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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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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0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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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죄(원죄)
1) 아담의 죄
창세 3,1-24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계명중 하나를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깨뜨리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이었다. 이 불순종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과 악을 아시는 하느님과 같아 지기를"(창세3,5) 원한 데서 출발한다. 즉 자기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기를 원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척도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종속되기를 거부함으로서 인간을 하느님께 결속시키는 끈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상대로 비슷하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두시지 않고 당신 생명까지 내놓으시는 분인데(참조 지혜2,23)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은 무한히 자애로우신 하느님께 대하여 의혹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께서 당신 특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신 술책이 아닌가 하고 또 그 계명에 수반되는 경고는 거짓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이제 인간은 자기의 경쟁 상대로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된다. 즉, 처음에는 하느님을 무한히 완전한 분으로서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무사 무욕하여 베푸시기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이제는 피조물한테서 자신을 방어하는데 급급하고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하느님으로 여기게 된다. 이렇게 죄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자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적 부패보다 더 근본적인 타락은 없는 것이다.
2)죄의 결과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양심의 가책은 그 한 예이다. 즉, 죄를 짓기 전에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던 아담과 하와는 잘못에 따르는 벌을 받기도 전에 벌써 하느님 야훼를 피하여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게 되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편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여 하느님을 기피한다. 그러니까 낙원에서의 추방도 인간의 그러한 마음을 확인해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추방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경고가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생명의 나무에 가까이 갈수 없게 됐고(창세 3,22) 결국 결정적 죽음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추방됨으로서 이때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았으며 또한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게 됐다. 그 사실은 이미 낙원에서 살았던 최초의 남녀 사이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하자마자 아담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반려자로 주신 자기 여인을 고발하면서 연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이 분열은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며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최초의 죄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을 안겨다 주는 요인을 제시하고서야 끝을 맺는다. 물론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독립하려다가 도리어 벌로 추락된 노예 상태는 본래 언제까지나 계속될 결정적인 것이었다. 또 일단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는 그것은 계속 불어 날 뿐이었고 죄가 증가됨에 따라 생명은 감소의 길을 걸었으며 마침내는 대홍수로 인해서 단절되게 되기까지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인간측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을 회복하는 화해는 하느님 편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최초의 죄의 이야기 안에는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몸소 이 화해를 실현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다(창세3,15). 인간이 경멸한 하느님의 선하심이 끝내는 승리하게 됨을, 즉 창세기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가 움트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2. 이스라엘의 죄
1) 금송아지의 경배
예전에 이스라엘은 자기편의 아무 공로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지상의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되고 특별한 사랑을 받아 하느님의 장자라는 특전을 입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의 노예 생활과 하느님을 섬길 수 없는 죄의 땅에서 해방 시키기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 구원 사건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안다. 이러한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에게 "증거의 판"(출애31,18)을 주심으로서 풀릴 수 없는 관계를 맺으시는 바로 그 순간에 이스라엘은 아론에게 "우리 선두에 서서 거닐 신을 만들어 주시오"(출애 32,1)하고 청하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표징으로 당신의 성실하심을 증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야훼께서 너무 멀리 계시고 보이지 않는 분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야훼께 대한 참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있고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 그 진노를 가라 앉힐 수 있는 신, 달리 말해서 그들이 "하느님과 함께 걷는" 대신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어 주기를 원하는 자기 중심적인 하느님을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최초의 죄는 순명의 거부였음을 보았다. 그것은 좀더 깊이 고찰해 볼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자신을 위탁하기를 거부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와 더불어 바알을 예배하려는 유혹, 즉 우상숭배에 빠질 때 현저하게 드러난다.
금송아지의 이야기에 이어서 신명기 9장 22절에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하나의 죄를 들고 있다. 그것은 탐욕의 죄이다. 이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기적적으로 내려주신 만나보다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더 좋아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민수11,4-6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위탁하기를 거절하고 하느님께서 광야의 영적 체험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신명8,3참조) 거절한다. 그들의 탐욕은 충족되지만 아담에게서와 같이 하느님의 길을 그들의 길로 대치할 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를 경험한다(민수11,33).
2)예언자들이 고발하는 죄
예전에 이스라엘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예언자"라고 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죄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의 실현을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며 유일한 장애물이라고 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죄는 매우 구체적인 실체로 사람들이 야훼를 저버림에 따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들은 폭력, 약탈, 부정한 재판, 허위, 간통, 위증, 살인, 폭리, 권리 침해 등이며 한마디로 사회적 질서의 파괴라고 보았다.
