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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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하느님의 모습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 성서의 창세기 제 1장 26절을 살펴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 짐승과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들짐승들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라고 적혀 있다.
- 닮았다고 하는 것은 똑 같다는 말과는 구별이 된다. 닮았다는 말이지 결코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느님이 될 수 없고 그분과 비슷하게 되려고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누굴 닮았다고 하는 것은 누구와 비슷하다는 것이지 그 사람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얼굴을 고치고 성격을 개조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 따라서 하느님을 닮은 인간에서 '닮다'라는 표현은 모습이라는 말에 내포된 동등함이라는 개념을 배제시키기 위하여 덧붙여진 것이다. 또한 우리 모습, 곧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이란 동물이 갖추지 못한 인간의 지성, 의지,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하느님께 인간을 다른 피조물의 관리자로 내세우시기 전에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고 이 관계를 통하여 인간에게 마땅한 자격과 권위가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 과연 하느님의 모습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 2. 인간 창조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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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먹을 양식이나 물이나 땅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먼저 인간이 필요한 세상을 만드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필요한 여러가지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만드셨다.
-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성서가 하느님께 창조받은 세계가 무엇이며 인간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둘 다 인간 창조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진흙을 빚는 옹기장이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공통된 표현법이며 이 표현법은 창조 행위를 묘사하는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귀속되어 있음과 인간의 취약성을 강조하는데 의도 가 있다.
- 여기서 잠깐 인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 하느님 ⇒ 사람 ⇒ 짐승 ⇒ 고기와 새 ⇒ 해, 달, 별 ⇒ 땅(풀과 나무) ⇒ 창공(하늘과 물) ⇒ 빛(낮과 밤) 등을 피라밋식으로 그려놓고 볼 때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지능이 높은 고등 동물이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맨 나중에 만들어졌고 인간 위에는 하느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약육강식의 피라밋과 같다.
- 하느님은 인간을 다스리고 인간은 동물을 다스리고 동물은 식물을 다스리며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땅을 다스리고 땅은 물을 다스리고 있다. 바로 자기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어있는데, 결국 인간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초대된 것이다. 이는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인간 중심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고 보존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고 있다. 이 초대를 무시하고 거절하면 인류는 동료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태계를 파괴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직권남용인 것이다.
-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먹을 양식이나 물이나 땅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먼저 인간이 필요한 세상을 만드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필요한 여러가지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만드셨다.
- 3.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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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 많은 말들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만물의 영장이다...
-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예를 들면 영혼, 자유의지, 진, 선,미, 지성, 사유, 등 많은 것들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특별한 것 몇 가지만을 살펴 보자.
- 인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 많은 말들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만물의 영장이다...
- 1) 영혼의 존재
-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영혼을 간직하고 있다. 영혼이란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으신 것이다. 창세기 1장2절에는 태초에 아무 것도 없었고 하느님의 기운 (영)이 휘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는 그냥 "있어라" 하셨지 당신이 빚으시고 만드시고 입김을 불고 하시지 않으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는 그냥 "있어라" 하셨지 당신이 빚으시고 만드시고 입김을 불고 하시지 않으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2) 자유의지의 선용
- 인간만이 선과 악을 행할 수가 있다. 여타의 다른 피조물들은 선이나 악을 행할 수가 없다. 호랑이가 다른 동물을 안잡아 먹는다고 해서 선이 되거나 다른 동물을 많이 죽인다고 해서 악이 되거나 하느님 대전에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다.
- 따라서 동물들은 아름다움이나 선을 추구할 수가 없고 그냥 본능대로 행동할 따름이다. 또한 물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를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이 정해주신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이다.
- 따라서 동물들은 아름다움이나 선을 추구할 수가 없고 그냥 본능대로 행동할 따름이다. 또한 물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를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이 정해주신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이다.
- 3) 진, 선, 미의 추구
-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인간만이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되고 바른 것을 추구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여 선을 행할 줄 안다. 살아 움직이는 것 중에서 인간만이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굶어 죽을 수가 있다고 한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강아지라 할지라도 먹이를 앞에 두고 굶어죽을 수는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고귀한 힘인 것이다.
- 4) 인간의 이성
- 인간만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술에 만취가 되어 본능에 따라 행동할 때 이성을 잃었다고 말한다.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이성이란 이치에 따라 사리를 분별하는 성품인데 인간만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섭리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능대로 먹고 마시고 싸우고 제멋대로 살아간다면 이것은 인간의 근본 이치를 망각하는 것으로써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 5) 봉사
-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희랍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 오직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을 수가 있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안다는 것이다.
- 동물들의 세계를 사회라 하지 않고 무리 또는 군이라고 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해서 질서가 잡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자인 호랑이의 우두머리도 힘이 없으면 그 무리에서 쫓겨난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읽어 봤으면 허준의 스승이 허준을 위해, 아니 인간의 의술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위 등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허준이 그 모습을 보며 인간은 대단한 존재라고 감탄을 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볼 수가 있다.
- 실로 인간만이 위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결코 죽음을 좋아하지 않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며 하찮은 벌레일지라도 위험이 닥치면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볼수 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 죽음을 추구할 줄 알고 삶을 버릴 줄 안다.
- 동물들의 세계를 사회라 하지 않고 무리 또는 군이라고 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해서 질서가 잡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자인 호랑이의 우두머리도 힘이 없으면 그 무리에서 쫓겨난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읽어 봤으면 허준의 스승이 허준을 위해, 아니 인간의 의술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위 등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허준이 그 모습을 보며 인간은 대단한 존재라고 감탄을 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볼 수가 있다.
- 6) 인간의 양심
- 인간의 속성 중에서 특이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의 양심이다. 양심이란 사물의 선악을 구별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취하려고 하는 도덕적 판단으로서, 특히 자기 행위에 대하여 품는 선악에 관한 윤리 의식이다. 이러한 양심은 동물이나 여타의 피조물에는 없다. 이 양심은 인간을 더 아름답게 하고 영혼을 살찌우게 하며 인간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 4.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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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1장 26절에서부터 31절까지에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은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모든 이성과 지혜와 의지 등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의 과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모든 피조물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어떤 형태로든 발전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 바로 발전이 없다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거나 죽은 것일 것이다.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의 활동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조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공심판을 나타내며 종말을 뜻한다. 따라서 종말이 올 때 까지 인간에게 맡겨진 것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되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개발하고 발전시키라는 것이지 그것을 파괴하고 멸종시키고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로 땅을 지배하라고 하심은 이 지배가 창조적이어야 하지 수탈과 파괴로 자행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력은 자유로이 그러나 책임있게 행사되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앞에서 세계에 대하여 져야 할 그의 책임을 필연적으로 포괄한다. 오늘의 문제는 인간의 이 권력을 자연을 위해서 어떻게 하느님 앞에 책임있게 사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을 질서있고 조화있게 가꾸며 멋있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생명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창세기 1장 26절에서부터 31절까지에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은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모든 이성과 지혜와 의지 등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의 과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모든 피조물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어떤 형태로든 발전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 바로 발전이 없다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거나 죽은 것일 것이다.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의 활동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조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공심판을 나타내며 종말을 뜻한다. 따라서 종말이 올 때 까지 인간에게 맡겨진 것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되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개발하고 발전시키라는 것이지 그것을 파괴하고 멸종시키고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로 땅을 지배하라고 하심은 이 지배가 창조적이어야 하지 수탈과 파괴로 자행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력은 자유로이 그러나 책임있게 행사되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앞에서 세계에 대하여 져야 할 그의 책임을 필연적으로 포괄한다. 오늘의 문제는 인간의 이 권력을 자연을 위해서 어떻게 하느님 앞에 책임있게 사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을 질서있고 조화있게 가꾸며 멋있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생명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5. 인간 활동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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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에덴 동산을 만드셨으며, 에덴 동산을 돌보게 하셨다.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의 완성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아담은 에덴 동산을 돌보며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들짐승과 온갖 날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 성서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이름을 받는 존재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 존재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담은 모든 짐승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짐승 하나하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짐승을 다스린다는 것은 노동의 행위로서 노동의 신성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승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취시키는데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사목헌장 34항)라고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에 언급된 것처럼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 따라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여긴다고 해서 인간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노동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이 없을 때 그것은 아주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을 통해서 다른 인간에게 봉사할 수가 있고 노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완성시키며 이 사회와 세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동은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공경하는 것이 될 것이고 먼 훗날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이 지상에서 행한 모든 노동의 대가를 받을 것이다.
