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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6. 19:00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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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유대계와 이방계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갈등과 분열상을 그대로 전해 주는 중요한 책이며,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질 때마다 믿음에 의한 구원과 성령에 의한 자유로운 삷을 되새기는데 늘 인용되어 온 성서이다. 믿음에 의한 의화를 논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면에서 로마서, 고린토전ㆍ후서와 함께 4대 서간성서로 꼽힌다.

●  누가 썼는가?
   
저자는 바오로다. 다만 당시의 편지글 관례대로 직접 마지막 인사(6,11-18)를 쓴 점으로 보아서는 대부분의 내용을 누군가에게 받아 적도록 했던 것 같다.

●  언제 쓰여졌는가?
   대략 50-55년, 특히 54년경에 썼을 것으로 본다. 제2차 전도 여행 중 병에 걸려 우연히 갈라티아에 머물면서 이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며(4,13) 교회를 세웠던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 중 갈라티아 교회의 문제를 듣고 에페소에 머물면서 편지를 띄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  왜 쓰여졌는가?
   바오로가 세운 갈라티아 교회에 들어 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면서 바오로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었다. 신도들은 이들에게 현혹되어 있었다. 이에 바오로는 자신을 참된 사도로 변호하고, '다른 복음'에 맞서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갈라티아 지역에 퍼진 왜곡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유대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분열되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는 반대자들과 이들에게 현혹된 갈라티아 교회의 신도들을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이끌고자 했다.

●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갈라티아서는 모두 6장이다. 반대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격정적인 변호와 논쟁을 통해 구약의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 및 복음의 진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1,1-2,21)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 갈라티아 교회에 완고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2,4: 거짓 형제들)이 들어 와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전하지 않는 바오로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있었다. 바오로 자신은 하느님께 직접 불리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전에 교회 내에 할례 문제가 생겨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을 상기시키고,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식사를 피했던 베드로를 나무라면서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의롭게 됨을 일깨운다.

   ◆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하나입니다(3,1-4,31)
   그릇된 복음에 현혹된 갈라티아 교회의 신도들을 꾸짖으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이전에 의인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된 축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방민족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밝히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이 하나이며, 하느님의 아들들임을 일깨운다. 또한 하갈과 사라의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이미 해방되었으므로 율법의 노예라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말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상속자로서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5,1-6,18)
   갈라티아인들을 현혹케 한 거짓 교사들은 심판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영을 따라 걷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하셨기에 이제는 할례나 비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육을 따른 삶과 영을 따른 삶의 열매들을 제시하여 영을 따라 걷는 이들에게는 율법이 필요없음을 일깨우면서 영을 따라 형제적 사랑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촉구한다.
 

posted by Bokto
2012. 10. 26. 13:00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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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후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이다. 초대 교회의 선교상황과 바오로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를 담고 있는 중요한 책이다. 삼위일체 신앙을(13,13) 가장 명백하게 전해 주는 성서이기도 하다.

● 언제 쓰여졌는가?
   
바오로는 코린토전서와 후서 사이에 한 통의 편지('눈물의 편지'라고 부른다)를 보냈다고 밝히고 있다(2고린 2,4.9; 7,8.12). 이 편지가 코린토후서에 포함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되고 있다. 두 통의 편지를 하나로 엮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먼저 쓴 '눈물의 편지'의 일부가 10-13장이라 하며, 1-9장은 나중에 보낸 '화해의 편지'라고 한다. 하지만 한 통의 편지로 코린토후서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앞서 보낸 '눈물의 편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다만 '화해의 편지'만이 전해지는데 이것이 코린토후서라고 주장한다(여기서는 1-9장과 10-13장이 내용과 어조에서 서로 많이 다르므로 두 통의 편지로 이루어졌다는 견해에 따른다). 대체로 이 두 통의 편지는 55-57년 사이에 쓰여졌으며, '눈물의 편지'는 에페소에서, '눈물의 편지'보다 반년쯤 뒤에 쓰여진 '화해의 편지'는 마케도니아에서 썼다고 본다.