이사야라는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을 갈라 놓는'(이사59,2) 이 죄악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죄의 고백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실상 우리의 악행들이 우리와 함께 있사오며, 우리가 우리의 잘못들 그것들을 잘 아옵나니, 곧 악을 행하고 야훼를 불신하며, 우리 하느님을 피해 달아나고, 압박과 반항에 관한 말을 하며, 마음으로부터 거짓말들을 지껄였다. 법규는 뒤로 제쳐 놓인바 되고 의리는 멀리 서있을 뿐이고 진실함이 대중 앞에서 짓밟혔고 정직함이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사 59,13-14).
그리고 예언자는 하느님을 떠나서 건방지게 스스로 서고자 하는 자는 타인, 특히 가난한 자와 약자를 짓누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는 자"(시편 52,9)는 "언제나 악한 뜻을 품고"(시편52,4) 의인은 "언제까지나 주님의 자비에 의탁한다"(시편 52.10)고 보았다. 사무엘 하권 12장에 나오는 "다윗"의 간통죄가 이미 암시하는 것도 역시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삽화는 이스라엘의 죄 관념을 명확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인간의 죄는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까지 상해 드린다는 것이다.
3) 하느님께 대한 모욕으로서의 죄
죄가 직접 하느님 자신을 해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해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해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이했을 때(2사무 12,9-10) 단지 한 인간을 상해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권리의 보호자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갈라 놓음으로서 그분의 사랑의 계획을 헝클어 놓는다는 의미에서도 하느님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가 점점 더 계시됨에 따라 인간의 죄가 어떻게 하느님께 "모욕"을 끼치게 되는지 그 참뜻이 더 명백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죄는 자애 깊은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배은망덕한 행위(이사 64,7)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어떤 인격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죄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이 보답되지 못함으로 고통당하시는 것, 즉 그분 사랑이 상처를 입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으며 그 참뜻은 신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계시되게 된다.
4)죄의 치유
예언자들이 죄를 고발하고 그 중대성을 분명히 밝힌 것은 백성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회개시키기 위해서 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충실하여도 항상 성실하시고 인간이 당신 사랑을 거절하여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는 한 당신께 돌아오기를 계속 독촉하신다는 것이다.
죄는 사랑의 거부이기 때문에 죄가 제거되거나 용서되는 정도는 인간이 다시 사랑할 것을 어느 정도 수락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기를 요구하지 않는 "용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부정하면서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자체가 인간의 회심을 강하게 요청한다.
그러므로 인간측에 첫째로 요구되는 조건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독립되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서 죄의 근원적 요인을 단절하는 것이다.
3. 예수님과 죄인들
복음서를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이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가 결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변혁 없이 순전히 하느님의 일방적 행위로 이루어진다고는 가르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도 옛 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과 같이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내맡기도록 정신의 철저한 쇄신 즉, 회개를 가르치신다.
그 대신 비유에서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나 빛을 거부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분 역시 속수무책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예언자들처럼 가시는 곳마다 죄를 고발하신다. 특히 계명을 규정대로 잘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렇게 하신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의 내부에 자리잡고서 거기에서부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가지의 죄가 나와 삶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로움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는 결국 사랑의 계명으로 귀착된다. 제자들은 스승의 행동을 바라봄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의 거부인 죄가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된다. 제자들은 특히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예언자들의 교훈과 비슷한 점이 많은 '탕자의 비유(루가15,11-32)'는 신약성서 중의 어떤 비유보다도 죄가 왜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며 용서가 죄인 자신의 회심없이 일방적으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당치 않는 것인지를 말해 준다.
이 복음 내용을 통해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불순명 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했던 것은 아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아 자기 곁을 떠나 갔다는 사실과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식을 사랑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집에 있지 않음으로서 아버지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하여는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서 다시 아들로 대우 받기를 수락하는 길 밖에 없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기쁨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회개 없이는 이 비유에서 용서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용서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용서의 힘은 실제로 아들이 되돌아가는 행위를 통해서만 효력이 나게 된다.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이러한 태도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보다도 행동으로서 잘 계시하신다.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하느님의 자비심을 이해 못하고 이를 곡해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도 구애되시지 않고 비유의 아버지와 같이 사랑과 보살핌으로 죄인들을 받아들이신다.
