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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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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공부'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11.06.03 예수 그리스도
  2. 2011.06.03 계시
  3. 2011.06.03 이스라엘 역사
  4. 2011.06.03 미사 전례
  5. 2011.06.03 원죄
2011. 6. 3. 23:05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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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人間)이시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셨는지 그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듯이,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
1) 예수의 탄생과 성장
예수님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식민지 통치 아래서 태어난 유다인이었던 셈이다. 그분의 아버지는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분이었다(마태 1,17; 루카1,27).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약혼만 해놓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의 힘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는 것이다(루카 1,34-35).
이같이 태어나신 예수님은 목수이셨던 아버지 요셉(마태 13,55)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살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며 "슬기와 키"가 자랐다(루카 1, 40.52).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면서 자랐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목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그분도 목수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마르 6,3).
2) 예수의 공생활
이렇게 자란 예수님은 30살 쯤 되었을 때(루카 3,23) 가정을 떠나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의 가정을 떠나 당신의 새로운 가족(마태 12,48-50)을 만들고 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신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을 뽑아 그들과 함께 지내셨다는 것이다.
(1) 예수님은 가르치는 분이다.
예수님은 함께 지내는 제자들에게 여러가지의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자들뿐 만 아니라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기쁜 소식을 가르치고 설명해주신다. 예수님이 가르칠 때는 어려운 말씀을 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당시 사람들이면 누구나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다. 예를 들면 양떼와 목자, 씨 뿌리는 사람, 포도원, 겨자씨, 등잔불, 누룩, 친구 이야기, 결혼잔치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가르치신다. 예를 들면 유다인들의 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이나 회당(루카 4,16),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혼인잔치를 하는 집(마르 2,1; 루카 5,29)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같이 어떤 건물 안에서만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호숫가에서 서서(루카 5,1), 물 위에 떠있는 배 안에서 앉아서(마르 4,1), 그리고 땅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도(요한 8,5.8) 가르치셨다. 심지어는 먹고 마시는 도중에도 가르치신다(루카 6,27-39).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마르 1,15)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마태 22,37-40; 루카 10,25-28)이었다.
(2) 예수의 인간적인 언행(言行)들
예수님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통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들, 예를 들면 기쁨, 분노, 사랑, 즐거움, 감사, 동정심 같은 것을 다 느끼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싫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기도 하고, 또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에 슬픔을 보이신다(마르 3,5).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집인 성전(聖殿)을 더럽힌다고 그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들어 엎어 버리는 과격한 행동을 하시기도 한다(마태 21,12).
또 백성들 앞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이던 당신의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에 갈 심판을 피하랴?"(마태 23,33)하고 욕을 퍼부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과는 달리 어린이들을 사랑하셔서 껴안기도 하고(마르 10,16),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라는 세 남매를 사랑하셔서(요한 11,5), 라자로가 죽자 비통한 마음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3.35).
이것만이 아니다. 그분은 굶주리기도 했고(마르 11,12), 먼 여행에 지쳐 낯선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기도 하신다(요한 4,6-7).
또 배 안에서 배의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기도 하고(마르 4,38), 잔치집에 가서는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마태9,10).
3) 예수의 죽음
사람이면 누구나 죽듯이 그분도 죽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요한 19,19-22).
다시말해서 당시 로마의 지배에 도전할 위험한 인물이라는 죄 때문에, 그리고 유다인들에게는 오직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사칭했다는 죄 때문에 정치범으로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분은 죽음을 앞에 두고 무서워 떨며 번민하고, 괴로워 하신다(마르 14,33-35).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탄식을 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결국은 33살이라는 나이에 숨을 거두셨다(마르 15,34.37).
2. 예수님은 하느님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일생은 완전한 실패이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눈에 보이게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는가? 아니면 장가를 들어서 자손들이라도 많았나? 지금의 사회 기준으로 보면 그저 철이 들만한 나이가 되니까 가출해서 자기 식대로 살다가 당시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결국은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일생을 마친 불행한 청년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손수 뽑았던 제자들마저도 예수가 잡히던 그 순간에 모두 도망 가버렸다(마태 26,56). 모든 것이 말 그대로 공(空)이다.
1) 제자들의 증언 -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라는 사람이 언제 있었더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땅에 묻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마태 28,6-7).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2) 제자들의 신앙고백 - 부활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다
바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때까지 스승인 예수의 죽음으로 실망하고(루카 24,17), 자기들까지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에 질려 있던 제자들을(요한 20,19)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놓는다.
제자들의 경우와 똑같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이 죽거나,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인생을 좀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 제자들도 이제 새로운 눈,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것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나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하기 시작한다(사도 2,14).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예수를 부활시킨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라고 말이다. 이제 제자들의 고백은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간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버지 하느님과 항상 일치하고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다고 말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구세주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자신들과 함께 하시던 일들에 대해서 새로이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야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시라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은 세상의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이시라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그 분의 일생은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께서 함께 하신 일생이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전에 죄인들을 용서해주거나 병을 고쳐준 기적들과 귀신을 내쫓은 행동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3)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우리가 예수께 드려야 할 대답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참된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오빠 라자로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요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5-27).
3. 육화의 신비
1) 어떻게 둘이 하나이고, 또 하나가 둘일 수 있는가?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이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일 수 있으며, 또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 신비로운 것을 육화(肉化)의 신비 또는 강생(降生)의 신비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되셨다는 신비이다.
이처럼 신비스러운 것이지만 그래도 이것을 간단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여기 날달걀이 있다. 이 달걀을 예수님이라 생각해보자. 그럼 이 달걀을 깨서 유리그릇에 담아 보면 흰자와 노른자가 있다. 여기서 흰자를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 즉 예수님의 인성(人性)이라고 하고 노른자를 예수님의 하느님적인 면, 즉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보면 이 달걀, 즉 예수님 안에는 분명히 인성과 신성이 함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는 그 인성과 신성이 지금 보시는 흰자와 노른자처럼 눈에 보이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달걀을 휘저어 보자. 흰자도 노른자도 안 보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분명히 이 안에는 흰자가 있고 노른자가 있다. 그렇다. 지금 휘저어 놓은 달걀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시지만 그 두 가지가 떨어지지 않고 완전히 하나로 되어 있다.
