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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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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6. 13:00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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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후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이다. 초대 교회의 선교상황과 바오로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를 담고 있는 중요한 책이다. 삼위일체 신앙을(13,13) 가장 명백하게 전해 주는 성서이기도 하다.

● 언제 쓰여졌는가?
   
바오로는 코린토전서와 후서 사이에 한 통의 편지('눈물의 편지'라고 부른다)를 보냈다고 밝히고 있다(2고린 2,4.9; 7,8.12). 이 편지가 코린토후서에 포함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되고 있다. 두 통의 편지를 하나로 엮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먼저 쓴 '눈물의 편지'의 일부가 10-13장이라 하며, 1-9장은 나중에 보낸 '화해의 편지'라고 한다. 하지만 한 통의 편지로 코린토후서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앞서 보낸 '눈물의 편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다만 '화해의 편지'만이 전해지는데 이것이 코린토후서라고 주장한다(여기서는 1-9장과 10-13장이 내용과 어조에서 서로 많이 다르므로 두 통의 편지로 이루어졌다는 견해에 따른다). 대체로 이 두 통의 편지는 55-57년 사이에 쓰여졌으며, '눈물의 편지'는 에페소에서, '눈물의 편지'보다 반년쯤 뒤에 쓰여진 '화해의 편지'는 마케도니아에서 썼다고 본다.

 누가 썼는가?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다. 바오로가 쓴 편지들 중에 코린토후서만큼 격앙되고 흥분된 어조로 쓴 편지는 없다.

  왜 쓰여졌는가?
   바오로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문제로 디도와 다른 협조자 한 사람을 코린토 교회에 파견하지만, 바오로가 세운 코린토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은 바오로를 반대하고 바오로의 사도직을 부정하면서 이 파견자들을 거부한다. 이때 코린토 교회 신자들은 이 거짓 사도들의 편에 서 있었다. 이에 바오로가 직접 코린토 교회를 방문하지만 바오로 역시 심한 비난과 모욕을 받고 에페소로 떠나온다. 슬픔에 싸인 바오로는 본의 아닌 자랑까지 섞어가며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불리움을 받아 사도직을 행해온 과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함과 동시에 코린토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눈물의 편지'(10-13장)를 쓴다. 이 편지를 전해 준 디도의 응답을 기다리다 못해 마케도니아까지 달려간 바오로는 디도에게서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바오로를 모욕한 사람들을 처벌하였으며, 바오로와 화해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이에  바오로는 화해의 기쁨을 전하면서 사도직의 참된 길과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 형제애를 바탕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완결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화해의 편지'(1-9장)를 띄운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코린토후서는 모두 13장이다. 사도 바오로를 거부했다가 회개하고 화해하는 등 코린토 교회의 구원과 모든 교회의 일치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열정이 흘러 넘치고 있다.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일뿐(1,1-7,16)
   코린토 교회가 자신과 화해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동안 자신이 받은 오해에 대해 변호하면서 사도직에 대한 소신을 피력한다. 사도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이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또한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계약의 봉사자'이며, 모세보다도 위대한 몫을 맡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은 두려움과 갈등 속에서 여러 환난을 당해 왔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으며 신뢰와 희망 안에서 기쁘게 살아왔다고 한다. 설령 앞서 보낸 '눈물의 편지'가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을 슬프게 했을지라도 교우들이 회개하였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며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

     은혜로운 선행을 완수하십시오(8,1-9,15)
   코린토 교회와 화해하는 기쁨을 전한 바오로는 이제 지난 번 디도를 통해 청했던 바와 같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을 완결하도록 권고한다. 심한 환난과 가난 속에서도 기꺼이 아니 능력 이상으로 이 선행에 참여한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모범으로 들면서, 서로 베푸는 너그러움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의로움의 수확을 늘려 주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코린토 교회를 격려하고 있다.