4. 자비로우신 하느님
죄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척도의 기준을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또한 아담과 하와가 서로 잘못을 떠 넘김으로서 책임을 회피했듯이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같이 죄는 사회적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특히 인격적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우리들이 죄에 대해 보다 효과적으로 회개하기 위해서 이며 하느님과의 은총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다. 더욱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충실하여도 항상 성실하시고 인간이 당신 사랑을 거절하여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탕자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언제든지 되돌아 오기만 하면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빠졌더라도 이에 절망과 실망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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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2:59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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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과연 하느님의 모습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성서의 창세기 제 1장 26절을 살펴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 짐승과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들짐승들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라고 적혀 있다.
닮았다고 하는 것은 똑 같다는 말과는 구별이 된다. 닮았다는 말이지 결코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느님이 될 수 없고 그분과 비슷하게 되려고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누굴 닮았다고 하는 것은 누구와 비슷하다는 것이지 그 사람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얼굴을 고치고 성격을 개조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따라서 하느님을 닮은 인간에서 '닮다'라는 표현은 모습이라는 말에 내포된 동등함이라는 개념을 배제시키기 위하여 덧붙여진 것이다. 또한 우리 모습, 곧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이란 동물이 갖추지 못한 인간의 지성, 의지,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하느님께 인간을 다른 피조물의 관리자로 내세우시기 전에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고 이 관계를 통하여 인간에게 마땅한 자격과 권위가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2. 인간 창조의 의미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먹을 양식이나 물이나 땅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먼저 인간이 필요한 세상을 만드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필요한 여러가지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만드셨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성서가 하느님께 창조받은 세계가 무엇이며 인간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둘 다 인간 창조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진흙을 빚는 옹기장이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공통된 표현법이며 이 표현법은 창조 행위를 묘사하는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귀속되어 있음과 인간의 취약성을 강조하는데 의도 가 있다.
여기서 잠깐 인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느님 ⇒ 사람 ⇒ 짐승 ⇒ 고기와 새 ⇒ 해, 달, 별 ⇒ 땅(풀과 나무) ⇒ 창공(하늘과 물) ⇒ 빛(낮과 밤) 등을 피라밋식으로 그려놓고 볼 때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지능이 높은 고등 동물이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맨 나중에 만들어졌고 인간 위에는 하느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약육강식의 피라밋과 같다.
하느님은 인간을 다스리고 인간은 동물을 다스리고 동물은 식물을 다스리며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땅을 다스리고 땅은 물을 다스리고 있다. 바로 자기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어있는데, 결국 인간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초대된 것이다. 이는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인간 중심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고 보존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고 있다. 이 초대를 무시하고 거절하면 인류는 동료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태계를 파괴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직권남용인 것이다.
3.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속성
인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 많은 말들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예를 들면 영혼, 자유의지, 진, 선,미, 지성, 사유, 등 많은 것들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특별한 것 몇 가지만을 살펴 보자.
1) 영혼의 존재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영혼을 간직하고 있다. 영혼이란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으신 것이다. 창세기 1장2절에는 태초에 아무 것도 없었고 하느님의 기운 (영)이 휘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는 그냥 "있어라" 하셨지 당신이 빚으시고 만드시고 입김을 불고 하시지 않으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자유의지의 선용
인간만이 선과 악을 행할 수가 있다. 여타의 다른 피조물들은 선이나 악을 행할 수가 없다. 호랑이가 다른 동물을 안잡아 먹는다고 해서 선이 되거나 다른 동물을 많이 죽인다고 해서 악이 되거나 하느님 대전에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다.
따라서 동물들은 아름다움이나 선을 추구할 수가 없고 그냥 본능대로 행동할 따름이다. 또한 물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를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이 정해주신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이다.
3) 진, 선, 미의 추구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인간만이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되고 바른 것을 추구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여 선을 행할 줄 안다. 살아 움직이는 것 중에서 인간만이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굶어 죽을 수가 있다고 한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강아지라 할지라도 먹이를 앞에 두고 굶어죽을 수는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고귀한 힘인 것이다.
4) 인간의 이성
인간만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술에 만취가 되어 본능에 따라 행동할 때 이성을 잃었다고 말한다.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이성이란 이치에 따라 사리를 분별하는 성품인데 인간만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섭리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능대로 먹고 마시고 싸우고 제멋대로 살아간다면 이것은 인간의 근본 이치를 망각하는 것으로써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5) 봉사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희랍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 오직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을 수가 있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안다는 것이다.