-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에덴 동산을 만드셨으며, 에덴 동산을 돌보게 하셨다.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의 완성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6.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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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위하여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 우리는 몇 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전세계에는 인종갈등, 종교갈등, 민족분규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전쟁과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전쟁이 없었던 때는 불과 300년밖에 안된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 또한 다국적기업의 횡포 속에 수백만의 인류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어느 나라에는 쌀이 남아 논밭을 갈아엎는가 하면 어느 한쪽은 수백만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류가 충분히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을 주셨음에도 인간이 피조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 분명히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양식을 충분히 주셨고 온갖 짐승과 날짐승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어김으로 인하여 심각한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으며 수많은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은 앞으로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 우선 모든 인간은 똑같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앞에서 인간은 상호 협력하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듯이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야 한다. 똑같은 하느님의 피조물인데 어찌 내 가족 내 국가 내 민족을 구분하여 차별하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똑같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겨 옆의 형제 자매 모든 인간들에게 협력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위하여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 1.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 기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루카 복음은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자주 묘사한다(루카 3,21; 5,16; 9,29; 10,21). 그리스도는 중대한 행동이나 사목 활동을 하기 전에 드러나게 혹은 은밀하게 기도하셨다(루카 4,1).
- 예수님은 사도들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기도의 완전한 모형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는 거만하지 말며 성실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단순하고 솔직한 말로 기도하셨다.
-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와 은총의 생명이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신앙고백인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겸손되이 복종하려는 마음으로(루카 11,9-13) 기도하므로 이기적인 기도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며, 하느님의 계획에 의하면 어떤 은총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만 내려진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기반을 둔 삶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써 표현되어 나온다.
- 예수님은 사도들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기도의 완전한 모형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는 거만하지 말며 성실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단순하고 솔직한 말로 기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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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도의 3가지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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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기도의 효과는 세 가지인데 첫째,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뿐 아니라 다른 혜택을 얻게 하여 마음이 영성적으로 원기를 얻게 한다.
- 둘째, 그리스도의 기도 형태를 따르면 기도는 사람의 삶을 변형하는 효과를 낸다. 우리는 먼저 생활을 정리하고 나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나친 활동을 피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 활동이 기도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자주 몸과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하는 것이다.
- 셋째, 기도는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사람을 새롭게 한다. 태도와 가치관의 복합체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다듬고 가꾸고 훈련해야 한다. 기도의 마지막 결과는 그리스도의 평화, 자신 안에서 느끼는 조화로운 질서와 균형, 하느님 안에서 영원의 눈길로 이 세상을 보는 눈, 자신의 내부와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누는 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점차로 가까와지게 한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기도의 효과는 세 가지인데 첫째,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뿐 아니라 다른 혜택을 얻게 하여 마음이 영성적으로 원기를 얻게 한다.
- 기도에 있어 이와 같은 요소는 서로 겹치는 것이 보통이다. 하느님께 향한 모든 참된 기도는 자연스럽게 흠숭, 감사, 통회가 포함되어 있다.
- 1) 소리기도(염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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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기도는 말로 표현하는 기도를 말한다. 소리기도는 지정된 기도문이나 자신의 말로 할 수도 있고, 큰 소리를 내거나 소리 없이 바쳐지기도 한다. 소리기도는 기쁠 때 또는 위험할 때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으로 소리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시편, 삼종기도, 묵주 기도 등과 같이 지정된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이다. 암기할 기도문은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통회의 기도, 묵주 기도 등이 있다.
스스로 하는 기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기도의 일종이다. 자발적인 기도는 두 가지 상황에서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할 때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예배의 응답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크나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저절로 하느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상당히 긴 기간 동안을, 특히 어른이 된 후에는 감정상태가 고조된 것도 아니고 침체된 것도 아닌 담담한 시기가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도 기도해야 한다. 어떤 열성이 없어도 계속적으로 간단없이 하느님께 신뢰하면서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
- 소리기도는 말로 표현하는 기도를 말한다. 소리기도는 지정된 기도문이나 자신의 말로 할 수도 있고, 큰 소리를 내거나 소리 없이 바쳐지기도 한다. 소리기도는 기쁠 때 또는 위험할 때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으로 소리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시편, 삼종기도, 묵주 기도 등과 같이 지정된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이다. 암기할 기도문은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통회의 기도, 묵주 기도 등이 있다.
- 2) 마음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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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기도의 특성은 마음 속으로 깊이 하는 것이다. 이때 지능과 의지는 하느님에게 온전히 향해져 있다. 마음기도는 하느님께 더 일치하게 한다. 일정한 시간을 이 마음기도에만 바치면서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음식 만들기나 운전 등 무엇을 하면서 내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다. 마음기도는 영성생활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성덕은 하느님의 정신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 이래 영성저자들은 마음기도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그 3단계를 묵상, 애정기도, 관상이라고 부른다. 기도생활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틀에 박힌 묵상에서 좀더 단순하고 직접적 관상에로 진전한다.- ①묵상(默想)
묵상은 사색적인 기도이며 하느님과 성인들과의 일치를 이루며 어떤 결심에 이르게 한다. 교회의 초기 교부들과 수도자들은 지정된 시간에 영적 서적이나 성서를 읽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였다. 이것이 묵상의 최초 형식 중에 하나이고, 가장 단순한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묵상 방법은 준비, 마음기도, 결론에 이르는 세 요소를 지닌다. 묵상의 먼 준비는 묵상자의 생활 전체이다. 가까운 준비는 조용한 곳에서 성서나 다른 종교서적의 일정한 부분을 읽고, 자신을 하느님의 현존 앞에 두고, 자신이 묵상을 잘 하도록 글이나 행동으로 청한다. 묵상의 주요 부분은 주제에 관한 성실한 고찰이다. 묵상기도는 기억, 상상, 이해, 애정 등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려고 한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속 신비와 그 메시지에서 영성적 성장을 위한 기초를 세운다. 묵상으로 더 풍요로운 신앙의 신비에 이르고, 정신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마태 22,37), 마음으로도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할 동기를 찾으려고 한다. 묵상을 끝맺을 때 하느님, 성모님, 어느 특정 성인과 친숙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결심은 자신이 더 열렬히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깊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②애정기도(愛情祈禱)
마음기도 중에 좀더 진보된 형식을 '애정기도'라 한다. 이 기도에서는 분석을 위한 사색의 부분이 별로 없다.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하느님 안에 이미 든든하게 뿌리박고 있어 하느님께로 빠르고 쉽게 들어간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에 관하여 이미 많은 것을 배웠으나 더 깊은 지식과 사랑을 갈망한다. 물론 애정적 요소는 초보자의 기도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단순하고 깊은 애정기도는 기도자가 상당히 진보하였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③관상(觀相)
마음기도의 최고 단계는 관상이나, 관상 자체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관상은 성실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에게 현세에서 내려지는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최고 단계에 이른 관상기도는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함. 이것이 천국의 행복한 상태임)에 도달하기 전에 가질 수 있는 하느님과의 가장 가까운 관계에까지 사람을 인도한다. 관상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풍요한 체험을 주고, 커다란 기쁨과 평화도 가져 온다. 진정한 관상기도일 때 그 기도는 생활 전체가 하느님께만 온전히 바쳐진 것으로 나타난다.
