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창조주이신 하느님
1) 질서정연한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
- 창조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아주 간단하게 "처음으로 만듦", "신이 우주 만물을 만듦"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철학대사전에는 창조를 "전혀 새로운 것의 산출을 의미한다. 창조하는 힘은 무한한 힘이므로 마땅히 신에게만 고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이와 같은 창조 행위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은 어떠한 도구나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는 '제작'과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라는 질문을 한다.
- 이럴 때 바로 눈을 들어 자연을 보라. 산에서, 들에서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자연을 통해 작아지는, 미소한 자임을 느끼게 될 때,무한한 신의 섭리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 구름 아래 놓인 아름다운 장관을 보실 때라든지,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서, 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존재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 로마서 1,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 모든 만물, 우주의 창조주는 바로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창조물을 통해 우리가 믿는,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 창조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아주 간단하게 "처음으로 만듦", "신이 우주 만물을 만듦"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철학대사전에는 창조를 "전혀 새로운 것의 산출을 의미한다. 창조하는 힘은 무한한 힘이므로 마땅히 신에게만 고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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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창세기에 의한 천지창조
- 2) 창세기에 의한 천지창조
- 창세기 1,1-2,4절까지는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하느님은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즉, 시간의 창 조를 하시고, 둘째 날에는 창공이 생겨 공간을 형성하셨고, 세째 날에는 아래에 있던 바다가 더욱 밀쳐졌고, 그래서 견고한 땅이 생겼으며, 그 땅 위에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푸른 식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네째 날에는 태양과 달, 별의 창조로 말미암아 시간 안에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것들은 시간, 날, 년의 규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와 창공에 생물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살도록 하셨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바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물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이것을 지배하도록 하셨다.
- 혹 구약성서의 우주관을 보면서 또 창세기의 내용을 보면서 신화적인 표현이 많고, 지금의 우주관과는 다르다고 의혹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저자가 근본적으로 그리는 자연관은 당시 누구든지 알고 있는 상식을 토대로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동원한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사화는 결코 저자가 물리학적으로, 과학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고대의 신화나 고대의 일을 전하려 한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태초에 투영함으로써, 그린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창세기 맨 첫 줄에 나오는 신학적인 진리, 즉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는 진리뿐 저자의 관심은 오로지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찬미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신화적인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구약성서의 세계창조는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 하느님은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즉, 시간의 창 조를 하시고, 둘째 날에는 창공이 생겨 공간을 형성하셨고, 세째 날에는 아래에 있던 바다가 더욱 밀쳐졌고, 그래서 견고한 땅이 생겼으며, 그 땅 위에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푸른 식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네째 날에는 태양과 달, 별의 창조로 말미암아 시간 안에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것들은 시간, 날, 년의 규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와 창공에 생물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살도록 하셨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바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물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이것을 지배하도록 하셨다.
- 3) 천지창조의 목적
- 하느님은 과연 무엇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는가? 그분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 이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이 생겨라" 하시자 ...이 생겨났다. (창세기 1,2)
- 말만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곧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로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1-5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
-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이미 계셨으므로 이 우주만물이 없어도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시고, 스스로 무한이 행복하신 분이고 선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더 이상 소유해야 할 선이 없는데도 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 사도 바울로는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있다" 고(로마 11,36참조) 간단 명료하게 창조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창조의 목적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하느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당신의 지위를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무한하신 하느님이 당신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은 오직 당신 자신의 착하심을 주고 받으실, 즉 통교하실 목적으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외쳤다. 창조의 근거는 바로 이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말만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곧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로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1-5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4) 창조에 관한 신학적 결론
- (1)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무에서 말씀을 통해 창조하셨다. 즉,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영적인 존재, 육적인 존재들이 하느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는 것이다.
- (2)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한 분이시고, 선(善)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통해 만들어진 세상의 창조물 역시 좋은 것이며 선한 것이다.
- (3) 하느님의 창조물 중 가장 으뜸인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고 영혼과 육신을 지닌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 (4) 창조된 세계는 창조 때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돌보시고 계시며 지배하고 있다.
- (2)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한 분이시고, 선(善)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통해 만들어진 세상의 창조물 역시 좋은 것이며 선한 것이다.
- 2. 구원의 하느님
- 1) 구약에 나타난 구원의 하느님
- 구약성서에서 구원의 사상은 옛부터 꾸준히 계속되어온 주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사상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 때문에 더욱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 구약성서의 거의 전부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탈출기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파라오의 치하에서 학정에 시달리는 것을 보신 야훼 하느님은 이를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느님은 모세라는 청년을 보내어 파라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파라오는 모세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다가 하느님으로부터 여러가지 재앙을 받은 다음에야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게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에집트를 빠져나오게 된다.