 누가 썼는가?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다. 바오로가 쓴 편지들 중에 코린토후서만큼 격앙되고 흥분된 어조로 쓴 편지는 없다.

  왜 쓰여졌는가?
   바오로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문제로 디도와 다른 협조자 한 사람을 코린토 교회에 파견하지만, 바오로가 세운 코린토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은 바오로를 반대하고 바오로의 사도직을 부정하면서 이 파견자들을 거부한다. 이때 코린토 교회 신자들은 이 거짓 사도들의 편에 서 있었다. 이에 바오로가 직접 코린토 교회를 방문하지만 바오로 역시 심한 비난과 모욕을 받고 에페소로 떠나온다. 슬픔에 싸인 바오로는 본의 아닌 자랑까지 섞어가며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불리움을 받아 사도직을 행해온 과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함과 동시에 코린토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눈물의 편지'(10-13장)를 쓴다. 이 편지를 전해 준 디도의 응답을 기다리다 못해 마케도니아까지 달려간 바오로는 디도에게서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바오로를 모욕한 사람들을 처벌하였으며, 바오로와 화해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이에  바오로는 화해의 기쁨을 전하면서 사도직의 참된 길과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 형제애를 바탕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완결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화해의 편지'(1-9장)를 띄운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코린토후서는 모두 13장이다. 사도 바오로를 거부했다가 회개하고 화해하는 등 코린토 교회의 구원과 모든 교회의 일치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열정이 흘러 넘치고 있다.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일뿐(1,1-7,16)
   코린토 교회가 자신과 화해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동안 자신이 받은 오해에 대해 변호하면서 사도직에 대한 소신을 피력한다. 사도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이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또한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계약의 봉사자'이며, 모세보다도 위대한 몫을 맡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은 두려움과 갈등 속에서 여러 환난을 당해 왔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으며 신뢰와 희망 안에서 기쁘게 살아왔다고 한다. 설령 앞서 보낸 '눈물의 편지'가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을 슬프게 했을지라도 교우들이 회개하였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며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

     은혜로운 선행을 완수하십시오(8,1-9,15)
   코린토 교회와 화해하는 기쁨을 전한 바오로는 이제 지난 번 디도를 통해 청했던 바와 같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을 완결하도록 권고한다. 심한 환난과 가난 속에서도 기꺼이 아니 능력 이상으로 이 선행에 참여한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모범으로 들면서, 서로 베푸는 너그러움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의로움의 수확을 늘려 주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코린토 교회를 격려하고 있다.

     내가 찾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지 재물이 아닙니다(10.1-13,13)
   이 부분은 앞의 1-9장보다 먼저 쓰여져 코린토 교회에 보내진 '눈물의 편지'의 일부로 여겨지며, 시종 흥분된 분위기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바오로를 보게된다. 바오로는 누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지 똑바로 보라며 반대자들과 코린토 교회의 교우들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는 자신이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세우시는 그런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자신 안에는 그리스도의 진실이 있다는 확신을 전하고 있다. 자신이 겪었던 고난과 고뇌를 이야기하고, 자신이 받은 현시와 계시를 본의 아니게 자랑하면서도 자신의 약점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소위 거물급 사도들보다 모자라지 않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깨달아 코린토 교회의 교우들이 교화되어 구원받기 바란다는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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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2. 10. 26. 12:30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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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이다. 코린토 교우들이 처한 문제들이 다양하게 실려있어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아는 데에 중요한 성서로 꼽히고 있으며,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송가'가 실려 있다.

 ● 누가 썼는가?
   사도 바오로가 썼다.

● 언제 쓰여졌는가?
   
사도 바오로가 3차 선교여행을 하는 중 에페소에서 머무를 때(54-57년쯤) 쓰여졌다. 바오로가 2차 선교여행 때 1년 6개월 동안 머무르면서(사도 18,11)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코린토 교회가 성도덕의 문란과 분쟁으로 심각한 혼란에 빠졌음을 전해 듣고 에페소에서 편지를 썼다.