- 마음기도의 특성은 마음 속으로 깊이 하는 것이다. 이때 지능과 의지는 하느님에게 온전히 향해져 있다. 마음기도는 하느님께 더 일치하게 한다. 일정한 시간을 이 마음기도에만 바치면서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음식 만들기나 운전 등 무엇을 하면서 내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다. 마음기도는 영성생활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성덕은 하느님의 정신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 3) 합동기도(合同祈禱)
합동기도는 실제로는 하느님께 드려지는 개인 소리기도인데,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큰 소리로 드려질 뿐이다. 합동기도는 다른 사람과 같은 자리에서 바치는 것이므로 개인기도와는 약간 다르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도에서 보여진 신앙의 증언과 투신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합동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찬미와 관상생활로의 복귀,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자 하는 소망,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자세, 성서를 정신차려 읽고, 관대한 형제애, 교회를 위한 봉사에 공헌하려는 의지를 증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효과를 간직하자면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 기도의 정의(定義)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기도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돌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감사하며, 그분에게 은혜나 용서를 청한다.
현대에 넓은 의미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정의 내린다. 기도는 대화이며, 하느님이 먼저 시작하시어 이미 첫 마디를 발표하셨다. 즉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미사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가톨릭 전통은 기도의 기반으로서 성서를 읽을 것을 적극 권장하며, 기도와 관상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 하였다.
4. 기도의 4가지 종류
목표나 이유에 따라 기도는 네 종류가 있다.
흠숭 기도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절대적 의존성을,
감사 기도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청원 기도는 무엇을 위한 요청을,
통회 기도는 죄에 대한 통회를 나타낸다.
5. 무엇을 청할 것인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무엇을 원할 때에만 하느님께 나아가 청하고서 그것을 즉시 얻지 못하면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기도를 중단한다. 이것은 분명히 비그리스도교적인 태도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신다(루카 11,13). 그러나 우리는 가끔 눈 앞에 당장 보이는 이익에 사로잡히거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로운 것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타당하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나 청원기도의 대상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 정신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 나라의 오심,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는 것,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한 은총을 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체적 물건이나 재산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면 기도로써 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해로운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 즉 자기가 평생에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 이웃을 위하여도 기도해야 한다.
6. 참된 기도를 위한 기도자의 자질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몇 가지 자질이 필요한데 그 중에는 정신 집중, 열심, 신뢰, 인내가 있다. 열심한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뜻하지 않은 분심이 인간의 약점 때문에 일어나도 이런 분심은 기도의 가치를 파손하지 않는다. 기도는 정신의 활동 그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의 의지를 굽히는 것이다. 열성적 행동에 평화와 즐거움이 따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기도하기가 어려울 때라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하느님께 뜻을 굽힐 수 있다. 주님은 신앙에 기초한 굳은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1,25).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이다(야고 1,6).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다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힘을 잃어서는 안된다(루카 18,1).
7. 기도의 대상
그리스도인은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 기도한다. 삼위 모두에게나 삼위 중 한분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다(요한 14,14). 우리의 기도는 최종적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고, 성모와 천사와 천상 성인을 향한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도록 청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에게 절대적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를 드린다. 성모와 성인에게는 다른 종류의 공경을 드리면서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그들에게 청한다(교회헌장 67).
8. 개인기도
주님은 개인기도를 권장하셨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 6,6).
개인기도를 위한 특별한 규칙은 없다. 장소나 자세는 자유롭게 기도에 적합하도록 한다. 그리스도 교회의 관습은 아침기도, 저녁기도, 식사 기도를 상당히 장려하며, 위험과 유혹을 당할 때에도 기도해야 한다고 권한다.
신앙인으로 살아가자면 개인기도라는 밑바탕이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개인기도는 전례기도를 위한 준비에도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개인기도를 잘 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는 주일미사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9. 기도 습관의 교육
부모들이 기도를 잘 배우도록 자기 자녀들을 배려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기도에 관한 교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될 때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 자연스럽게 기도할 것이다. 아침 저녁과 식사 때에 기도하는 습관과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어린이들도 따라서 하도록 해야 한다.
-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는 라틴어로 Religio, 영어로 Religion이라고 해서 사람이 초인간적인 위력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신뢰의 정을 느끼며 희생을 바치고 기원,예배하며 나아가서는 흔히 제사의식을 행하고 의무관념에서 복종, 종사하는 생활을 말한다.
그렇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정의만 가지고는 종교라는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지금까지 나온 정의가 불충분하다는 것보다는 종교라는 현상이 그만큼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종교를 정의하고 종교의 기원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간략하게 여러 종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 1. 종교의 정의
- 1. 종교의 정의
- 오늘날 종교를 상식적 수준에서 정의할 때, '신과 인간과의 관계'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유신론적 관념을 중심으로 종교를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세계의 수많은 종교 중에는 이러한 종교적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 것도 있다.
불교를 위시하여 인도의 자이나교 또는 원시적인 종교형태에서 볼 수 있는 초자연적인 우주적 능력이나 정령을 믿는 애니미즘과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종교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고 초자연적인 힘과 인간과의 관계 혹은 초인간적인 원리와 인간과의 관계를 말한다.
어떠한 형태의 종교이든지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인간 이상의 어떤 실재와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의 관념이 중심이 되면 종교적 교의는 신의 계시로서 인간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며, 초자연적인 관념이 중심개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와 같이 어떤 우주적인 원리의 개념이 중심이 되는 종교에서는 그에 대한 신비적인 체험에 의해서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가르침으로 나타난다. - 이러한 종교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고 초자연적인 힘과 인간과의 관계 혹은 초인간적인 원리와 인간과의 관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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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종교의 기원
- 2. 종교의 기원
- 인간에 관해 여러 가지의 정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기서 다루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라는 것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에 있어서 종교는 보편적인 인간의 활동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종교는 인간 사회에서나 인간 경험 속에 두루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종교가 출현한 것은 십만년 전이라고 한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접하면서 자기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신적 대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자연의 제현상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의식을 행해왔다. 이러한 종교 행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종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현재 여러 가지 설이 나와 있다.그 중에서 몇 가지를 들어보자.
우선 공포감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미지의 세계에서 느끼는 두려움에서 자기를 보존하려는 동기에서 종교가 생겼다는 것이다. 소원성취라는 것도 있다. 인간이 무한한 욕구를 가지나 항상 방해를 받으므로 종교를 통해 욕구를 달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제계급이 창안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따르면 사제계급이 자기들의 지위와 세력을 보존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지고한 신을 신앙함으로써 종교가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고 마술이 최초의 종교형식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또 하나의 유력한 설은 토테미즘이다. 토템이란 원시인과 친밀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식물이나 동물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물활론적 기원설이 있다. 이것은 주위의 모든 사물을 인간의 생명과 같이 다 살아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학설들은 모두 다 나름의 근거를 대고 있다. 그러나 종교의 정의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이 종교의 기원이다'라고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학설은 아직 없다.
그러므로 역시 마찬가지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종교의 기원을 살펴볼 수밖에 없겠다.- 종교의 기원은 인간의 조건 또는 상황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은 양면성을 지닌다.