- 그러나 파라오는 다시 마음이 바뀌어 기마와 병거를 출동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추격을 펼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하나 제대로 숨길 곳 없는 광야에서 모조리 에집트 군사들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 엎친데 덥친 격으로 앞에는 홍해라는 바다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된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지팡이로 홍해바다를 치자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이 뚫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해서 에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고 그후 여러 해를 광야에서 방랑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에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된다.
- 바로 이것이 '출애굽사건'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을 체험한 후 야훼 하느님을 자신들의 하느님으로 받들어 모시게 되었고 그 후에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들은 하느님께 기도하고 청원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최대의 역사적 체험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 번 구원의 역사를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다.
- 노아를 대홍수에서 구원하시고(창세 7장 참조) 야곱의 아들들을 구원하셨고(창세 45,5) 롯의 생명을 구하시기도 하셨다.
-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국가를 이루기 전, 즉 부족국가의 형태로 있을 때에도 위기가 닥치면 위대한 인물들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곤 하였는데 그러한 인물들을 '판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후에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다윗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다.
- 이상의 몇 가지 예만 보더라도 구약은 그 자체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리가 구약의 역사를 읽으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고난을 겪을 때 결코 모른체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 탄원하고 간청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탄원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 구약성서의 거의 전부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탈출기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2) 신약의 구원자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 신약에 와서는 구약에서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계속 이어가심을 알 수 있다.
- 예수께서는 여러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병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신다.
- 그러나 육체적 구원의 한계를 뛰어넘는 더 높은 의미의 구원을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
- 예수께서는 죄 많은 여자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써 구원하시고 (루가 7,48-50) 통회하고 뉘우치는 세리 자캐오의 집안에 구원을 내리신다. 또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심으로써 구원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신다.
- 이처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심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개인적인 치유나 용서가 인류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에서 알아본 예수님의 기적들은 단순히 각 개인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의 구원을 상징하는 예표라는 것과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신약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지닌 분이셨지만 인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라고 한다.
- 우리나라에서 제사는 조상들의 음덕을 기리고 자손들이 잘 되게 해 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우환이나 재난을 예방하려는 뜻도 갖고 있다. 예수님의 희생을 이러한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당신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 그 대가로 인류의 구원을 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의 고사성어중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러나 살신성인은 개인적인 의미가 강한데 비해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셨고 그 결과로 인간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다.
-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되는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의 하느님이 아니고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 로마인등 다른 민족들을 경시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다)까지도 치유해 주신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 예수께서는 여러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병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신다.
- 3) 인간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 신·구약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자로서의 모습은 인간을 극진하게 사랑하시고 인간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간청을 결코 저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이러한 내용을 조금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한다면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시라고 할 수 있다. 신·구약 성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어느 한 곳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뜻을 펼치고 계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되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신약성서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 예수의 탄생과 활동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에 참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작위로 인류를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의로운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세주는 인류를 해방시키고 구원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의로운 자를 뽑으시고 세상의 마지막 날에 그들을 통하여 악한 자를 벌할 심판자로서 드러나신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인류의 현세적인 해방자인 동시에 종말론적 심판자이신다.
-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늘 기도하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며 이웃을 위해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 여기서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기도가 구원의 절대적이고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이렇게 인정받은 사람은 현세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맛볼 뿐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하느님의 나라, 흔히들 말하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이러한 내용을 조금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한다면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시라고 할 수 있다. 신·구약 성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어느 한 곳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뜻을 펼치고 계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되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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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버지이신 하느님
- 1) 사랑과 인자의 아버지 하느님
- 3. 아버지이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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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왜나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또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 신약성서는 여기저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빠(abba,아버지)'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마르14,36;로마 8,15;갈라 4,6 등).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의기도'에서도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세번씩이나 말씀하고 계신다.
- '아빠'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아버지'라는, 어린 아이가 자기 부친을 부를 때의 매우 친근한 호칭이다. 그리고 어른들도 그들의 아버지나 노인에게 존경을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애칭이라고 할 수 있다.
-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처럼 익숙하고 평범한 표현으로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께 존경을 표시하지 않는 태도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기도에서 하느님을 '자애로운 아버지'(abba)로 부르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지니고 있는 그러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유다 민족의 전통속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다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 '왕', '주', '심판자', '변호자' 등으로 하느님을 나타내고 계신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칭호들은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 속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인자하심 속에 포함된다.