동물들의 세계를 사회라 하지 않고 무리 또는 군이라고 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해서 질서가 잡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자인 호랑이의 우두머리도 힘이 없으면 그 무리에서 쫓겨난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읽어 봤으면 허준의 스승이 허준을 위해, 아니 인간의 의술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위 등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허준이 그 모습을 보며 인간은 대단한 존재라고 감탄을 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볼 수가 있다.
실로 인간만이 위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결코 죽음을 좋아하지 않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며 하찮은 벌레일지라도 위험이 닥치면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볼수 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 죽음을 추구할 줄 알고 삶을 버릴 줄 안다.
6) 인간의 양심
인간의 속성 중에서 특이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의 양심이다. 양심이란 사물의 선악을 구별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취하려고 하는 도덕적 판단으로서, 특히 자기 행위에 대하여 품는 선악에 관한 윤리 의식이다. 이러한 양심은 동물이나 여타의 피조물에는 없다. 이 양심은 인간을 더 아름답게 하고 영혼을 살찌우게 하며 인간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4.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서의 인간
창세기 1장 26절에서부터 31절까지에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은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모든 이성과 지혜와 의지 등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의 과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모든 피조물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어떤 형태로든 발전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 바로 발전이 없다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거나 죽은 것일 것이다.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의 활동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조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공심판을 나타내며 종말을 뜻한다. 따라서 종말이 올 때 까지 인간에게 맡겨진 것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되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개발하고 발전시키라는 것이지 그것을 파괴하고 멸종시키고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로 땅을 지배하라고 하심은 이 지배가 창조적이어야 하지 수탈과 파괴로 자행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력은 자유로이 그러나 책임있게 행사되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앞에서 세계에 대하여 져야 할 그의 책임을 필연적으로 포괄한다. 오늘의 문제는 인간의 이 권력을 자연을 위해서 어떻게 하느님 앞에 책임있게 사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을 질서있고 조화있게 가꾸며 멋있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생명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5. 인간 활동의 가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에덴 동산을 만드셨으며, 에덴 동산을 돌보게 하셨다.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의 완성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담은 에덴 동산을 돌보며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들짐승과 온갖 날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 성서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이름을 받는 존재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 존재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담은 모든 짐승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짐승 하나하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짐승을 다스린다는 것은 노동의 행위로서 노동의 신성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승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취시키는데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사목헌장 34항)라고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에 언급된 것처럼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여긴다고 해서 인간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노동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이 없을 때 그것은 아주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을 통해서 다른 인간에게 봉사할 수가 있고 노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완성시키며 이 사회와 세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동은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공경하는 것이 될 것이고 먼 훗날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이 지상에서 행한 모든 노동의 대가를 받을 것이다.
6.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자세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위하여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몇 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전세계에는 인종갈등, 종교갈등, 민족분규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전쟁과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전쟁이 없었던 때는 불과 300년밖에 안된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다국적기업의 횡포 속에 수백만의 인류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어느 나라에는 쌀이 남아 논밭을 갈아엎는가 하면 어느 한쪽은 수백만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류가 충분히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을 주셨음에도 인간이 피조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분명히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양식을 충분히 주셨고 온갖 짐승과 날짐승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어김으로 인하여 심각한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으며 수많은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은 앞으로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우선 모든 인간은 똑같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앞에서 인간은 상호 협력하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듯이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야 한다. 똑같은 하느님의 피조물인데 어찌 내 가족 내 국가 내 민족을 구분하여 차별하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똑같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겨 옆의 형제 자매 모든 인간들에게 협력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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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2:59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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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 기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루카 복음은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자주 묘사한다(루카 3,21; 5,16; 9,29; 10,21). 그리스도는 중대한 행동이나 사목 활동을 하기 전에 드러나게 혹은 은밀하게 기도하셨다(루카 4,1).
    예수님은 사도들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기도의 완전한 모형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는 거만하지 말며 성실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단순하고 솔직한 말로 기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와 은총의 생명이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신앙고백인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겸손되이 복종하려는 마음으로(루카 11,9-13) 기도하므로 이기적인 기도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며, 하느님의 계획에 의하면 어떤 은총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만 내려진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기반을 둔 삶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써 표현되어 나온다.