인간을 가벼이 표현한 것 중에 '울고 웃는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의 불완전성, 결함, 좌절과 실망 등 어두운 면과 높은 완성을 향하여 쉼없이 내닫는 의지와 희망으로 인간의 불가능을 극복해 가는 밝은 면이라는 양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지닌 이 이중성이야말로 인간을 종교로 이끄는 근본적 동기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를 구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이 지닌 현실적 비참성을 벗어나 삶의 궁극적 목적과 목표를 향해가는 길, 그 실존적 순례가 종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도의 신학자인 파니카가 '종교간의 대화'라는 책에서 지적하는 대로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 인간이 지금 여기에서 처해 있는 상태에 대한 이해, 인간이 피안과 미래에서 도달할 목표와 궁극적 상태에 대한 여러 개념들 및 전자에서 후자로 옮아가기 위한 수단이 그것이다.
- 종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현재 여러 가지 설이 나와 있다.그 중에서 몇 가지를 들어보자.
- 1) 인간의 상황에 대한 이해
- 이는 인간에 대한 상황 즉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는가 하는 특수한 견해라고 부를 수 있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관이다.
- 우리는 보통 존재의 네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들어 말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이 세상의 일부로서,그러나 어떤 자유와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 우선 인간의 공동생활, 현세생활, 육체생활 및 정신생활이 그것이다. 인간의 사랑과 행복, 보람과 자부심 및 영광 등이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덮어버릴 만한 괴로움과 비참한 불행도 여기에서 야기된다.
- 종교는 인간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원죄나 일체개고라는 말은 인간 실존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자기애와 갈망이 번뇌를 낳으며 이것이 인간 불행의 원인임을 말해준다. 이것이 인간의 상황이다. 인간은 비록 이런 불행 속에 살아가지만 그 현실적 상황에만 머물려 하지 않고 그가 마땅히 존재해야 할 바나 마땅히 존재할 수 있는 상태에로 나가려 한다. 인간 세상의 무상을 넘어 영원한 것을 바라는 것이다.
- 우리는 보통 존재의 네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들어 말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이 세상의 일부로서,그러나 어떤 자유와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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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간이 도달할 궁극적 상태
- 두번째 요소는 인간이 도달할 목표 또는 궁극적 종착점을 가진다는 인식이다. 인간이 현재와 같은 불행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거나 등을 돌린 탓이다. 즉 무지나 타락에 빠져 있어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성취할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인식 하에 완성, 구원을 갈망하게 되고 자신의 변화를 시도한다.
- 앞에서 종교를 신과 인간과의 관계라고 정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도달할 궁극적 목표는 신 - 인격적이든지 비인격적이든지 간에 -이며 이 실재와 일치할 때 인간은 완성에 이르게 된다.
- 그러므로 종교란 현상을 그대로 유지해 보려는 태도에 저항함으로써 현상을 끝맺으려는 역동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앞에서 종교를 신과 인간과의 관계라고 정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도달할 궁극적 목표는 신 - 인격적이든지 비인격적이든지 간에 -이며 이 실재와 일치할 때 인간은 완성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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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현상에서 궁극적 상태에 이르기 위한 수단
- 인간은 이렇게 미완성 내지 미성취의 현실에서 완성을 향해가는 존재 즉 과정적 존재이며 도상의 순례자이다. 현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부정적 상황에서 벗어나 궁극적 종착점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각 종교마다 독특한 방법을 낳게 했다. 신적 실재를 향한 기도와 종교 창시자의 말씀이 담긴 경전의 독서 및 가르침의 실천, 동양의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수행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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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세계 4대 종교
- 1) 그리스도교
- 3. 세계 4대 종교
- 그리스도교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종교로서, 즉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인간의 주님이시며 구원자 완성자'라는 믿음을 그 신앙의 기초이자 중심 진리로 믿으며 생활하는 종교를 말한다.
- 그리스도교는 역사종교이며 하느님에 의해서 세워진 종교이다.
-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고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전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하느님(성부)께서 선택하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나자렛이라는 곳에서 30여년을 사시고 유대지방(중동지방)에서 3년동안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신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었다(나자렛 예수).
- 당시 예수가 속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하느님(야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유대교).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다른 민족들의 신들과는 달리 유일하시고 살아 계신 분으로서, 전능하시고 절대적인 능력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리고 보살피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이셨다(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대해서는 구약성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역시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태어나셔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만을 이루려고 노력하였고, 또 실제로 그 삶을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신약성서에 잘 나와 있다.
- 예수님은 구약의 하느님께서, 당신을 인간에게 가장 온전이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육화의 신비), 세상이 기다리던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참 인간이시면서 참 하느님이신 분이다.
-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들을 선정 하시고, 이들에게 당신의 삶과 죽음 부활 그리고 모든 권능을 넘겨 주시고 보존해 주심으로써 이 세상에 세우신 종교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힘으로 하느님을 깨닫고, 하느님이 주신 양심의 법도를 따라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된 '자연종교(自然宗敎)'와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을 가르치시고 깨우치시며 당신이 직접 세우신 계시종교(啓示宗敎)'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세계의 모든 종교 중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세우신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교 밖에는 없다.
- 그리스도교는 역사종교이며 하느님에 의해서 세워진 종교이다.
- 2) 불교
- 불교에 의하면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이다. 생로병사가 고통이며 증오하는 사람과의 만남의 고통이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이 고통이며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인 것이다. 붓다는 이 고통이 감정과 생의 욕망에서 온다고 보았다. 이런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세상의 고통스럽고 무상한 사물들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길을 붓다는 제시했다. 이것이 일체의 고통이 없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열반에 이르는 팔정도(八正道)는 실천적인 방법으로 자력구원의 길을 보여준다. 불교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 3) 이슬람교
- 서기 600년경 마호메트는 어떤 동굴에서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받은 계시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계시를 결정적으로 완성하는 '예언자들의 봉인'이라고 믿었다. 신은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단일하며 전능하다는 것이 마호메트가 가르친 교리의 핵심이다. 그가 계시를 받아 기록했다는 '코란'은 글자 그대로 신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간주되는 회교도의 경전이다.
- 4) 유교
- 이는 공자의 사상을 존중하는 교이다. 발생은 고대 중국에서부터인데 중국과 동아시아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공자는 고래의 전통을 이어받고 자기 자신의 사색을 가하여 조상숭배, 극기, 인의 등 인생의 길을 가르쳤다. 그의 본지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한 후에 나아가서 남을 지도하는 데 있다. 따라서 가장 윤리적이며 한편 하늘(天)을 숭배하는 점에 있어서 도덕적 종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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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종교는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
- 4. 종교는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
- 우리는 앞에서 종교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라고 불릴 만큼 종교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지닌 현실적 조건 즉 유한성을 넘어서 진실로 인간다운 삶 그리고 영원한 삶을 바라면서 신적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려고 한다.
- 종교란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며 이 진리는 변화하고 무상한 것 속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진리이다라고 가르친다.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신비를 깨우치게 되고 괴로움과 불행을 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 한국은 종교 박람회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 대종교라고 불리는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및 유교가 있으며 다수의 민족종교와 신흥종교가 있고 무속계의 종교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한국의 종교는 다분히 혼합주의적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따라 한국인의 종교심성도 인생관은 불교적이고 행동은 그리스도교적이며 인간관계는 유교적이고 운명관은 무교적이라고 한다.
- 이러한 상황 속에 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인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다. 하느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 삶의 길이며 그 삶만이 영원한 삶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로 결심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가르침, 즉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인생관 및 구원관 등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느님에 의해 불리운 자들인 것이다.