- 하느님의 적절한 이름은 아버지이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친밀하게,확신을 가지고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계시다. 이처럼 '아빠'라는 호칭은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마태11,27)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계시를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을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다. 자신이 하느님에게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한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왜나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또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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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통애(痛愛)의 아버지 하느님
- 2) 통애(痛愛)의 아버지 하느님
- 성서의 첫 권인 창세기에는 창조의 이야기 바로 뒤이어 인간의 타락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 숨어있었고 하느님은 동산을 거니시며 그를 찾고 계셨다.
- "아담아,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의 음성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이의 애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인간을 애타게 찾는 하느님이시다. 성서 전편이 사실상 하느님이 인간을 애타게 찾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인간적 비유를 쓰자면 망나니 아들을 애타게 찾는 어버이의 모습이다.
- 예수님께서 루카복음 15,11-32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두고 들려 주신 탕자의 비유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작은 아들이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나 타관으로 가버린 뒤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며 '애달픈' 마음으로 그를 기다린다. 인간을 찾는 하느님의 그리움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쓰라림'으로 비유되어 있다.
- 중국에서는 이러한 사랑과 아픔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통애'가 그것이다. '통애'라는 말은 아기를 꼬옥 끌어 안고 있는 엄마, 아기를 통째로 삼킬듯이 입 맞추는 엄마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력을 갖고 있다. 아기에 대한 엄마의 사랑,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도 크고 진해서 아픔을 느낄 지경이다. 이러한 사랑은 미움이나 노여움으로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엿볼 수 있다. 상대방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 사랑은 통애가 된다.
- 통애는 노여움 때문에 미움이 되거나 미움 때문에 노여움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분노를 쏟는 수단으로 남에게 벌을 가하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 상대방은 온전한 건강을 보존케한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통애을 느낀다. 그 통애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헌신이다.
- 이러한 인간세계의 통애를 맛봄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림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교 복음의 중심 곧 하느님 아버지의 통애의 최고 표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들판을 헤메시는 분이시다(루카15,3- 7). 하느님은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다 뒤지시는 분이시다(루카15). 하느님은 잃어버린 인간, 자신을 더 이상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어둠에 빠져 있는 그런 우리를 애타게 찾으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죄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는 우리를 찾아 당신께로 데려가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 숨어있었고 하느님은 동산을 거니시며 그를 찾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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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시는 아버지 하느님
- 3)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시는 아버지 하느님
- 하느님은 우리의 처지,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게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 그분은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입히시는 것처럼(마태 6,24-34) 그보다 더 소중한 인간을 돌보시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 그분은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고통스러워 울부짖을 때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전능한 팔로 이스라엘을 에집트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셨다. 또한 그분은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항상 도와주시고 구원해 내셨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소외받고 천대받는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을 낫게 하시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을 먹이시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행적을 통해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주신 것이다.
-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아시고 돌보시는"(마태10,30)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나갈 때,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루가12,31)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내려 주신다.
-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알려 주심으로 자발적으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르기를 원하고 계신다.
-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 4)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시고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함께 아파하시며 당신께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기다리고 계신 분이시다.
- "나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거슬러 반항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출애 6-7)라고 선언하신다. 그분은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아낌없이 용서하기 위해 죄인의 회개를 원하신다(에제 18,23).
- 그분은 당신을 모욕해도 그를 새로 세워주시고 부서지고 거만한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그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신다(시편 51,10-14.19;시편 32,1-11참조). 그분은 죄인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죄인을 벌하시다가도 곧 뉘우치시는 분(요엘 2,13)으로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자녀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시다(시편 103,3.8,14).
-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전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을 전하셨다.
- 당신께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죄많은 여인들 보고 용서를 베푸셨으며,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 회개하는 아들을 달려나가 목을 끌어안고 받아들이셨다.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시며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시고(루카15,20) 기쁨에 넘쳐 잔치를 베풀고 춤을 추시는 분이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루카15,7)
- "나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거슬러 반항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출애 6-7)라고 선언하신다. 그분은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아낌없이 용서하기 위해 죄인의 회개를 원하신다(에제 18,23).
- 5) 조건없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뻗어 나가고, 거저 주고, 창조하신 사랑일 뿐 아니라, 인자하고 자비로우며 동정하고 구속하는 사랑이다.
-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자기 안에서 자기 밖으로 퍼져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모습에 따라 없는 가운데로부터 창조하시기를 원하시고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을 우리에게 주셨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까닭에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고 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하느님은 먼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아름답고 가치있는 존재가 된 연후에 사랑하겠다는 조건을 붙이지 않으시고, 먼저 하느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당신의 사랑을 온 인류에게 보여주시고자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인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게까지 하시고, 죽기까지 희생하시도록 하셨다. 타락한 인간을 무한한 인자로 용서하시고, 동정하시며, 비참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는 최상의 기쁨이요, 영광이 되시는 것이다.