    2. 기도의 3가지 효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기도의 효과는 세 가지인데 첫째,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뿐 아니라 다른 혜택을 얻게 하여 마음이 영성적으로 원기를 얻게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기도 형태를 따르면 기도는 사람의 삶을 변형하는 효과를 낸다. 우리는 먼저 생활을 정리하고 나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나친 활동을 피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 활동이 기도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자주 몸과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하는 것이다.
    셋째, 기도는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사람을 새롭게 한다. 태도와 가치관의 복합체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다듬고 가꾸고 훈련해야 한다. 기도의 마지막 결과는 그리스도의 평화, 자신 안에서 느끼는 조화로운 질서와 균형, 하느님 안에서 영원의 눈길로 이 세상을 보는 눈, 자신의 내부와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누는 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점차로 가까와지게 한다.

    3. 기도의 정의(定義)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기도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돌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감사하며, 그분에게 은혜나 용서를 청한다.
    현대에 넓은 의미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정의 내린다. 기도는 대화이며, 하느님이 먼저 시작하시어 이미 첫 마디를 발표하셨다. 즉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미사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가톨릭 전통은 기도의 기반으로서 성서를 읽을 것을 적극 권장하며, 기도와 관상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 하였다.

    4. 기도의 4가지 종류
    목표나 이유에 따라 기도는 네 종류가 있다.
    흠숭 기도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절대적 의존성을,
    감사 기도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청원 기도는 무엇을 위한 요청을,
    통회 기도는 죄에 대한 통회를 나타낸다.

    기도에 있어 이와 같은 요소는 서로 겹치는 것이 보통이다. 하느님께 향한 모든 참된 기도는 자연스럽게 흠숭, 감사, 통회가 포함되어 있다.

    5. 무엇을 청할 것인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무엇을 원할 때에만 하느님께 나아가 청하고서 그것을 즉시 얻지 못하면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기도를 중단한다. 이것은 분명히 비그리스도교적인 태도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신다(루카 11,13). 그러나 우리는 가끔 눈 앞에 당장 보이는 이익에 사로잡히거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로운 것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타당하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나 청원기도의 대상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 정신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 나라의 오심,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는 것,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한 은총을 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체적 물건이나 재산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면 기도로써 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해로운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 즉 자기가 평생에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 이웃을 위하여도 기도해야 한다.

    6. 참된 기도를 위한 기도자의 자질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몇 가지 자질이 필요한데 그 중에는 정신 집중, 열심, 신뢰, 인내가 있다. 열심한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뜻하지 않은 분심이 인간의 약점 때문에 일어나도 이런 분심은 기도의 가치를 파손하지 않는다. 기도는 정신의 활동 그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의 의지를 굽히는 것이다. 열성적 행동에 평화와 즐거움이 따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기도하기가 어려울 때라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하느님께 뜻을 굽힐 수 있다. 주님은 신앙에 기초한 굳은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1,25).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이다(야고 1,6).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다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힘을 잃어서는 안된다(루카 18,1).

    7. 기도의 대상
    그리스도인은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 기도한다. 삼위 모두에게나 삼위 중 한분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다(요한 14,14). 우리의 기도는 최종적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고, 성모와 천사와 천상 성인을 향한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도록 청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에게 절대적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를 드린다. 성모와 성인에게는 다른 종류의 공경을 드리면서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그들에게 청한다(교회헌장 67).

    8. 개인기도
    주님은 개인기도를 권장하셨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 6,6).
    개인기도를 위한 특별한 규칙은 없다. 장소나 자세는 자유롭게 기도에 적합하도록 한다. 그리스도 교회의 관습은 아침기도, 저녁기도, 식사 기도를 상당히 장려하며, 위험과 유혹을 당할 때에도 기도해야 한다고 권한다.
    신앙인으로 살아가자면 개인기도라는 밑바탕이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개인기도는 전례기도를 위한 준비에도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개인기도를 잘 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는 주일미사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1) 소리기도(염경기도)
    소리기도는 말로 표현하는 기도를 말한다. 소리기도는 지정된 기도문이나 자신의 말로 할 수도 있고, 큰 소리를 내거나 소리 없이 바쳐지기도 한다. 소리기도는 기쁠 때 또는 위험할 때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으로 소리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시편, 삼종기도, 묵주 기도 등과 같이 지정된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이다. 암기할 기도문은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통회의 기도, 묵주 기도 등이 있다.