2)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육화의 신비는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의 우리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의 처지가 되셨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서의 말씀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루카 2,11-12).
하느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한 갓난 아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시니까 마음대로 선택해서 잘 사는 귀족이나 왕의 아들로 호화로운 집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육화의 신비는 예수님의 일생 안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 우선 30년간에 걸친 나자렛의 가정 생활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느님이시라면 굳이 부모님 슬하에서 자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철저하게 한 인간이셨기에 보통 인간들이 겪는 성장 과정을 다 겪었다는 말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이나 권세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 좀 더 쉽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 창녀, 지체부자유자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항상 찬밥 신세이던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또 그들과 함께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선포를 시작할 때 하신 일종의 취임사 같은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이 말씀들을 실제로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셨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육화의 신비가 잘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 있을까? 아니 하느님이시라면 죽음의 고통을 당하더라도 겉으로만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셨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고통뿐만 아니라 고문과 십자가형이라는 극도의 고통까지도 실제로 다 겪으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가장 비참한 인간의 처지에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육화의 신비가 가장 잘 드러난다. 결국 예수께서는 성서의 말씀처럼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신의 가난으로 여러분이 부요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2고린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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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3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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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시란 무엇인가?
1) 종교학적인 의미
(1). 어원 - '계시(啓示)'-'revelatio'(라틴어)라는 말은 라틴어 'revelare'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의 뜻은 '드러나다','나타나다', '열어 밝히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계시(啓示)'란 어떤 '감추어져 있는 것', '가려져 있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고, 나타내고, 열어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종교학적으로 볼 때 '계시'는 '거룩한 것(聖)'이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히는 것이다.
(2)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이고 자신을 감추어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거룩한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 체험할 수 없다.
(3) 그러나 '거룩한 것'은 가끔 예외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거룩한 것'이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어떤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때)'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럴 때에는 언제나 '속(俗)된 것'을 매개로 하여 드러낸다.
'장소', '사물'을 통한 체험 - '거룩한 것'은 때로는 일정한 사물, 즉 나무,바 위,하늘 등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이때 인간은 이러한 사물을 통하여 거룩한 것을 체험한다.
따라서 인간이 커다란 바위나 오래된 나무 앞에서 절하는 것, 하늘을 두려워 하고 경천사상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나무, 바위, 하늘을 통하여 '거룩한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주위에는 사적이든지 공적이든지 특별히 생각하는 '공간'이 있다. 그 예가 도심 속에 존재하는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룩한 장소는 '신들에로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창세기 28,12-19에서 야곱이 꿈에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천사를 본 그곳인 것이다. 종국적 인간은 '존재'를 갈망하고 그 종교적인 인간의 심원한 향수는 '신적인 세계'안에 거주하려는 것이며 자기 집이 성전처럼 표현되어 신들의 집을 닮고 싶어한다.
즉, 태초에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났을 때의 그대로 순수하고 거룩한 우주에서 살려는 욕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건'을 통한 체험 - '거룩한 존재'는 때로는 일정한 사건과 그 사건과 관계된 인간을 통하여 자신을 열어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 성인이나 예언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거룩한 존재'를 만나기 때문이다.
(4) 이와같이 '거룩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안에 자신을 드러낸다. 즉, '사물'과 '사건'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사건'이 '거룩한 것'을 만나게 되면 그 '장소'와 '역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고, 구체적으로 '거룩한 장소와 사건' 을 띠게 되는 것이다.
결국, 종교학적인 의미에서 '계시(啓示)'란 '거룩한 것'이 자신을 '열어 보이거나,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다. 또한 그 '계시'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2) 성서적인 의미
성서적 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거룩한 존재자인 인격신이 자유로이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에 있다. 즉, 성서는 계시자이신 '거룩한 존재'가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으로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계시의 성서적 특징은 역사적 행위 안에서 완성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룩한 하느님이 시간의 제약 안으로 들어 오셔서 천천히, 점진적으로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가) 구약성서
(1) 성서 : 탈출기 3,1-7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모세야"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
이 장면은 '거룩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즉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사무엘의 현시(visio)는 사무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루어지지만 불타는 가시덤불에서는 하느님이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이 장면의 특징은 모세가 하느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에 있다. 또 하느님이란 '거룩한 분'을 만난 장소도 곧 '거룩한 장소'가 되어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야'할 정도로 구체적인 거룩한 장소, 거룩한 공간이 된다. 그리고 모세가 '거룩한 분'을 만났을 때의 행동을 보자.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는 모세의 행동에서 일반적으로 인간이 어떤 신비한 존재를 체험할 때 느끼는 그 어떤 두려움의 체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비스러운 존재 앞에서 인간은 '경외심'을 갖게 된다.
(2)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실질적인 삶이었으며, 생존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 (탈출 3,13-15;이사 64,1 이하), '권능'(예레 16,21), 당신이 하신 '위대한 일'(하바 3,2)을 계시하신 것이다.
(3) 역사 : 그런데 하느님의 계시는 '역사'안에서 발생하므로,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의 역사는 하느님 계시의 대상과 수단이 된다.계시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행동하신다는 의미이다.
(a) 인물 : 하느님은 특정한 사람들,즉 아브라함·모세·예레미아·에제키엘,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
(b) 사물 : 또한 자연사물을 통한 계시를 보면, 하느님은 폭풍, 구름기둥, 불기둥, 나무소리, 바람소리 등의 자연사물의 형태 안에 자신을 드러내시어 인간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c) 특정한 장소 : 그리고 계약의 궤, 천막, 성전, 하느님의 지팡이, 희생제물 등도 계시의 특정한 장소가 되는 곳이다.
특히 구약성서 탈출기,신명기 등을 읽어 보면, 어떤 특별한 사건, 일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들안에 하느님이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수많이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계시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이사40,5;60,2), 당신의 정의(이사56,1), 당신의 사랑(시편85,8)을 드러내심으로써 나타나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동시에 인간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나) 신약성서
"때가 다 되어"(마르 1,14) 다가온 하느님의 계시는 나자렛 예수의 인격안에 현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신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신 자기 계시의절정이자 완성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의 공적 계시는 완결되었다.
