떠한 파벌의식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님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완성자'라는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온 세계의 천주교회는 그 가르치는 교리나 종교의식(미사)이 동일하고 같은 성사 같은 기도 안에서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세계 천주교회의 외적인 일치는 곧 천주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그리스도교라는 좋은 예이다.
2) 거룩한 교회(聖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이 공동체가 거룩한 것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 거룩함은 바로 천주교회 안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 안에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거룩하게 변화(성화)시켜 주신다.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표현하는 내용으로서 미사와 일곱 가지의 성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당 안에서는 잡스러운 행동이 용납되질 않으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여 계시는 성당에서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천주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즉, 천주교회의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성인·성녀들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천주교회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3) 공번되고 보편적인 교회(普遍性)
천주교회는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한국 명칭이다. '가톨릭'이란 단어의 뜻은 '보편적·공번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교회(라틴어로 ECCLESIA)라는 단어에는 '하느님으로부터 호출되어 모인 백성들의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모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무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전세계에 퍼져 있으며, 공동체가 생긴 이래 인종과 민족, 성별과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전인류를 위해 존재해 온 것이다.
4) 사도로부터 계승된 교회(使徒繼承性)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파가 약 50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당신의 공동체를 맡겨주신 열 두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온 공동체는 천주교회 뿐이다. 특히 천주교회의 주교님들은 열 두 제자들을 대리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직책이다. 이 사실의 증거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5.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의무
하느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포와 행적을 통하여, 당신을 따르던 몇몇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을 모으고자 하심으로써 교회를 창설하셨다.
우리 역시 이러한 기쁨과 사랑의 공동체에 초대를 받아 오게 된 것이며, 이곳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인간역사 안에서 존재하는 한, 인간적인 동기와 한계에 제약을 받는, 인간에 의해서 구성되고 관리되므로 그 자체 내에는 한계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결합과 일치가 그 목표이지만 아직은 완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완성에 이르도록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낱낱이 실천하고 있지 못하고, 하나인 교회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실정이며, 여러 지체들간의 일치와 형제애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상태이다. 교회의 참된 본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러한 현실들은, 교회를 이루는 각 구성원인 우리들이 헤쳐 나가야 할 임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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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