     내가 찾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지 재물이 아닙니다(10.1-13,13)
   이 부분은 앞의 1-9장보다 먼저 쓰여져 코린토 교회에 보내진 '눈물의 편지'의 일부로 여겨지며, 시종 흥분된 분위기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바오로를 보게된다. 바오로는 누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지 똑바로 보라며 반대자들과 코린토 교회의 교우들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는 자신이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세우시는 그런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자신 안에는 그리스도의 진실이 있다는 확신을 전하고 있다. 자신이 겪었던 고난과 고뇌를 이야기하고, 자신이 받은 현시와 계시를 본의 아니게 자랑하면서도 자신의 약점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소위 거물급 사도들보다 모자라지 않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깨달아 코린토 교회의 교우들이 교화되어 구원받기 바란다는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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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2. 10. 26. 12:30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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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이다. 코린토 교우들이 처한 문제들이 다양하게 실려있어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아는 데에 중요한 성서로 꼽히고 있으며,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송가'가 실려 있다.

 ● 누가 썼는가?
   사도 바오로가 썼다.

● 언제 쓰여졌는가?
   
사도 바오로가 3차 선교여행을 하는 중 에페소에서 머무를 때(54-57년쯤) 쓰여졌다. 바오로가 2차 선교여행 때 1년 6개월 동안 머무르면서(사도 18,11)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코린토 교회가 성도덕의 문란과 분쟁으로 심각한 혼란에 빠졌음을 전해 듣고 에페소에서 편지를 썼다.

왜 쓰여졌는가?
   코린토 교인들이 적어 보낸 문제들(1고린 7,1)에 대해 답하고 코린토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고자 쓰여졌다. 코린토 교인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제기되는 분열과 음행은 결코 바오로가 전한 '십자가 복음'의 내용이 아님을 상기 시키면서 한 분 하느님 안에서 서로 일치하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일깨우고 있다.
   자유, 결혼, 우상숭배 등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도 함께 일러줌으로써 참된 교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애쓸 것을 사랑 안에서 호소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코린토전서는 모두 16장이다. 분쟁과 윤리적인 폐단, 결혼, 공동체 예배시 지켜야 할 자세, 부활 신앙 등 코린토 교인들이 부딪친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이 바오로의 사상, 열정적인 신앙과 어우러져 담겨 있다. 코린토 전서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1,1-4,21)
   코린토 교회가 서로 편을 갈라서 싸우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갈라지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같은 정신과 같은 사상으로 일치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능력에 믿음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사도 바오로 자신이 말하는 내용 역시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배웠으며 오직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만을 선포하고 있다고 한다. 오로지 복음을 위해 목마르고 헐벗고 박해를 당하면서도 견디어내는(4,11-13) 선교사의 참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5,1-6,20)
   신자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근친 상간의 음행과 교만에 대해 꾸짖고 있다. 음행을 하는 자, 우상 숭배자, 간음을 하는 자 등은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비행과 악습이라는 묵은 누룩에서 벗어나 누룩 없는 빵, 즉 순결과 진실을 지키라고 권고한다. 몸은 음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일깨우면서 음행을 피하고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라고 한다. 또한 송사가 있을 때 이교도들에게 가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지적하면서 형제 사이의 시비를 이교 법정에서 해결하는 일을 옳은 일이 아니며 더욱이 형제가 형제를 고소하는 것은 큰 잘못임을 역설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7,1-11,1)
   결혼은 죄가 아니니 서로 자유롭게 결혼을 택할 수 있지만 결혼을 했건 독신이건 현재상태에 충실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제 의무를 다하라고 한다. 또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에 있어서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느님만 계시기에 우상은 없다고 판단하여 먹을 수 있지만, 그 행동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라면 그 형제를 위해서 하지 말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우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몸으로 한 몸이 되어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11,2-14,40)
   만찬시에 드러나는 분열과 욕심을 지적하면서 성찬례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주고 있다. 최후의 만찬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전하는 것이니만큼 먼저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참여하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시면 주님의 몸과 피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준 고유한 은사는 모두 공익과 교회를 키우는 데에 이바지해야 하므로 예언이나 이상한 언어를 할 때에는 예의와 질서를 지키라고 당부한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은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은 바로 사랑의 실천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 복음의 핵심(15,1-16,24)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흘만에 일으켜지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선포도, 믿음도 모두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바오로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지시하면서 늘 깨어 믿음 안에서 굳게 서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이루라고 당부하면서 사랑의 인사로 끝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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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2. 10. 26. 10:58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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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믿음에 의한 새로운 의'를 주장한 유명한 책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리 형성에 크게 기여한 성서이다.