히브리서 1,1-2을 읽어 보자.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위의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가지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이제 '이 마지막 시대'에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시대'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도 바오 로의 말씀에 비추어 요한 복음 1,1-4.9-14.18을 살펴보자.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말씀이 곧 참 빛이셨다. ...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는 이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고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거룩한 존재'인 하느님이 사람으로 '육화(肉化)'(Incarnatio) 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거룩한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자리하셨다는 사실에서 "말씀은 영원하나 그 말씀이 육화할 때에는 언제나 역사를 입는 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 거룩한 존재인 하느님은 "임마누엘(Emmanuel)"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마태 1,23)으로 드러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계시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요한복음 안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특징은 "나는 ... 이다"라는 선언이다. "나는 착한 목자, 문, 빛, 하늘로 부터 내려온 빵이며, ... 부활, 길, 진리, 생명이다". 이러한 "나는 ... 이다"(요한 8,28)라는 절대적 선언은 하느님의 공현인 자기 계시의 절정이다. 더 나아가 요한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해서 표현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 안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분(요한5,39)"이시며,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요한 11,27)",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고 말씀하시는 분,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7,11)"이신 분 ..., 이러한 증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삶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사도 바오로의 계시 체험
- 사울의 개종(사도 9,1-19) -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희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 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울은 자신의 과거 껍질이 벗겨지고 삶이 새로와 졌다. 예수를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구원이란 이처럼 삶의 양식이 바뀐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계시는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3) 교의신학적인 의미
교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계시는 초세계적인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열어 보이시는 것으로 성서적인 입장과 같다. 계시는 능동적 계시(revelatio activa)와 수동적 계시(revelatio passiva)가 있지만,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이 스스로 당신을 열어 보이셨다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천명하고, 이 초자연적 계시가 역사적 행위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공의회는 말한다.
한편 공의회는 하느님 계시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 자연적 방법의 계시 - 하느님의 창조물인 피조물 안에서 자연적 방법으로 하느님의 계시가 파악되기도 한다.(지혜 13,1-5; '자연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
-집회 42,15-25)
(2) 초자연적 말씀계시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일 때 그 계시를 '공적계시'(revelatio publica)라 부르고, 한 개인에게 해당될 때에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라고 부른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공적 계시의 절정이고 종결임을 선포했으며, 계시의 확실한 선포는 마지막 사도가 죽으면서 끝났다고 말한다.
당신 제자들에게 예수 님은 모든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당신 외아들을 주셨으므로(요한 3,16)"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이상 하실 말씀과 보내실 분이 없으시다. 따라서 계시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나자렛 예수의 인격적인 현존 그 이상을 넘어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공의회는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는 아무런 공적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임을 천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계시가 담긴 성서와 성전의 해석은 교회의 교도권에 있다
교회는 계시의 "장소"(place)이다. 사도들은 교회의 증거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 또한 교회는 계시의 성서적인 증거를 계속 현실화시키면서 계시를 새롭게 '전하여' 준다.
전례, 설교, 성서의 말씀, 주교들의 가르침, 공의회와 교황의 가르침, 전승, 교부들의 저서, 신경과 참회, 신학자들의 업적-등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현실화 시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계시가 전수된 성서와 성전의 올바른 해석은 교회의 교도권에 있다.(계시헌장 2,10)
3. 성령의 빛으로 계시 인식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고 하느님의 공적인 계시이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자기 계시로 알아본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가?
심지어 3년동안 동거동락을 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여 예수님이 잡히자 모두 도망쳐 버렸다.
제자들이 예상한 그리스도는 화려한 왕관을 쓰고 굳센 능력으로 로마인들을 쫓아 내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처럼 영화로운 시대로 변화시켜주는 그러한 세속적인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으로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 이점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한 때는 언제였을까?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 안에 성령이 임하실 때였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한14,20)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임하셔야 만이 하느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령에 의하여 사도들은 수십년이 흐르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실 때에 이해하지 못했던 계시의 내용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계시'의 인식을 위하여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엠마오'로 가는 길(루카 24,13-35)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을 깨닫을 수 있었던 것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며,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음을 열고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인식을 위하여 언제나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 된다.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로마 10,8;신명 30,14)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집회 51,26)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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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3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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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별로 본 이스라엘의 역사
1) 성조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셈족의 일부로 기원 전 19 - 17세기에 시리아 초원을 유랑하며 목축을 하던 유목민이었다.
그들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사악,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의 시대를 성조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를 탈출하게 된 그 뒷 배경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으며, 아울러 그들의 이주를 신앙적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1)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있던 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그가 지금까지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땅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것은 고향과 친척등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전폭적이고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약할 수 없는 앞 날을 믿음과 순종으로 하느님께 맡기고 살던 곳을 떠났다. 이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의 번영을 약속하시고, 계약을 맺으셨다(창세기 12 - 15 참조)
(2) 이사악
이사악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느님 약속의 살아 있는 표시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결실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과 그에 따르는 의무와 축복은 이사악에게 계승된다. 그리고 이사악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에사오가 장자 상속권을 야곱에게 넘김으로써 계약과
의무와 축복은 야곱에게 계승된다(창세기 25,19 - 34)
(3) 야곱
하느님께서는 더욱 구체적인 축복을 야곱에게 주셨다. 야곱이 야훼와 대결함으로써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창세기 32,23 - 28)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을 두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원을 이룬다. 그러나 혈육간의 질투로 인해 요셉이 에집트로 팔려가고 후에 야곱의 가문도 에집트로 이주 하게 된다(창세기 37 - 47).
2) 모세와 출애급
야곱과 그의 아들이 에집트로 이주한지 약 400년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은 에집트의 고센 땅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새 왕조가 에집트에서 일어나 이스라엘을 억압하기 시작했다(출애급 1장 참조). 이 때 모세가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히브리 男兒는 태어나는 즉시 죽이라는 명이 내려져 있었으므로 어머니와 누이의 기지로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파라오의 궁전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을 박해하던 한 에집트인을 죽인 문제로 에집트를 탈출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였다(출애급기 2,11 -22). 그곳에서 그는 조상들의 하느님 야훼를 뵙고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자기 민족을 구해내야 할 사명을 게 된다(출애급 3장 참조).
