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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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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공부'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1.06.03 세례성사
  2. 2011.06.03 성모 마리아
  3. 2011.06.03 교회
  4. 2011.06.03 삼위일체
  5. 2011.06.03 성령
  6. 2011.06.03 전례와 전례주기
  7. 2011.06.03 하느님 나라
  8. 2011.06.03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9. 2011.06.03 예수 그리스도
  10. 2011.06.03 계시
2011. 6. 3. 23:13 교리공부
1. 물의 의미와 물로 씻음에 대하여
세상에서 물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 없다. 물은 생명과 직결되고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인간 생명의 발생부터 인간 생명의 유지에까지 물은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류 역사를 통하여 풍습과 종교 속에는 물이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데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어떤 중대한 일을 앞두고 물로 몸을 씻는 풍습이 있다. 즉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과거를 보러 갈 때는 목욕 재개를 하였다. 이는 내적인 정화를 외적인 양식으로 표시한다는 뜻에서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목욕을 함으로써 마음이 정화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씻는 예식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으면 정결한 자가 된다고 믿고 있으며, 부정이나 허물을 씻는다는 의미에서 정결 예식을 행하였다. 이는 물이 지니는 생명의 근원성과 동시에 정화의 능력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여된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시 세례성사, 즉 초자연적인 생명에로의 재생의 표징으로 물을 사용하고 있다.
희랍어의 세례라는 명사는 '잠기다' , '씻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세례는 물에 잠기고 씻음으로 과거의 생활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형제로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성토요일에 세례 성사를 거행해왔고, 그 전례에서는 매우 아름다운 찬미가와 기도로써 성세수를 축성하고 구원사에서 물이 차지하는 역할을 강조하여 왔다.

2. 세례란 무엇인가?
1) 세례의 성서적 배경 고찰
① 구약에서의 세례 예표
- 창세 7, 17-24 : 세상의 죄악을 물로써 멸망시키다.(세례수로 낡은 사람을 파괴함을 의미한다.)
- 에제 36, 25-26 :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주고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주리라.
② 신약에서의 세례 예표
- 요한 3, 3-5 :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마태 28, 19-30 :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물에서 모든 생명이 나왔으며, 요한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세 때 물을 사용하는 이유는 성세가 재생의 성사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중요성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노아의 홍수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노하심으로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멸망되었으나,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예외적 존재인 노아의 가족은 깨끗하게 된 땅에 새로운 인류를 번성시키게 된다. 여기서 물은 악으로 가득한 세계를 멸하고 새로운 인류의 새 생명의 탄생을 뜻하고 있다. 물로 성세를 받음도 이와같이 우리 안에 악의 요소를 멸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2) 요한의 세례
세례는 회개의 행위이다. 달리 말하면 세례는 겸손과 진리의 행위인 것이다. 세례 성사의 설정자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지만, 복음서에서는 세례에 대한 기사를 예수님 전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요르단강에서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고, 몰려왔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다.
이 세례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해 회개를 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드러내는 외적 표시이며, 세례를 받기 전에 진정한 자기 속죄가 요구되며,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분께 용서를, 빌 때 비로소 세례의 참뜻이 있음을 알아들을 수 있다.
3)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보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고, 또한 물 가운데에 들어감은 우리 자신이 세례의 결과 얻게 되는 승리의 시초적 행동이며, 성서의 완성이다.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라고 하느님께서 장엄하게 선언하셨는데, 여기서 세례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며, 그분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게 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 죄인을 개별적으로 속량하고 새롭게 할 뿐 아니라, 홍해 바다에서처럼 새로운 민족, 하느님의 백성을 낳고 노아의 홍수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재생된 인간을 창조해주는 것이다.
4) 세례의 효과
①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
우리는 세례를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죄악과 헛된 욕망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물의 의미에서 살펴보았듯이, 세례 때 물에 잠기는 것은 이러한 죽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또한 세례를 '신앙의 성사' 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례를 받을 때 크리스찬 공동체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오로지 주 예수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의탁의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받는 이는 온전히 예수님과 결합하여 자기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쳐 이기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할 새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례의 이런 차원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세례전

    세례후

    낡은 인간(묵은 인간)

    새로운 인간

    자연적 생명의 죽음

    초자연적 생명의 탄생

    죄와 벌의 파괴와 소멸

    은총의 부여

    그리스도 무덤에 묻힘과 같이 죄에 대하여 묻힘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에 동참

② 하느님의 자녀, 상속자가 된다.
우리들은 세례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일원이 되고,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
이는 로마서 8,1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을 이루는 우리들은 상호간에 깊은 사랑과 신뢰로서 생활하며, 함께 하느님의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세례 성사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항상 무한한 신뢰감으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우선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은총으로써 하느님의 영광과 크신 사랑을 알고 굳게 믿어야 하며, 그리스도 부활로 인한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을 향하는 이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깨끗해진 우리 마음을 보호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5) 세례 예식
- 첫 질문 ; 세례자의 진정한 의도를 확인하는 질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확실한 믿음을 확인한다.
- 구마 기도 ; 진리와 사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온갖 악으로의 경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 끊는 예식과 신앙 고백 ; 세 번에 걸쳐 " 끊어 버립니까?"와 "믿습니다" 의 질문이 주어진다. 이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즉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겠는가, 아니면 죄와 악의 지배를 받으며, 죽음의 길을 가겠는가를 최종적으로 결단하는 질문이다.
- 물로 씻음 ; 세례에서의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성삼위의 능력으로 원죄와 이전에 실제로 범한 죄를 씻어낸다.
- 기름 바름 ; 새로운 생명의 부패를 방지하도록 하는 거룩한 신분(왕직,예언직, 사제직)으로 축성됨을 뜻한다.
- 흰옷과 촛불 ; 새로이 받게 된 생명의 결백함을 뜻한다.
- 세례명 ; 예비신자가 세레를 받을 때 성인 성녀의 이름을 가짐으로써 그 성인 성녀의 생활을 본받기 위함이며, 따라서 자신의 신앙 생활을 한층 드높이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새로이 영성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그 이름을 가진 성인 성녀의 도움과 전구를 청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을 때 유명한 성인 성녀들의 이름만 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보다 특성있는 성인 성녀의 생활을 알아보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의 이름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또한 자신이 택한 세례명의 축일이 바로 그 성인 성녀의 축일이므로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 대부모 ; 견진 성사를 받은 사람으로서 세례를 줄 때 참석하여 세례받는 자를 영성적으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는 사람으로 그 직무는 예비신자에게 복음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과 사회 생활로 친절히 보여주고, 고통에서 도와주고, 예비신자를 보증하며 세례 성사 생활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6) 세례의 종류
① 어른들의 세례
성인들의 세례는 예비신자 시기라는 긴 시간을 두고 준비하게 된다. 여기에는 예비신자의 세례 요청이 성숙하고, 또 그의 원의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교리로 밝혀질 수 있을 만큼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이 교리는 점점 더 밀도 있게 행해지는 단계적 준비의 절차를 따른 예식을 수반한다. 이 예식은 모든 사람들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회개한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하여 보통 사순절 시작 때,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참회예식 중에 거행된다.
② 유아 세례
세례성사로 부터 그리스도 교육은 시작되기에, 부모들은 자녀가 교회 안에 받아들여지고, 교회 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린이가 정신적 기능의 부족으로 아직 귀의와 신앙의 헌신이 불가능해서 세례의 특성인 개심과 신앙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어린이는 어른에 의존하여 그 표징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린이들은 세례받을 때, 그들나름대로 은총과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께 결합되며, 그들나름으로 구속적 봉사를 위하여 구속적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축성된다. 이 모든 것은 이후의 그리스도 교육으로 개발되어야 하고, 세례 성사는 그 정신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교육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③ 대 세
일반 성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몇 개월간 교리 강습을 받아서 신앙이 무엇이며 세례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죽을 위험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 사람처럼 교리를 배울 수는 없다. 그런 경우 비상 조치로 주는 세례를 '대세'라고 하는데, 이 대세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기본 교리를 일러주고 그것을 믿는다는 표시를 받아야 한다.
- 천주 존재, - 상선 벌악, - 삼위일체 교리, - 강생 구속.등이다.
이상 네 가지 교리를 다 가르칠 수 없고 벌써 환자가 의식을 잃었을 경우에는 그분이 옛날에 하느님을 믿을 뜻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조건부로 임종 비상 세례를 주어야 하는데, 조건부 세례는 이렇게 한다. "만일 당신이 세례를 받을만 하면,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④ 혈 세
피로써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순교하는 숭고한 행동이다. 순교는 생명을 바치면서 신앙을 증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물로써 수세를 받지 못했어도 순교하면 즉각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⑤ 화 세
자기의 뜨거운 열성으로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죽음이 임박하여 영세할 시간이 없고 그런 조건이 되어 있지 못할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상등 통해를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3. 세례의 필요성과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김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이른 것과 같이 우리도 헛된 욕망과 세상적 삶에 너무 집착하는 나쁜 습성을 끊고 오직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며, 이세상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새로운 영적 생명으로 재생되는 은혜를 입는 성사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며,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충실하게, 그리고 이웃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신비체인 교회의 구성원임을 절감함을 뜻하고, 교회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항상 복음에 충실하게 만들려고 노력함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항상 보다 자유로워지고 인간적으로 되고, 보다 책임감 있게 되고, 보다 우정있는 사람들이 되고, 보다 행복한 사람들로 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함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시기와 질투와 분노와 증오와 우월감을 버리고, 사회적 갈등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보존하면서,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살아감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에로 건너감을 뜻하고, 다시 태어남을 뜻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의 실현을 위해 노력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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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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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2 교리공부
1. 구원사에서 성모 마리아의 위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서 하와는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하였고, 그 결과 죽음이라는 벌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원죄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약성서는 이 원죄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자 하느님께서 구세주와 그의 어머니가 될 한 여인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뱀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이 약속되었고(창세3,15), 그 여인은 처녀로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주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로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를 가리킨다(이사7,14참조). 때가 차니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는데(갈라4,4-5참조), 그 여인이란 바로 악마의 머리를 밟아 죄악의 세력을 멸하고 승리할 구원자 그리스도의 모친이다.
루가복음 1장 26-38절을 보면 천사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한다. 마리아는 과연 은총을 가득하게 받으신 분이다. 이에 대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마리아는 대답한다. 마리아는 이 대답을 통하여 메시아를 잉태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부와 본질이 같은 성자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인성(人性)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여 하느님의 구속사업을 수행하게 된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와 역할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구원사에서 마리아는 특이하고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리아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대망(待望)사상과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성취(成就) 사이에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인류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2.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협력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시 여기며, 마리아의 자유로운 동의를 구한다.
마리아의 동의없이 하느님은 자신의 구원사업을 이루실 수 없다. 하느님의 계획과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마리아의 순명은 곧 하느님께 향한 자신의 온전한 '동정봉헌'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대로 '정녕 복되신 분'(루가 1,35)이다. 복되신 마리아의 순명으로 아담과 하와로 부터 멀어진 하느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이어지게 되고 인류 구원의 역사는 마리아의 순명을 통하여 새롭게 전개되어 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셨기에 원조의 죄를 '복된 죄'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인류에게 주셨다.
하느님은 한 여인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원죄로 잃었던 인류의 생명을 다시 찾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을 한 인간(마리아)의 순명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인류에게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다. 즉,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구원의 매듭은 엉클어졌다. 하와의 불순명의 매듭은 마리아의 순명을 통해서 풀어졌다. 하와가 자신의 불신앙을 통해서 얽어 맨 것을 동정녀 마리아가 자신의 신앙을 통해서 풀어낸 것이다.

3. 마리아의 순명의 의미
마리아의 순종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죄 많은 인간들과 충만한 연대성을 맺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은 것(봉헌)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순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어머니,
구세주의 모친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대답인 것이다. 자신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도 오직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과 결코 그르칠 수 없는 인도하심을 믿고 오로지 당신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마리아의 대답이었으며, 거기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하느님의 인류구원에 협력하였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내어놓는 신앙이기에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마지 못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것처럼 기쁘게 순종하는 자세를 배워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준 잃어버린 생명을 마리아의 응답으로 되찾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마리아에게서 배워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생명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명하여, 그동안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여야겠다.

