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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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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0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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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죄(원죄)
1) 아담의 죄
창세 3,1-24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계명중 하나를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깨뜨리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이었다. 이 불순종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과 악을 아시는 하느님과 같아 지기를"(창세3,5) 원한 데서 출발한다. 즉 자기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기를 원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척도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종속되기를 거부함으로서 인간을 하느님께 결속시키는 끈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상대로 비슷하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두시지 않고 당신 생명까지 내놓으시는 분인데(참조 지혜2,23)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은 무한히 자애로우신 하느님께 대하여 의혹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께서 당신 특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신 술책이 아닌가 하고 또 그 계명에 수반되는 경고는 거짓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이제 인간은 자기의 경쟁 상대로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된다. 즉, 처음에는 하느님을 무한히 완전한 분으로서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무사 무욕하여 베푸시기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이제는 피조물한테서 자신을 방어하는데 급급하고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하느님으로 여기게 된다. 이렇게 죄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자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적 부패보다 더 근본적인 타락은 없는 것이다.
2)죄의 결과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양심의 가책은 그 한 예이다. 즉, 죄를 짓기 전에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던 아담과 하와는 잘못에 따르는 벌을 받기도 전에 벌써 하느님 야훼를 피하여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게 되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편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여 하느님을 기피한다. 그러니까 낙원에서의 추방도 인간의 그러한 마음을 확인해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추방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경고가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생명의 나무에 가까이 갈수 없게 됐고(창세 3,22) 결국 결정적 죽음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추방됨으로서 이때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았으며 또한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게 됐다. 그 사실은 이미 낙원에서 살았던 최초의 남녀 사이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하자마자 아담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반려자로 주신 자기 여인을 고발하면서 연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이 분열은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며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최초의 죄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을 안겨다 주는 요인을 제시하고서야 끝을 맺는다. 물론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독립하려다가 도리어 벌로 추락된 노예 상태는 본래 언제까지나 계속될 결정적인 것이었다. 또 일단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는 그것은 계속 불어 날 뿐이었고 죄가 증가됨에 따라 생명은 감소의 길을 걸었으며 마침내는 대홍수로 인해서 단절되게 되기까지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인간측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을 회복하는 화해는 하느님 편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최초의 죄의 이야기 안에는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몸소 이 화해를 실현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다(창세3,15). 인간이 경멸한 하느님의 선하심이 끝내는 승리하게 됨을, 즉 창세기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가 움트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2. 이스라엘의 죄
1) 금송아지의 경배
예전에 이스라엘은 자기편의 아무 공로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지상의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되고 특별한 사랑을 받아 하느님의 장자라는 특전을 입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의 노예 생활과 하느님을 섬길 수 없는 죄의 땅에서 해방 시키기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 구원 사건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안다. 이러한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에게 "증거의 판"(출애31,18)을 주심으로서 풀릴 수 없는 관계를 맺으시는 바로 그 순간에 이스라엘은 아론에게 "우리 선두에 서서 거닐 신을 만들어 주시오"(출애 32,1)하고 청하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표징으로 당신의 성실하심을 증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야훼께서 너무 멀리 계시고 보이지 않는 분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야훼께 대한 참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있고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 그 진노를 가라 앉힐 수 있는 신, 달리 말해서 그들이 "하느님과 함께 걷는" 대신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어 주기를 원하는 자기 중심적인 하느님을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최초의 죄는 순명의 거부였음을 보았다. 그것은 좀더 깊이 고찰해 볼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자신을 위탁하기를 거부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와 더불어 바알을 예배하려는 유혹, 즉 우상숭배에 빠질 때 현저하게 드러난다.
금송아지의 이야기에 이어서 신명기 9장 22절에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하나의 죄를 들고 있다. 그것은 탐욕의 죄이다. 이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기적적으로 내려주신 만나보다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더 좋아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민수11,4-6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위탁하기를 거절하고 하느님께서 광야의 영적 체험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신명8,3참조) 거절한다. 그들의 탐욕은 충족되지만 아담에게서와 같이 하느님의 길을 그들의 길로 대치할 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를 경험한다(민수11,33).
2)예언자들이 고발하는 죄
예전에 이스라엘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예언자"라고 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죄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의 실현을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며 유일한 장애물이라고 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죄는 매우 구체적인 실체로 사람들이 야훼를 저버림에 따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들은 폭력, 약탈, 부정한 재판, 허위, 간통, 위증, 살인, 폭리, 권리 침해 등이며 한마디로 사회적 질서의 파괴라고 보았다.
