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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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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2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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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사에서 성모 마리아의 위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서 하와는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하였고, 그 결과 죽음이라는 벌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원죄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약성서는 이 원죄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자 하느님께서 구세주와 그의 어머니가 될 한 여인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뱀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이 약속되었고(창세3,15), 그 여인은 처녀로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주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로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를 가리킨다(이사7,14참조). 때가 차니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는데(갈라4,4-5참조), 그 여인이란 바로 악마의 머리를 밟아 죄악의 세력을 멸하고 승리할 구원자 그리스도의 모친이다.
루가복음 1장 26-38절을 보면 천사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한다. 마리아는 과연 은총을 가득하게 받으신 분이다. 이에 대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마리아는 대답한다. 마리아는 이 대답을 통하여 메시아를 잉태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부와 본질이 같은 성자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인성(人性)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여 하느님의 구속사업을 수행하게 된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와 역할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구원사에서 마리아는 특이하고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리아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대망(待望)사상과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성취(成就) 사이에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인류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2.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협력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시 여기며, 마리아의 자유로운 동의를 구한다.
마리아의 동의없이 하느님은 자신의 구원사업을 이루실 수 없다. 하느님의 계획과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마리아의 순명은 곧 하느님께 향한 자신의 온전한 '동정봉헌'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대로 '정녕 복되신 분'(루가 1,35)이다. 복되신 마리아의 순명으로 아담과 하와로 부터 멀어진 하느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이어지게 되고 인류 구원의 역사는 마리아의 순명을 통하여 새롭게 전개되어 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셨기에 원조의 죄를 '복된 죄'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인류에게 주셨다.
하느님은 한 여인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원죄로 잃었던 인류의 생명을 다시 찾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을 한 인간(마리아)의 순명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인류에게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다. 즉,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구원의 매듭은 엉클어졌다. 하와의 불순명의 매듭은 마리아의 순명을 통해서 풀어졌다. 하와가 자신의 불신앙을 통해서 얽어 맨 것을 동정녀 마리아가 자신의 신앙을 통해서 풀어낸 것이다.

3. 마리아의 순명의 의미
마리아의 순종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죄 많은 인간들과 충만한 연대성을 맺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은 것(봉헌)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순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어머니,
구세주의 모친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대답인 것이다. 자신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도 오직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과 결코 그르칠 수 없는 인도하심을 믿고 오로지 당신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마리아의 대답이었으며, 거기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하느님의 인류구원에 협력하였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내어놓는 신앙이기에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마지 못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것처럼 기쁘게 순종하는 자세를 배워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준 잃어버린 생명을 마리아의 응답으로 되찾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마리아에게서 배워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생명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명하여, 그동안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여야겠다.

4. 교회의 어머니요, 신앙인의 모범이신 마리아
아브라함은 오직 하느님께 순종하여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지상 여정을 걸음으로써 그 결과 그에게서 큰 민족이 이루어졌다(창세12.1-4참조). 하느님을 향한 그의 여정은 하나의 큰 백성을 이룬 시조가 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시공을 초월하여 '신앙의 아버지', 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곧 바로 아브라함을 지칭한다. 이 귀한 호칭이 그에게 주어지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기포기를 통하여 전 생애를 하느님께 의탁한 결과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아드님이 가신 그 길을 온전히 함께 걸어감으로써,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앙인이 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분이며, 언제나 아드님 곁에 머물러 계셨다.(우리들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어머니들은 한결 같이 자신이 낳은 자녀의 행동을 잊지 못한다.)
또한 마리아는 아드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셨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운명을 지켜 보고 시신을 끌어 안으신다. 마리아는 아드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참하였다.
어머니가 가신 그 길은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인생의 여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마리아가 우리 모두의 어머니임을 분명하게 말씀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6-27).

우리에게 나타나는 마리아의 모습은 하느님과 같은 자태, 기적의 아가씨 또는 초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한 한 인간, 한 여인의 본연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이때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제 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한 사람의 참 인간상을 볼 수 있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이 어떠한가를 항상 마리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은 인간으로서 가장 가깝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신 분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 공경은 흠숭과는 다르다. 흠숭은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만 드리는 것이지만, 공경은 모든 성인들에게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테스탄스 제교회에서 말하는 마리아께 대한 우상 숭배는 아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따르고 그 말씀을 지켰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모든 신앙인은 최초의 신앙을 가진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며, 교회의 어머니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가장 완전하게 따른 분이 마리아이다.)