누가 썼는가?
바오로의 친필로 바오로 특유의 어휘들로 이루어져 있고, 초대교회 이후의 시대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다. 여러 교부들과 초대 문헌들도 바오로가 저자임을 증언하고 있다.
이는 오늘까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16,25-27(영광송)은 후대의 편집자가 첨가했다고 본다. 로마에서는 이미 교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살았었지만 49년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해 신자들이 대부분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이야기하듯이 편지를 썼다.

언제 쓰여졌는가?
바오로가 고린토에서 지낸 시기를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57-58년 겨울에 썼다고 본다.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다 전한 뒤(15,19)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15,25), 고린토에서 석달 간 체류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사도 20,2의 '그리스'는 그리스의 고린토를 말한다).

왜 쓰여졌는가?
3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마친 바오로에게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이에 로마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바오로는 로마의 신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을 알리고자 이 편지를 썼다.
이러한 면에서 다른 지역교회에 보낸 편지와 큰 차이가 있다. 다른 편지들은 그 지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또는 질문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쓰여졌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로마서는 모두 16장이다. 율법 중심의 유대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을 권고하고 있다.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 죄에 죽고 생명에로(1,1-8,39)
바오로는 먼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곳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하면서 자신을 이방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불리운 사도로 소개한다. 그리고 주로 신앙과 율법을 대조함으로써 하느님의 의(義)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의는 할례나 율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믿는 이들 모두를 위한 의(義)를 말한다.
아울러 바오로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실증하셨다고 한다. 아담 한 사람에 의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죽음(속량)으로 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부활하신 그분처럼 생명 안에서 거닐 게 된 사람들이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영을 따라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국에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리라고 함으로써 희망을 북돋우고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는가(9,1-11,39)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언약을 받은 민족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에서 나셨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으나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행업에 의존함으로써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언약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직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으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보고 회개한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오로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으로 구원이 이방민족에까지 이를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인자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만하지 말며 엄위하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지 않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새로운 생활(12,1-16,27)
그리스도에 의해 불리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죽거나 살거나 이미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벗어 버린 빛의 자녀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는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며, 사랑 이외에는 빚지지 말라고 강조한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임을 일깨우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존경하며, 다정하고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하는, 심지어 주리고 목마른 원수에게조차 먹여주고 물을 주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와 같은 사랑 실천에, 성서는 인내와 위로를 주어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성령의 능력은 그 희망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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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2. 7. 8. 18:54 천주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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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으며,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팔공 산괴의 주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유교의 전통이 강하였던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상주 등으로 피난하여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잠시동안 외부와 격리된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정부의 관여 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인 을해박해(1815)때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과 형제들이 그들과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839년 4월 정해박해 때에 체포된 신자들이 처형되기 한 해 전인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정을 비롯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850년대 말에는 큰 신자촌이 되었다. 경신박해(1860)때에 한티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박해가 끝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1862년 장 베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신박해로 김현상의 후손들이 대구로 떠난 후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성상돈 아우구스띠노 및 그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씨 가정과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 해 봄 문경 한실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월 19일 순교하니 그 조카 서상돈이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다.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한다.