4. 교회의 어머니요, 신앙인의 모범이신 마리아
아브라함은 오직 하느님께 순종하여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지상 여정을 걸음으로써 그 결과 그에게서 큰 민족이 이루어졌다(창세12.1-4참조). 하느님을 향한 그의 여정은 하나의 큰 백성을 이룬 시조가 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시공을 초월하여 '신앙의 아버지', 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곧 바로 아브라함을 지칭한다. 이 귀한 호칭이 그에게 주어지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기포기를 통하여 전 생애를 하느님께 의탁한 결과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아드님이 가신 그 길을 온전히 함께 걸어감으로써,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앙인이 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분이며, 언제나 아드님 곁에 머물러 계셨다.(우리들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어머니들은 한결 같이 자신이 낳은 자녀의 행동을 잊지 못한다.)
또한 마리아는 아드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셨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운명을 지켜 보고 시신을 끌어 안으신다. 마리아는 아드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참하였다.
어머니가 가신 그 길은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인생의 여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마리아가 우리 모두의 어머니임을 분명하게 말씀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6-27).

우리에게 나타나는 마리아의 모습은 하느님과 같은 자태, 기적의 아가씨 또는 초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한 한 인간, 한 여인의 본연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이때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제 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한 사람의 참 인간상을 볼 수 있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이 어떠한가를 항상 마리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은 인간으로서 가장 가깝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신 분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 공경은 흠숭과는 다르다. 흠숭은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만 드리는 것이지만, 공경은 모든 성인들에게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테스탄스 제교회에서 말하는 마리아께 대한 우상 숭배는 아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따르고 그 말씀을 지켰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모든 신앙인은 최초의 신앙을 가진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며, 교회의 어머니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가장 완전하게 따른 분이 마리아이다.)
구세주의 모친이 가신 길 즉, 자신의 봉헌과 사랑, 봉사와 희생, 고통과 즐거움 등 인생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서 살아간 마리아의 모습이 곧 우리들이 배워야 할 모델이며 과제가 되는 것이다.

5.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
성서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는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정통 신앙으로 고백하며 받아들여져(사도신경)왔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동정성은 단지 생물학적인 동정성(동정녀 잉태(單性生殖)란 고등생물체에서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나 자연과학적 입장(이 입장에 대해서는 말할 때 하느님은 어느 때라도 새로운 상황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자연발생 안에 삽입시킬 수 있다. 창조 개념으로부터 기적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연과학적 입장에서의 정당한 반론이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또는 신화론적 입장(한 인간의 여인과 신의 성적결합 또는 기적적 탄생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녀의 잉태와 탄생의 의미는 그리스도로 인한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것임을 드러내는 징조이다. 또한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출생과 함께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역사를 통해서 이미 약속되었던 바로 그 아기였다는 것을 동정녀 잉태는 말해주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보통 인간의 탄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탄생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였다'라는 신조의 깊은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동정녀 출생을 상징적 의미로 가르친다거나 동정녀 잉태의 사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마리아의 자유로운 신앙결단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조건없이 신뢰하고, 진심으로 사랑한 모습을 신앙인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하여 마리아처럼 "예"라고 응답하여야 한다.
이것이 평생 동정성의 핵심이며, 마리아의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선사하며, 그래서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고, 하느님은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마리아가 받아들임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며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듯이 우리 자신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마리아는 신자들의 모친, 그리고 교회의 원형이 되며 모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문제는 과학적이며 생물학적인 동정성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관건이 되는 것은 성(性)이 아니라 마리아의 신앙이다.
바로 마리아의 신앙에서 동정성을 찾아야 하며, 마리아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대답 즉,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 라고 한 대답 -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라고 순종한 대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개신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형제와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한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현세의 인간적 부친을 가지지 않았다는 정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생명과 존재의 창시자요 원천이신 성부께서 바로 예수의 인간적 실존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동정녀 출산을 거스르는 반론을 제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의 온전한 인간임이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성을 성부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에 안전하고 충만하게 받았다.

6. 마리아에 대한 신앙교의에 대하여
1) 마리아의 모성
오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문들은 한결같이 마리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교의는 413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대하게 교의로 선포 되었으며, 하느님을 낳으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다. 그러므로 '천주의 모친'이라는 호칭은 성자와 마리아의 밀접한 관계에서 분명하게 연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의 모성에 대하여 성모님은 몸으로보다 정신으로 먼저 잉태하였다. 마리아는 일차적으로 그녀의 절대적인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모친이 되었고 그 다음에 비로서 육체적으로 모친이 된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성전에서 성부께 바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며,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세주의 구세사업을 도와드렸다. 이 때문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모친이 되시었다"라고 선포한다.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닌 만큼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된다.
2)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
마리아의 무염시태란 마리아가 처녀로 잉태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영원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미리 구원사업에 참가하도록 선택된 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일체의 죄의 세력에서 구원받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을 낳으실 어머니가 원죄에 물들었다면 태어나는 아들 또 한 죄의 세력에 물들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죄의 세력에 물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1830년 7월 18일에 프랑스 파리의 까리따스 수녀원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당신이 원죄없이 잉태되었음을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잉태 되시는 첫 순간,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미리 내다 보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특은을 베푸시어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셨다"고 선포하고 이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다.
마리아는 다른 이들이 세례 때 받는 은총을 출생 이전에 미리 입음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도록 불림받았다. 이 교리가 선포된지 4년 후에 성모님께서는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발현하시어 이를 다시 알려주셨다.
3) 성모몽소승천(蒙召昇天)
성모님의 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가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은 것,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약속된 영원한 생명의 영광에 맨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승천에 참여하게 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승천은 스스로 하늘에 오르신 것이지만 마리아는 스스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구별을 하기 위하여 몽소(蒙召)라는 말을 사용한다. 몽소승천은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 즉, 마리아의 인격이 전적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와 일치함을 뜻하는 것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11월 1일 일찍부터 교회가 믿어오던 마리아의 승천을 신조(信條)로서 선언하였다.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모친은 지상생애를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잠든 자들의 첫 열매요"(1고린15,20)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장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로서 누릴 종말적 구원이 마리아의 몽소승천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마리아는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일 뿐 아니라 지상에서 천상도성(天上都城)을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지막 날에 성모님과 같이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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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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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1 교리공부