- 종교란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며 이 진리는 변화하고 무상한 것 속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진리이다라고 가르친다.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신비를 깨우치게 되고 괴로움과 불행을 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 1. 창조주이신 하느님
1) 질서정연한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
- 창조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아주 간단하게 "처음으로 만듦", "신이 우주 만물을 만듦"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철학대사전에는 창조를 "전혀 새로운 것의 산출을 의미한다. 창조하는 힘은 무한한 힘이므로 마땅히 신에게만 고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이와 같은 창조 행위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은 어떠한 도구나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는 '제작'과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라는 질문을 한다.
- 이럴 때 바로 눈을 들어 자연을 보라. 산에서, 들에서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자연을 통해 작아지는, 미소한 자임을 느끼게 될 때,무한한 신의 섭리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 구름 아래 놓인 아름다운 장관을 보실 때라든지,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서, 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존재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 로마서 1,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 모든 만물, 우주의 창조주는 바로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창조물을 통해 우리가 믿는,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 창조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아주 간단하게 "처음으로 만듦", "신이 우주 만물을 만듦"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철학대사전에는 창조를 "전혀 새로운 것의 산출을 의미한다. 창조하는 힘은 무한한 힘이므로 마땅히 신에게만 고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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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창세기에 의한 천지창조
- 2) 창세기에 의한 천지창조
- 창세기 1,1-2,4절까지는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하느님은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즉, 시간의 창 조를 하시고, 둘째 날에는 창공이 생겨 공간을 형성하셨고, 세째 날에는 아래에 있던 바다가 더욱 밀쳐졌고, 그래서 견고한 땅이 생겼으며, 그 땅 위에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푸른 식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네째 날에는 태양과 달, 별의 창조로 말미암아 시간 안에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것들은 시간, 날, 년의 규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와 창공에 생물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살도록 하셨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바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물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이것을 지배하도록 하셨다.
- 혹 구약성서의 우주관을 보면서 또 창세기의 내용을 보면서 신화적인 표현이 많고, 지금의 우주관과는 다르다고 의혹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저자가 근본적으로 그리는 자연관은 당시 누구든지 알고 있는 상식을 토대로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동원한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사화는 결코 저자가 물리학적으로, 과학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고대의 신화나 고대의 일을 전하려 한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태초에 투영함으로써, 그린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창세기 맨 첫 줄에 나오는 신학적인 진리, 즉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는 진리뿐 저자의 관심은 오로지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찬미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신화적인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구약성서의 세계창조는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 하느님은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즉, 시간의 창 조를 하시고, 둘째 날에는 창공이 생겨 공간을 형성하셨고, 세째 날에는 아래에 있던 바다가 더욱 밀쳐졌고, 그래서 견고한 땅이 생겼으며, 그 땅 위에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푸른 식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네째 날에는 태양과 달, 별의 창조로 말미암아 시간 안에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것들은 시간, 날, 년의 규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와 창공에 생물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살도록 하셨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바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물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이것을 지배하도록 하셨다.
- 3) 천지창조의 목적
- 하느님은 과연 무엇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는가? 그분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 이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이 생겨라" 하시자 ...이 생겨났다. (창세기 1,2)
- 말만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곧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로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1-5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
-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이미 계셨으므로 이 우주만물이 없어도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시고, 스스로 무한이 행복하신 분이고 선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더 이상 소유해야 할 선이 없는데도 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 사도 바울로는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있다" 고(로마 11,36참조) 간단 명료하게 창조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창조의 목적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하느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당신의 지위를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무한하신 하느님이 당신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은 오직 당신 자신의 착하심을 주고 받으실, 즉 통교하실 목적으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외쳤다. 창조의 근거는 바로 이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말만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곧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로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1-5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4) 창조에 관한 신학적 결론
- (1)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무에서 말씀을 통해 창조하셨다. 즉,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영적인 존재, 육적인 존재들이 하느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는 것이다.
- (2)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한 분이시고, 선(善)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통해 만들어진 세상의 창조물 역시 좋은 것이며 선한 것이다.
- (3) 하느님의 창조물 중 가장 으뜸인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고 영혼과 육신을 지닌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 (4) 창조된 세계는 창조 때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돌보시고 계시며 지배하고 있다.
- (2)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한 분이시고, 선(善)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통해 만들어진 세상의 창조물 역시 좋은 것이며 선한 것이다.
- 2. 구원의 하느님
- 1) 구약에 나타난 구원의 하느님
- 구약성서에서 구원의 사상은 옛부터 꾸준히 계속되어온 주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사상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 때문에 더욱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 구약성서의 거의 전부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탈출기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파라오의 치하에서 학정에 시달리는 것을 보신 야훼 하느님은 이를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느님은 모세라는 청년을 보내어 파라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파라오는 모세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다가 하느님으로부터 여러가지 재앙을 받은 다음에야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게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에집트를 빠져나오게 된다.
- 그러나 파라오는 다시 마음이 바뀌어 기마와 병거를 출동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추격을 펼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하나 제대로 숨길 곳 없는 광야에서 모조리 에집트 군사들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 엎친데 덥친 격으로 앞에는 홍해라는 바다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된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지팡이로 홍해바다를 치자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이 뚫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해서 에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고 그후 여러 해를 광야에서 방랑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에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된다.
- 바로 이것이 '출애굽사건'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을 체험한 후 야훼 하느님을 자신들의 하느님으로 받들어 모시게 되었고 그 후에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들은 하느님께 기도하고 청원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최대의 역사적 체험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 번 구원의 역사를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다.
- 노아를 대홍수에서 구원하시고(창세 7장 참조) 야곱의 아들들을 구원하셨고(창세 45,5) 롯의 생명을 구하시기도 하셨다.
-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국가를 이루기 전, 즉 부족국가의 형태로 있을 때에도 위기가 닥치면 위대한 인물들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곤 하였는데 그러한 인물들을 '판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후에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다윗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다.
- 이상의 몇 가지 예만 보더라도 구약은 그 자체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리가 구약의 역사를 읽으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고난을 겪을 때 결코 모른체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 탄원하고 간청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탄원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 구약성서의 거의 전부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탈출기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2) 신약의 구원자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 신약에 와서는 구약에서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계속 이어가심을 알 수 있다.
- 예수께서는 여러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병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신다.
- 그러나 육체적 구원의 한계를 뛰어넘는 더 높은 의미의 구원을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
- 예수께서는 죄 많은 여자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써 구원하시고 (루가 7,48-50) 통회하고 뉘우치는 세리 자캐오의 집안에 구원을 내리신다. 또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심으로써 구원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신다.
- 이처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심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개인적인 치유나 용서가 인류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에서 알아본 예수님의 기적들은 단순히 각 개인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의 구원을 상징하는 예표라는 것과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신약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지닌 분이셨지만 인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라고 한다.
- 우리나라에서 제사는 조상들의 음덕을 기리고 자손들이 잘 되게 해 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우환이나 재난을 예방하려는 뜻도 갖고 있다. 예수님의 희생을 이러한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당신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 그 대가로 인류의 구원을 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의 고사성어중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러나 살신성인은 개인적인 의미가 강한데 비해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셨고 그 결과로 인간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다.
-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되는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의 하느님이 아니고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 로마인등 다른 민족들을 경시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다)까지도 치유해 주신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 예수께서는 여러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병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신다.
- 3) 인간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 신·구약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자로서의 모습은 인간을 극진하게 사랑하시고 인간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간청을 결코 저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이러한 내용을 조금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한다면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시라고 할 수 있다. 신·구약 성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어느 한 곳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뜻을 펼치고 계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되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신약성서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 예수의 탄생과 활동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에 참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작위로 인류를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의로운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세주는 인류를 해방시키고 구원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의로운 자를 뽑으시고 세상의 마지막 날에 그들을 통하여 악한 자를 벌할 심판자로서 드러나신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인류의 현세적인 해방자인 동시에 종말론적 심판자이신다.