구세주의 모친이 가신 길 즉, 자신의 봉헌과 사랑, 봉사와 희생, 고통과 즐거움 등 인생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서 살아간 마리아의 모습이 곧 우리들이 배워야 할 모델이며 과제가 되는 것이다.

5.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
성서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는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정통 신앙으로 고백하며 받아들여져(사도신경)왔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동정성은 단지 생물학적인 동정성(동정녀 잉태(單性生殖)란 고등생물체에서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나 자연과학적 입장(이 입장에 대해서는 말할 때 하느님은 어느 때라도 새로운 상황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자연발생 안에 삽입시킬 수 있다. 창조 개념으로부터 기적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연과학적 입장에서의 정당한 반론이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또는 신화론적 입장(한 인간의 여인과 신의 성적결합 또는 기적적 탄생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녀의 잉태와 탄생의 의미는 그리스도로 인한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것임을 드러내는 징조이다. 또한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출생과 함께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역사를 통해서 이미 약속되었던 바로 그 아기였다는 것을 동정녀 잉태는 말해주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보통 인간의 탄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탄생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였다'라는 신조의 깊은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동정녀 출생을 상징적 의미로 가르친다거나 동정녀 잉태의 사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마리아의 자유로운 신앙결단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조건없이 신뢰하고, 진심으로 사랑한 모습을 신앙인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하여 마리아처럼 "예"라고 응답하여야 한다.
이것이 평생 동정성의 핵심이며, 마리아의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선사하며, 그래서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고, 하느님은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마리아가 받아들임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며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듯이 우리 자신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마리아는 신자들의 모친, 그리고 교회의 원형이 되며 모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문제는 과학적이며 생물학적인 동정성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관건이 되는 것은 성(性)이 아니라 마리아의 신앙이다.
바로 마리아의 신앙에서 동정성을 찾아야 하며, 마리아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대답 즉,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 라고 한 대답 -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라고 순종한 대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개신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형제와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한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현세의 인간적 부친을 가지지 않았다는 정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생명과 존재의 창시자요 원천이신 성부께서 바로 예수의 인간적 실존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동정녀 출산을 거스르는 반론을 제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의 온전한 인간임이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성을 성부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에 안전하고 충만하게 받았다.

6. 마리아에 대한 신앙교의에 대하여
1) 마리아의 모성
오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문들은 한결같이 마리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교의는 413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대하게 교의로 선포 되었으며, 하느님을 낳으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다. 그러므로 '천주의 모친'이라는 호칭은 성자와 마리아의 밀접한 관계에서 분명하게 연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의 모성에 대하여 성모님은 몸으로보다 정신으로 먼저 잉태하였다. 마리아는 일차적으로 그녀의 절대적인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모친이 되었고 그 다음에 비로서 육체적으로 모친이 된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성전에서 성부께 바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며,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세주의 구세사업을 도와드렸다. 이 때문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모친이 되시었다"라고 선포한다.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닌 만큼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된다.
2)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
마리아의 무염시태란 마리아가 처녀로 잉태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영원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미리 구원사업에 참가하도록 선택된 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일체의 죄의 세력에서 구원받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을 낳으실 어머니가 원죄에 물들었다면 태어나는 아들 또 한 죄의 세력에 물들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죄의 세력에 물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1830년 7월 18일에 프랑스 파리의 까리따스 수녀원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당신이 원죄없이 잉태되었음을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잉태 되시는 첫 순간,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미리 내다 보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특은을 베푸시어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셨다"고 선포하고 이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다.
마리아는 다른 이들이 세례 때 받는 은총을 출생 이전에 미리 입음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도록 불림받았다. 이 교리가 선포된지 4년 후에 성모님께서는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발현하시어 이를 다시 알려주셨다.