1868년 음력 4월 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가롤로를 비롯한 30여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현재 한티의 순교자 묘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당시의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1868년 박해의 칼날을 받은 한티 공소는 한줌의 재로 변한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마을에 살던 박만수 요셉은 살아남은 몇몇의 사람들을 모아 공소재건에 앞장선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바람맞이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룬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 토마(당시 12세)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무렵 군위 칫솔에서 김재윤 플로리아노 가정과 김윤하 가정이 들어오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꼬 가정이 들어왔다.
1882-1883년 김보록 로베르또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때 신자수 39명, 고백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니, 김보록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참례하러 갔다. 이후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수가 8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전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공소재건의 의의
첫째, 순교자의 시신을 묻어드리고 이주해 와서 살았다. 이는 순교자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남은 것이 없는 곳에 성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여들었다.
둘째, 바람맞이 땅에 동네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속죄의 마음과 순교자를 따라 순교하겠다는 의지이다. 노출이 가장 심한 곳에 마을을 이룬다는 것은 죽음을 언제나 맞을 준비된 마음이다.
셋째, 조 가롤로 회장의 어린 아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모셨다. 이것은 순교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이며, 순교자들에 대한 예우였을 것이다.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순교자의 묘지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조 가롤로는 상주의 구두실이 고향으로 그의 집안은 1839년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기해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 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티 부락에 열심한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서익순과 서태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 대(代)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주 장원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1857년 상주에 도착한 이들은 2년간 살다가 1859년 장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1866년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리델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대구에 와서 박해에 관한 소식을 전하자 신자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는데, 서태순은 문경 한실로, 그의 형 서익순 가족과 서상돈 가족은 한티로 피난을 갔다. 서태순과 부인 김데레사와 7세된 남자아이는 1866년 문경에서 잡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조카 서상돈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서태순의 옥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한번은 서태순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옥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참혹한 광경에 이후 서상돈은 평생 쌀밥을 먹지 않았다 한다. 서태순 베드로가 1866년 12월 18일에 34세의 나이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형 서익순이 한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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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21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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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에의 생활
모든 사람들은 소명을 갖고 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소명,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소명,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소명 등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소명을 갖고 있고 그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께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현재의 우리의 소명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가정과 사회에서 우리가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장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직장에서 우리가 맡은 다양한 일에 대하여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임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때 바로 즉시 응답을 하여야 한다.