-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늘 기도하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며 이웃을 위해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 여기서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기도가 구원의 절대적이고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이렇게 인정받은 사람은 현세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맛볼 뿐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하느님의 나라, 흔히들 말하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이러한 내용을 조금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한다면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시라고 할 수 있다. 신·구약 성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어느 한 곳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뜻을 펼치고 계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되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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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버지이신 하느님
- 1) 사랑과 인자의 아버지 하느님
- 3. 아버지이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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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왜나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또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 신약성서는 여기저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빠(abba,아버지)'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마르14,36;로마 8,15;갈라 4,6 등).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의기도'에서도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세번씩이나 말씀하고 계신다.
- '아빠'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아버지'라는, 어린 아이가 자기 부친을 부를 때의 매우 친근한 호칭이다. 그리고 어른들도 그들의 아버지나 노인에게 존경을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애칭이라고 할 수 있다.
-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처럼 익숙하고 평범한 표현으로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께 존경을 표시하지 않는 태도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기도에서 하느님을 '자애로운 아버지'(abba)로 부르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지니고 있는 그러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유다 민족의 전통속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다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 '왕', '주', '심판자', '변호자' 등으로 하느님을 나타내고 계신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칭호들은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 속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인자하심 속에 포함된다.
- 하느님의 적절한 이름은 아버지이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친밀하게,확신을 가지고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계시다. 이처럼 '아빠'라는 호칭은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마태11,27)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계시를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을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다. 자신이 하느님에게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한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왜나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또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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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통애(痛愛)의 아버지 하느님
- 2) 통애(痛愛)의 아버지 하느님
- 성서의 첫 권인 창세기에는 창조의 이야기 바로 뒤이어 인간의 타락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 숨어있었고 하느님은 동산을 거니시며 그를 찾고 계셨다.
- "아담아,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의 음성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이의 애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인간을 애타게 찾는 하느님이시다. 성서 전편이 사실상 하느님이 인간을 애타게 찾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인간적 비유를 쓰자면 망나니 아들을 애타게 찾는 어버이의 모습이다.
- 예수님께서 루카복음 15,11-32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두고 들려 주신 탕자의 비유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작은 아들이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나 타관으로 가버린 뒤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며 '애달픈' 마음으로 그를 기다린다. 인간을 찾는 하느님의 그리움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쓰라림'으로 비유되어 있다.
- 중국에서는 이러한 사랑과 아픔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통애'가 그것이다. '통애'라는 말은 아기를 꼬옥 끌어 안고 있는 엄마, 아기를 통째로 삼킬듯이 입 맞추는 엄마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력을 갖고 있다. 아기에 대한 엄마의 사랑,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도 크고 진해서 아픔을 느낄 지경이다. 이러한 사랑은 미움이나 노여움으로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엿볼 수 있다. 상대방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 사랑은 통애가 된다.
- 통애는 노여움 때문에 미움이 되거나 미움 때문에 노여움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분노를 쏟는 수단으로 남에게 벌을 가하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 상대방은 온전한 건강을 보존케한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통애을 느낀다. 그 통애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헌신이다.
- 이러한 인간세계의 통애를 맛봄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림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교 복음의 중심 곧 하느님 아버지의 통애의 최고 표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들판을 헤메시는 분이시다(루카15,3- 7). 하느님은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다 뒤지시는 분이시다(루카15). 하느님은 잃어버린 인간, 자신을 더 이상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어둠에 빠져 있는 그런 우리를 애타게 찾으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죄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는 우리를 찾아 당신께로 데려가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 숨어있었고 하느님은 동산을 거니시며 그를 찾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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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시는 아버지 하느님
- 3)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시는 아버지 하느님
- 하느님은 우리의 처지,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게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 그분은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입히시는 것처럼(마태 6,24-34) 그보다 더 소중한 인간을 돌보시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 그분은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고통스러워 울부짖을 때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전능한 팔로 이스라엘을 에집트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셨다. 또한 그분은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항상 도와주시고 구원해 내셨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소외받고 천대받는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을 낫게 하시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을 먹이시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행적을 통해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주신 것이다.
-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아시고 돌보시는"(마태10,30)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나갈 때,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루가12,31)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내려 주신다.
-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알려 주심으로 자발적으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르기를 원하고 계신다.
-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 4)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시고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함께 아파하시며 당신께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기다리고 계신 분이시다.
- "나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거슬러 반항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출애 6-7)라고 선언하신다. 그분은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아낌없이 용서하기 위해 죄인의 회개를 원하신다(에제 18,23).
- 그분은 당신을 모욕해도 그를 새로 세워주시고 부서지고 거만한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그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신다(시편 51,10-14.19;시편 32,1-11참조). 그분은 죄인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죄인을 벌하시다가도 곧 뉘우치시는 분(요엘 2,13)으로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자녀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시다(시편 103,3.8,14).
-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전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을 전하셨다.
- 당신께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죄많은 여인들 보고 용서를 베푸셨으며,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 회개하는 아들을 달려나가 목을 끌어안고 받아들이셨다.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시며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시고(루카15,20) 기쁨에 넘쳐 잔치를 베풀고 춤을 추시는 분이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루카15,7)
- "나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거슬러 반항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출애 6-7)라고 선언하신다. 그분은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아낌없이 용서하기 위해 죄인의 회개를 원하신다(에제 18,23).
- 5) 조건없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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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뻗어 나가고, 거저 주고, 창조하신 사랑일 뿐 아니라, 인자하고 자비로우며 동정하고 구속하는 사랑이다.
-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자기 안에서 자기 밖으로 퍼져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모습에 따라 없는 가운데로부터 창조하시기를 원하시고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을 우리에게 주셨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까닭에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고 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하느님은 먼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아름답고 가치있는 존재가 된 연후에 사랑하겠다는 조건을 붙이지 않으시고, 먼저 하느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당신의 사랑을 온 인류에게 보여주시고자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인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게까지 하시고, 죽기까지 희생하시도록 하셨다. 타락한 인간을 무한한 인자로 용서하시고, 동정하시며, 비참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는 최상의 기쁨이요, 영광이 되시는 것이다.
-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들 뿐만 아니라 원수에게까지 미치는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대의(大意)이며 사랑의 주제이며 사랑의 증명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원수와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사랑에 조건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셨다.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뻗어 나가고, 거저 주고, 창조하신 사랑일 뿐 아니라, 인자하고 자비로우며 동정하고 구속하는 사랑이다.
- 4. 영원하신 하느님
- 1) 하느님은 가장 진실하시다
- 인생은 속음과 속임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인간은 쉴 새없이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우리가 과연 찾아야 할 불변의 진리는 무엇이며 지켜야 할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정말 모든 것이 다 허위요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뿐이라면, 진리 탐구에 전심 전력하는 인간의 피나는 노력은 온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의 진리 탐구가 헛수고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된 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진실한 분이심은 지극히 당연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속였거나 혹은 인간에게 속으셨다는 기사는 한 군데도 없다.하느님은 우리를 속이시거나 인간을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그분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같지 않고 참되다는 것을 수차 강조하고 있다.
- 그러나 인간의 진리 탐구가 헛수고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된 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진실한 분이심은 지극히 당연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속였거나 혹은 인간에게 속으셨다는 기사는 한 군데도 없다.하느님은 우리를 속이시거나 인간을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그분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같지 않고 참되다는 것을 수차 강조하고 있다.
- 2)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
- 인간은 겨우 몇 치 밖에 안되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산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느님은 일정한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여기에 계시면서 바다 건너 외국 땅에도 계시고 하늘 높은 곳에도 계신다. 이것은 사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설명하기도 힘든 일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의 편재(遍在)라 한다.