3) 성모몽소승천(蒙召昇天)
성모님의 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가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은 것,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약속된 영원한 생명의 영광에 맨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승천에 참여하게 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승천은 스스로 하늘에 오르신 것이지만 마리아는 스스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구별을 하기 위하여 몽소(蒙召)라는 말을 사용한다. 몽소승천은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 즉, 마리아의 인격이 전적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와 일치함을 뜻하는 것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11월 1일 일찍부터 교회가 믿어오던 마리아의 승천을 신조(信條)로서 선언하였다.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모친은 지상생애를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잠든 자들의 첫 열매요"(1고린15,20)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장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로서 누릴 종말적 구원이 마리아의 몽소승천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마리아는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일 뿐 아니라 지상에서 천상도성(天上都城)을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지막 날에 성모님과 같이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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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1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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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삶의 공동체적(共同體的) 성격
우리 속담을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없다"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인간이면 누구나 날 때부터, 어느 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할 수밖에 없는 인간본성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생각된다.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결단하고 그 결단에 대한 책임성 있는 행위로써, 한 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려는 열망을 갖고 그곳에 개인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이상(理想)과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고자 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나 욕구가 공동체의 그것과 맞지 않을 때, 그로부터의 알력이나 긴장이 나타나기 때문에 독립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한편으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기를 열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독립하려는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려는 열망이 이탈하려는 열망보다 강한 듯하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체계화된 사회에서는 협력과 봉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 삶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단"이나 "단체"라는 표현보다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어떠한 공동체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특성이 있다.
먼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요소로서, 신념의 하나됨과 그 목적의 일치, 그리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방편을 쓰겠다는 의견의 일치가 그것이다. 즉, 가급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다면 짧은 시간 안에 자기들이 믿는 것을 전달하여 공동체로서 커져야겠다는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의 일치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단순히 공생(共生) 그 자체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어떤 신념의 일치에서 나온 귀결로서, "같이 나누는 삶"이라는 성격을 띄는 공동체를 말한다.
공동체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자신들이 맡은 것과 그 맡은 것에 대하여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을 "교회"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을까? 답변은 다양할 것이다. 이는 교회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1) "교회"의 어원과 그 유래
우선 '교회'(Ecclesia)라는 어원에 대하여 보자. 이 단어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이 아니었다가 점차 성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적인 용어가 된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원래 희랍어인 이 단어는 정치적인 의미로서 '민족 집합체'를 의미했다. 이 단어를 2세기에 라틴어 성서(70인역)로 번역하면서, 어의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Contio' 혹은 'Comitio'(정치적 집단으로서의 '집회')로 쓰지 않고, '유대인의 회당'(Syagogue), '예식단체', '하느님 백성의 전체 공동체'라는 의미로 도입함으로써 아직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까지도 통용되는 영어의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공번된', '보편적인'을 뜻하는 'Catholicus'에서 나온 표현으로서,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에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지역을 망라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는 단지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다. "교회"라는 의미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적인 결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공동체이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생활의 실천과 관계있는 것으로서 온 인류의 안녕과 기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 지상 생애 동안의 예수
예수는 마르꼬 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1,15)라는, 간결한 말씀으로 자신의 원의가 무엇인지를 요약하고 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설교와 그의 공적인 활동을 통한 본래의 임무는 "하느님 나라"로서, 이 단어는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 지니는 본래 의미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열 두 사도의 선발(마르 3,13; 6.7-13)을 통해서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선발된 열 두 사도로 하여금 그 자신이 행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세력을 나타내는 징표로, 악신을 몰아내게 하는 힘과 함께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을 준다. 열두 제자의 선발은 예수의 이스라엘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암시한다. 예수는 이 열 둘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고자 하며 길 잃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민족 복고주의적인 면모로서 만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유대 민족으로부터 이 개념을 정화하였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8,11의 이방인들을 상대로 행한 제자들의 선교활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데에 있다. 즉,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의 구원행위 속에서, 그의 구마 행위와 병자치유 속에서, 지금 이미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체적인 한 백성을 관통하게 되며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하느님 나라"와 확고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항상 하나의 백성을 전제로 하고 이 백성을 통해서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가운데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뒤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되면서부터 예수와 함께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해야 할 소임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대강 윤곽이 잡힌 셈이다. 성서학자들이 원칙적인 관점에 일치하고 있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 설교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는 완전히 현실화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말한다.
둘째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신이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는 완전히 자유롭고 충만한 최고의 권능행사를 의미한다.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이 그곳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약속하시며, 인간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하느님 나라"는 지상적인 현세의 민족적 신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충실성, 즉 하느님과 타인들과의 친교에 그 참 뜻이 있는 순수한 종교적 다스림이다.