그로 인해 에집트로 돌아간 모세는 야훼의 도움으로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민족을 이끌고 에집트를 탈출한다. 이 에집트 탈출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임을 체험케 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해방절' 혹은 '빠스카'라는 축제를 대대로 지내게 되었다.
이 축제는 '거르고 지나가다', '건너뛰다'라는 '빠스카'의 의미 그대로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거르고 지나갔다는 사실과,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넘으로써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었음을 기리는 것이다(출애급기 12,1-14, 21-27 참조).
3) 광야 생활과 시나이산의 계약
에집트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고난의 여행을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시나이산에 도착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이 계약은 아브라함이 맺었던 계약을 새롭게 한 것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 예배드리기로 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이 계약을 잊지 않도록 가축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는 예식을 거행하라고 명하시고, 당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을 주신다. 사십 년이라는 긴광야 유랑을 통하여 에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온갖 영적 부패를 씻고 단련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에 정착한다(여호수아서 1 - 21).
4) 판관시대
판관이란 왕정이 실시되기 전 이스라엘을 영도하던 정치, 군사, 종교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 열 두 지파 족장이 땅을 분할하여 통치하고 종교의식에서만 유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이스라엘은 민족적 특성과 종교적 사명을 망각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면서 심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판관으로는 삼손, 사무엘, 기드온, 입다, 에후, 드보라 등을 들 수 있다.
5) 왕정시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인근 이민족들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자 판관의 영도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왕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은 정의를 수호하고 전쟁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왕정시대의 대표적 왕으로는 사울, 다윗, 솔로몬이 있었다.
(1) 사울왕
사울은 왕이라기 보다는 전시대의 판관 보다는 약간 더 힘을 가진 지도자에 불과했다. 사울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점차 야훼의 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2) 다윗왕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된 다윗은 국가조직을 정비하여 완전한 군주국가 체제를 확립한다. 그는 남쪽과 북쪽의 세력을 합치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필리스테인들에게 빼앗겼던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킴으로써 명실공히 예루살렘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다윗에게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통해 "다윗 왕가의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게 되고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은 다윗 왕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빼앗고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다. 그 죄로 다윗 가문에 는 가정불화, 근친상간, 모반등의 수치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기원전 775년경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윗은 눈을 감게 된다.
(3) 솔로몬왕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외교, 국방, 무역, 개화정책 등으로 국가를 부강하게 하지만 정략결혼으로 인한 이교도의 우상숭배의 만연, 지나친 건설사업 등으로 인한 강제 노동과 무거운 세금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고, 그의 이러한 행실 등으로 인해 그의 사후에 왕국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6) 왕국의 분열과 예언자들의 활약
이스라엘은 점차 하느님을 저버렸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위세를 떨치려는 현세적 야망이 무너져감을 깨달았다. 차츰 이스라엘 내부에 잠재해 있던 상호 대립 의식이 되살아 나면서,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기대에 못미치자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 주도하에 열개 지파가 분리되어 나가서 북부 왕국(이스라엘)을 세워 남부 왕국(유다)과 갈라지게 되었다(1열왕기 12).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등의 예언자가 활약하였다.
이들은 백성들이 방탕할 때는 하느님의 경고를, 시련기에는 하느님의 약속에 의한 희망을 전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였다.
남부의 유다에서 활약했던 예언자는 이사야와 예레미아를 들 수 있다. 특히 이사야는 나라가 망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새 이스라엘을 안배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 중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메시아 사상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
7) 유배시대
예루살렘이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함락되자 많은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 갔고 유다에는 이민족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지도자들을 잃은 백성들이 이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이교 풍습을 따르게 됨으로써 야훼 신앙은 잊혀져 갔다. 한편으로 유배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에 대한 당연한 징벌이요,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정화의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따라서 야훼의 구원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희망을 갖고 할례와 안식일 등의 전통과 율법을 엄격히 고수하는 유다이즘이 발생하였다.
유배 말기의 위대한 예언자로는 제2 이사야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죄없이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제물이 되어 고난을 당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라는 노래를 통해 절망과 좌절에 빠진 유배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이스라엘을 정신차리게 하고, 이방 민족들에게는 빛을 보여주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의 수난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8) 구약말기
이스라엘 민족은 기원 전 539년 바빌론 제국의 멸망 이후 그 이듬 해에 유배지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그곳에서 생활터전을 잡은 상태이므로 귀환하지 않고 자기네 나름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외의 일부 야훼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과 고국을 그리워 하던 이들은 귀환하였다. 이 귀환자들의 지도자는 즈루빠벨이었다다. 즈루빠벨은 귀환 즉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위하여 힘썼고 그 외의 여러 예언자들이 신앙의 쇄신과 종교개혁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고 단지 율법을 근거로 하는 새로운 율법 공동체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시킴에 따라 이스라엘은 다시 희랍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안티오쿠스 4세는 유다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는 유대인들을 헬레니즘화 시키기 위해 안식일과 할례를 폐지하게 하고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던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게 만든다. 이같은 박해에 대항하여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적 항쟁이 발생한다.
마침내 유다 마카베오는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기원전 142년에 자주독립을 성취하지만, 기원 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유다지방은 다시금 이민족에게 짓밟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기원 후 70년에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났으나 예루살렘의 파괴를 가져왔고, 다시 135년의 유다인의 마지막 폭동의 실패로 이스라엘은 1,800여년 동안 지구상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한 항쟁과 마카베오 가문의 몰락이 계속되면서 유대인들은 극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을 격려하던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다니엘서를 보면 이제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사상 대신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실 것"이라는 사상이 팽배하였고, 그 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는 다시 가증스러운 외적을 물리치고 다윗 왕과 같이 위대한 나라를 재건하여 줄 세속적 메시아를 고대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종말론적 사상이 팽배하였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뒤엎으시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이룩하시리라는 '종말적 사상'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사상들이 유포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아주 뜻밖의 방법으로, 성령을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인 마굿간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 하였지만 후에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의 감도로 용기를 얻고 복음을 전파 하였던 것이다.