-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을 피해서 세상 끝까지 (당시는 지구가 평평하여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함) 도망 가려 하나, 결국 하느님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까지 계시기에 구약은 "주의 눈은 태양보다도 훨씬 밝으사 사람들의 모든 길이나 구렁의 깊은 곳에까지도 바라보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그 은밀한 곳까지 통찰하신다"(집회 23,19) 고 기록하고 있다.
- 성경은 이렇듯 하느님이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것만을 말할 뿐 아니라, 더욱 뚜렷이 내게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선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우리 옆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하느님이 어디든지 안 계신 곳 없이 다 계신다고 해서 이 세상에 있는 유형 무형의 만물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드신 분과 만들어진 것들은 결코 동일할 수 없고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시지 하늘이나 땅이 곧 하느님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하느님은 악이 만연되어 있는 이 사회에도 항상 계신다.
- 인간은 겨우 몇 치 밖에 안되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산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느님은 일정한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여기에 계시면서 바다 건너 외국 땅에도 계시고 하늘 높은 곳에도 계신다. 이것은 사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설명하기도 힘든 일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의 편재(遍在)라 한다.
- 3)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다
-
-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이 가끔 하느님이란, 인간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인간 정신이 생각해 낸 가상의 절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이러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으며 고백할 수 있다.
-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이 가끔 하느님이란, 인간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인간 정신이 생각해 낸 가상의 절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이러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으며 고백할 수 있다.
- 4) 하느님은 신령한 분이시다
-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계신다.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지만, 하느님은 육체가 없다. 순수한 영체(靈體)로 계시는 신령한 분이시다. 물론 순수 영체가 어떤 것인지 우리 인간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를 통해서만 어떤 것을 보고 깨닫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이해가 가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신령함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 5) 하느님은 전능한 분이시다
-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임은 예수님에 의해서도 드러나고 그분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갖가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님은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마르 10,46-52참조) 한 마디 말씀으로 문둥병 환자를 깨끗이 고쳐 주시고(마태8,1-4참조),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가 하면 (요한 11,1-16참조), "잠잠하라"는 말씀 한 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멈추게 하시는 분이셨다(마태 4,35-41참조).
- 예수님은 또한 말씀으로도 하느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다.
-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마태19,26).
-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행적을 보든지 세상 만물을 보고 그 지으신 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쉽게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이해할 수 있다.
-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임은 예수님에 의해서도 드러나고 그분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갖가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님은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마르 10,46-52참조) 한 마디 말씀으로 문둥병 환자를 깨끗이 고쳐 주시고(마태8,1-4참조),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가 하면 (요한 11,1-16참조), "잠잠하라"는 말씀 한 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멈추게 하시는 분이셨다(마태 4,35-41참조).
- 6)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토록 인간에게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인간은 아는 데 있어서도 매우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존재해 있기에 그분은 우리처럼 배우거나 깨닫거나 궁리하거나 기억해서 아시는 분이 아니다.
- "야훼,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을 낱낱이 살펴 보신다. 사람들의 마음을 몸소 빚어 주신 분이시라 사람이 하는 일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시편 33, 13.15).
- 이렇듯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이렇듯 하느님의 전지하심은 이상의 성경 말씀으로도 입증된다.
- 그럼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특히 곤란에 부딪쳤을 때에도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것이다.
- "야훼,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을 낱낱이 살펴 보신다. 사람들의 마음을 몸소 빚어 주신 분이시라 사람이 하는 일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시편 33, 13.15).
- 7) 하느님은 무한히 선하시다
- 하느님이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다는 것은 마태오 복음 7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가를 보여 준다.
- 인간은 착하면서도 악의를 품는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전히 선하신 분이시다. 악이란 자신의 부족함에서 생기는 것인데,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모자람이 없이 가장 완전한 분이시므로 그분에게는 악이란 있을 수도 없다.
-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으로서 선 자체이시다.
-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함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렇듯 선 자체이신 하느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니시니 거룩하시기 이를 데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선을 지녀야만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함을 나누어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에 들어오라 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따라 우리 힘대로 우리의 선함을 키워가며 거룩한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 8) 하느님은 공의로우시다
- 공의하다 함은 옳은 것을 옳게 그른 것은 그르게 판단하고 선한 일에는 상급을 베풀고 악한 일에는 벌함을 뜻한다. 하느님이 공의로운 분이라 함은 우리 인간의 행실을 심판하시어 상벌을 주시는 데 있어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억울함을 당할 때가 가끔 있다. 이럴 때 우리의 속까지 다 보시고 아시는 공의로운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다 알고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의 억울한 설움을 언제나 삭혀주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도록 위로해 주신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억울함을 당할 때가 가끔 있다. 이럴 때 우리의 속까지 다 보시고 아시는 공의로운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다 알고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의 억울한 설움을 언제나 삭혀주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도록 위로해 주신다.
- 9) 하느님은 초월적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다
-
-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당신이 만드신 세계 안에 언제나 현존하시지만, 하느님은 이 세상과는 아주 다른 분이시다. 모든 종류의 범신론(汎神論)과 하느님을 이 세상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경향, 그리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세계의 어떤 차원이나 모습으로 보려는 모든 경향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파악하지 못한다.
-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만드신 하느님의 위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에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인간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다.
- 모든 사물이 하느님을 증거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과는 다른 분이시다.
- 하느님은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시고, 그분이 만드신 변화하는 사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하느님은 만물을 초월하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만물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함이 없고 영원한 하느님의 실재는 그 자체가 완전한 것으로서 유한한 실재와는 완전히 구별된다.
- 또한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사야 5,24)이시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어떤 악에도 물들지 않은 자유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과는 달리 죄를 범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강렬한 선성(善性)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한다. 그것은 희망과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뛰어난 존경심이다.
-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당신이 만드신 세계 안에 언제나 현존하시지만, 하느님은 이 세상과는 아주 다른 분이시다. 모든 종류의 범신론(汎神論)과 하느님을 이 세상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경향, 그리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세계의 어떤 차원이나 모습으로 보려는 모든 경향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파악하지 못한다.
- 5.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깊이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몸을 맡기고 있는가?
- 신문에 나온 한 이야기를 읽고 이를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 ★ 어떤 집에서 한밤중에 프로판 가스가 폭발하여 화재가 발생했다. 양친과 두 어린이는 어떻게든 밖으로 달려 나왔으나 혼란 속에서 제일 밑에 있는 5세의 남자 아이가 2층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양친은 광란 상태가 되었다.그 남자 아이는 2층의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쳐다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창에서 뛰어 내려라!'
-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연기와 화염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나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아버지의 얼굴도 보이지 않아요!' 어린이는 그렇게 대답하였다.'아빠가 너를 보고 있으니 염려 없다, 자 뛰어 내려!' 아버지의 목소리에 따라 어린이는 창에서 뛰어 내렸다. 아버지는 창 밑에서, 창에서 뛰어 내리는 어린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어린이는 찰과상 하나도 없이 무사했다.
- 우리들도 하늘의 아버지께 이 어린이처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자신은 결점 투성이로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으나 노력하여 자신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의 사랑은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신다. 이것은 결코 독선적인 생각이 아니라 깊은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만 신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은 사랑 자체이시고 나에 대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하늘의 아버지는 나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깊이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몸을 맡기고 있는가?
- 십자가를 잡고 성호경을 한 다음 십자가에 친구하고 사도신경을 외운다.
- 다음 묵주알을 잡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 다음 세개의 알을 차례로 넘기며 각각 성모송을 한다. 각각에서 다음을 묵상한다.