넷째로, "하느님 나라"는 만민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복음"이며 그 조건이 되는 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는 어떤 도덕적 법 규정에로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배와 현세의 지배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요구, 즉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
(1) 하느님 백성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형되고 부활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30-100년)는 일차적으로 부활사건이 발생했던 갈릴레아 지역에서가 아니라 수도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계시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그곳에서 경이적인 성령을 체험하였으며 이로부터 모두가 하느님께 사로 잡히고 공동체 상호간에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와의 연관성하에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 두 지파와 관계있는 사고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였을 때는,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와 벤자민 지파 그리고 레위 지파의 절반만이 존재할 뿐, 더 이상 열 두 지파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기에 열 두 부족이 완전히 재건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여기서 열 두 제자와 같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봉사하는 협력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데 있어서의 조력자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또 하나의 기능이 이들 공동체에 추가되기에 이른다 . 즉, 그들에게 본래 전 이스라엘에서 발생해야만 하는 이들,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전적인 헌신, 새로운 생활 질서에로의 회개, 형제·자매적 공동체에로의 모임 등의 일을 표징적으로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종말론적이며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세계의 일반적 사회질서 속에서 타당성을 인정받고 통용되는 지배구조를 배격하고 상이한 유형의 공동체 구조를 구성해야 하는 소명을 받기에 이른다.
(2) 그리스도의 몸
사도 성 바울로의 서간에서 주로 발견되는 이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 일원간에 일치의 근본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먼저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모든 사람이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 고 있고(갈라 3,23-28), 창녀와의 결합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대조시키면서, 공동체 일원이 그의 몸과 합일되는 지체임을 말하고 있다(1고린 6,15- 17).
한편 바울로 사도는 이 개념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머리이며 세속적인 원리를 벗어버린 그리스도인은 그의 부르심을 받아서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구절들을 보면,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와 공동체와의 관계로 보고 있으며 공동체가 사회적 집단으로서 보다는 구원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천상적 실재로서, 이 안에서 공동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몸"으로 볼 때에, 서로 구별 지을 수 없는 상호관계가 성립되고(에페 1,22-23; 골로 1,18), 그리스도는 공동체가 그리로 향해 나아가는 원천과 목표이며(에페 4,15-16), 그리스도는 몸을 지배하는 머리 역할을 하는 가운데 공동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공동체 상호간에 교제하는 일,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양식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으므로(사도 21,20), 교회의 초기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다. 즉, 어린이들은 할례를 받고 경신례의 규범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쉬는 날로 지켰고, 성전에서 모여 매일 암송하는 기도에 참석하였다(사도 2,4-6; 3,1; 5,21).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그들 자신의 생활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드러나는,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새로운 "성전"(1베드 2,5)으로서, 새롭고
독특한 나름내로의 형태를 지니면서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생활구조를 갖고 살았다.
(1)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안식일에 공동기도에 참석한 다음(20,7), 개인 집에서 그들만의 집회를 가졌음을 전하고 있다(2,46; 12,12; 16,40; 20,8). 그리고 다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42)고 한다.
집회는 흔히 훈시와 예절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훈시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세례 전 예비신자 교리교육과,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강론이 있었다. 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메시아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2,23-26), 그 외에도 신앙과 애덕실천을 위한 훈계(14,22; 16,3) 혹은 용서, 그리고 좀더 친밀한 담화를 담은 권고 및 윤리교육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주로 사도들이 맡았다.
그리고 예절부분은 친교, 빵을 나눔, 기도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부유한 구성원들은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난한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실천은 교육정도, 지방, 신분이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거리감과 여기에 따라오는 상호간의 장벽을 예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에 "성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이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빵과 포도주 위에 손을 펴들고 "최후의 만찬"에서 하셨던 예수의 말씀(1고린 11,23-26)을 빌어 축복하였다는 데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예식을 통해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지고의 사랑을 기억하게 되고,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게 됨으로써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은, 이를 통해서 한데 뭉치고 그리스도의 근본에 공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신강림으로 인하여 그들 안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이후에 계속되는 복음선포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되었고, 이러한 진술의 내용은 곧 복음선포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사도들은 하느님의 업적인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 목격자로 자처하면서(사도 2,32; 3,1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그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증거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종말에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하여 재림하므로, 그동안에 인간의 응답으로서 개인의 속죄와 용서, 그리고 세례를 제시하였다.