이 응답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응답을 할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2. 기도의 생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분이셨다. 그분은 매일매일 선교여행을 하셨으며 그분의 그러한 여행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 늘 기도하셨다. 그분이 기도하신 것은 시간이 있으셔서가 아니었다. 그분의 주위에는 항시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녔고 사방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항시 장터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소란스럽고 분주한 선교의 여행 속에서도 항시 스스로 시간을 내셔서 하느님의 뜻을 항시 살피셨다. 루가 복음은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 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루가 5. 16)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현대를 바쁘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기도의 시간을 내어야 함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그분 자체를 만나고 그리고 그분과 기도 속에서 일치를 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러한 신앙생활은 한 겨울날의 추운 날씨처럼 차차 굳어질 것이고 급기야는 신앙에 대하여 맹숭맹숭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어렵게 얻은 신앙을 등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3. 감사와 순명의 생활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축복을 주셨다. 창세기는 이 축복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리라"(창세 1, 28).
그러나 태초의 인간은 하느님께 불순명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망각하였다. 그 이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기 위하여 너무나도 힘든 일을 하여야 했다. 이러한 일은 최초의 인간에게만이 한정된 것이 아니라 원죄로 이어져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금의 우리에게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을까? 그것은 교만한 마음, 즉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겸손하지 못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 한 연못가에 갈대가 서 있었다.이 갈대는 조그만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나부꼈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떡갈나무가 갈대를 보며 동정어린 눈길로 바로 보며 말했다.
"이봐요, 갈대. 자네는 바람이 조금만 불거나 물위에 여울이져도 머리를 숙여야 하니 자네의 가냘픈 몸집이 자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되겠는걸!" 그리고 이어서 "내 건강한 머리를 좀 보게, 햇빛을 멈추게도 하고 강한 폭풍까지도 힘차게 맞설 수 있지 삭풍이 자네에게는 폭풍이지만 나에겐 미풍만도 못하네. 자네가 내 몸 밑에라도 태어났던들 나의 그늘을 은신처로 삼아 고생이 없었을 텐데. 내 생각으로는 자연은 불공평한 것 같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갈대가 대답했다. "나를 동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다지 걱정은 마시게나. 모든 바람은 나에게보다 당신에게 더 위험스러운 것 같은데. 바람이 불어도 나는 굽혀지기는 해도 그러나 꺾이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이 말을 듣고 떡갈나무는 갈대를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얼마후 지평선 저쪽에서 북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떡갈나무는 몸을 굽히지 않고 바람에 맞섰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왔다. 가냘픈 갈대는 당장쓰러질 것같아 보였다. 그러나 갈대는 바람이 부는 대로 뭄을 기울일 뿐 아무 괴로움도 없었다.
한편 떡갈나무는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쳐들고, 발을 땅에 붙이고 서 있었다.
그러나 끝내 뿌리 채 뽑히고 말았다.
하느님 앞에서 불완전하기만 한 인간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영유하려면 겸손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신 성모님께서는 매우 겸손하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겸손되게 순명하실 수 있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모친이 되시는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모님에게서 겸손과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순명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모범을 본받아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명하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4. 공동체 생활
인간은 비록 하느님의 뜻을 거슬려 이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하였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지상 위의 모든 생물들의 주인으로서 남아있게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가운데서 구속사업을 계속 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음식과 옷, 집 그리고 그 밖의 것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땅의 주인으로 남아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이익)에 이바지하고, 이웃을 도우며 서로 사랑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하느님은 바로 지금 세계공동체, 국가공동체, 가정공동체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삶을 충실히 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사도 4 32). 지금의 우리들이 이러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하느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 더욱 완전한 공동체를 건설하여 주실 것이다.
5. 결단의 생활
우리가 만약에 어떤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위치가 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선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그 단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결단을 하나씩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이외에도 우리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앞 길에 대해 결정하는 중요한 일까지 수많은 결단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그 가르침과 실천에 있어서 의미있는 것으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 결단은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결단을 우리가 잘 내릴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되고 동시에 삶에 무한한 기쁨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올바르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때는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라는 것이 부끄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그리고 동시에 짐으로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 둘 중에 어느 곳에 우리가 속하게 되는 가는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렇게 살기로 삶 속에서 끊임없이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명하므로써 성장하는 하느님 공동체의 수많은 사람들 안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게 할 것이다.