-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들 뿐만 아니라 원수에게까지 미치는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대의(大意)이며 사랑의 주제이며 사랑의 증명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원수와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사랑에 조건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셨다.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뻗어 나가고, 거저 주고, 창조하신 사랑일 뿐 아니라, 인자하고 자비로우며 동정하고 구속하는 사랑이다.
- 4. 영원하신 하느님
- 1) 하느님은 가장 진실하시다
- 인생은 속음과 속임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인간은 쉴 새없이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우리가 과연 찾아야 할 불변의 진리는 무엇이며 지켜야 할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정말 모든 것이 다 허위요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뿐이라면, 진리 탐구에 전심 전력하는 인간의 피나는 노력은 온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의 진리 탐구가 헛수고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된 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진실한 분이심은 지극히 당연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속였거나 혹은 인간에게 속으셨다는 기사는 한 군데도 없다.하느님은 우리를 속이시거나 인간을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그분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같지 않고 참되다는 것을 수차 강조하고 있다.
- 그러나 인간의 진리 탐구가 헛수고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된 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진실한 분이심은 지극히 당연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속였거나 혹은 인간에게 속으셨다는 기사는 한 군데도 없다.하느님은 우리를 속이시거나 인간을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그분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같지 않고 참되다는 것을 수차 강조하고 있다.
- 2)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
- 인간은 겨우 몇 치 밖에 안되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산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느님은 일정한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여기에 계시면서 바다 건너 외국 땅에도 계시고 하늘 높은 곳에도 계신다. 이것은 사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설명하기도 힘든 일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의 편재(遍在)라 한다.
-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을 피해서 세상 끝까지 (당시는 지구가 평평하여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함) 도망 가려 하나, 결국 하느님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까지 계시기에 구약은 "주의 눈은 태양보다도 훨씬 밝으사 사람들의 모든 길이나 구렁의 깊은 곳에까지도 바라보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그 은밀한 곳까지 통찰하신다"(집회 23,19) 고 기록하고 있다.
- 성경은 이렇듯 하느님이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것만을 말할 뿐 아니라, 더욱 뚜렷이 내게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선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우리 옆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하느님이 어디든지 안 계신 곳 없이 다 계신다고 해서 이 세상에 있는 유형 무형의 만물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드신 분과 만들어진 것들은 결코 동일할 수 없고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시지 하늘이나 땅이 곧 하느님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하느님은 악이 만연되어 있는 이 사회에도 항상 계신다.
- 인간은 겨우 몇 치 밖에 안되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산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느님은 일정한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여기에 계시면서 바다 건너 외국 땅에도 계시고 하늘 높은 곳에도 계신다. 이것은 사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설명하기도 힘든 일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의 편재(遍在)라 한다.
- 3)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다
-
-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이 가끔 하느님이란, 인간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인간 정신이 생각해 낸 가상의 절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이러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으며 고백할 수 있다.
-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이 가끔 하느님이란, 인간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인간 정신이 생각해 낸 가상의 절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이러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으며 고백할 수 있다.
- 4) 하느님은 신령한 분이시다
-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계신다.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지만, 하느님은 육체가 없다. 순수한 영체(靈體)로 계시는 신령한 분이시다. 물론 순수 영체가 어떤 것인지 우리 인간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를 통해서만 어떤 것을 보고 깨닫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이해가 가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신령함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 5) 하느님은 전능한 분이시다
-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임은 예수님에 의해서도 드러나고 그분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갖가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님은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마르 10,46-52참조) 한 마디 말씀으로 문둥병 환자를 깨끗이 고쳐 주시고(마태8,1-4참조),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가 하면 (요한 11,1-16참조), "잠잠하라"는 말씀 한 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멈추게 하시는 분이셨다(마태 4,35-41참조).
- 예수님은 또한 말씀으로도 하느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다.
-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마태19,26).
-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행적을 보든지 세상 만물을 보고 그 지으신 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쉽게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이해할 수 있다.
-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임은 예수님에 의해서도 드러나고 그분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갖가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님은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마르 10,46-52참조) 한 마디 말씀으로 문둥병 환자를 깨끗이 고쳐 주시고(마태8,1-4참조),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가 하면 (요한 11,1-16참조), "잠잠하라"는 말씀 한 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멈추게 하시는 분이셨다(마태 4,35-41참조).
- 6)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토록 인간에게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인간은 아는 데 있어서도 매우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존재해 있기에 그분은 우리처럼 배우거나 깨닫거나 궁리하거나 기억해서 아시는 분이 아니다.