또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들은 사도들이 제시한 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산상설교(마태 5 - 7 장)의 여덟가지 행복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 용서와 간음, 이혼과 거짓 맹세에 관한 금령과 보복에 대한 금령, 원수에 대한 사랑, 자선과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 물질에의 초탈,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 등을 권고받았으며, 특별히 마태오 복음 11,28-30의 말씀은 그들이 자주 회고하던 내용이었다.
(2) 공동체 상호간의 친교
공동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원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는 친교로서의 생활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어서, 가난하고 곤궁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다양한 전승들 안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고 있다. 특별히 바울로 사도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벌였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성령강림 이후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줌으로써 얻는 기쁨"을 경험한 사실을 보여준다(사도 2,44이하). 이러한 묘사로써 사도행전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이상적인 공동체상(像)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역시 "애덕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예로 바르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서 받은 돈을 사도들에게 바침으로써(사도 4,26- 27) 사도들의 제자, 더 나아가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교 지도자로서 공동체 활동에 봉사하게 된다.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땅을 팔아 돈의 일부만을 바쳤기 때문에(사도 5,1-2) 죽음의 벌을 받았다(사도 5,5). 물론 이 사건으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재산공유가, "공산주의"나 "집산주의"의 표현으로 보이는 단면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재산의 공동소유는 새로운 신앙의 열정에서 생긴 형제적 사랑의 자의적 원칙으로서 결코 의무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나니아 부부의 죽음은 사도들과 공동체, 무엇보다 하느님을 속인 결과였고(사도 5,4), 성령을 떠보는 죄의 결과(사도 5,9)였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생활은 공동생활의 원형이며 지배관계에서 해방된 성공적인 상호친교의 원형으로서, 무엇보다도 이런 사유재산의 집단의 집착에 따른 공동소유는 강제성이 아니라,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상호부조의 행위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 및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사상과 함께 현세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만 원조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원조받음으로써 서로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자진해서 바치는 구제금이나 헌금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친교를 나누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3) 이웃에 대한 봉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그들의 근본 직능, 직무, 과업, 사명을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봉사"하는 개념을 쓰고 있다. 이 단어는 인간이면 누구나가 즉시 굴종을 연상하게 마련인 하나의 행동, 즉 식사 시중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설교 안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식사시중을 드는 가운데 사람들끼리 존재하는 지배관계, 즉 봉사받는 사람과 시중을 들어 야 하는 사람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루가 17,7-9).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행위를 종 노릇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집니다"(마태 23,13)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인간실존의 가치전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가 하느님의 봉사적 실존의 원형을 친히 비유해 주는 인물로 등장하며 제자들과 공동체에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고(루가 22,24-29), 또한 예수가 봉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 공동체 실존의 척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단순히 식사시중이나 부양과 생계를 돌보는 자선행위만이 아니라 살거나 죽거나 그 어떤 때이던지 간에 "남을 위한 존재", 즉 처음부터 자신의 근본은 자기 인격을 다 바쳐 "타인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발견되는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0,28; 요한 12,25-26).
그러므로 봉사를 통해서 온갖 집단들이 이해관계와 신분의 차별, 성(性)의 우열같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장벽들이 지양되기에 이른다(갈라 3,26-29).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섬기는 일", 즉 "남에 대한 헌신과 사랑 속에서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교회의 본질
지상생애 동안에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그 나라에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고자 의도하였고,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선포와 행적에 입각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갖고 살았다. 그 생활양식이란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예배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의 친교는 공동식사(성찬례)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소명을 기억하면서 자아의식을 새롭게 하였는데, 이런 의식은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자기소유의 개념을 뛰어넘어,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돕는 봉사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였으며, 그들이 구제를 위해서 헌금을 할 때에도 헌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바침으로써 세상을 위한 증거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였다.