1. 인간 삶의 공동체적(共同體的) 성격
우리 속담을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없다"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인간이면 누구나 날 때부터, 어느 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할 수밖에 없는 인간본성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생각된다.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결단하고 그 결단에 대한 책임성 있는 행위로써, 한 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려는 열망을 갖고 그곳에 개인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이상(理想)과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고자 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나 욕구가 공동체의 그것과 맞지 않을 때, 그로부터의 알력이나 긴장이 나타나기 때문에 독립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한편으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기를 열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독립하려는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려는 열망이 이탈하려는 열망보다 강한 듯하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체계화된 사회에서는 협력과 봉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 삶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단"이나 "단체"라는 표현보다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어떠한 공동체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특성이 있다.
먼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요소로서, 신념의 하나됨과 그 목적의 일치, 그리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방편을 쓰겠다는 의견의 일치가 그것이다. 즉, 가급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다면 짧은 시간 안에 자기들이 믿는 것을 전달하여 공동체로서 커져야겠다는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의 일치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단순히 공생(共生) 그 자체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어떤 신념의 일치에서 나온 귀결로서, "같이 나누는 삶"이라는 성격을 띄는 공동체를 말한다.
공동체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자신들이 맡은 것과 그 맡은 것에 대하여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을 "교회"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을까? 답변은 다양할 것이다. 이는 교회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1) "교회"의 어원과 그 유래
우선 '교회'(Ecclesia)라는 어원에 대하여 보자. 이 단어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이 아니었다가 점차 성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적인 용어가 된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원래 희랍어인 이 단어는 정치적인 의미로서 '민족 집합체'를 의미했다. 이 단어를 2세기에 라틴어 성서(70인역)로 번역하면서, 어의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Contio' 혹은 'Comitio'(정치적 집단으로서의 '집회')로 쓰지 않고, '유대인의 회당'(Syagogue), '예식단체', '하느님 백성의 전체 공동체'라는 의미로 도입함으로써 아직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까지도 통용되는 영어의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공번된', '보편적인'을 뜻하는 'Catholicus'에서 나온 표현으로서,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에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지역을 망라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는 단지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다. "교회"라는 의미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적인 결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공동체이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생활의 실천과 관계있는 것으로서 온 인류의 안녕과 기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 지상 생애 동안의 예수
예수는 마르꼬 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1,15)라는, 간결한 말씀으로 자신의 원의가 무엇인지를 요약하고 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설교와 그의 공적인 활동을 통한 본래의 임무는 "하느님 나라"로서, 이 단어는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 지니는 본래 의미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열 두 사도의 선발(마르 3,13; 6.7-13)을 통해서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선발된 열 두 사도로 하여금 그 자신이 행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세력을 나타내는 징표로, 악신을 몰아내게 하는 힘과 함께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을 준다. 열두 제자의 선발은 예수의 이스라엘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암시한다. 예수는 이 열 둘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고자 하며 길 잃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민족 복고주의적인 면모로서 만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유대 민족으로부터 이 개념을 정화하였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8,11의 이방인들을 상대로 행한 제자들의 선교활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데에 있다. 즉,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의 구원행위 속에서, 그의 구마 행위와 병자치유 속에서, 지금 이미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체적인 한 백성을 관통하게 되며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하느님 나라"와 확고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항상 하나의 백성을 전제로 하고 이 백성을 통해서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가운데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뒤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되면서부터 예수와 함께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해야 할 소임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대강 윤곽이 잡힌 셈이다. 성서학자들이 원칙적인 관점에 일치하고 있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 설교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는 완전히 현실화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말한다.
둘째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신이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는 완전히 자유롭고 충만한 최고의 권능행사를 의미한다.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이 그곳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약속하시며, 인간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하느님 나라"는 지상적인 현세의 민족적 신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충실성, 즉 하느님과 타인들과의 친교에 그 참 뜻이 있는 순수한 종교적 다스림이다.
넷째로, "하느님 나라"는 만민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복음"이며 그 조건이 되는 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는 어떤 도덕적 법 규정에로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배와 현세의 지배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요구, 즉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
(1) 하느님 백성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형되고 부활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30-100년)는 일차적으로 부활사건이 발생했던 갈릴레아 지역에서가 아니라 수도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계시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그곳에서 경이적인 성령을 체험하였으며 이로부터 모두가 하느님께 사로 잡히고 공동체 상호간에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와의 연관성하에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 두 지파와 관계있는 사고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였을 때는,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와 벤자민 지파 그리고 레위 지파의 절반만이 존재할 뿐, 더 이상 열 두 지파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기에 열 두 부족이 완전히 재건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여기서 열 두 제자와 같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봉사하는 협력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데 있어서의 조력자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또 하나의 기능이 이들 공동체에 추가되기에 이른다 . 즉, 그들에게 본래 전 이스라엘에서 발생해야만 하는 이들,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전적인 헌신, 새로운 생활 질서에로의 회개, 형제·자매적 공동체에로의 모임 등의 일을 표징적으로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종말론적이며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세계의 일반적 사회질서 속에서 타당성을 인정받고 통용되는 지배구조를 배격하고 상이한 유형의 공동체 구조를 구성해야 하는 소명을 받기에 이른다.
(2) 그리스도의 몸
사도 성 바울로의 서간에서 주로 발견되는 이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 일원간에 일치의 근본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먼저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모든 사람이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 고 있고(갈라 3,23-28), 창녀와의 결합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대조시키면서, 공동체 일원이 그의 몸과 합일되는 지체임을 말하고 있다(1고린 6,15- 17).
한편 바울로 사도는 이 개념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머리이며 세속적인 원리를 벗어버린 그리스도인은 그의 부르심을 받아서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구절들을 보면,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와 공동체와의 관계로 보고 있으며 공동체가 사회적 집단으로서 보다는 구원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천상적 실재로서, 이 안에서 공동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몸"으로 볼 때에, 서로 구별 지을 수 없는 상호관계가 성립되고(에페 1,22-23; 골로 1,18), 그리스도는 공동체가 그리로 향해 나아가는 원천과 목표이며(에페 4,15-16), 그리스도는 몸을 지배하는 머리 역할을 하는 가운데 공동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공동체 상호간에 교제하는 일,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양식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으므로(사도 21,20), 교회의 초기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다. 즉, 어린이들은 할례를 받고 경신례의 규범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쉬는 날로 지켰고, 성전에서 모여 매일 암송하는 기도에 참석하였다(사도 2,4-6; 3,1; 5,21).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그들 자신의 생활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드러나는,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새로운 "성전"(1베드 2,5)으로서, 새롭고
독특한 나름내로의 형태를 지니면서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생활구조를 갖고 살았다.
(1)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안식일에 공동기도에 참석한 다음(20,7), 개인 집에서 그들만의 집회를 가졌음을 전하고 있다(2,46; 12,12; 16,40; 20,8). 그리고 다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42)고 한다.
집회는 흔히 훈시와 예절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훈시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세례 전 예비신자 교리교육과,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강론이 있었다. 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메시아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2,23-26), 그 외에도 신앙과 애덕실천을 위한 훈계(14,22; 16,3) 혹은 용서, 그리고 좀더 친밀한 담화를 담은 권고 및 윤리교육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주로 사도들이 맡았다.
그리고 예절부분은 친교, 빵을 나눔, 기도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부유한 구성원들은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난한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실천은 교육정도, 지방, 신분이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거리감과 여기에 따라오는 상호간의 장벽을 예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에 "성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이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빵과 포도주 위에 손을 펴들고 "최후의 만찬"에서 하셨던 예수의 말씀(1고린 11,23-26)을 빌어 축복하였다는 데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예식을 통해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지고의 사랑을 기억하게 되고,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게 됨으로써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은, 이를 통해서 한데 뭉치고 그리스도의 근본에 공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신강림으로 인하여 그들 안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이후에 계속되는 복음선포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되었고, 이러한 진술의 내용은 곧 복음선포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사도들은 하느님의 업적인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 목격자로 자처하면서(사도 2,32; 3,1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그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증거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종말에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하여 재림하므로, 그동안에 인간의 응답으로서 개인의 속죄와 용서, 그리고 세례를 제시하였다.
또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들은 사도들이 제시한 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산상설교(마태 5 - 7 장)의 여덟가지 행복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 용서와 간음, 이혼과 거짓 맹세에 관한 금령과 보복에 대한 금령, 원수에 대한 사랑, 자선과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 물질에의 초탈,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 등을 권고받았으며, 특별히 마태오 복음 11,28-30의 말씀은 그들이 자주 회고하던 내용이었다.
(2) 공동체 상호간의 친교
공동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원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는 친교로서의 생활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어서, 가난하고 곤궁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다양한 전승들 안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고 있다. 특별히 바울로 사도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벌였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성령강림 이후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줌으로써 얻는 기쁨"을 경험한 사실을 보여준다(사도 2,44이하). 이러한 묘사로써 사도행전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이상적인 공동체상(像)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역시 "애덕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예로 바르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서 받은 돈을 사도들에게 바침으로써(사도 4,26- 27) 사도들의 제자, 더 나아가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교 지도자로서 공동체 활동에 봉사하게 된다.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땅을 팔아 돈의 일부만을 바쳤기 때문에(사도 5,1-2) 죽음의 벌을 받았다(사도 5,5). 물론 이 사건으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재산공유가, "공산주의"나 "집산주의"의 표현으로 보이는 단면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재산의 공동소유는 새로운 신앙의 열정에서 생긴 형제적 사랑의 자의적 원칙으로서 결코 의무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나니아 부부의 죽음은 사도들과 공동체, 무엇보다 하느님을 속인 결과였고(사도 5,4), 성령을 떠보는 죄의 결과(사도 5,9)였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생활은 공동생활의 원형이며 지배관계에서 해방된 성공적인 상호친교의 원형으로서, 무엇보다도 이런 사유재산의 집단의 집착에 따른 공동소유는 강제성이 아니라,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상호부조의 행위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 및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사상과 함께 현세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만 원조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원조받음으로써 서로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자진해서 바치는 구제금이나 헌금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친교를 나누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3) 이웃에 대한 봉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그들의 근본 직능, 직무, 과업, 사명을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봉사"하는 개념을 쓰고 있다. 이 단어는 인간이면 누구나가 즉시 굴종을 연상하게 마련인 하나의 행동, 즉 식사 시중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설교 안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식사시중을 드는 가운데 사람들끼리 존재하는 지배관계, 즉 봉사받는 사람과 시중을 들어 야 하는 사람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루가 17,7-9).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행위를 종 노릇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집니다"(마태 23,13)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인간실존의 가치전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가 하느님의 봉사적 실존의 원형을 친히 비유해 주는 인물로 등장하며 제자들과 공동체에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고(루가 22,24-29), 또한 예수가 봉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 공동체 실존의 척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단순히 식사시중이나 부양과 생계를 돌보는 자선행위만이 아니라 살거나 죽거나 그 어떤 때이던지 간에 "남을 위한 존재", 즉 처음부터 자신의 근본은 자기 인격을 다 바쳐 "타인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발견되는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0,28; 요한 12,25-26).
그러므로 봉사를 통해서 온갖 집단들이 이해관계와 신분의 차별, 성(性)의 우열같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장벽들이 지양되기에 이른다(갈라 3,26-29).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섬기는 일", 즉 "남에 대한 헌신과 사랑 속에서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교회의 본질
지상생애 동안에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그 나라에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고자 의도하였고,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선포와 행적에 입각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갖고 살았다. 그 생활양식이란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예배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의 친교는 공동식사(성찬례)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소명을 기억하면서 자아의식을 새롭게 하였는데, 이런 의식은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자기소유의 개념을 뛰어넘어,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돕는 봉사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였으며, 그들이 구제를 위해서 헌금을 할 때에도 헌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바침으로써 세상을 위한 증거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였다.
물론 이러한 점은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그들의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얻고, 영적 친교의 증진을 통해서 공동체의 친교와 봉사는 세상을 섬기는 데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4. 교회의 특징
1) 하나인 교회(唯一性)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보호하심을 약속하시며(성령강림), 당신이 세우신 교회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세상 방방곡곡에 전파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길 원하셨다. 그런데 천주교회만이 같은 신앙, 같은 전례, 같은 가르침, 같은 제도를 가지고 하나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
즉, 전세계 9억 이상의 천주교회 신자들은 어떠한 파벌의식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님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완성자'라는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온 세계의 천주교회는 그 가르치는 교리나 종교의식(미사)이 동일하고 같은 성사 같은 기도 안에서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세계 천주교회의 외적인 일치는 곧 천주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그리스도교라는 좋은 예이다.
2) 거룩한 교회(聖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이 공동체가 거룩한 것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 거룩함은 바로 천주교회 안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 안에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거룩하게 변화(성화)시켜 주신다.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표현하는 내용으로서 미사와 일곱 가지의 성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당 안에서는 잡스러운 행동이 용납되질 않으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여 계시는 성당에서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천주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즉, 천주교회의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성인·성녀들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천주교회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3) 공번되고 보편적인 교회(普遍性)
천주교회는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한국 명칭이다. '가톨릭'이란 단어의 뜻은 '보편적·공번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교회(라틴어로 ECCLESIA)라는 단어에는 '하느님으로부터 호출되어 모인 백성들의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모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무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전세계에 퍼져 있으며, 공동체가 생긴 이래 인종과 민족, 성별과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전인류를 위해 존재해 온 것이다.
4) 사도로부터 계승된 교회(使徒繼承性)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파가 약 50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당신의 공동체를 맡겨주신 열 두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온 공동체는 천주교회 뿐이다. 특히 천주교회의 주교님들은 열 두 제자들을 대리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직책이다. 이 사실의 증거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5.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의무
하느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포와 행적을 통하여, 당신을 따르던 몇몇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을 모으고자 하심으로써 교회를 창설하셨다.
우리 역시 이러한 기쁨과 사랑의 공동체에 초대를 받아 오게 된 것이며, 이곳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인간역사 안에서 존재하는 한, 인간적인 동기와 한계에 제약을 받는, 인간에 의해서 구성되고 관리되므로 그 자체 내에는 한계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결합과 일치가 그 목표이지만 아직은 완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완성에 이르도록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낱낱이 실천하고 있지 못하고, 하나인 교회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실정이며, 여러 지체들간의 일치와 형제애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상태이다. 교회의 참된 본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러한 현실들은, 교회를 이루는 각 구성원인 우리들이 헤쳐 나가야 할 임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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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0 교리공부
1.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이다
복되신 삼위일체의 신비는 곧 하느님 자신에 관한 신비이다.
이 신비가 다른 많은 신앙의 교의를 알아듣게 하는 빛이 되며 또 그 많은 계시진리가 이 신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신비야 말로 신앙의 진리들의 계층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고 본질적인 교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을 내리실 때에, 그분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가르치셨다.
"너희는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그러므로 아타나시오 신경에서는 이렇게 삼위일체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한 분 하느님을 예배하며, 일체로 계신 삼위를 예배하나이다. 성령도 구별되는 한 위격이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신성을 가지시며 동등한 영광과 똑같은 위엄을 가지시느니라."
이처럼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한 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아울러 영원으로부터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시면서 구별되는 세 위가 계심을 믿는 것이다.
유일한 하느님, 유일한 신성이 계시다고 하는 말은 신적 존재가 다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원천이요 목표는 오직 한 '지혜' 한 '사람' 한 '생명'이 계실 뿐인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구분되는 세 위이지만 무한하신 한 지혜로 우리를 아시고 영원하신 한 사랑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은총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하느님께 감추어져 있어서 신적으로 계시되지 않으면 알려질 수 없었던 신비들 가운데 하나이다. 계시 진리의 어떤 것은 이성의 탐구의 대상이 되고 이성에 의해서 발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같은 신비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2.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느님
구세사의 시초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온전하고 확실하게 계시되지 않았었다. 하느님은 단계적으로 당신께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다. 구악성서에도 이 진리의 예표들이 있지만, 삼위일체의 신비가 정식으로 계시되지는 않았다.
이 신비가 계시된 것은 신약성서이다. 성자와 성령이 알려지고, 그분들이 하느님이시며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들이심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느님은 한 분 뿐이라는 진리를 견지하면서도, 이 진리들을 명확하게 종합하는 데는, 여러 세대를 거쳐 기도와 반성,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했다.
1) 구약성서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하느님
삼위일체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다. 기원전 1850년경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을 믿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정하시고 자신을 밝히시기 시작하신다. 에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준 후 40년간 광야에서 인류사적 실생활을 통하여 교육하시고,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기적과 말을 들려 주시며, 당신은 전능의 하느님,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신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출애 20,2-3).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시는 분으로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고 다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하신 신으로 "우리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이제 알아라 내가 바로 그다. 나 외에는 신이 없다"(신명 6,4; 32,39)라고 말씀하여 주신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감추어졌던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신다. 그러나 구약성서 안에서는 세 위에 대한 정확한 구분은 없고 다만 세 위들이 계시다는 것을 희미하게 암시하여 주는 귀절들이 몇 있다. 교부들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복수명사(엘로힘)가 자주 쓰였다는 점과 하나이신 하느님께 복수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창세 1,26) 하느님의 이름과 속성을 세 번 거듭 부르는 일(신명 6,4)등이 이 세 위를 암시하는 속성으로 이해하였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느님
신약성서도 체계적으로 정립된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교리를 명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내밀한 본성의 계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여기서 체험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거론되는 하느님은 구약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으로서 한 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을 부여하는 하느님을 뜻한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울러 증언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마태 12,28)이며, 구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선포된 율법을 능가하는 전권의 소유자이고(마르 2,23-28; 3,1-8),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시다(루가 4,18).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성자)와 성령이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증언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고(요한 14,16.20; 15,26; 17,3; 갈라 4,6)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각기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마태 11,27; 요한 1,1; 8,38; 10,38; 15,26) 이를테면 나자렛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성부)의 현존이면서도 성부 자신은 아니다. 또 성령도 하느님(성부)의 자기 전달이지만, 하느님(성부)과 구별된다. 이와같은 점들을 통하여 볼때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하느님 단일성과 구별성을 모호하게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단순히 하느님과 조물 사이의 중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배열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성서 귀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위로 올라 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마르1:9-11).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시며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이다"(로마1:3-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에게 누리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구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
3. 삼위일체교리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신비로써 실증적 계시와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이성에 의해서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절대 신비가 있다면 이 삼위일체 신비이고 가장 기본적인 신비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서 존재하는데 위격들은 하느님 본질이며, 하나의 하느님 실체이다. 이 세 위격들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시다.
2) 그런데 이 세 위격들은 서로 구별된다.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하였다. 성령은 출산되지 않고 하나의 유일 원리로서의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된다.
3)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가 있으며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
4)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이 본질과 함께 하나의 삼위일체를 구성하지 않다.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계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하나이기에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시다.
4.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 만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3-26).
이와같이 성부는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초자연적인 생명을 얻게 하시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생명을 받아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이며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셔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변모되기까지 영혼의 성화를 완수하신다. 이처럼 성령은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생활의 완성을 향해 부르고 있으며, 이 완성이 곧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이룬다.
우리는 현세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머리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형언하는데 사용되는 인간 언어가 하느님께 관한 숭고한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미비하다. 그러나 기도에 정진하고 묵상과 사랑을 익혀가면, 우리도 영원하신 성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처하는 성령께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커져 가리라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목표는 복되신 성삼위를 알게 되는 데에 있다. 성삼위의 하느님이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관해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와 사랑으로 엮어지는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에 우리도 한 몫 끼게 되는 것이다(1요한3:2).
5.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하느님 안에는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로 있다. 그런데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발산된 두번째 위가 있는데 그분은 신성한 말씀이시다. 그리고 완전한 이 실체들의 상호적인 사랑으로부터 세번째 위가 태어나는데 이 위는 사랑 혹은 성령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처음의 두 근원, 즉 첫번째 위와 두번째 위로부터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두 위로부터 발산되고, 그 위가 서로를 알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랑이 완전하고 무한한 두 근원으로부터 발산되므로 성령 역시 성부, 성자와 같이 영원하고 무한한다. 또한 무한하신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파괴되거나 감소되지 않은 채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두 위에게 다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한한 근원이시고 또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에 당신 자신은 아무 것도 잃지 않으신 채 당신 스스로 가지신 모든 것을 전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가 사랑 안에서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도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들이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나눌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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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9 교리공부
1. 구세사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성령께서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 3위로 계셨다.
그러나 인간이 성령께 대하여 알게 된 것은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의 영(얼, 혼, 기운, 숨)으로 표현된 성령께서는 창조사업에도 참여하셨고(창세 1,2), 구약시대에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일꾼들(모세, 여호수아, 삼손, 다윗, 여러 예언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는 앞으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일할 구세주를 예고하였고(이사 11장), 요엘 예언자는 만민에게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 줄 날이 오리라고 예언하였다(요엘 3장).
구약에서 예언된 구세주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으로써 이 세상에 오셨고(루가 1-2장),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 오셨고,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의 유혹을 이기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다(마태 3-4장).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은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태 12,28).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으며, 오순절날 함께 모여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았다(사도 1-2장).
초대 교회에 있어서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보편적이었던 성령의 은사는(사도행전, 고린토 전서 12장 참조) 그동안 교회 안에서 수많은 성인 성녀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교회 안에 나타나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었지만, 일반신자들 사이에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일반신자들도 성령의 여러 은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고 계신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기 전과 공의회 동안 계속하여 "오, 주여! 새로운 성령강림과도 같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오늘날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며 모든 신자들에게 기도를 당부하셨다. 그 결과 공의회 후에는 가톨릭 성령쇄신 운동이 시작되었고, 공의회 문헌에는 성령께 관하여 언급한 부분이 252군데나 나온다.