- "야훼,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을 낱낱이 살펴 보신다. 사람들의 마음을 몸소 빚어 주신 분이시라 사람이 하는 일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시편 33, 13.15).
- 이렇듯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이렇듯 하느님의 전지하심은 이상의 성경 말씀으로도 입증된다.
- 그럼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특히 곤란에 부딪쳤을 때에도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것이다.
- "야훼,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을 낱낱이 살펴 보신다. 사람들의 마음을 몸소 빚어 주신 분이시라 사람이 하는 일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시편 33, 13.15).
- 7) 하느님은 무한히 선하시다
- 하느님이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다는 것은 마태오 복음 7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가를 보여 준다.
- 인간은 착하면서도 악의를 품는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전히 선하신 분이시다. 악이란 자신의 부족함에서 생기는 것인데,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모자람이 없이 가장 완전한 분이시므로 그분에게는 악이란 있을 수도 없다.
-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으로서 선 자체이시다.
-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함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렇듯 선 자체이신 하느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니시니 거룩하시기 이를 데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선을 지녀야만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함을 나누어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에 들어오라 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따라 우리 힘대로 우리의 선함을 키워가며 거룩한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 8) 하느님은 공의로우시다
- 공의하다 함은 옳은 것을 옳게 그른 것은 그르게 판단하고 선한 일에는 상급을 베풀고 악한 일에는 벌함을 뜻한다. 하느님이 공의로운 분이라 함은 우리 인간의 행실을 심판하시어 상벌을 주시는 데 있어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억울함을 당할 때가 가끔 있다. 이럴 때 우리의 속까지 다 보시고 아시는 공의로운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다 알고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의 억울한 설움을 언제나 삭혀주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도록 위로해 주신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억울함을 당할 때가 가끔 있다. 이럴 때 우리의 속까지 다 보시고 아시는 공의로운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다 알고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의 억울한 설움을 언제나 삭혀주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도록 위로해 주신다.
- 9) 하느님은 초월적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다
-
-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당신이 만드신 세계 안에 언제나 현존하시지만, 하느님은 이 세상과는 아주 다른 분이시다. 모든 종류의 범신론(汎神論)과 하느님을 이 세상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경향, 그리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세계의 어떤 차원이나 모습으로 보려는 모든 경향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파악하지 못한다.
-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만드신 하느님의 위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에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인간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다.
- 모든 사물이 하느님을 증거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과는 다른 분이시다.
- 하느님은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시고, 그분이 만드신 변화하는 사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하느님은 만물을 초월하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만물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함이 없고 영원한 하느님의 실재는 그 자체가 완전한 것으로서 유한한 실재와는 완전히 구별된다.
- 또한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사야 5,24)이시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어떤 악에도 물들지 않은 자유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과는 달리 죄를 범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강렬한 선성(善性)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한다. 그것은 희망과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뛰어난 존경심이다.
-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당신이 만드신 세계 안에 언제나 현존하시지만, 하느님은 이 세상과는 아주 다른 분이시다. 모든 종류의 범신론(汎神論)과 하느님을 이 세상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경향, 그리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세계의 어떤 차원이나 모습으로 보려는 모든 경향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파악하지 못한다.
- 5.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깊이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몸을 맡기고 있는가?
- 신문에 나온 한 이야기를 읽고 이를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 ★ 어떤 집에서 한밤중에 프로판 가스가 폭발하여 화재가 발생했다. 양친과 두 어린이는 어떻게든 밖으로 달려 나왔으나 혼란 속에서 제일 밑에 있는 5세의 남자 아이가 2층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양친은 광란 상태가 되었다.그 남자 아이는 2층의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쳐다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창에서 뛰어 내려라!'
-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연기와 화염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나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아버지의 얼굴도 보이지 않아요!' 어린이는 그렇게 대답하였다.'아빠가 너를 보고 있으니 염려 없다, 자 뛰어 내려!' 아버지의 목소리에 따라 어린이는 창에서 뛰어 내렸다. 아버지는 창 밑에서, 창에서 뛰어 내리는 어린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어린이는 찰과상 하나도 없이 무사했다.
- 우리들도 하늘의 아버지께 이 어린이처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자신은 결점 투성이로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으나 노력하여 자신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의 사랑은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신다. 이것은 결코 독선적인 생각이 아니라 깊은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만 신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은 사랑 자체이시고 나에 대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하늘의 아버지는 나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깊이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몸을 맡기고 있는가?
- 십자가를 잡고 성호경을 한 다음 십자가에 친구하고 사도신경을 외운다.
- 다음 묵주알을 잡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 다음 세개의 알을 차례로 넘기며 각각 성모송을 한다. 각각에서 다음을 묵상한다.