    스스로 하는 기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기도의 일종이다. 자발적인 기도는 두 가지 상황에서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할 때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예배의 응답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크나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저절로 하느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상당히 긴 기간 동안을, 특히 어른이 된 후에는 감정상태가 고조된 것도 아니고 침체된 것도 아닌 담담한 시기가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도 기도해야 한다. 어떤 열성이 없어도 계속적으로 간단없이 하느님께 신뢰하면서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


    2) 마음기도
    마음기도의 특성은 마음 속으로 깊이 하는 것이다. 이때 지능과 의지는 하느님에게 온전히 향해져 있다. 마음기도는 하느님께 더 일치하게 한다. 일정한 시간을 이 마음기도에만 바치면서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음식 만들기나 운전 등 무엇을 하면서 내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다. 마음기도는 영성생활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성덕은 하느님의 정신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 이래 영성저자들은 마음기도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그 3단계를 묵상, 애정기도, 관상이라고 부른다. 기도생활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틀에 박힌 묵상에서 좀더 단순하고 직접적 관상에로 진전한다.
    ①묵상(默想)
    묵상은 사색적인 기도이며 하느님과 성인들과의 일치를 이루며 어떤 결심에 이르게 한다. 교회의 초기 교부들과 수도자들은 지정된 시간에 영적 서적이나 성서를 읽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였다. 이것이 묵상의 최초 형식 중에 하나이고, 가장 단순한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묵상 방법은 준비, 마음기도, 결론에 이르는 세 요소를 지닌다. 묵상의 먼 준비는 묵상자의 생활 전체이다. 가까운 준비는 조용한 곳에서 성서나 다른 종교서적의 일정한 부분을 읽고, 자신을 하느님의 현존 앞에 두고, 자신이 묵상을 잘 하도록 글이나 행동으로 청한다. 묵상의 주요 부분은 주제에 관한 성실한 고찰이다. 묵상기도는 기억, 상상, 이해, 애정 등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려고 한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속 신비와 그 메시지에서 영성적 성장을 위한 기초를 세운다. 묵상으로 더 풍요로운 신앙의 신비에 이르고, 정신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마태 22,37), 마음으로도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할 동기를 찾으려고 한다. 묵상을 끝맺을 때 하느님, 성모님, 어느 특정 성인과 친숙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결심은 자신이 더 열렬히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깊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②애정기도(愛情祈禱)
    마음기도 중에 좀더 진보된 형식을 '애정기도'라 한다. 이 기도에서는 분석을 위한 사색의 부분이 별로 없다.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하느님 안에 이미 든든하게 뿌리박고 있어 하느님께로 빠르고 쉽게 들어간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에 관하여 이미 많은 것을 배웠으나 더 깊은 지식과 사랑을 갈망한다. 물론 애정적 요소는 초보자의 기도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단순하고 깊은 애정기도는 기도자가 상당히 진보하였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③관상(觀相)
    마음기도의 최고 단계는 관상이나, 관상 자체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관상은 성실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에게 현세에서 내려지는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최고 단계에 이른 관상기도는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함. 이것이 천국의 행복한 상태임)에 도달하기 전에 가질 수 있는 하느님과의 가장 가까운 관계에까지 사람을 인도한다. 관상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풍요한 체험을 주고, 커다란 기쁨과 평화도 가져 온다. 진정한 관상기도일 때 그 기도는 생활 전체가 하느님께만 온전히 바쳐진 것으로 나타난다.


    3) 합동기도(合同祈禱)
    합동기도는 실제로는 하느님께 드려지는 개인 소리기도인데,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큰 소리로 드려질 뿐이다. 합동기도는 다른 사람과 같은 자리에서 바치는 것이므로 개인기도와는 약간 다르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도에서 보여진 신앙의 증언과 투신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합동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찬미와 관상생활로의 복귀,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자 하는 소망,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자세, 성서를 정신차려 읽고, 관대한 형제애, 교회를 위한 봉사에 공헌하려는 의지를 증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효과를 간직하자면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9. 기도 습관의 교육
    부모들이 기도를 잘 배우도록 자기 자녀들을 배려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기도에 관한 교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될 때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 자연스럽게 기도할 것이다. 아침 저녁과 식사 때에 기도하는 습관과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어린이들도 따라서 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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