2. 교회 안에 머물고 계신 성령
1) 성령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높은데로부터의 힘'을 보내 주실 터이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신다(루가 24,39). 루가 복음 사가는 데오필로에게 바치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부탁을 소개하면서 아버지의 약속이 다름 아닌 오순절에 제자들이 받게 될 성령으로 인한 세례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분은 사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에 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명령하시며, '여러분은 내게서 그 약속에 대해 들었다. 사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여러분은 며칠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사도1,4-5).
이어지는 예수의 승천기사에서 루가는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행전의 청사진을 이렇게 밝힌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이제 성령의 역할은 세례자 요한과 지상의 예수께 국한되지 않고, 열 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태동하게 될 교회공동체에 그 영향력을 확장시킨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다른 어느 신약성서 저서들에서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약속이지만, 그 약속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포된다. 하늘로 높이 들어 올려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제자들에게 전달하신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는 한편 제자들에게 내려진 성령은 다시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전달하는 대목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오른 편으로 높이 올려져 앉히시고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의 약속을 받으신 다음에,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 성령을 쏟아 주셨다. ...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곧 여러분이 십자가 형에 처한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로 삼으셨다"(사도2,33-36). 따라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분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이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신생 교회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2) 성령과 새로운 공동체
오순절에 내려온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성령이 예수의 탄생과 공생활의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듯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태동에 즈음하여 성령은 인류 역사에 개입해 오시는 하느님의 가시적 현존이 되면서 구세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다.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같은 혀들이 갈라지면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자 위에 내려 앉았다. 그러자 성령으로 가득차서 영이 그들에게 일러주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2-4).
루가복음 사가는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세계도처에서 모여온 순례자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다(사도 2,5-11).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예언자 요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결정적인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들에 있을 일이라. 나는 모든 육신에게 나의 영을 쏟으리니, 너희의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리라. ... 그러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사도 2,17-20참조; 요엘 3,1-5).
한마디로 루가는 수많은 인종들을 증인으로 내세운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사도17,16-39), 성령의 내리심과 더불어 태동한 새로운 교회공동체의 진로와 방향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한 인류의 보편적 구원'으로 확고하게 정해 놓은 셈이다.
3) 성령과 12사도
모든 인간이 성령 안의 새 생활을 하길 원하시는 성부께로부터 파견을 받아 인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인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기 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셨고(마르 1,8),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께서 아버지께 구하면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14,16-17).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래지 않아 제자들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사도 1,5).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떨고 있었는데(요한 20,19.26), 오순절 날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는 성령을 받아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사도 2,2-13), 군중에게 설교를 하며(사도 2,14-36), 앉은뱅이를 고치고(사도3,2-10), 박해를 받으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하게 전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전파하는 그분의 제자들과 증인들을 인도하는 힘이다. 성령은 그들의 행위를 지시하기도 하고(사도 2,41; 4,31; 10,19,44; 11,28; 13,2,4; 15,28; 19,21; 20,22,28), 억제하기도 한다(16,6.7; 21,4).
그런데 사도행전의 특이한 점은 성령이 항상 12사도단의 존재와 권위에 관련되어 내려 온다는 사실이다. 곧 성령은 12사도단이 모여 있을 때, 또는 사도단의 일원이나 사절이 참석해 있을 때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령은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핵심을 이룬 12사도단과 처음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신다.
12사도단의 권위와 성령의 도움은 신생교회를 세상에서 존립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두개의 중대한 원동력이다. 루가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과 가르침에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서로를 불가분의 관계로 성립함으로써 이상적인 교회상을 제시하는데 성공하였다. 루가에게 있어서 성령과 교계제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두 아버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만민 구원이라는 '보편적 구원계획'을 성취시키는데 기여한다. 제도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직된 교조주의나, 이와는 반대로 제도권에서 벗어나 카리스마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루가가 제시한 이상적인 교회상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서, 주님과 성령 안에서 건설되어야 한다(에페2,21-22).
4) 교회제도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
공동체 안에서 주교나 사제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성령께서 공동체의 각 구성원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살아 있는 교회 전승과 대조하여 이것을 종합하여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위해 그 문제점을 올바르게 찾아 이끄는 데 있다. 그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주교와 사제는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권위와 순명에 대한 의미도 시대의 변화와 역사 속에서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만을 지도자로 모셨을 따름이며 그들은 모두가 주님의 자녀일 뿐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 관심사가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성령께서는 자녀들의 삶 가운데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내리시는 선물을 통해서 그들 자녀들에게 스스로 느끼도록 말씀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형제들의 생활 그 가운데에 언제나 현존하신다. 성령께서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뜻과 방법을 모든 그리스도인은 알아듣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앙인은 성령의 뜻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성령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될 때, 모든 신앙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의 권위와 순명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 성령의 활동
성령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 3위로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협조자(요한 14,16)이시다. 성서에는 물(요한 7,37-38), 불(마태3,11), 기름(루가 4,18), 바람(요한 3,8), 비둘기(마태 3,16) 등이 성령의 상징으로 나온다.
이러한 상징들은 우리를 깨끗이 정화시키고, 생명을 주고,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붙여 주며,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성별시키고, 자유와 평화를 주는 등 성령이 우리 안에 이루시는 일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체험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 생활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영이신 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변화된 생활, 풍성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부께로부터 파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
1) 성령께서 하시는 일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성령이 오시면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 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당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체험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체험하며 하느님이 참으로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해 주시는 주님의 다스림과 가르침이 삶의 기본 원칙이 된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맛들이며, 자기 마음 안에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면 성서말씀, 전례생활, 성사생활이 더욱 생명력있게 다가오며 그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체험도 하게 된다. 성령의 도움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이들은 성령 안에서 사셨던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의 생애를 깊이 이해하게 되고, 이웃과 보다 친밀한 사귐을 나누게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된다.
2) 기도생활을 도와 주는 성령
성령께서 에페소 교회의 신자들에게 내리셨을 때 신자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사도 19,6). 이상한 언어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 들을 수가 없고,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1고린 14,2).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신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탄식하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신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신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신다(로마 8,26-27).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는 자기자신을 돕는다(1고린 14,6). 바울로 사도는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권면한다.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도 생활의 변화이다. 그는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기도생활에서 벗어나고 기도생활에 맛들이게 되어 전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된다. 그는 더욱 자주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되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며,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어로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초대 교회 때에는 성령께서 내리신 경우에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사도 2,4; 10,44-48; 19,6-7), 오늘날에도 이 은사를 갈망하는 경우에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내려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이 이상한 언어는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이기에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모르는 우리를 도와 주시려는 성령께서 영감을 불어 넣어 주시는 기도로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풍성하게 해주고 영적인 성장을 도와 주며 보다 풍성한 성령 안의 생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다른 이보다 이상한 언어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1고린 14,18).
성령 안의 생활에 있어 기초가 되는 은사인 이상한 언어는 주로 봉사은사가 아닌 기도은사로 사용되지만, 때로는 해석의 은사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예언의 은사와 비슷하게 봉사은사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성으로 하는 노래처럼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언어로 하는 기도는 심령기도라고 부르고, 이상한 언어로 하는 예언은 심령 예언이라고 부르며, 이상한 언어로 하는 노래는 심령노래라고 부른다.