1) 천주 성부의 지극히 거룩한 딸이신 마리아
2) 천주 성자의 평생 동정 어머니이신 마리아
3) 천주 성령의 지극히 정결한 짝이신 마리아
- 다음의 묵주알을 잡고 (머리를 숙이며) 영광송을 한 후, 묵상 주제인 환희, 고통, 영광, 빛의 신비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신비 1단을 외운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 묵주알 10개를 넘기면서 성모송 10번을 하는 동안 신비 1단의 내용을 묵상한다.
- 다음 알을 잡고 영광송과 구원경을 바치면서 1단을 마친다.
- 이어서 신비 2단을 외운 뒤,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도 1번과 성모송을 10번을 하면서 2단의 내용을 묵상하고, 영광송, 구원경을 바친다.
- 같은 방법으로 3단, 4단, 5단을 바친다.
- 마지막 5단의 영광송, 구원경을 바친 뒤 성모찬송을 바치고 십자가에 친구하면서 성호경을 하고 끝낸다.
묵주기도란
묵주기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다. 더 정확히 말해 묵주기도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모 마리아와 함께 관상하는 기도다. 방법적으로는 열번의 성모송과 한번의 주님의 기도와 영광송을 한 단으로 하는 5단 묶음을 넘기며 묵주알 하나하나마다 기도문을 암송한다.
묵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로사리움(Rosarium)은 '장미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알고 있는 로사리오(Rosario)는 '장미 꽃다발' 혹은 '장미화환'을 뜻한다. 결국 '로사리오'기도란 '장미 꽃다발 기도'를, 묵주알 '하나'는 장미 '한송이'를 의미한다.
장미 한다발, 묵주의 기도는 복음서의 요약이자 인류 구원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교회의 신비, 그리고 마리아의 신비를 요약, 함축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을 통해 "묵주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자 구원적인 강생에 집중하는 기도며 그리스도께 대한 끊임없는 찬미이고 순수한 기도" (46항)라고 정의했다.
묵주기도의 유래와 의미
묵주기도의 기원은 초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기도 대신 장미 꽃다발을 바치기도 했으며 순교자들은 장미관을 쓰기도 했다. 정확한 묵주기도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으나 초세기 은수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한 시편을 외우면서 작은 돌멩이나 곡식의 낱알을 엮어 하나씩 굴리면서 기도의 횟수를 센 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환희, 고통, 영광의 15단 묵주기도가 자리잡게 된 것은 15세기 말경, 정확히 오늘날과 같은 묵주기도는 '묵주기도의 교황'이라 불리는 비오 5세가 1569년에 만들었다. 묵주기도는 1830년 이후 세계 각처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는 1830년 파리에서, 1858년 루르드에서,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할 때마다 묵주기도를 잘 바치도록 간곡히 부탁하셨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와 함께 빛의 신비를 추가하여 기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묵주기도는 '인체의 호흡'에 비유될 만큼(레지오 마리애 새교본 19장 14항) 신자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묵주기도는 구원의 역사를 효과적으로 집약하고 있으며 그 구원의 역사 속에서 마리아가 하시는 여러가지 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 새교본 18장 4항)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면 성서의 신비를 모두 알게 되며 영원한 삶에 대한 신비를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묵주기도를 통해 묵상하게 되는 예수의 탄생(환희), 죽음(고통), 부활(영광)의 신비는 우리 삶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묵주의 기도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기쁨 뒤에 고통이 찾아오고 그 고통 뒤에 영광이 찾아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마라톤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우승을 차지한 선수에게 '영웅'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바로 수없이 많은 고통의 시간을 이겨낸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묵주기도는 이처럼 환희, 고통, 영광이라는 이 '삼각 순환고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사를 묵상하며 구원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우리들의 삶을 묵상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역대 교황들은 묵주기도의 중요성과 함께 묵주의 기도의 은총을 계속 강조해 오고 있다.
교황 비오 10세는 "묵주기도만큼 아름답고 은총을 많이 내리게 하는 기도는 없다"면서 묵주기도를 매일 정성스럽게 바치라고 유언했다.