6. 사랑의 생활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하고 사랑하고 싶어한다. 사랑은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이며 가장 깊은 갈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말로 간단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러운 것이며 동시에 우주에 가득찬 하느님의 숨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 4, 16).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구세주를 약속하셨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의 두 발로 먼지가 펄펄 날리는 땅을 디디며 걸어 다니셨고 또 당신의 두 손으로 지치고 소외된 이들을 쓸어주셨으며 그들과 함께 머물러 계셨다. 그분의 그러한 행동은 그분을 선동자로 몰리게 하였고 결국 그 죄목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하여졌다.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말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활 속에 가득찬 인간에 대한 넘치는 그분의 사랑에 근거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의미에 합당하게 살아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던 많은 성인들의 삶을 볼 수 있다. 이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신 분들이다. 우리도 이분들의 모범을 따라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생활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산상설교(마태오 5,3-10)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산상설교의 한 절 한 절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자.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은 다 가난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점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놓고 하느님만을 애타게 목말라 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부를 누리게 할 것이다.
(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마음의 근심과 가혹한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자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데 대한 비탄과 소외 당함과 그로 인한 억울함의 눈물, 그리고 실의와 "잔인한 운명"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이면에는 더욱 커다란 슬픔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헛되고 황폐한 세상에 대한 애통해함, 하느님과 하느님의 법이 지배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애통함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온갖 역경으로 점철된 자신의 운명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슬픔, 고통당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전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주위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외면한다. 그 외면하는 것이 내 자신에 해당되는 것일 때도 있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일 때도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로 작정한 이상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안에서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예수님 앞에 펼쳐놓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고통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 위로를 받으며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두번째로 하신 말씀의 뜻이라 할 수 있다.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여 불평불만을 품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람은 불만스러운 환경을 극복한다. 온유한 사람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솔개가 그 높은 하늘에서도 먹이를 금방 찾아내듯이 이러한 사람을 금방 알아보고 그 사람에게 몰려와 평화 속에 휴식을 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 동안에 항상 자신에게 와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으셨고 반기셨다. 바로 온유한 사람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옳은 일이란 정의, 거룩함, 완전함을 뜻하고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옳은 일을 갈망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주의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듯이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열심히 열망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이세상에 도래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 가득히 넘쳐흐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하염없는 만족에 젖게 될 것이다.
(5)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가진 자이고, 가진 바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남에게 물질, 힘, 시간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힘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마음 먹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힘인 것이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할까?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지향되어 있고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더 재미있어 하고 또 거기에 더욱더 마음을 두게 된다.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이 관심있어 하는 것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기울이느냐, 아니면 세상 일에 더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찰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으로 가득 찰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정의 삶을 끊어버리고 은총의 삶을 살기 위하여 침묵 가운데서 열심히 기도를 하여야 한다.
(6)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참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이 일치될 때 이루어진다. 평화는 우리 스스로 이룩하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지 평화를 바라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평화를 이룩하려 는 노력을 게을리하기 때문에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바로 그 평화를 나누어 주기 위하여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7)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어떠한 역경도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은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러나 세상의 정의는 자신의 이권에 손해가 되지 않는 범위까지만이고 그것이 그 범위를 넘을 때는 늘 힘의 논리가 지배를 하고 그것이 정의라고 강요된다. 그리고 그러한 거짓된 정의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고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참된 정의를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늘 박해를 당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꼭 승리를 하고 만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인 103위 순교 성인들은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라는 오해를 사서 모두 고향을 등지고 도망 다녀야 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관원에게 붙잡혀서 비참한 최후를 고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분들이 그렇게 무참하게 돌아가신지 200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 누구도 그분들을 박해하던 높은 관직의 조정 대신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지금은 힘없이 죄인으로 죽어갔던 사형수들의 이름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이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을 증언하는 정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분들의 삶은 십자가에서 신성모독과 반란죄로 죽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몸으로 따라 가신 것이다.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우리는 순교성인들처럼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7.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기울이고 사랑으로 응답을 하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며 동시에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은 우리가 속하여 있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가장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순간은 뭐니뭐니 해도 기도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경건하게 성체 앞에 앉아서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 혹은 길을 가며 잠깐 동안 바치는 화살기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그분의 이끄심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명하여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결단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누구도 결단을 쉽게 내리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한가지를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 외의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결단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열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충만한 은총을 주실 것이다. 우리들 은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한 순간도 하느님을 선택할 수가 없으며 또한 그분의 뜻에 맞게 살 수도 없다. 이러한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결단을 내려 응답하는 삶은 사랑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이웃과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를 할 수 있고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따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무엇이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신자생활이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자기를 통해 흘러 넘치는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요한 15, 12)라고 말씀하신 계명의 완성인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사랑 자체라고 믿고 있다(1 요한 4,8).
사랑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조건 없이 남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 아니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상대편에게 내어준다. 그는 상대편의 운명에 전적으로 동참하고 자신이 바로 그가 되어 필요하다면 상대편을 대신하여 기꺼이 죽으려고 까지 한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는다. 영악하고 타산적인 인간의 눈에는 이 사랑이 어리석은 바보짓으로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다. 강생한 성자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남에게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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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