4. 성령의 은사와 열매
1)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9가지 은사
"은총의 선물은 여러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4,7).
성령께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보다 능력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9가지 은사를 주신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나누어 주신다(1고린 12,8-11).
성령께서는 우리가 공동체에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봉사 은사를 베풀어 주시고 키워 주신다.
(1) 지혜의 은사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1고린 12,8)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실천적인 말을 하게 하여 주어진 환경 속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한다.
(2) 지식의 은사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설명하거나 설교를 할 때 영감을 받아 말함으로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은사이다.
(3) 믿음의 은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골로 2,20). 어떤 일이나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적 확신을 줌으로써 기적을 이루는 바탕이다.
(4) 치유의 은사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1고린 12,9). 자연적 수단이 개입될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에 기인된 육체적 심리적 영신적 치유 즉, 재생이 일어나는 성령의 현현이다.
(5) 기적의 은사
"그 무렵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사도5,12). 자연적 은혜를 넘어서서 놀라움과 더불어 주어지는 은혜로, 중대한 병의 즉각적인 치유같은 윤리적 기적 등이 있다.
(6) 예언의 은사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1고린 14,5-39). 하느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나 공동체에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7) 분별의 은사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1데살5,19-20). 하나의 생각, 활동, 사건 그리고 은사의 원인과 근원이 다른 무엇의 힘인지 아니면 성령인지를 아는 것은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내적 계시이다.
(8) 심령 예언의 은사
"어떤 사람은 여러가지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다"(1고린12,10). 기도회 때 어떤 사람(보통으로 성령 안에 성숙한 사람)을 움직여 영적인 깨달음을 은사적 언어(이상한 언어로) 큰 소리로 내어 말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다.
(9) 해석의 은사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한다"(1고린14,27). 한 사람이 큰소리 심령 예언을 하면 그 일반적인 뜻을 모국어로 말하도록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2) 개인의 성화를 위한 7가지 은혜
성령께서는 개인의 견고의 은사로 우리에게 7가지 은혜를 베푸신다.
(1) 슬기 :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보다 귀하게 아는 지혜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사정에 관심을 갖게 한다.
(2) 통달 : 구원의 진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은혜이다.
(3) 의견 : 우리가 행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식별하게 하는 은혜이다.
(4) 지식 : 믿어야 할 진리와 믿지 말아야 할 허위를 식별하는 은혜이다.
(5) 굳셈(용기) : 신앙생활에 수반하는 장애를 극복하는 힘을 주는 은혜이다.
(6) 효경 : 하느님께 대한 자녀적 사랑을 증진시키는 은혜로서 하느님께 대한 열성을 북돋아 준다.
(7) 두려움(경외심) :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는 은혜이다.
3) 성령의 9가지 열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활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1) 사랑 :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가페적인 사랑, 즉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다.
(2) 기쁨 : 기뻐해야 할 일이 없어도 샘솟는 기쁨, 하느님의 사랑,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느끼는 것이다.
(3) 평화 : 세상풍파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화로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4) 인내 : 비록 일이 지연되는 경우라도 실망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5) 친절 : 이웃의 어려움을 알고 따뜻하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6) 선행 : 주님께서 주신 재산, 시간, 재능을 관대하게 다른 이를 위하여 사용한다.
(7) 진실 : 거짓이 없이 신뢰할 수 있고 착수한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충실성을 의미한다.
(8) 온유 : 자제된 힘, 약자에 대해서도 부드럽게 대할 수 있는 힘이다.
(9) 절제 : 육정을 눌러 주님의 주권하에 복종시키는 힘과 권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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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8 교리공부
    1. 전례
    /images/icon/dot1_gre3.gif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
    /images/icon/dot1_gre3.gif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속 수행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
    /images/icon/dot1_gre3.gif 교회가 성서나 성전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공인한 의식으로 개인의 신심생활과는 구별
    전례의 목적
    전례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거처가 되게 하고, 신자들을 굳세게 하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선포하게 하고 한 목자 아래 한 무리가 되게 함
    전례의 세 분야
    1.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인 미사
    2. 우리를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케 하는 성사
    3. 교회가 매일 드리는 성무일도
    공적 예배인 전례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서'와 '성사 예식서 '를 따라야 한다.
    전례의 일치와 참여
    일치된 전례행위 - 전세계에서 같은 날, 같은 형식, 같은 지향으로 하느님을 찬미함
    신자 각자는 전례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례를 함께 행하는 것임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말씀, 음악, 기도 - 우리의 마음을 하나되게 하고 뜨겁게 만들어 하늘 나라로 초대
    우리가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함은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누리는 것
    전례기도의 조건
    미사, 성사, 성무일도 등은 전례이고, 십자가의 길, 로사리오 기도, 기도회 등은 여러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지만 전례가 아니라 신심행위.
    전례기도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첫째, 교황청이 인준한 기도문 사용
    둘째, 교회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하며
    셋째, 정식으로 임명된 사람이 전례를 지도함.
    2. 전례주기(주년)
    /images/icon/dot1_gre3.gif 교회는 1년을 한 주기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 즉, 재현함.
    /images/icon/dot1_gre3.gif 그리스도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되고 그의 부활로써 완성되기 때문에 전례주년도 성탄과 부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음
    /images/icon/dot1_gre3.gif 성탄은 부활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부활이 교회 전례의 정점
    /images/icon/dot1_gre3.gif 성탄 준비기간 - 4주간의 대림시기
    성탄시기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성가정,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주의공헌, 주의 세례, 주의 봉헌 축일을 수반하고 성탄을 위해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성모성탄, 성모영보,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축일, 성 요셉 축일, 성요한 세자 축일, 대천사 축일 등이 이어짐
    /images/icon/dot1_gre3.gif 부활 준비기간 - 40일간의 사순시기
    부활시기는 예수수난[성지], 빠스카의 3일과 계속되는 부활주일들, 승천,성령강림을 수반하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예수성심, 예수의 거룩한 변모, 성 십자가 현양, 그리스도왕 축일 등이 계속 됨.
    대림시기의 전례
    새해의 시작 : 대림 제 1주일 - 이 날부터 교회력[전례력]은 새해가 시작
    말씀의 전례는 3년을 한 주기로 편찬 - 1999년은 A해, 2000년은 B해, 2001년은 C해의 순서
    대림시기 동안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음.
    대림환 : 대림시기 동안 푸른 나뭇가지와 네 개의 초를 꽂아 만든 것으로써 구세주께서 어느 정도 가까이 오셨는지 알려 주어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 켬.
    성탄 전례
    성탄 대축일 미사 : 모든 사제는 미사를 세대 드릴 수 있는 특권, 미사경문도 세 가지
    첫째 미사 - 밤중에 드리는데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영원히 탄생하심을 경축함.
    둘째 미사 - 새벽에 드리는데, 성자께서 영원으로부터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사이에 육체를 가지고 성모 마리아 몸에서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심을 경축.
    셋째 미사 - 낮에 드리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요, 구원자로 오심을 경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장엄하게 선포.
    성탄 8부 : 너무나 큰 축일이기에 성탄 후 8일간 성탄을 축하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새로 나신 예수님께 흠숭과 사랑을 드림..
    8부까지 축제를 지내는 축일은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 뿐이다.
    성탄8부는 성 스테파노 축일(26일), 성 요한 사도 축일(27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28)일, 성 가정 축일(8부 내의 주일), 8부의 마지막 날(1일)인 천주의 모친 축일등 이미 정해져 내려오는 축일 때문에 축제의 의미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구유조배 : 예루살렘 신자들이 성탄 밤에 베들레헴 현지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을 부러워한 로마의 신자들이 5세기부터 마굿간 모형을 만들어 그 앞에서 성탄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가 예루살렘 성지순례에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더 잘 인식시키기 위하여 짐승과 새들까지 구유 앞에 등장시켰고 이를 널리 보급시킴.
    성탄 밤 미사 전에 구유를 꾸며두고 말씀의 전례와 함께 예수 아기를 구유에 모시는 장엄한 행렬을 함. 행렬 후 새로 나신 예수 아기에게 조배를 드리고 새 삶을 다짐.
    성탄나무 : 상록수에 금실, 은실, 별 등으로 장식하여, 온갖 은총[금실, 은실]을 가지신 분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상록수]을 주시고 세상의 빛[별]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표현.
    주의 공현 전례
    삼왕래조 축일이라고도 하는 주의 공현 축일은 교회력의 가장 오래된 큰 축일이며 의무적 축일 - 한국에서는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냄[원래는 1월 6일].
    공현이란 말은 '나타남, 나타내어 보여줌'이란 뜻.
    옛부터 교회는 이 축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세 가지의 중요한 신비를 기념함으로써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세상에 알린다.
    이 주간으로써 성탄시기가 끝남.
    사십일[사순]
    사순시기는 우리의 육체적 고신극기나 단식을 통한 참회의 생활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여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기
    40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 정화하는 데 필요한 기간을 상징.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축일 전 6주간 중에서 주님의 축일인 주일을 뺀 40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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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주간×7일 - 6일[주일] + 4일[재의 수요일까지 역산] = 40일
    재의 수요일
    사제는 지난 해 성지주일에 나누어 주었던 성지를 회수하여 재를 만들고, 이를 축성하여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세 3, 19) 하며 자신과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다.
    재는 죽음을 상징하고, 재를 얹는 것은 방자했던 자신을 채찍질하여 낮추고 참되게 사는 방법을 찾도록 한다.
    이 날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극기, 금욕, 자선을 권장 -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기 위한 훈련.
    사순시기의 각 주간의 지향
    1. 세례 : 이 기간 동안 예비자 선발예식을 하고 성 토요일[부활성야]에 세례식을 하기 때문에 미사의 독서나 기도문은 세례를 주제로 함.
    2. 속죄 : 원래 사순시기 동안 죄를 범한 신자들이 공적으로 보속 - 희생. 기도, 자선
    3. 예수님의 수난 : 사순시기 초에는 예수님의 외적 수난 사건에 앞서 예수님이 어두움과 악의 세력과 투쟁하는 모습 → 사순 제 5주간부터는 예수님의 수난이 극대화하여 성주간에 절정.
    성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전 한 주간 - 예수님이 위대한 구원사업을 이룩하는 때요, 교회전례의 정점을 이루기 때문에 성주간이라 함.
    성주간은 예수수난[성지]주일부터 시작.
    성지주일에 사제는 성지[빨마가지]를 축성하여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루살렘[교회]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다함께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
    말씀의 전례 때에는 수난사가 봉독.
    성 월요일 - 예수님의 죽음[장례]을 예고,
    성 화요일 -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
    성 수요일 -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실지 예고.