물론 이러한 점은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그들의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얻고, 영적 친교의 증진을 통해서 공동체의 친교와 봉사는 세상을 섬기는 데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4. 교회의 특징
1) 하나인 교회(唯一性)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보호하심을 약속하시며(성령강림), 당신이 세우신 교회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세상 방방곡곡에 전파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길 원하셨다. 그런데 천주교회만이 같은 신앙, 같은 전례, 같은 가르침, 같은 제도를 가지고 하나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
즉, 전세계 9억 이상의 천주교회 신자들은 어떠한 파벌의식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님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완성자'라는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온 세계의 천주교회는 그 가르치는 교리나 종교의식(미사)이 동일하고 같은 성사 같은 기도 안에서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세계 천주교회의 외적인 일치는 곧 천주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그리스도교라는 좋은 예이다.
2) 거룩한 교회(聖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이 공동체가 거룩한 것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 거룩함은 바로 천주교회 안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 안에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거룩하게 변화(성화)시켜 주신다.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표현하는 내용으로서 미사와 일곱 가지의 성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당 안에서는 잡스러운 행동이 용납되질 않으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여 계시는 성당에서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천주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즉, 천주교회의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성인·성녀들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천주교회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3) 공번되고 보편적인 교회(普遍性)
천주교회는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한국 명칭이다. '가톨릭'이란 단어의 뜻은 '보편적·공번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교회(라틴어로 ECCLESIA)라는 단어에는 '하느님으로부터 호출되어 모인 백성들의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모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무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전세계에 퍼져 있으며, 공동체가 생긴 이래 인종과 민족, 성별과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전인류를 위해 존재해 온 것이다.
4) 사도로부터 계승된 교회(使徒繼承性)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파가 약 50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당신의 공동체를 맡겨주신 열 두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온 공동체는 천주교회 뿐이다. 특히 천주교회의 주교님들은 열 두 제자들을 대리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직책이다. 이 사실의 증거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5.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의무
하느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포와 행적을 통하여, 당신을 따르던 몇몇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을 모으고자 하심으로써 교회를 창설하셨다.
우리 역시 이러한 기쁨과 사랑의 공동체에 초대를 받아 오게 된 것이며, 이곳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인간역사 안에서 존재하는 한, 인간적인 동기와 한계에 제약을 받는, 인간에 의해서 구성되고 관리되므로 그 자체 내에는 한계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결합과 일치가 그 목표이지만 아직은 완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완성에 이르도록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낱낱이 실천하고 있지 못하고, 하나인 교회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실정이며, 여러 지체들간의 일치와 형제애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상태이다. 교회의 참된 본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러한 현실들은, 교회를 이루는 각 구성원인 우리들이 헤쳐 나가야 할 임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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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0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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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이다
복되신 삼위일체의 신비는 곧 하느님 자신에 관한 신비이다.
이 신비가 다른 많은 신앙의 교의를 알아듣게 하는 빛이 되며 또 그 많은 계시진리가 이 신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신비야 말로 신앙의 진리들의 계층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고 본질적인 교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을 내리실 때에, 그분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가르치셨다.
"너희는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그러므로 아타나시오 신경에서는 이렇게 삼위일체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한 분 하느님을 예배하며, 일체로 계신 삼위를 예배하나이다. 성령도 구별되는 한 위격이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신성을 가지시며 동등한 영광과 똑같은 위엄을 가지시느니라."
이처럼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한 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아울러 영원으로부터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시면서 구별되는 세 위가 계심을 믿는 것이다.
유일한 하느님, 유일한 신성이 계시다고 하는 말은 신적 존재가 다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원천이요 목표는 오직 한 '지혜' 한 '사람' 한 '생명'이 계실 뿐인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구분되는 세 위이지만 무한하신 한 지혜로 우리를 아시고 영원하신 한 사랑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은총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하느님께 감추어져 있어서 신적으로 계시되지 않으면 알려질 수 없었던 신비들 가운데 하나이다. 계시 진리의 어떤 것은 이성의 탐구의 대상이 되고 이성에 의해서 발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같은 신비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2.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느님
구세사의 시초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온전하고 확실하게 계시되지 않았었다. 하느님은 단계적으로 당신께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다. 구악성서에도 이 진리의 예표들이 있지만, 삼위일체의 신비가 정식으로 계시되지는 않았다.
이 신비가 계시된 것은 신약성서이다. 성자와 성령이 알려지고, 그분들이 하느님이시며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들이심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느님은 한 분 뿐이라는 진리를 견지하면서도, 이 진리들을 명확하게 종합하는 데는, 여러 세대를 거쳐 기도와 반성,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했다.