묵주기도의 약속
다음은 동정녀이신 어머니 마리아께서 성 도미니꼬와 복자 알라노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1. |
내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는 자에게는 나의 특별한 보호와 수많은 은총을 약속한다. |
2. |
내 묵주기도에 항구한 자는 어떤 표시 있는 은혜를 받을 것이다. |
3. |
묵주기도는 지옥을 능히 쳐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며, 악을 쳐부시고 죄에서 구원하고, 이단을 물리칠 것이다. |
4. |
묵주기도는 덕과 선을 더욱 풍성케 하고, 영혼 안에 하느님의 가장 풍요한 은총을 내릴 것이며, 그 마음 안에 세상의 사랑 대신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다 줄 것이며, 그 영혼은 이로 인해 성화될 것이다. |
5. |
묵주기도를 드리며 나에게 달아드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
6. |
매 신비를 묵상하며, 나의 묵주기도를 경건하게 바치는 자는 불행에 묻히거나 죽을 때에 버림받지 않을 것이며, 죄인은 회개하고 의인은 은총에 더욱 성장하고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
7. |
나의 묵주기도에 진실로 헌신하는 자는 교회의 위로나 은총 없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
8. |
나의 묵주기도를 바치는 자는 살아있을 때와 죽을 때에 하느님의 빛과 그 은총의 풍요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모든 성인들의 공로를 나누어 받을 것이다. |
9. |
나의 묵주기도에 열심했던 영혼이 연옥에 떨어지면 즉시 구해낼 것이다. |
10. |
나의 묵주기도의 진실한 자녀들은 천상에서 큰 영광을 누릴 것이다. |
11. |
나의 묵주기도를 통해 청하는 바는 무엇이나 다 들어 주겠다. |
12. |
나의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자는 모든 필요한 도움을 다 얻을 것이다. |
13. |
나는 내 아들로부터, 매괴회 회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천상의 성인들을 형제로 차지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 |
14. |
나의 묵주기도를 성실하게 바치는 자는 내 사랑하는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될 것이다. |
15. |
나의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은 구원의 명확한 표시가 될 것이다. |
묵주기도 방법
묵주기도는 구도와 염도가 가장 아름답게 조화된 기도라고 한다. 구도란 일정한 문장으로 정해진 기도문이고, 염도란 일정한 문장으로 정해지지 않은 내심의 기도 또는 침묵의 기도이다. 묵주기도는 바로 일정한 기도문을 되풀이하여 외우면서 주님의 구원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로사리오를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으로 기도할 때 각단의 신비 내용을 진정으로 묵상해야 한다.
예를 들면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 예수를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라고 한 후,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는 동안에 일체 다른 생각이나 묵상을 하지 말고 마리아께서 예수를 잉태하시는 그 신비만을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고 있다. 그냥 일반적인 생각이나 묵상으로 바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무 생각이나 묵상도 하지 않고 외워버리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세운 지향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바치기도 한다.
예로써, 아픈 어머니를 생각한다든가 또는 아들의 시험 합격을 바라고 시험 결과를 이리저리 상상하면서 바치는 경우이다. 지향은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세우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묵상중에 생각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분심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 기도와 성모송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로사리오 기도를 얼마나 깊이 묵상하는가 하는 척도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자기 생활을 기도화하고 자신을 관상화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일수록 로사리오 기도를 깊이 묵상하고 관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로사리오 기도를 꾸준히 묵상하면서 자기 생활을 더욱더 기도화하고 자신을 관상화할 수 있다. 로사리오 기도는 깊은 영성에 도달하기 위한 힘있는 수단이다.
* 묵주기도의 구성 및 방법은 다음과 같다.
<환희의 신비>
제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제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제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제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고통의 신비>
제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제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제4단. 예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제5단. 예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영광의 신비>
제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제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 올리심을 묵상합시다.
제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빛의 신비>
제1단.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제3단.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제4단.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제5단.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구원경>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성호경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성모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영광송
밑줄 부분에서 고개를 숙이며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반성기도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
아멘.
고백기도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가슴을 치며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통회기도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아멘.
삼덕송
신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망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애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나이다.
봉헌기도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소서.
아멘.
삼종기도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나이다.
성모송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성모송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저희 가운데 계시나이다.
성모송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 기도합시다.
하느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부활 삼종기도
(예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알렐루야.
동정 마리아님, 기뻐하시며 즐거워하소서.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온 세상을 기쁘게 하셨으니
성자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도움으로
영생의 즐거움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식사 전 기도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식사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아멘.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받으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일을 마치고 바치는 기도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지켜주시고
어려울 때 저희가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물리치지 마소서.
또한 온갖 위험에서 언제나 저희를 지켜주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아침기도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소서.
아멘.
우리 주 하느님께 권능과 영광
지혜와 굳셈이 있사오니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전능하신 하느님
오늘도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저녁기도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
잠깐 반성한다.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아멘.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하루도 이미 저물었나이다.
이제 저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주님을 흠숭하며
지금 이 순간까지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나이다.
아멘.
전능하신 천주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지켜주소서.
아멘.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빠라끌리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 16 - 17).