    이 3일 동안에 특별한 전례는 없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다.
성 3 일
3 일은 성주간의 후반부 3일인데 주의 만찬으로 시작되고 부활 전야제로 절정을 이루며 부활주일 저녁기도로 끝난다.
성 목요일 전례
이 날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 유언을 남기셨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제자 유다 이스가리옷의 배반으로 이교도들의 손에 붙잡히셨던 날.
성유 축성 미사 : 예수님이 당신 사제직을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주셨음을 기념.
이날 아침에 주교좌성당에서 주교와 사제단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성유를 축성 - 주교와 사제들의 일치가 표현, 사제들은 약속 갱신식을 거행.
성유는 사제들이 세례, 견진, 신품, 병자성사를 집행할 때 사용.
주의 만찬 미사 :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저녁식사로써 당신을 만인에게 성체성사로서 주심을 기념. "서로 사랑하라" (요한 13, 34)는 새 계명이 선포되는 미사.
강론 후에 세족례 - 예수님이 사도들의 발을 씻으면서 남기신 사랑의 계명을 상기시켜 서로 봉사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뜻을 가르치는 예식.
영성체 후 성체를 본 감실에 모시지 않고 비워둔 채 현양제대에 모시고 제대를 벗김 - 예수께서 3일 동안 땅에 묻혀 계셨음을 드러냄.
영성체 후 기도를 마친 다음 사제는 성체를 현양제대에 모시고 분향 - 성금요일 수난예절까지 신자들은 성체조배 함. 이것은 올리브산에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기까지 기도와 번민으로 고통당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함.
현양제대로 성체가 옮겨질 때부터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예절에서 십자가를 벗길 때까지 십자가를 가리워둠.
성 금요일 전례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라 죽음의 산 골고타로 오르셨고, 십자가상에서 희생제물로서 죽으신 날.
교회가 미사를 드리지 않는 유일한 날. 다른 성사도 집행하지 않음.
수난예식 : 예수님이 운명하신 오후 3시경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목상의 이유로 더 늦은 시간에도 거행.
십자가 경배예식 :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십자가는 구원과 생명의 나무이며 계속 세상을 새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
영성체를 위하여 본 제대로 성체가 옮겨지고 남은 성체는 별실에 모셔둔다.
성 토요일 전례 (부활성야)
사순시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성 토요일 밤의 전례는 모든 전례의 극치.
이 날은 교회가 주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 - 제대도 벗겨진 채 그대로 있고 미사도 드리지 아니한다.
이 밤은 주께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참 삶으로 건너가심[빠스카]을 기억하는 밤 -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자유로, 죄의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의 죽음에서 영생[부활]으로 건너감을 체험하는 밤.
빛의 예식 : 불과 부활초를 축성하고 불의 행렬을 한다. 부활로써 어둠의 권세를 몰아내고 세상에 나타나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린다는 뜻에서 이 예식을 거행.
말씀의 전례 : 일곱 개의 독서와 일곱 개의 층계송을 노래한 후 대영광송을 장엄하게 노래로 시작. 풍금과 종을 다시 치고 이때부터 영광송을 하게 된다.
세례 예식 : 세례수 축성과 세례식 후 모두가 촛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영세자와 함께 세례서약을 갱신.
부활 전례
부활 축일 결정 : 부활 대축일은 유다인들의 과월절[빠스카] 축제에서 유래하므로 유다인들의 월력으로 니산(Nisan)달 14일에 지냈으나 지금은 춘분이 지난후 만월 다음에 오는 첫 주일에 지낸다.
부활초 : 부활초는 부활성야에 축성하며 성령강림까지 제대 옆에 두고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 불을 켠다.
부활초는 에집트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을 비추며 앞장 서서 인도하던 불기둥(출애 13, 21;14, 24 참고)을 상징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신다는 표지.
촛불은 초가 탈 때 사랑의 불로 작열하고 어둠을 몰아 내는 빛이 되어 영광스럽게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본성과 내적 모습을 나타냄.
부활초에는 구원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상징하기 위하여 희랍문자의 첫 글자인 A와 끝 글자인 Ω를 새기고 그 해의 수자를 새겨 넣음.
부활 삼종기도 : '부활의 날'인 주일과 부활시기에는 삼종기도를 할 때 서서 함 - 서 있는 자세는 살아 있는 인간의 자세, 기쁨의 자세, 승리자의 자세.
부활 8부 축제 : 부활의 기쁨을 하루에 끝내지 못하고 부활시기의 첫 8일 동안을 주님의 대축일로 지냄.
부활 축일이 신앙의 근본 축일이므로 12세기부터 8부로 끝내지 않고 성령강림까지 7주간을 축제기간으로 지내기 시작하였음.
8부의 전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망애 삼덕으로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을 나타냄.
부활 달걀 : 부활 대축일에 달걀에 그림이나 글씨 혹은 기호를 새겨 선물.
옛부터 달걀은 봄 혹은 생명의 상징. 중세에는 사순절 동안 달걀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부활주일에 달걀을 주고 받는 관습으로 바뀜.
부활 행렬 : 부활주일 미사후 선두에 꽃으로 장식된 십자고상이나 부활초를 앞세우고 노래와 기도를 하면서 행렬 -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 기쁨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임을 경축.
예수승천 대축일
승천은 예수님과 우리, 우리와 하느님 나라와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주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한 사건.
예수님은 승천으로써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그분은 영광을 입으시고 모든 시간과 공간에 자리하시게 되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고 약속하셨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존을 일시 거두셨지만, 신앙인의 마음속과 기도하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며, 특히 성체성사로서 현존하신다.
원래 승천 축일은 부활 후 제 40일[성령강림 10일 전]에 지냈음.
승천 축일 후 9일 동안 성령을 기다리면서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 - 여기서 '9일 기도'라는 말이 나오고 어떤 특별한 은총을 구하기 위해서 9일 기도를 하는 관례가 생김.
성령강림 대축일
불혀 모양으로 강림한 성령은 사도들의 지혜를 밝혀주고 마음을 뜨겁게 해주며 여러 가지 언어를 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뭉쳐 나가기 시작했다(사도 2, 1-47).
성령은 부활한 예수님의 영이요, 그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위로자[협조자]와 보호자로 오신 분.
성령께서는 전례 안에 활동하시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전례행위를 그리스도의 행위가 되게 하심. 이 날 특별히 미사 중에 '성령송가'를 바침.
연중시기
부활시기는 성령강림으로 일단 막을 내리고, 하늘 나라를 묵상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긴 준비기간인 연중시기가 시작.
성령강림 후 첫 주일 -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으로 더욱 뚜렷이 드러난 삼위일체 대축일.
그 다음 주일 -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 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세워주셨지만 죽음이 임박한 상황이라 복된 성사 안에 우리 주께서 현존하여 우리와 함께 계심을 경축할 여유가 없었음.
그 다음 금요일 - 예수성심 대축일, 성 금요일의 신비 중의 하나인 창에 찔리신 예수성심을 기념.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부터 대림시기까지는 그리스도 신비의 특수한 면을 경축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경축.
긴 연중시기가 계속되다가 11월 1일에 성령의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른 모든 성인 성녀들을 기념하는 '모든 성인의 날'을 맞음 - 종말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차려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라는 가르침.
그 다음 날 - '위령의 날'.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이니 하늘 나라에서 모두 반가이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
연중 마지막 주일 - '그리스도왕 대축일'. 그리스도는 세말에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오실 왕이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최고의 흠숭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축일로 정함.
주일 : 일요일이 시작될 때 무덤에서 영광스럽게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분은 바로 우리를 위한 빛이요, 생명이요, 기쁨이 되었고, 죽음과 암흑을 없애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 주일을 거룩하게 경축하는 것이 전례생활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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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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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7 교리공부
    1.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여러분은 회개(悔改)하고 복음(福音)을 믿으시오" (마르 1, 15).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核心)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있으며, 이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에 대해 여러가지 비유와 기적 그리고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심으로 깨닫게 해준다.
    당시의 유다인들의 사고에는 어떤 의로운 지배자를 그리워했으며 언젠가는 이 이상이 실현되리라 희망하여 왔다. 당시의 유다인들의 희망(希望)을 총괄하는 개념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의지할 데 없고 무력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고 도움을 받으며, 불의한 지배로부터 해방(解放)되는 기쁨과 평화(平和)가 넘치는 곳이리라 희망하였다. 이를 위해 아주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며, 이 새로운 시작은 생명과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 새로움,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것, 연역적으로 불가능한 것, 더구나 조작될 수 없는 것, 그러기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 결국 '하느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느님의 하느님이심, 그 분의 주님이심을 뜻하며,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인간임과 세상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하느님의 다스림'은 창조 질서에 적대적인 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解放), 구원(救援)받을 길이 없을 만큼 서로 찢겨져 있는 실재 상호 간의 화해(和解)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느님 나라의 비유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 역사 체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에집트를 탈출할 때 놀라운 기적으로 당신 백성들을 건져내셨으며(출애 13,17-15,21)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도 줄곧 당신 자신을 섭리의 하느님, 길을 이끄시는 하느님으로 드러내셨다(출애 16-40).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에 이웃 나라와 많은 충돌을 하며 줄곧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작가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신앙을 명백히 종말론화(終末論化)하기 시작한다. 이 '작가 예언자들'은 과거의 출애굽이나 하느님과의 계약 체결과 같은 과거의 모든 위대한 구원위업(救援偉業)들이 미래에 가서는 더욱 거창하게 재현되리라고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새로운 계약', 어떤 '새로운 출애굽'을 희망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종말론적 희망(終末論的 希望)은 장차 일어날 사건 보도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 희망은 오히려 어떤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위로(慰勞)와 희망(希望)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결국 이 세상의 지배자로 오셔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리라는 신앙(信仰)의 확신(確信)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상태에서 새롭고도 결정적인 희망(希望)을 제시하였다. 예수님은 이 종말론적 희망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 15).
    수많은 세대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지금 다 되었다고 선포하신다.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되도다! 사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루가 10,23-24).
    예언자들이 선포하던 그 때가 다 된 것이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마르 4, 26-29).
    또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된다"(마르 4, 30-32).
    또 하느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신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비슷한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 33).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 안에 숨겨져 있고, 그 작은 것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은 가장 작은 것 안에 숨어있음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나의 감추어진 현실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현재 안에 바로 지금 이 자리에(Here and Now)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이 바로 이 세상 한 가운데로 몰래 뚫고 들어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3. 하느님 나라의 완성
    우리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매우 막막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로서 사회의 개혁 같은 엄청난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 속에 살면서 그 생활 양식을 전수받았다. 우리는 독이나 약 모두를 이 사회와 함께 마시고 살아간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한 존재인가를 통감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험지옥과 같은 입시 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자기 자식만은 될 수 있으면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한다. 소비 사회의 낭비를 반대하지만 상점에서 상품 하나를 사는 일 자체가 그러한 사회 구조에 가담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렇듯이 우리는 마치 큰 바다에 떠 다니는 해초와도 같이 사회의 가치관에 휩쓸려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는 바위에다 계란을 내리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는 무에서 천지를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시며 마침내 는 이 세상을 모두 포괄하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하였지만 '아직 아니'(Not Yet)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렇듯이 완성의 도정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맛들이고 거기에 동참하는 생활이어야 하겠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멋진 삶에 눈을 뜬 사람은 이 세상이 보장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지 숨겨 두고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장사꾼과 비슷하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물러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4. 하느님 나라를 위한 협력자의 생활양식
    예수님의 진복선언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 5장은 이 진복선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을 예수님의 산상설교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생활 양식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산상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으로써 제시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마태오복음 5장 38절에서 39절, 43절에서 45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오히려 누가 당신의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을 돌려대시오....'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계명은 참으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듯이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 양식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적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규칙과 계명처럼 억지로 사랑해야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애를 써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계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우리가 죄많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서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생활 양식과 타인에 대한 관계 양식이 변화될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생활양식이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할 때 틀림없이 이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데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 어떠한 체험을 하고 어떠한 생활 양식을 이루고 있는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각자 반성해 보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변화될 때 교회가 변화되고 마침내 세상이 변화될 것임을 굳게 믿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하느님 나라를 전해야 할 사명
    우리 모두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어두움과 악의 세력이 만연하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가난한 사람들, 즉 우리에게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모른다. 경제성장과 번영, 능률을 최대의 가치로 삼는 사회, 너무도 시끄럽고 분주하게 우리를 일로 몰아 붙여서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더욱 빼앗아 가는 사회, 자기의 이익과 성공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고 이에 필요없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말살시키려는 사회, 이런 사회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 의(義)를 찾아가는 것, 자기의 이해와 관계없이 참으로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설령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혁되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이 하느님 사랑의 도구로써 활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 스스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위해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를 관철시키셨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 역시 우리의 삶과 죽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증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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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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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6 교리공부
1.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금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살아 계시던 때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은 시골의 한 예언자가 놀라운 기적을 하면서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처음 얼마 동안은 중풍병자나 나병 등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고작인 줄 알고 안심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의 병자들을 고치는데 그치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음이 병든 사람들도 고쳐 주셨다. 그것도 병든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당신이 몸소 찾아가서 그들의 병을 보살펴 주셨다. 또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소외받고 핍박받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갈릴레아 호수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겨우 수십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켰고 그때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마침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지자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은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지배를 따르면 그만이었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쫓아내고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그 불안은 더 커졌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이렇게 하는 권한이 있는지를 따지기 시작한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들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으로 예수님을 묵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찌기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의 예고에 따라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한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박해는 처음부터 고의적이고 무지막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다 듣고 나서 백성들이 보고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대답이나 부활논쟁(루가 20.20-40)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답변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고 또한 겉꾸며 길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니 조심하라고 말씀하셨고 이런 사람들은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셨던 것이다(루가 20,45-47).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트집을 잡지도 못하고 망신을 당하자 예수님을 미워한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율법의 적용을 무색하게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질투하였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한낱 시골의 예언자로만 보지 않고 자기들의 경쟁자로 보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들을 조사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트집잡을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백성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율법을 안 지킨 때가 여러 번 있는 예수님은 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었다. 그때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이 가져다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더 좋아하면서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초기의 예수님 행적을 멀리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로 치부하면서 그들은 되도록 예수님에 관한 것을 모르는 체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지금까지는 아무도 넘겨다 보지 않았던 율법학자들의 권위에 예수님이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어서 그들은 예수님을 증오하게 되었다. 곧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마치 그들의 계획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바로 이때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그들을 만난다. 이 만남으로 예수님은 며칠 후에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묻히심