2.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구원의 하느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판관들의 영도 아래 부족 연맹체로 지내다가 인접 국가들과 맞설 수 있도록 왕을 세우려 하였다. 이에 하느님은 사무엘을 시켜 왕을 세워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그들의 주인으로 나타나신다. 왕들이 백성을 불의하게 다스리거나, 당신께 의지하지 않고 다른 왕국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를 지키려 할 때에도 역시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릇된 것을 알려주고 이교인들의 신을 섬기게 될 위험에서 건져주시려 하셨다. 이스라엘이 당신과 맺은 계약에 충실치 못하고 계명에 어긋나는 생활을 할 때에는 몇 번이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깨우쳐 주시어 다시 당신께 돌아오도록 하신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느님을 그들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거듭 체험하면서 차차 그분을 알게 된다. 에집트 종살이에서 구해 주신 그 하느님이 바로 그들의 하느님이시며(신명기 5,6참조), 유일하신 하느님 그 분 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신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어길 때마다 책망하시고 벌을 주시지만 결국은 그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마음으로 통하는 사이가 되도록 하신다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특히 바빌론 유배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존망이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왕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야훼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절감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그들의 조상과 계약을 맺은 이래 그 후손들에게 축복을 주신다고 하신 당신 언약대로 늘 그들의 역사 속에 함께 계시어,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인 어른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3. 하느님의 구원경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백성과 구원계약(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맺으시고, 역사에 참여하시므로써 당신의 뜻을 인류에게 펴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하시려는 역사 참여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집단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새롭고 완전한 계약과 계시의 준비요,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인 것이다. 하느님은 오늘도 인류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가고 계신다.
하느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하느님만을 중심으로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항상 하느님의 속성을 따라 살아 나가야 하며, 인간들의 변화무쌍한 원리들을 따라가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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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2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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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사
먼저 미사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같은 뜻인 제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제사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높으신 전능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경신행위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임을 인정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바치며, 간구하는 종교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몇 가지만 보기로 하겠다.
우선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볼 수 있는데, 인류 역사 초기에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카인과 아벨이 각각 야훼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살찐 양을 바친 아벨의 제사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셨고, 곡물을 바쳤지만 성의없이 바친 카인의 제사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온갖 타락에 빠져 죄에 물든 인간 세상을 심판하는 무서운 홍수에서 구함을 받고 야훼 하느님께 드린 노아의 감사제와, 적을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멜키세덱은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빵과 포도주를 제물로 바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파라오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놓아 그날 밤에 주님의 천사들이 에집트의 맏아들을 모두 죽일 때, 그 죽음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녀들이 해방되었음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 기념제사를 빠스까(지나감)라고 말하고 해마다 이 기념제사를 지내고 축하했던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따라 구분하면, 양, 염소, 소 같은 희생물을 제단에서 피를 흘려 죽이는 혈제(血祭)와 밀가루, 빵, 포도주, 곡식, 향유 등을 바치는 무혈제(無血祭), 그리고 짐승을 죽일 뿐 아니라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燔祭)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드리는 목적에 따라 구분을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흠숭제(欽崇祭)와,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기 위하여 드리는 감사제(感謝祭), 필요한 은혜를 청하기 위하여 드리는 기원제(祈願祭),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드리는 속죄제(贖罪祭)가 있다.
구약의 빠스카 만찬의 순서를 보면 개회식에서
첫째, 술잔을 채워서 마심.
둘째, 종살이와 탈출의 긴박함을 의미하는 쓴 풀과 누룩 없는 빵을 먹음.
셋째, 고양(高揚)의 준비.
넷째, 가장 나이가 적은 아이의 질문과.
다섯째, 가장(家長)의 답변이 있음.
여섯째, 시편 112 - 113,8을 읽음.
일곱째, 본 만찬으로서 빵의 축성이 가장(家長)의 감사의 기도로 이루어짐.
여덟째, 둘째 잔을 마시며 식사를 함.
아홉째, 축복의 잔인 셋째 잔을 마심. 여기에서도 가장(家長)의 감사의 기도가 있다.
열번째, 시편 113,8 - 117장까지 읽음.
마지막으로 제 4의 잔을 마심. 이렇게 구약의 빠스카의 만찬은 모두 11개의 순서로 되어있다.
한편 구약의 제사를 완성시킨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제사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제사를 통하여 당신 백성들을 준비시킨 다음,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하느님께 완전한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다. 당신의 죽음을 하나의 제사로 생각하셨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마리의 속죄(贖罪)의 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기 전에 사도들과 최후 만찬을 하시면서 '이것은 내 피이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이다'(마태 26, 27-28)라는 말씀으로 새로운 계약을 통해 맺으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미사를 당신의 제헌(祭獻)을 계속하고자 하셨다.
2. 미사
미사성제는 크게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나눌 수 있는데, 말씀의 전례 앞에 시작예식을 넣고 성찬의 전례 다음에 마침예식을 넣어, 전부 시작예식,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 그리고 마침예식, 이렇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작예식 부분에는 입당송과 사제의 인사, 그리고 참회예절, 자비를 구하는 기도, 대영광송이 있고, 끝으로 모음기도인 본기도가 있는데, 이러한 시작예식의 목적은 한데 모인 교우들이 한 몸을 이루어 공동체가 되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미사를 합당하게 거행하도록 준비시키는 데에 있다.
그러면 시작예식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 입당송 : 입당은 성전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입당송은 미사예절을 시작하고 집회의 일치를 강화하며 교우들의 마음을 전례시기와 축제의 신비로 인도하고 사제와 봉사자들의 행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 인사와 성호경 : 인사는 제단에 입을 맞추거나 깊이 숙여 절을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깊이 절을 하는 것을 택하였다. 제단에 절을 한 후에 장엄미사 때에는 분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구원을 드러내며 그리스도께 우리가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십자성호는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의 신비와 이미 받은 세례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 참회예절 : 참회예절은 미사성제를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먼저 주님 앞에 뉘우치고 고백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는 예절로서, 전 공동체의 공동고백으로 이루어지며 사제의 사죄경으로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 중의 참회예절은 형식적인 예절이 되어서는 안되며, 실제로 대죄가 있을 경우에는 개별고백을 해야 되지만 소죄나 미소한 죄가 있을 때에는 이 예절에서 죄를 뉘우치고 성체를 영함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
◐ 자비송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는 이 자비송은 주님을 부르며 그 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노래이다. 이 자비송은 우리들의 이 미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대한 고백이며,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공동체의 대답인 것이다.