왜 쓰여졌는가?
   코린토 교인들이 적어 보낸 문제들(1고린 7,1)에 대해 답하고 코린토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고자 쓰여졌다. 코린토 교인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제기되는 분열과 음행은 결코 바오로가 전한 '십자가 복음'의 내용이 아님을 상기 시키면서 한 분 하느님 안에서 서로 일치하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일깨우고 있다.
   자유, 결혼, 우상숭배 등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도 함께 일러줌으로써 참된 교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애쓸 것을 사랑 안에서 호소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코린토전서는 모두 16장이다. 분쟁과 윤리적인 폐단, 결혼, 공동체 예배시 지켜야 할 자세, 부활 신앙 등 코린토 교인들이 부딪친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이 바오로의 사상, 열정적인 신앙과 어우러져 담겨 있다. 코린토 전서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1,1-4,21)
   코린토 교회가 서로 편을 갈라서 싸우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갈라지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같은 정신과 같은 사상으로 일치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능력에 믿음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사도 바오로 자신이 말하는 내용 역시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배웠으며 오직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만을 선포하고 있다고 한다. 오로지 복음을 위해 목마르고 헐벗고 박해를 당하면서도 견디어내는(4,11-13) 선교사의 참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5,1-6,20)
   신자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근친 상간의 음행과 교만에 대해 꾸짖고 있다. 음행을 하는 자, 우상 숭배자, 간음을 하는 자 등은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비행과 악습이라는 묵은 누룩에서 벗어나 누룩 없는 빵, 즉 순결과 진실을 지키라고 권고한다. 몸은 음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일깨우면서 음행을 피하고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라고 한다. 또한 송사가 있을 때 이교도들에게 가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지적하면서 형제 사이의 시비를 이교 법정에서 해결하는 일을 옳은 일이 아니며 더욱이 형제가 형제를 고소하는 것은 큰 잘못임을 역설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7,1-11,1)
   결혼은 죄가 아니니 서로 자유롭게 결혼을 택할 수 있지만 결혼을 했건 독신이건 현재상태에 충실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제 의무를 다하라고 한다. 또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에 있어서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느님만 계시기에 우상은 없다고 판단하여 먹을 수 있지만, 그 행동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라면 그 형제를 위해서 하지 말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우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몸으로 한 몸이 되어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11,2-14,40)
   만찬시에 드러나는 분열과 욕심을 지적하면서 성찬례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주고 있다. 최후의 만찬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전하는 것이니만큼 먼저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참여하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시면 주님의 몸과 피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준 고유한 은사는 모두 공익과 교회를 키우는 데에 이바지해야 하므로 예언이나 이상한 언어를 할 때에는 예의와 질서를 지키라고 당부한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은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은 바로 사랑의 실천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 복음의 핵심(15,1-16,24)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흘만에 일으켜지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선포도, 믿음도 모두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바오로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지시하면서 늘 깨어 믿음 안에서 굳게 서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이루라고 당부하면서 사랑의 인사로 끝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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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2. 10. 26. 10:58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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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믿음에 의한 새로운 의'를 주장한 유명한 책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리 형성에 크게 기여한 성서이다.

누가 썼는가?
바오로의 친필로 바오로 특유의 어휘들로 이루어져 있고, 초대교회 이후의 시대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다. 여러 교부들과 초대 문헌들도 바오로가 저자임을 증언하고 있다.
이는 오늘까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16,25-27(영광송)은 후대의 편집자가 첨가했다고 본다. 로마에서는 이미 교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살았었지만 49년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해 신자들이 대부분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이야기하듯이 편지를 썼다.

언제 쓰여졌는가?
바오로가 고린토에서 지낸 시기를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57-58년 겨울에 썼다고 본다.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다 전한 뒤(15,19)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15,25), 고린토에서 석달 간 체류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사도 20,2의 '그리스'는 그리스의 고린토를 말한다).