이사야라는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을 갈라 놓는'(이사59,2) 이 죄악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죄의 고백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실상 우리의 악행들이 우리와 함께 있사오며, 우리가 우리의 잘못들 그것들을 잘 아옵나니, 곧 악을 행하고 야훼를 불신하며, 우리 하느님을 피해 달아나고, 압박과 반항에 관한 말을 하며, 마음으로부터 거짓말들을 지껄였다. 법규는 뒤로 제쳐 놓인바 되고 의리는 멀리 서있을 뿐이고 진실함이 대중 앞에서 짓밟혔고 정직함이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사 59,13-14).
그리고 예언자는 하느님을 떠나서 건방지게 스스로 서고자 하는 자는 타인, 특히 가난한 자와 약자를 짓누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는 자"(시편 52,9)는 "언제나 악한 뜻을 품고"(시편52,4) 의인은 "언제까지나 주님의 자비에 의탁한다"(시편 52.10)고 보았다. 사무엘 하권 12장에 나오는 "다윗"의 간통죄가 이미 암시하는 것도 역시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삽화는 이스라엘의 죄 관념을 명확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인간의 죄는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까지 상해 드린다는 것이다.
3) 하느님께 대한 모욕으로서의 죄
죄가 직접 하느님 자신을 해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해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해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이했을 때(2사무 12,9-10) 단지 한 인간을 상해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권리의 보호자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갈라 놓음으로서 그분의 사랑의 계획을 헝클어 놓는다는 의미에서도 하느님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가 점점 더 계시됨에 따라 인간의 죄가 어떻게 하느님께 "모욕"을 끼치게 되는지 그 참뜻이 더 명백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죄는 자애 깊은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배은망덕한 행위(이사 64,7)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어떤 인격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죄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이 보답되지 못함으로 고통당하시는 것, 즉 그분 사랑이 상처를 입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으며 그 참뜻은 신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계시되게 된다.
4)죄의 치유
예언자들이 죄를 고발하고 그 중대성을 분명히 밝힌 것은 백성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회개시키기 위해서 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충실하여도 항상 성실하시고 인간이 당신 사랑을 거절하여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는 한 당신께 돌아오기를 계속 독촉하신다는 것이다.
죄는 사랑의 거부이기 때문에 죄가 제거되거나 용서되는 정도는 인간이 다시 사랑할 것을 어느 정도 수락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기를 요구하지 않는 "용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부정하면서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자체가 인간의 회심을 강하게 요청한다.
그러므로 인간측에 첫째로 요구되는 조건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독립되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서 죄의 근원적 요인을 단절하는 것이다.
3. 예수님과 죄인들
복음서를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이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가 결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변혁 없이 순전히 하느님의 일방적 행위로 이루어진다고는 가르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도 옛 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과 같이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내맡기도록 정신의 철저한 쇄신 즉, 회개를 가르치신다.
그 대신 비유에서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나 빛을 거부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분 역시 속수무책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예언자들처럼 가시는 곳마다 죄를 고발하신다. 특히 계명을 규정대로 잘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렇게 하신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의 내부에 자리잡고서 거기에서부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가지의 죄가 나와 삶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로움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는 결국 사랑의 계명으로 귀착된다. 제자들은 스승의 행동을 바라봄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의 거부인 죄가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된다. 제자들은 특히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예언자들의 교훈과 비슷한 점이 많은 '탕자의 비유(루가15,11-32)'는 신약성서 중의 어떤 비유보다도 죄가 왜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며 용서가 죄인 자신의 회심없이 일방적으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당치 않는 것인지를 말해 준다.
이 복음 내용을 통해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불순명 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했던 것은 아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아 자기 곁을 떠나 갔다는 사실과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식을 사랑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집에 있지 않음으로서 아버지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하여는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서 다시 아들로 대우 받기를 수락하는 길 밖에 없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기쁨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회개 없이는 이 비유에서 용서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용서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용서의 힘은 실제로 아들이 되돌아가는 행위를 통해서만 효력이 나게 된다.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이러한 태도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보다도 행동으로서 잘 계시하신다.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하느님의 자비심을 이해 못하고 이를 곡해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도 구애되시지 않고 비유의 아버지와 같이 사랑과 보살핌으로 죄인들을 받아들이신다.
4. 자비로우신 하느님
죄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척도의 기준을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또한 아담과 하와가 서로 잘못을 떠 넘김으로서 책임을 회피했듯이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같이 죄는 사회적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특히 인격적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우리들이 죄에 대해 보다 효과적으로 회개하기 위해서 이며 하느님과의 은총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다. 더욱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충실하여도 항상 성실하시고 인간이 당신 사랑을 거절하여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탕자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언제든지 되돌아 오기만 하면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빠졌더라도 이에 절망과 실망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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