◐ 대영광송 : 대영광송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성삼위께 영광을 드리는 성시로서, 베들레헴에서 천사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찬미하던 노래로 시작되었다. 대영광송은 성령 안에 모인 교회가 하느님 아버지와 어린 양을 찬양하고 간청하는 가장 훌륭한 찬미가이다. 그리고 이 대영광송은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 대축일, 축일 및 지역의 성대한 축제 때에 노래하거나 외우는 것이다.
◐ 모음기도 : 대영광송이 끝나면 사제는 모음기도를 바친다. 이 모음기도를 통하여 미사의 성격이 드러나며, 사제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천주 성부께 기도한다. 사제가 기도를 하는 동안 우리들도 사제와 함께 성부께 기도를 드리도록 해야 된다.
말씀의 전례는 성경독서와 독서 사이의 응송과 복음이 있고 복음 후에는 강론이 있다. 그리고 강론이 끝나면 신앙고백과 신자들의 기도가 있다.
◐ 독서 : 평일에는 독서가 하나밖에 없지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주일과 대축일에는 두 개의 독서를 읽는다. 1독서와 2독서가 있을 때에는 1독서를 주로 구약에서, 그리고 2독서를 신약에서 읽는다. 특히 이 말씀의 전례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과거에는 매년 읽혀지던 성서들이 이제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하느님의 말씀의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도록 신자들에게 성경의 보고를 널리 개방하여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일정한 연수 내에 회중들에게 낭독해 주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3년을 주기로 나누어 놓았다는 점이다.
◐ 화답송 : 제 1독서 후에는 말씀의 전례의 본질적인 부분인 응송이 따른다. 이 말은 옛날에는 층계송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층계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주로 시편이 인용되는데, 이 시편은 독서책에 있는 시편을 사용하는 것이 정상이다.
◐ 알렐루야 : 그리고 제 2독서 후에는 알렐루야를 부르는데, 알렐루야는 사순시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노래한다.
◐ 복음 : 복음은 말씀의 전례의 최고의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서, 가능하면 복음은 부제가 봉독하고, 부제가 없으면 다른 사제가 복음을 봉독하는데, 복음을 봉독하기 전에 제대를 향하여 머리를 굽히는데 이것은 복음을 읽을 마음과 혀를 깨끗이 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작은 십자가를 긋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머리로 깊이 생각하고, 입으로 고백하고 전하며,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겠다는 뜻이다.
◐ 강론 : 복음 봉독이 끝나면 강론이 뒤따르는데, 강론은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풀이하고 기타 신앙에 필요한 일들을 그 날 전례정신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다. 이 강론에 대하여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는 '강론은 전례의 한 부분이며 신앙생활을 양육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매우 권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 신앙고백 : 강론이 끝나면 신앙고백이 있는데, 사도신경은 복음의 말씀에 대한 우리 신앙심의 응답으로서 주의 기도와 함께 초대교회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사도신경은 주일과 대축일에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외우는 것으로서, 지역의 성대한 축제에도 사도신경을 욀 수 있다.
이 신앙고백은 우리 공동체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증거하며, 그 공동체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심화시키는 경청된 말씀에 대한 신앙의 응답이다. 또한 신앙고백은 교회와 그리스도를 믿는 전 교회들의 일치를 염원하는 감명깊은 호소인 것이다.
◐ 신자들의 기도 : 그리고 신앙고백이 끝나면 신자들의 기도가 있는데, 신자들의 기도는 신자들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바로 성찬의 전례로 들어가는데, 성찬의 전례에는 제물봉헌과 예물준비가 있고 손을 씻는 예식이 있으며, 봉헌기도가 있다. 그리고 환호송인 거룩하시다와 성찬기도, 성체축성, 거양성체, 끝영광송이 있다.
◐ 제물봉헌 : 제물봉헌 때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는 인간의 생명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땀을 봉헌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전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또한 봉헌된 헌금은 우리의 노고와 수고를 담은 것이고, 한 주간동안 받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도 하다.
◐ 예물준비 : 사제는 성작에다 포도주를 붓고 물을 섞는데, 이것의 상징적인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에 우리의 노고와 희생을 한데 바쳐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이며, 또한 예수님의 늑방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을 연상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 손을 씻음 : 손을 씻음은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집에서 가지고 온 제물을 사제가 받았으므로 더러워진 손을 씻던 것이 오늘날 예절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제가 손을 씻는 것은 사제의 내적 정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을 씻는 것이다.
◐ 봉헌기도 : 사제는 이 봉헌기도 때에 우리 자신과 제대에 준비된 제물을 축복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 감사송 : 이 감사송은 그 날 축일의 성격에 따라 다른 것을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에 하신 사례하는 감사의 기도이다.
◐ 거룩하시다 : 거룩하시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히브리 백성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던 환호로써, 우리가 미사 중에 '거룩하시다'를 할 때에 환호와 찬미의 자세를 지니고 참다운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 성찬기도 : 성찬기도는 미사성제의 가장 핵심부분으로서 여기에는 4가지 양식이 있다.
1양식은 어떤 미사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2양식은 주간의 평일과 특수한 환경(시간이 촉박한 때나, 어린이의 미사)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3양식은 특별히 주일과 축일에 사용함이 좋다. 그리고 4양식은 구원의 역사를 종합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 성체축성 : 축성 전에 사제가 밀떡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향하는 것은 감사와 봉헌의 표시이며, "이는 내 몸이니라, 이는 내 피니라"라는 사제의 선언으로 밀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고,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와 성혈을 따로 축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거양성체 : 사제가 성체와 성혈을 높이 드는 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체와 성혈을 흠숭하게 하기 위함이며, 복사가 종을 치는 것은 신자들의 온 정신을 제대 위로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 끝 영광송 : 이 기도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이며, 이 영광송 끝에 신자들은 "아멘"
이라고 응답을 하는데, 이는 미사의 가장 장엄한 순간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다 바쳐 자신을 제물로 제헌하신 순간을 드러내는 것이다.
◐ 주의 기도 : 이 주의 기도로 성찬식 즉 영성체 부분에 들어간다. 이 기도로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의 빵을 암시하는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또 죄를 깨끗이 씻어 달라고 간청하여 거룩한 빵을 실제로 거룩한 사람들이 받게 한다.