이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과월절이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예루살렘의 어느 집 이층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것이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루가 22.14-20).
과월절의 본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할 때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 옛날의 조상들이 종살이 하던 것을 구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는 조상들이 고생하던 때를 생각하여 쓴 풀과 누룩없는 빵 그리고 속죄의 의미로 양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예절과는 다르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빵을 드시고는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하셨다.
또 잔을 드시고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 여러분을 위하여 쏟는 것이다" 하셨다. 그런 후에 당신이 한 제자의 배반에 의해서 곧 잡히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는 고통스러운 말이었다. 그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게 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전에도 하느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괴로워 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려 들지 않는 백성들을 보시고 무서운 예언을 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셨다(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저주하심 - 루가 10,13-15.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심 - 루가 19,41-44).
아무튼 이때의 예수님은 착잡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을 하셨다. 즉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협조자로 성령을 보내겠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맡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언을 제자들에게 하신 후에 그 방을 나와서 전에 갔던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그곳에 있는 게세마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떨어져서 혼자서 기도하신다. 이 기도를 하는 동안 예수님은 온갖 인간적인 고통과 번민을 느끼신다.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즉 아무리 중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나약한 인간의 심경으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간구한다. 즉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다가오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다가오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 후에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신다. 얼마 있지 않아서 깜깜한 밤 중인데도 유다가 성전 관리병들과 함께 올리브산에 와서 예수님을 체포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는 대제관의 집으로 갔다. 베드로는 스승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겁이 나서 도망쳤지만 이내 스승이 걱정되어서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라 대제관의 집에까지 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추궁으로 베드로는 또 겁이 나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이때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이곳에 없었다.
한편 대제관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잡혀온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면서 때렸다.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은 최고의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곳에 예수님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증명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들이 내놓은 증거나 증인들이 하는 말은 어느 것도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떻게 해도 그런 죄목은 예수님에게 맞지 않자 그들은 끝에 가서 억지를 부린다.
즉 "그러니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대제관이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대로라면 누구든 '하느님'이라는 말조차도 함부로 말해서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님처럼 시골 예언자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알고 계시지만 예수님은 "내가 '그'라고 여러분은 말한다"하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씀을 갖고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다음날 대제관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에게는 사형 권한이 없음을 이유로 하여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준다.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흔히 볼 수 있는 군인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대제관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표면적인 죄목은 '유대민족을 이간하여 황제에게 세금내는 것을 막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말한 점'이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별도로 예수님을 심문해 보고는 대제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위험 인물이 아니라고 보았다. 빌라도 조차도 대제관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알고서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을 또 다른 사람, 헤로데에게 넘겨준다. 헤로데라는 사람은 로마 총독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에 불과한 유대인의 왕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로마의 총독이 허가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아무런 권한이 없었던 헤로데이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건네 받았지만 별다른 심문은 하지 않고 그저 장난이나 치고는 다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빌라도는 짜증이 나서 축제 때마다 유대인 죄인 하나를 풀어주었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예수님을 매질이나 해서 풀어 주려고 한다. 그러나 대제관들은 빌라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예수님은 죽이고 그대신 바라빠라는 죄인을 풀어 달라고 한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요구한 예수님의 사형은 그저 단순히 칼로 목을 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요구한 사형의 방법은 그 시대에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만 언도하였던 '십자가 형'이었다. 이 형을 받은 죄인은 자기가 매달리게 될 십자가를 들고 형장으로 가기 전에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시를 돌았다. 로마의 총독은 자기들에게 반항한 죄인들에게 이런 가혹한 형벌을 주었다.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보고 로마에 반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이 사형장에 도착하는 동안 이제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조롱과 모욕을 모든 사람들에게 받았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보고 침을 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저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욕설은 듣기만 해도 보통은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쓰러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꾀를 부린다고 조롱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때린다. 그 험한 길을 걸어 오는 동안 예수님을 도와 준 사람은 키레네 사람 시몬 뿐이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죽어야 할 장소인 '해골산(골고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군인들은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예수님의 옷을 벗기우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게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눕자 그들은 예수님의 양 손목과 발등 위에 커다란 못을 들고 주저없이 박았다. 그리고 십자가를 들자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대제관들의 시기심에 의해서 예수님은 억울하게 잡혀와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게 되었다. 즉 예수님 때문에 백성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대제관들은 질투심을 못 이겨서 예수님에게 잔악한 보복을 한 것이다. 본시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작은 명패를 달았다.
I.N.R.I.(Jesus Nazarenus Rex Judaeorum) 곧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것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죄명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명패는 유대 지도자들의 보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보인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시면서 서서히 죽으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도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또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하고 하실 뿐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자 아무도 그분을 거두어서 무덤에 묻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선 대제관들이 그것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도 자신이 당당한 의회의원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빌라도에게 가서 허가를 받아서 자기가 아는 빈무덤에 예수님을 묻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는 가운데 쓸쓸히 돌아가셨다. 단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십자가 아래서 지켜본 사람은 성모 마리아와 몇 사람의 여자들, 그리고 제자로는 유일하게 요한 뿐이었다. 이들은 안식일 전날에 예수님이 빈무덤에 묻히시는 것을 지켜 보았다.
3. 예수님의 부활
그 여인들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와 향료를 발라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고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저 조용히 지냈다. 그 여자들은 안식일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 갔다. 여자들은 무덤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덤에 있었던 어떤 사람이 실의에 빠진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준다. 즉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전에 갈릴레아 계셨을 때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시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여자들은 사람들이 무서워 숨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대로 알려 주었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도 깜짝 놀라서 무덤에 와 보기는 하였지만 아직 믿지는 않았다. 얼마 후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에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4. 예수님의 수난, 고통, 죽음 그리고 부활의 구원적 의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특히 성삼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한다. 즉 성목요일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을, 성금요일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성토요일에는 부활하심을 기념한다.
가톨릭의 십자가는 개신교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이 달려 계시며 몸에 오상이 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십자고상'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처럼 처참한 죽음을 하셨을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멸망될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체험과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이룩하신 업적의 가장 중대한 측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한 구원에 대한 개념을 갖고 예수님의 행동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당신이 받은 소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셨다. 즉 가난한 사람과 소외받은 사람들을 찾아 가서 위로하셨고 억눌리고 천대받던 세리와 창녀들을 따뜻하게 대하여 인간다운 해방을 주었다. 그리고 과부와 병든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행동에서 잘못된 곳을 찾아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곳은 도무지 보이질 않다. 오히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불안과 불행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준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구원 사업은 인간의 육체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보다 인간의 정신적인 면의 구원에 더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하여 잡힌 여인의 통회하는 모습을 보시고 용서하심으로서 그녀를 구원하셨다(루가 7,48 -50). 또한 통회하고 뉘우치는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내리셨다(루가 19,9).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구원은 주어진다. 다시 말하면 먼저 자기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 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수난과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한 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은 어찌보면 모순된 말씀으로 제시되었다. 즉 스스로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될 것이다(마태 19,39; 루가 9,24; 요한 12,25).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후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지옥의 저 아래에까지 내려 가셨다가 다시 그 죽음의 힘을 물리치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중에서 첫째로 태어나신 분"으로서(사도 26,23; 골로 1,18) 구원된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첫번째로 들어가신 분이시다. 그분은 "영광의 주님"으로서(1고린 2,8)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주인이시고(사도 3,6-8 참조) 하느님의 능력을 띤 강자이신다. 이렇게 부활이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그것은 환생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이 부활이 있었기에 사도들은 신앙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부활이 주는 기쁨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기쁨보다도, 가장 순수하고 최고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구약의 빠스카와 비교될 수 있다. 본래 빠스카라는 의미는 '거르고 지나가다'이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구하기 위해서 모든 생물의 첫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집 대문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칠했는데 그것은 생명의 구원을 약속하는 표시였다. 곧 죽음의 천사는 그 표시가 있으면 거르고 다음으로 건너 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도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죽지 않고 파라오의 종살이라는 속박에서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이처럼 구약에서 양의 피가 지녔던 것을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그대로 실천하셨다. 어떠한 잘못이나 흠집이 없는 순결한 양이 죽임을 당하여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이 보게 됨으로써, 또 천사가 보게 됨으로써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나아가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해방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이 순수하고 온화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여 그 처참한 몰골을 우리들에게 보이심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단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의 시기심이나 질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의 이웃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죄의 종살이를 해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우리가 매일 범하는 시기심과 질투심이라는 죄악 때문에 당신이 빠스카의 제물인 어린 양처럼 산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대로 하셨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되는 산 제물의 봉헌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죄의 종살이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이렇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이 세우신 성체성사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시는 약속의 재현이며 그것의 실현이다.
이것은 매주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고 성찬 중에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러한 빠스카의 의미를 매일의 미사 중에 성체성사 안에서 늘 새롭게 재현한다. 빠스카의 신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에서 죽고 또 부활하여 예수님과 만남으로서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뿐 아니라 내세까지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니는 구원의 의미
성서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유언하신 것처럼 복음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이러한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은 자캐오가 한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거나 바리사이들처럼 거절하여서 멸망에 빠지거나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주저없이 복음을 받아들였으므로 구원을 선택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생활에서 노력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또 가까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생활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때 그 용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 구원이 매일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이러한 통회와 신앙의 고백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빠스카의 신비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즉 진정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여야겠다. 또한 축성된 성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나아가서 생활의 나눔을 통해서 나의 이웃과 일치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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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5 교리공부
1. 예수님은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人間)이시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셨는지 그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듯이,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
1) 예수의 탄생과 성장
예수님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식민지 통치 아래서 태어난 유다인이었던 셈이다. 그분의 아버지는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분이었다(마태 1,17; 루카1,27).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약혼만 해놓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의 힘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는 것이다(루카 1,34-35).
이같이 태어나신 예수님은 목수이셨던 아버지 요셉(마태 13,55)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살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며 "슬기와 키"가 자랐다(루카 1, 40.52).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면서 자랐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목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그분도 목수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마르 6,3).
2) 예수의 공생활
이렇게 자란 예수님은 30살 쯤 되었을 때(루카 3,23) 가정을 떠나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의 가정을 떠나 당신의 새로운 가족(마태 12,48-50)을 만들고 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신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을 뽑아 그들과 함께 지내셨다는 것이다.
(1) 예수님은 가르치는 분이다.
예수님은 함께 지내는 제자들에게 여러가지의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자들뿐 만 아니라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기쁜 소식을 가르치고 설명해주신다. 예수님이 가르칠 때는 어려운 말씀을 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당시 사람들이면 누구나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다. 예를 들면 양떼와 목자, 씨 뿌리는 사람, 포도원, 겨자씨, 등잔불, 누룩, 친구 이야기, 결혼잔치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가르치신다. 예를 들면 유다인들의 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이나 회당(루카 4,16),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혼인잔치를 하는 집(마르 2,1; 루카 5,29)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같이 어떤 건물 안에서만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호숫가에서 서서(루카 5,1), 물 위에 떠있는 배 안에서 앉아서(마르 4,1), 그리고 땅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도(요한 8,5.8) 가르치셨다. 심지어는 먹고 마시는 도중에도 가르치신다(루카 6,27-39).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마르 1,15)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마태 22,37-40; 루카 10,25-28)이었다.
(2) 예수의 인간적인 언행(言行)들
예수님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통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들, 예를 들면 기쁨, 분노, 사랑, 즐거움, 감사, 동정심 같은 것을 다 느끼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싫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기도 하고, 또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에 슬픔을 보이신다(마르 3,5).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집인 성전(聖殿)을 더럽힌다고 그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들어 엎어 버리는 과격한 행동을 하시기도 한다(마태 21,12).
또 백성들 앞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이던 당신의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에 갈 심판을 피하랴?"(마태 23,33)하고 욕을 퍼부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과는 달리 어린이들을 사랑하셔서 껴안기도 하고(마르 10,16),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라는 세 남매를 사랑하셔서(요한 11,5), 라자로가 죽자 비통한 마음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3.35).