진리의 성령을 예수님께서는 빠라끌리또라고 부르신다. 빠라끌리또란 '위로자', '협조자' 또는 '변호인'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다른' 또는 '두 번째' 빠라끌리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첫 번째 협조자이시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은 세상에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신 하느님의 첫 번째 협조자이시고 성령께서는 '그분 다음에' 또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요청으로'오시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업을 "세상 끝날까지"(마태 28, 20) 계속 추진하시는 두 번째 협조자이시다. 협조자라고 번역된 '빠라끌리또' 라는 표현은 본래 어린이나 노약자 등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부르면 언제나 달려가 도와 줄 태세를 갖추고 곁에 있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아기에게는 엄마가 바로 협조자이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세상 한 복판에서 세상을 향하여 흔들림 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의 시작이시며 새 협조자이신 것이다. 이제 성령께서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의 스승으로서 사도들과 교회 한 가운데에 계시면서 그들의 위로자, 변호인이 되시어 함께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요한 14, 18) 않으신다. 그래서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 7) 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열어 보여 주시는 최고의 완전한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 하셨지만 그것을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빠라끌리또 즉, 진리의 성령을 파견하심으로써 계속 드러내고 증거 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사도행전은 교회의 기원과 성장에 관해 전해 주는 중요한 책으로, 성령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어 '성령의 복음서'라고도 불리운다. 오늘날 교회가 초대 교회의 모범을 따르고자 열심히 공부하는 성서이기도 하다.
누가 썼는가?
루카복음서를 쓴 사람이 썼다고 본다. 신약성서 중에 머리말은 등장하는 수신인이 모두 '데오필로'('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사도행전의 머리말에 첫 번째 책에 관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루카복음서의 끝 부분과 사도행전의 앞 부분이 예수님의 승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두 책에 사용된 문체나 용어도 비슷하다. 루카복음서처럼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힐 수 없지만 편의상 루카라고 한다.
언제 쓰여졌는가?
사도행전은 대략 95년경에 완성되었다고 본다. 사도, 장로, 부제 등 교계제도적인 모습과 세례, 안수, 성찬 등 원초적인 루카복음서와 사도행전은 한 사람의 신학적인 의도아래 두 권의 책으로 쓰여졌다. 그중에 루카복음서가 80-90년경에 먼저 쓴 성사제도는 1세기 말엽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왜 쓰여졌는가?
예수님의 승천 이후 교회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일깨우고자 한다. 교회 탄생에 이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이방인의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를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근원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교회 성원들에게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81-96)의 황제숭배 강요 및 유대인과 이방인의 모함 등으로 시련과 지켜 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 사이의 빈부 차이 문제 및 유대계, 이방계 그리스도인 간의 갈등 등 교회 내의 문제를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을 모범 삼아 극복하고자 했다.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는가?
사도행전은 모두 28장이다. '예수님의 길'을 이야기한 루카복음서에 이어 지리적인 흐름에 따라 '교회의 길'을 전해 주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베드로, 후반부에서는 바오로가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성령으로 탄생한 새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활(1,1-5,42)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주님으로 삼으셨음을 온 이스라엘에 선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촉구한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고 새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룬다. 신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친교를 맺고, 성찬을 거행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가진 바를 나누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한 마음 한 몸을 이루었다. 이렇게 신명나는 공동체 생활로 교회는 온 백성의 호감을 샀고, 주님께서는 이 모임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날마다 늘려 주었다.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확장되어 가는 교회(6,1-12,25)
교회 안팎에서 시련을 당하지만 계속적으로 성장해 가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교회가 점차 커지면서 유대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의 봉사에 전념하기로 하고 일곱명의 보조자를 뽑아 신도들을 돌보게 했다. 그중 한 사람인 스테파노는 조상 때부터 예언자들을 박해하며 하느님을 거역해 온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다가 순교하게 된다.
그 이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닥치자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지역에까지 흩어져 복음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때 베드로는 현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아무런 차별없이 평화의 복음을 전하도록 이르셨음을 교회에 알려, 이방인을 향한 선교를 더욱 북돋운다. 박해는 계속되지만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복음은 더욱 널리 퍼져간다.
땅 끝까지 복음을 선포한 바오로의 선교여행(13,1-28,31)
바오로를 중심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오로라고도 불리운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이러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빛 체험을 하고 회심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된다. 특히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하여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의 주장에 대해, 이방인에게 행하신 주님의 표징과 기적을 증거함으로써 할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베드로의 선언을 뒷받침한다.
모함과 위기, 감옥에 갇히는 등 여러 차례 시련을 맞지만, 성령의 이끄심으로 세 번에 걸친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운다. 그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어 묶인 몸이 되었으나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다.
이로써 루카는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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