◐ 평화의 기도와 평화의 인사 : 주의 기도를 바친 다음에 사제는 온 세상과 교회를 위하여 평화의 기도를 바친다. 교우들은 교회와 전 인류 가족의 평화와 일치를 간청하고, 서로 평화와 사랑의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축복하는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 성체를 쪼갬 : 이 성체를 쪼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상징하고, 한 부분을 떼어 성혈에 넣는 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갈라졌던 몸과 피를 합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식은 성체를 나누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받아 모심으로써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 하느님의 어린 양 : 여기에서 말하는 어린 양은 제물로 바쳐지는 양을 말한다. 이 기도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되신 예수께 우리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으로서, 세 번이나 반복을 하면서 주님을 받아 모시기에 부당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하는 것이다.
◐ 보라 천주의 어린 양 : 사제는 영성체 때에 받아 모실 성체를 교우들에게 보이며 그리스도의 잔치에 초대하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들은 성서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의 자세를 본받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응답한다.
◐ 영성체 : 초대교회에서는 신자들도 성체와 성혈을 다 영했다. 그러나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빵과 포도주에 각각 완전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인정하면서 1415년 콘스탄틴 공의회에서는 신자들의 성혈의 영함을 금했다. 그러나 사목적인 이유에서 특별한 경우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성체와 성혈을 다 모시는 양형 영성체를 허락하고 있다.
◐ 영성체송 : 이 기도문은 그 날 미사와 성체의 신비를 표현하며, 신자들이 영성체를 하는 동안에 부르는 노래이다. 영성체 때에 때로는 성체성가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성체를 영하는 이들의 영신적 일치를 드러내고 마음의 기쁨을 표시한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러 나가는 행렬 속에서 우리는 형제적인 성격을 느낄 수 있다. 만일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경우에는 미사경본의 영성체송을 신자들 전부나 그들 중의 몇 사람 또는 독서자가 읽는다.
◐ 영성체 후 묵상과 기도 : 신자들의 영성체가 끝나면 사제는 남은 성체를 감실에 모시고 성반과 성합과 손에 묻은 성체가루를 물을 부어 깨끗이 영하는데, 이것은 성체께 대한 주의와 공경을 작은 부분에까지도 다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묵상의 시간에 우리 마음 안에 오신 주님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면서 성체의 신비를 매일의 생활 안에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 영성체 후 기도 : 이 영성체 후 기도는 그 날 미사와 특히 내 마음 안에 오신 주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로써, 내가 받은 은혜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때이다.
◐ 사제의 강복 : 옛날에는 주교님들이 강복을 주셨는데, 그 때에는 퇴장하시면서 아무 말도 없이 십자표로만 강복을 주셨다. 그 후 십자표와 함께 강복의 말을 삽입하였다. 그리고 사제들이 미사 후에 강복을 주게 된 것은 9세기부터이다. 이러한 강복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축복을 주신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특별한 날에는 '장엄축복'이나 '백성을 위한 기도'로 축복을 더욱 성대하게 할 수 있다.
◐ 마지막 인사와 파견 : 미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사는 그분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파견됨을 명심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미사 때에 받은 은혜와 결심한 것을 실천해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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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0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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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죄(원죄)
1) 아담의 죄
창세 3,1-24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계명중 하나를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깨뜨리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이었다. 이 불순종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과 악을 아시는 하느님과 같아 지기를"(창세3,5) 원한 데서 출발한다. 즉 자기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기를 원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척도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종속되기를 거부함으로서 인간을 하느님께 결속시키는 끈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상대로 비슷하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두시지 않고 당신 생명까지 내놓으시는 분인데(참조 지혜2,23)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은 무한히 자애로우신 하느님께 대하여 의혹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께서 당신 특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신 술책이 아닌가 하고 또 그 계명에 수반되는 경고는 거짓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이제 인간은 자기의 경쟁 상대로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된다. 즉, 처음에는 하느님을 무한히 완전한 분으로서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무사 무욕하여 베푸시기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이제는 피조물한테서 자신을 방어하는데 급급하고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하느님으로 여기게 된다. 이렇게 죄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자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적 부패보다 더 근본적인 타락은 없는 것이다.
2)죄의 결과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양심의 가책은 그 한 예이다. 즉, 죄를 짓기 전에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던 아담과 하와는 잘못에 따르는 벌을 받기도 전에 벌써 하느님 야훼를 피하여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게 되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편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여 하느님을 기피한다. 그러니까 낙원에서의 추방도 인간의 그러한 마음을 확인해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추방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경고가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생명의 나무에 가까이 갈수 없게 됐고(창세 3,22) 결국 결정적 죽음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추방됨으로서 이때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았으며 또한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게 됐다. 그 사실은 이미 낙원에서 살았던 최초의 남녀 사이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하자마자 아담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반려자로 주신 자기 여인을 고발하면서 연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이 분열은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며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최초의 죄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을 안겨다 주는 요인을 제시하고서야 끝을 맺는다. 물론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독립하려다가 도리어 벌로 추락된 노예 상태는 본래 언제까지나 계속될 결정적인 것이었다. 또 일단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는 그것은 계속 불어 날 뿐이었고 죄가 증가됨에 따라 생명은 감소의 길을 걸었으며 마침내는 대홍수로 인해서 단절되게 되기까지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인간측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을 회복하는 화해는 하느님 편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최초의 죄의 이야기 안에는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몸소 이 화해를 실현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다(창세3,15). 인간이 경멸한 하느님의 선하심이 끝내는 승리하게 됨을, 즉 창세기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가 움트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2. 이스라엘의 죄
1) 금송아지의 경배
예전에 이스라엘은 자기편의 아무 공로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지상의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되고 특별한 사랑을 받아 하느님의 장자라는 특전을 입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의 노예 생활과 하느님을 섬길 수 없는 죄의 땅에서 해방 시키기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 구원 사건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안다. 이러한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에게 "증거의 판"(출애31,18)을 주심으로서 풀릴 수 없는 관계를 맺으시는 바로 그 순간에 이스라엘은 아론에게 "우리 선두에 서서 거닐 신을 만들어 주시오"(출애 32,1)하고 청하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표징으로 당신의 성실하심을 증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야훼께서 너무 멀리 계시고 보이지 않는 분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야훼께 대한 참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있고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 그 진노를 가라 앉힐 수 있는 신, 달리 말해서 그들이 "하느님과 함께 걷는" 대신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어 주기를 원하는 자기 중심적인 하느님을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최초의 죄는 순명의 거부였음을 보았다. 그것은 좀더 깊이 고찰해 볼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자신을 위탁하기를 거부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와 더불어 바알을 예배하려는 유혹, 즉 우상숭배에 빠질 때 현저하게 드러난다.