1) 천주 성부의 지극히 거룩한 딸이신 마리아
2) 천주 성자의 평생 동정 어머니이신 마리아
3) 천주 성령의 지극히 정결한 짝이신 마리아
- 다음의 묵주알을 잡고 (머리를 숙이며) 영광송을 한 후, 묵상 주제인 환희, 고통, 영광, 빛의 신비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신비 1단을 외운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 묵주알 10개를 넘기면서 성모송 10번을 하는 동안 신비 1단의 내용을 묵상한다.
- 다음 알을 잡고 영광송과 구원경을 바치면서 1단을 마친다.
- 이어서 신비 2단을 외운 뒤,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도 1번과 성모송을 10번을 하면서 2단의 내용을 묵상하고, 영광송, 구원경을 바친다.
- 같은 방법으로 3단, 4단, 5단을 바친다.
- 마지막 5단의 영광송, 구원경을 바친 뒤 성모찬송을 바치고 십자가에 친구하면서 성호경을 하고 끝낸다.
묵주기도란
묵주기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다. 더 정확히 말해 묵주기도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모 마리아와 함께 관상하는 기도다. 방법적으로는 열번의 성모송과 한번의 주님의 기도와 영광송을 한 단으로 하는 5단 묶음을 넘기며 묵주알 하나하나마다 기도문을 암송한다.
묵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로사리움(Rosarium)은 '장미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알고 있는 로사리오(Rosario)는 '장미 꽃다발' 혹은 '장미화환'을 뜻한다. 결국 '로사리오'기도란 '장미 꽃다발 기도'를, 묵주알 '하나'는 장미 '한송이'를 의미한다.
장미 한다발, 묵주의 기도는 복음서의 요약이자 인류 구원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교회의 신비, 그리고 마리아의 신비를 요약, 함축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을 통해 "묵주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자 구원적인 강생에 집중하는 기도며 그리스도께 대한 끊임없는 찬미이고 순수한 기도" (46항)라고 정의했다.
묵주기도의 유래와 의미
묵주기도의 기원은 초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기도 대신 장미 꽃다발을 바치기도 했으며 순교자들은 장미관을 쓰기도 했다. 정확한 묵주기도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으나 초세기 은수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한 시편을 외우면서 작은 돌멩이나 곡식의 낱알을 엮어 하나씩 굴리면서 기도의 횟수를 센 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환희, 고통, 영광의 15단 묵주기도가 자리잡게 된 것은 15세기 말경, 정확히 오늘날과 같은 묵주기도는 '묵주기도의 교황'이라 불리는 비오 5세가 1569년에 만들었다. 묵주기도는 1830년 이후 세계 각처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는 1830년 파리에서, 1858년 루르드에서,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할 때마다 묵주기도를 잘 바치도록 간곡히 부탁하셨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와 함께 빛의 신비를 추가하여 기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묵주기도는 '인체의 호흡'에 비유될 만큼(레지오 마리애 새교본 19장 14항) 신자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묵주기도는 구원의 역사를 효과적으로 집약하고 있으며 그 구원의 역사 속에서 마리아가 하시는 여러가지 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 새교본 18장 4항)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면 성서의 신비를 모두 알게 되며 영원한 삶에 대한 신비를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묵주기도를 통해 묵상하게 되는 예수의 탄생(환희), 죽음(고통), 부활(영광)의 신비는 우리 삶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묵주의 기도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기쁨 뒤에 고통이 찾아오고 그 고통 뒤에 영광이 찾아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마라톤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우승을 차지한 선수에게 '영웅'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바로 수없이 많은 고통의 시간을 이겨낸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묵주기도는 이처럼 환희, 고통, 영광이라는 이 '삼각 순환고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사를 묵상하며 구원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우리들의 삶을 묵상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역대 교황들은 묵주기도의 중요성과 함께 묵주의 기도의 은총을 계속 강조해 오고 있다.
교황 비오 10세는 "묵주기도만큼 아름답고 은총을 많이 내리게 하는 기도는 없다"면서 묵주기도를 매일 정성스럽게 바치라고 유언했다.
묵주기도의 약속
다음은 동정녀이신 어머니 마리아께서 성 도미니꼬와 복자 알라노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1. |
내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는 자에게는 나의 특별한 보호와 수많은 은총을 약속한다. |
2. |
내 묵주기도에 항구한 자는 어떤 표시 있는 은혜를 받을 것이다. |
3. |
묵주기도는 지옥을 능히 쳐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며, 악을 쳐부시고 죄에서 구원하고, 이단을 물리칠 것이다. |
4. |
묵주기도는 덕과 선을 더욱 풍성케 하고, 영혼 안에 하느님의 가장 풍요한 은총을 내릴 것이며, 그 마음 안에 세상의 사랑 대신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다 줄 것이며, 그 영혼은 이로 인해 성화될 것이다. |
5. |
묵주기도를 드리며 나에게 달아드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
6. |
매 신비를 묵상하며, 나의 묵주기도를 경건하게 바치는 자는 불행에 묻히거나 죽을 때에 버림받지 않을 것이며, 죄인은 회개하고 의인은 은총에 더욱 성장하고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
7. |
나의 묵주기도에 진실로 헌신하는 자는 교회의 위로나 은총 없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
8. |
나의 묵주기도를 바치는 자는 살아있을 때와 죽을 때에 하느님의 빛과 그 은총의 풍요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모든 성인들의 공로를 나누어 받을 것이다. |
9. |
나의 묵주기도에 열심했던 영혼이 연옥에 떨어지면 즉시 구해낼 것이다. |
10. |
나의 묵주기도의 진실한 자녀들은 천상에서 큰 영광을 누릴 것이다. |
11. |
나의 묵주기도를 통해 청하는 바는 무엇이나 다 들어 주겠다. |
12. |
나의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자는 모든 필요한 도움을 다 얻을 것이다. |
13. |
나는 내 아들로부터, 매괴회 회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천상의 성인들을 형제로 차지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 |
14. |
나의 묵주기도를 성실하게 바치는 자는 내 사랑하는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될 것이다. |
15. |
나의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은 구원의 명확한 표시가 될 것이다. |
묵주기도 방법
묵주기도는 구도와 염도가 가장 아름답게 조화된 기도라고 한다. 구도란 일정한 문장으로 정해진 기도문이고, 염도란 일정한 문장으로 정해지지 않은 내심의 기도 또는 침묵의 기도이다. 묵주기도는 바로 일정한 기도문을 되풀이하여 외우면서 주님의 구원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로사리오를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으로 기도할 때 각단의 신비 내용을 진정으로 묵상해야 한다.
예를 들면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 예수를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라고 한 후,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는 동안에 일체 다른 생각이나 묵상을 하지 말고 마리아께서 예수를 잉태하시는 그 신비만을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고 있다. 그냥 일반적인 생각이나 묵상으로 바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무 생각이나 묵상도 하지 않고 외워버리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세운 지향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바치기도 한다.
예로써, 아픈 어머니를 생각한다든가 또는 아들의 시험 합격을 바라고 시험 결과를 이리저리 상상하면서 바치는 경우이다. 지향은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세우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묵상중에 생각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분심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 기도와 성모송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로사리오 기도를 얼마나 깊이 묵상하는가 하는 척도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자기 생활을 기도화하고 자신을 관상화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일수록 로사리오 기도를 깊이 묵상하고 관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로사리오 기도를 꾸준히 묵상하면서 자기 생활을 더욱더 기도화하고 자신을 관상화할 수 있다. 로사리오 기도는 깊은 영성에 도달하기 위한 힘있는 수단이다.
* 묵주기도의 구성 및 방법은 다음과 같다.
<환희의 신비>
제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제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제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제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고통의 신비>
제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제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제4단. 예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제5단. 예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영광의 신비>
제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제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 올리심을 묵상합시다.
제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빛의 신비>
제1단.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제3단.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제4단.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제5단.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구원경>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