1) 구약성서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하느님
삼위일체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다. 기원전 1850년경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을 믿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정하시고 자신을 밝히시기 시작하신다. 에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준 후 40년간 광야에서 인류사적 실생활을 통하여 교육하시고,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기적과 말을 들려 주시며, 당신은 전능의 하느님,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신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출애 20,2-3).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시는 분으로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고 다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하신 신으로 "우리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이제 알아라 내가 바로 그다. 나 외에는 신이 없다"(신명 6,4; 32,39)라고 말씀하여 주신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감추어졌던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신다. 그러나 구약성서 안에서는 세 위에 대한 정확한 구분은 없고 다만 세 위들이 계시다는 것을 희미하게 암시하여 주는 귀절들이 몇 있다. 교부들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복수명사(엘로힘)가 자주 쓰였다는 점과 하나이신 하느님께 복수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창세 1,26) 하느님의 이름과 속성을 세 번 거듭 부르는 일(신명 6,4)등이 이 세 위를 암시하는 속성으로 이해하였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느님
신약성서도 체계적으로 정립된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교리를 명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내밀한 본성의 계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여기서 체험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거론되는 하느님은 구약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으로서 한 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을 부여하는 하느님을 뜻한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울러 증언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마태 12,28)이며, 구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선포된 율법을 능가하는 전권의 소유자이고(마르 2,23-28; 3,1-8),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시다(루가 4,18).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성자)와 성령이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증언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고(요한 14,16.20; 15,26; 17,3; 갈라 4,6)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각기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마태 11,27; 요한 1,1; 8,38; 10,38; 15,26) 이를테면 나자렛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성부)의 현존이면서도 성부 자신은 아니다. 또 성령도 하느님(성부)의 자기 전달이지만, 하느님(성부)과 구별된다. 이와같은 점들을 통하여 볼때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하느님 단일성과 구별성을 모호하게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단순히 하느님과 조물 사이의 중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배열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성서 귀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위로 올라 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마르1:9-11).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시며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이다"(로마1:3-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에게 누리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구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
3. 삼위일체교리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신비로써 실증적 계시와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이성에 의해서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절대 신비가 있다면 이 삼위일체 신비이고 가장 기본적인 신비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서 존재하는데 위격들은 하느님 본질이며, 하나의 하느님 실체이다. 이 세 위격들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시다.
2) 그런데 이 세 위격들은 서로 구별된다.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하였다. 성령은 출산되지 않고 하나의 유일 원리로서의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된다.
3)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가 있으며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
4)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이 본질과 함께 하나의 삼위일체를 구성하지 않다.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계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하나이기에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시다.
4.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 만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3-26).
이와같이 성부는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초자연적인 생명을 얻게 하시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생명을 받아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이며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셔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변모되기까지 영혼의 성화를 완수하신다. 이처럼 성령은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생활의 완성을 향해 부르고 있으며, 이 완성이 곧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이룬다.
우리는 현세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머리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형언하는데 사용되는 인간 언어가 하느님께 관한 숭고한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미비하다. 그러나 기도에 정진하고 묵상과 사랑을 익혀가면, 우리도 영원하신 성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처하는 성령께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커져 가리라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목표는 복되신 성삼위를 알게 되는 데에 있다. 성삼위의 하느님이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관해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와 사랑으로 엮어지는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에 우리도 한 몫 끼게 되는 것이다(1요한3:2).
5.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하느님 안에는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로 있다. 그런데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발산된 두번째 위가 있는데 그분은 신성한 말씀이시다. 그리고 완전한 이 실체들의 상호적인 사랑으로부터 세번째 위가 태어나는데 이 위는 사랑 혹은 성령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처음의 두 근원, 즉 첫번째 위와 두번째 위로부터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두 위로부터 발산되고, 그 위가 서로를 알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랑이 완전하고 무한한 두 근원으로부터 발산되므로 성령 역시 성부, 성자와 같이 영원하고 무한한다. 또한 무한하신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파괴되거나 감소되지 않은 채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두 위에게 다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한한 근원이시고 또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에 당신 자신은 아무 것도 잃지 않으신 채 당신 스스로 가지신 모든 것을 전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가 사랑 안에서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도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들이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나눌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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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