금송아지의 이야기에 이어서 신명기 9장 22절에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하나의 죄를 들고 있다. 그것은 탐욕의 죄이다. 이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기적적으로 내려주신 만나보다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더 좋아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민수11,4-6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위탁하기를 거절하고 하느님께서 광야의 영적 체험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신명8,3참조) 거절한다. 그들의 탐욕은 충족되지만 아담에게서와 같이 하느님의 길을 그들의 길로 대치할 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를 경험한다(민수11,33).
2)예언자들이 고발하는 죄
예전에 이스라엘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예언자"라고 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죄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의 실현을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며 유일한 장애물이라고 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죄는 매우 구체적인 실체로 사람들이 야훼를 저버림에 따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들은 폭력, 약탈, 부정한 재판, 허위, 간통, 위증, 살인, 폭리, 권리 침해 등이며 한마디로 사회적 질서의 파괴라고 보았다.
이사야라는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을 갈라 놓는'(이사59,2) 이 죄악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죄의 고백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실상 우리의 악행들이 우리와 함께 있사오며, 우리가 우리의 잘못들 그것들을 잘 아옵나니, 곧 악을 행하고 야훼를 불신하며, 우리 하느님을 피해 달아나고, 압박과 반항에 관한 말을 하며, 마음으로부터 거짓말들을 지껄였다. 법규는 뒤로 제쳐 놓인바 되고 의리는 멀리 서있을 뿐이고 진실함이 대중 앞에서 짓밟혔고 정직함이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사 59,13-14).
그리고 예언자는 하느님을 떠나서 건방지게 스스로 서고자 하는 자는 타인, 특히 가난한 자와 약자를 짓누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는 자"(시편 52,9)는 "언제나 악한 뜻을 품고"(시편52,4) 의인은 "언제까지나 주님의 자비에 의탁한다"(시편 52.10)고 보았다. 사무엘 하권 12장에 나오는 "다윗"의 간통죄가 이미 암시하는 것도 역시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삽화는 이스라엘의 죄 관념을 명확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인간의 죄는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까지 상해 드린다는 것이다.
3) 하느님께 대한 모욕으로서의 죄
죄가 직접 하느님 자신을 해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해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해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이했을 때(2사무 12,9-10) 단지 한 인간을 상해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권리의 보호자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갈라 놓음으로서 그분의 사랑의 계획을 헝클어 놓는다는 의미에서도 하느님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가 점점 더 계시됨에 따라 인간의 죄가 어떻게 하느님께 "모욕"을 끼치게 되는지 그 참뜻이 더 명백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죄는 자애 깊은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배은망덕한 행위(이사 64,7)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어떤 인격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죄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이 보답되지 못함으로 고통당하시는 것, 즉 그분 사랑이 상처를 입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으며 그 참뜻은 신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계시되게 된다.
4)죄의 치유
예언자들이 죄를 고발하고 그 중대성을 분명히 밝힌 것은 백성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회개시키기 위해서 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충실하여도 항상 성실하시고 인간이 당신 사랑을 거절하여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는 한 당신께 돌아오기를 계속 독촉하신다는 것이다.
죄는 사랑의 거부이기 때문에 죄가 제거되거나 용서되는 정도는 인간이 다시 사랑할 것을 어느 정도 수락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기를 요구하지 않는 "용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부정하면서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자체가 인간의 회심을 강하게 요청한다.
그러므로 인간측에 첫째로 요구되는 조건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독립되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서 죄의 근원적 요인을 단절하는 것이다.
3. 예수님과 죄인들
복음서를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이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가 결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변혁 없이 순전히 하느님의 일방적 행위로 이루어진다고는 가르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도 옛 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과 같이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내맡기도록 정신의 철저한 쇄신 즉, 회개를 가르치신다.
그 대신 비유에서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나 빛을 거부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분 역시 속수무책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예언자들처럼 가시는 곳마다 죄를 고발하신다. 특히 계명을 규정대로 잘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렇게 하신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의 내부에 자리잡고서 거기에서부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가지의 죄가 나와 삶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로움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는 결국 사랑의 계명으로 귀착된다. 제자들은 스승의 행동을 바라봄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의 거부인 죄가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된다. 제자들은 특히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예언자들의 교훈과 비슷한 점이 많은 '탕자의 비유(루가15,11-32)'는 신약성서 중의 어떤 비유보다도 죄가 왜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며 용서가 죄인 자신의 회심없이 일방적으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당치 않는 것인지를 말해 준다.
이 복음 내용을 통해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불순명 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했던 것은 아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아 자기 곁을 떠나 갔다는 사실과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식을 사랑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집에 있지 않음으로서 아버지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하여는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서 다시 아들로 대우 받기를 수락하는 길 밖에 없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기쁨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회개 없이는 이 비유에서 용서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용서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용서의 힘은 실제로 아들이 되돌아가는 행위를 통해서만 효력이 나게 된다.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이러한 태도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보다도 행동으로서 잘 계시하신다.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하느님의 자비심을 이해 못하고 이를 곡해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도 구애되시지 않고 비유의 아버지와 같이 사랑과 보살핌으로 죄인들을 받아들이신다.
4. 자비로우신 하느님
죄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척도의 기준을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또한 아담과 하와가 서로 잘못을 떠 넘김으로서 책임을 회피했듯이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같이 죄는 사회적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특히 인격적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우리들이 죄에 대해 보다 효과적으로 회개하기 위해서 이며 하느님과의 은총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다. 더욱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충실하여도 항상 성실하시고 인간이 당신 사랑을 거절하여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탕자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언제든지 되돌아 오기만 하면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빠졌더라도 이에 절망과 실망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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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