이것만이 아니다. 그분은 굶주리기도 했고(마르 11,12), 먼 여행에 지쳐 낯선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기도 하신다(요한 4,6-7).
또 배 안에서 배의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기도 하고(마르 4,38), 잔치집에 가서는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마태9,10).
3) 예수의 죽음
사람이면 누구나 죽듯이 그분도 죽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요한 19,19-22).
다시말해서 당시 로마의 지배에 도전할 위험한 인물이라는 죄 때문에, 그리고 유다인들에게는 오직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사칭했다는 죄 때문에 정치범으로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분은 죽음을 앞에 두고 무서워 떨며 번민하고, 괴로워 하신다(마르 14,33-35).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탄식을 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결국은 33살이라는 나이에 숨을 거두셨다(마르 15,34.37).
2. 예수님은 하느님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일생은 완전한 실패이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눈에 보이게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는가? 아니면 장가를 들어서 자손들이라도 많았나? 지금의 사회 기준으로 보면 그저 철이 들만한 나이가 되니까 가출해서 자기 식대로 살다가 당시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결국은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일생을 마친 불행한 청년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손수 뽑았던 제자들마저도 예수가 잡히던 그 순간에 모두 도망 가버렸다(마태 26,56). 모든 것이 말 그대로 공(空)이다.
1) 제자들의 증언 -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라는 사람이 언제 있었더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땅에 묻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마태 28,6-7).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2) 제자들의 신앙고백 - 부활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다
바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때까지 스승인 예수의 죽음으로 실망하고(루카 24,17), 자기들까지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에 질려 있던 제자들을(요한 20,19)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놓는다.
제자들의 경우와 똑같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이 죽거나,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인생을 좀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 제자들도 이제 새로운 눈,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것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나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하기 시작한다(사도 2,14).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예수를 부활시킨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라고 말이다. 이제 제자들의 고백은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간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버지 하느님과 항상 일치하고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다고 말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구세주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자신들과 함께 하시던 일들에 대해서 새로이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야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시라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은 세상의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이시라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그 분의 일생은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께서 함께 하신 일생이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전에 죄인들을 용서해주거나 병을 고쳐준 기적들과 귀신을 내쫓은 행동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3)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우리가 예수께 드려야 할 대답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참된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오빠 라자로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요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5-27).
3. 육화의 신비
1) 어떻게 둘이 하나이고, 또 하나가 둘일 수 있는가?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이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일 수 있으며, 또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 신비로운 것을 육화(肉化)의 신비 또는 강생(降生)의 신비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되셨다는 신비이다.
이처럼 신비스러운 것이지만 그래도 이것을 간단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여기 날달걀이 있다. 이 달걀을 예수님이라 생각해보자. 그럼 이 달걀을 깨서 유리그릇에 담아 보면 흰자와 노른자가 있다. 여기서 흰자를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 즉 예수님의 인성(人性)이라고 하고 노른자를 예수님의 하느님적인 면, 즉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보면 이 달걀, 즉 예수님 안에는 분명히 인성과 신성이 함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는 그 인성과 신성이 지금 보시는 흰자와 노른자처럼 눈에 보이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달걀을 휘저어 보자. 흰자도 노른자도 안 보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분명히 이 안에는 흰자가 있고 노른자가 있다. 그렇다. 지금 휘저어 놓은 달걀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시지만 그 두 가지가 떨어지지 않고 완전히 하나로 되어 있다.
2)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육화의 신비는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의 우리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의 처지가 되셨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서의 말씀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루카 2,11-12).
하느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한 갓난 아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시니까 마음대로 선택해서 잘 사는 귀족이나 왕의 아들로 호화로운 집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육화의 신비는 예수님의 일생 안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 우선 30년간에 걸친 나자렛의 가정 생활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느님이시라면 굳이 부모님 슬하에서 자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철저하게 한 인간이셨기에 보통 인간들이 겪는 성장 과정을 다 겪었다는 말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이나 권세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 좀 더 쉽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 창녀, 지체부자유자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항상 찬밥 신세이던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또 그들과 함께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선포를 시작할 때 하신 일종의 취임사 같은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이 말씀들을 실제로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셨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육화의 신비가 잘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 있을까? 아니 하느님이시라면 죽음의 고통을 당하더라도 겉으로만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셨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고통뿐만 아니라 고문과 십자가형이라는 극도의 고통까지도 실제로 다 겪으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가장 비참한 인간의 처지에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육화의 신비가 가장 잘 드러난다. 결국 예수께서는 성서의 말씀처럼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신의 가난으로 여러분이 부요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2고린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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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3 교리공부
1. 계시란 무엇인가?
1) 종교학적인 의미
(1). 어원 - '계시(啓示)'-'revelatio'(라틴어)라는 말은 라틴어 'revelare'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의 뜻은 '드러나다','나타나다', '열어 밝히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계시(啓示)'란 어떤 '감추어져 있는 것', '가려져 있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고, 나타내고, 열어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종교학적으로 볼 때 '계시'는 '거룩한 것(聖)'이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히는 것이다.
(2)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이고 자신을 감추어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거룩한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 체험할 수 없다.
(3) 그러나 '거룩한 것'은 가끔 예외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거룩한 것'이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어떤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때)'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럴 때에는 언제나 '속(俗)된 것'을 매개로 하여 드러낸다.
'장소', '사물'을 통한 체험 - '거룩한 것'은 때로는 일정한 사물, 즉 나무,바 위,하늘 등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이때 인간은 이러한 사물을 통하여 거룩한 것을 체험한다.
따라서 인간이 커다란 바위나 오래된 나무 앞에서 절하는 것, 하늘을 두려워 하고 경천사상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나무, 바위, 하늘을 통하여 '거룩한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주위에는 사적이든지 공적이든지 특별히 생각하는 '공간'이 있다. 그 예가 도심 속에 존재하는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룩한 장소는 '신들에로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창세기 28,12-19에서 야곱이 꿈에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천사를 본 그곳인 것이다. 종국적 인간은 '존재'를 갈망하고 그 종교적인 인간의 심원한 향수는 '신적인 세계'안에 거주하려는 것이며 자기 집이 성전처럼 표현되어 신들의 집을 닮고 싶어한다.
즉, 태초에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났을 때의 그대로 순수하고 거룩한 우주에서 살려는 욕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건'을 통한 체험 - '거룩한 존재'는 때로는 일정한 사건과 그 사건과 관계된 인간을 통하여 자신을 열어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 성인이나 예언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거룩한 존재'를 만나기 때문이다.
(4) 이와같이 '거룩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안에 자신을 드러낸다. 즉, '사물'과 '사건'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사건'이 '거룩한 것'을 만나게 되면 그 '장소'와 '역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고, 구체적으로 '거룩한 장소와 사건' 을 띠게 되는 것이다.
결국, 종교학적인 의미에서 '계시(啓示)'란 '거룩한 것'이 자신을 '열어 보이거나,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다. 또한 그 '계시'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2) 성서적인 의미
성서적 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거룩한 존재자인 인격신이 자유로이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에 있다. 즉, 성서는 계시자이신 '거룩한 존재'가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으로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계시의 성서적 특징은 역사적 행위 안에서 완성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룩한 하느님이 시간의 제약 안으로 들어 오셔서 천천히, 점진적으로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가) 구약성서
(1) 성서 : 탈출기 3,1-7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모세야"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
이 장면은 '거룩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즉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사무엘의 현시(visio)는 사무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루어지지만 불타는 가시덤불에서는 하느님이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이 장면의 특징은 모세가 하느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에 있다. 또 하느님이란 '거룩한 분'을 만난 장소도 곧 '거룩한 장소'가 되어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야'할 정도로 구체적인 거룩한 장소, 거룩한 공간이 된다. 그리고 모세가 '거룩한 분'을 만났을 때의 행동을 보자.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는 모세의 행동에서 일반적으로 인간이 어떤 신비한 존재를 체험할 때 느끼는 그 어떤 두려움의 체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비스러운 존재 앞에서 인간은 '경외심'을 갖게 된다.
(2)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실질적인 삶이었으며, 생존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 (탈출 3,13-15;이사 64,1 이하), '권능'(예레 16,21), 당신이 하신 '위대한 일'(하바 3,2)을 계시하신 것이다.
(3) 역사 : 그런데 하느님의 계시는 '역사'안에서 발생하므로,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의 역사는 하느님 계시의 대상과 수단이 된다.계시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행동하신다는 의미이다.
(a) 인물 : 하느님은 특정한 사람들,즉 아브라함·모세·예레미아·에제키엘,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
(b) 사물 : 또한 자연사물을 통한 계시를 보면, 하느님은 폭풍, 구름기둥, 불기둥, 나무소리, 바람소리 등의 자연사물의 형태 안에 자신을 드러내시어 인간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c) 특정한 장소 : 그리고 계약의 궤, 천막, 성전, 하느님의 지팡이, 희생제물 등도 계시의 특정한 장소가 되는 곳이다.
특히 구약성서 탈출기,신명기 등을 읽어 보면, 어떤 특별한 사건, 일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들안에 하느님이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수많이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계시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이사40,5;60,2), 당신의 정의(이사56,1), 당신의 사랑(시편85,8)을 드러내심으로써 나타나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동시에 인간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나) 신약성서
"때가 다 되어"(마르 1,14) 다가온 하느님의 계시는 나자렛 예수의 인격안에 현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신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신 자기 계시의절정이자 완성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의 공적 계시는 완결되었다.
히브리서 1,1-2을 읽어 보자.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위의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가지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이제 '이 마지막 시대'에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시대'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도 바오 로의 말씀에 비추어 요한 복음 1,1-4.9-14.18을 살펴보자.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말씀이 곧 참 빛이셨다. ...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는 이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고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거룩한 존재'인 하느님이 사람으로 '육화(肉化)'(Incarnatio) 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거룩한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자리하셨다는 사실에서 "말씀은 영원하나 그 말씀이 육화할 때에는 언제나 역사를 입는 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 거룩한 존재인 하느님은 "임마누엘(Emmanuel)"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마태 1,23)으로 드러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계시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요한복음 안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특징은 "나는 ... 이다"라는 선언이다. "나는 착한 목자, 문, 빛, 하늘로 부터 내려온 빵이며, ... 부활, 길, 진리, 생명이다". 이러한 "나는 ... 이다"(요한 8,28)라는 절대적 선언은 하느님의 공현인 자기 계시의 절정이다. 더 나아가 요한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해서 표현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 안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분(요한5,39)"이시며,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요한 11,27)",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고 말씀하시는 분,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7,11)"이신 분 ..., 이러한 증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삶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사도 바오로의 계시 체험
- 사울의 개종(사도 9,1-19) -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희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 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울은 자신의 과거 껍질이 벗겨지고 삶이 새로와 졌다. 예수를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구원이란 이처럼 삶의 양식이 바뀐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계시는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3) 교의신학적인 의미
교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계시는 초세계적인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열어 보이시는 것으로 성서적인 입장과 같다. 계시는 능동적 계시(revelatio activa)와 수동적 계시(revelatio passiva)가 있지만,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이 스스로 당신을 열어 보이셨다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천명하고, 이 초자연적 계시가 역사적 행위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공의회는 말한다.
한편 공의회는 하느님 계시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 자연적 방법의 계시 - 하느님의 창조물인 피조물 안에서 자연적 방법으로 하느님의 계시가 파악되기도 한다.(지혜 13,1-5; '자연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
-집회 42,15-25)
(2) 초자연적 말씀계시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일 때 그 계시를 '공적계시'(revelatio publica)라 부르고, 한 개인에게 해당될 때에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라고 부른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공적 계시의 절정이고 종결임을 선포했으며, 계시의 확실한 선포는 마지막 사도가 죽으면서 끝났다고 말한다.
당신 제자들에게 예수 님은 모든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당신 외아들을 주셨으므로(요한 3,16)"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이상 하실 말씀과 보내실 분이 없으시다. 따라서 계시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나자렛 예수의 인격적인 현존 그 이상을 넘어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공의회는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는 아무런 공적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임을 천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계시가 담긴 성서와 성전의 해석은 교회의 교도권에 있다
교회는 계시의 "장소"(place)이다. 사도들은 교회의 증거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 또한 교회는 계시의 성서적인 증거를 계속 현실화시키면서 계시를 새롭게 '전하여' 준다.
전례, 설교, 성서의 말씀, 주교들의 가르침, 공의회와 교황의 가르침, 전승, 교부들의 저서, 신경과 참회, 신학자들의 업적-등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현실화 시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계시가 전수된 성서와 성전의 올바른 해석은 교회의 교도권에 있다.(계시헌장 2,10)
3. 성령의 빛으로 계시 인식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고 하느님의 공적인 계시이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자기 계시로 알아본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가?
심지어 3년동안 동거동락을 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여 예수님이 잡히자 모두 도망쳐 버렸다.
제자들이 예상한 그리스도는 화려한 왕관을 쓰고 굳센 능력으로 로마인들을 쫓아 내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처럼 영화로운 시대로 변화시켜주는 그러한 세속적인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으로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 이점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한 때는 언제였을까?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 안에 성령이 임하실 때였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한14,20)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임하셔야 만이 하느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령에 의하여 사도들은 수십년이 흐르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실 때에 이해하지 못했던 계시의 내용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계시'의 인식을 위하여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엠마오'로 가는 길(루카 24,13-35)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을 깨닫을 수 있었던 것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며,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음을 열고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인식을 위하여 언제나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 된다.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로마 10,8;신명 30,14)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집회 51,26)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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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TAG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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