왜 쓰여졌는가?
3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마친 바오로에게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이에 로마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바오로는 로마의 신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을 알리고자 이 편지를 썼다.
이러한 면에서 다른 지역교회에 보낸 편지와 큰 차이가 있다. 다른 편지들은 그 지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또는 질문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쓰여졌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로마서는 모두 16장이다. 율법 중심의 유대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을 권고하고 있다.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 죄에 죽고 생명에로(1,1-8,39)
바오로는 먼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곳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하면서 자신을 이방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불리운 사도로 소개한다. 그리고 주로 신앙과 율법을 대조함으로써 하느님의 의(義)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의는 할례나 율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믿는 이들 모두를 위한 의(義)를 말한다.
아울러 바오로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실증하셨다고 한다. 아담 한 사람에 의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죽음(속량)으로 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부활하신 그분처럼 생명 안에서 거닐 게 된 사람들이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영을 따라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국에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리라고 함으로써 희망을 북돋우고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는가(9,1-11,39)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언약을 받은 민족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에서 나셨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으나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행업에 의존함으로써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언약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직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으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보고 회개한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오로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으로 구원이 이방민족에까지 이를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인자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만하지 말며 엄위하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지 않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새로운 생활(12,1-16,27)
그리스도에 의해 불리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죽거나 살거나 이미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벗어 버린 빛의 자녀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는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며, 사랑 이외에는 빚지지 말라고 강조한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임을 일깨우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존경하며, 다정하고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하는, 심지어 주리고 목마른 원수에게조차 먹여주고 물을 주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와 같은 사랑 실천에, 성서는 인내와 위로를 주어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성령의 능력은 그 희망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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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8. 18:54 천주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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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으며,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팔공 산괴의 주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유교의 전통이 강하였던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상주 등으로 피난하여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잠시동안 외부와 격리된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정부의 관여 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인 을해박해(1815)때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과 형제들이 그들과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839년 4월 정해박해 때에 체포된 신자들이 처형되기 한 해 전인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정을 비롯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850년대 말에는 큰 신자촌이 되었다. 경신박해(1860)때에 한티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박해가 끝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1862년 장 베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신박해로 김현상의 후손들이 대구로 떠난 후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성상돈 아우구스띠노 및 그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씨 가정과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 해 봄 문경 한실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월 19일 순교하니 그 조카 서상돈이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다.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한다.
1868년 음력 4월 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가롤로를 비롯한 30여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현재 한티의 순교자 묘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당시의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1868년 박해의 칼날을 받은 한티 공소는 한줌의 재로 변한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마을에 살던 박만수 요셉은 살아남은 몇몇의 사람들을 모아 공소재건에 앞장선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바람맞이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룬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 토마(당시 12세)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무렵 군위 칫솔에서 김재윤 플로리아노 가정과 김윤하 가정이 들어오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꼬 가정이 들어왔다.
1882-1883년 김보록 로베르또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때 신자수 39명, 고백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니, 김보록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참례하러 갔다. 이후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수가 8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전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공소재건의 의의
첫째, 순교자의 시신을 묻어드리고 이주해 와서 살았다. 이는 순교자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남은 것이 없는 곳에 성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여들었다.
둘째, 바람맞이 땅에 동네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속죄의 마음과 순교자를 따라 순교하겠다는 의지이다. 노출이 가장 심한 곳에 마을을 이룬다는 것은 죽음을 언제나 맞을 준비된 마음이다.
셋째, 조 가롤로 회장의 어린 아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모셨다. 이것은 순교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이며, 순교자들에 대한 예우였을 것이다.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순교자의 묘지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조 가롤로는 상주의 구두실이 고향으로 그의 집안은 1839년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기해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 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티 부락에 열심한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서익순과 서태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 대(代)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주 장원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1857년 상주에 도착한 이들은 2년간 살다가 1859년 장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1866년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리델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대구에 와서 박해에 관한 소식을 전하자 신자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는데, 서태순은 문경 한실로, 그의 형 서익순 가족과 서상돈 가족은 한티로 피난을 갔다. 서태순과 부인 김데레사와 7세된 남자아이는 1866년 문경에서 잡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조카 서상돈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서태순의 옥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한번은 서태순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옥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참혹한 광경에 이후 서상돈은 평생 쌀밥을 먹지 않았다 한다. 서태순 베드로가 1866년 12월 18일에 34세의 나이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형 서익순이 한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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