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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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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03 하느님 나라
  2. 2011.06.03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3. 2011.06.03 예수 그리스도
  4. 2011.06.03 계시
  5. 2011.06.03 이스라엘 역사
2011. 6. 3. 23:07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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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여러분은 회개(悔改)하고 복음(福音)을 믿으시오" (마르 1, 15).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核心)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있으며, 이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에 대해 여러가지 비유와 기적 그리고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심으로 깨닫게 해준다.
    당시의 유다인들의 사고에는 어떤 의로운 지배자를 그리워했으며 언젠가는 이 이상이 실현되리라 희망하여 왔다. 당시의 유다인들의 희망(希望)을 총괄하는 개념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의지할 데 없고 무력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고 도움을 받으며, 불의한 지배로부터 해방(解放)되는 기쁨과 평화(平和)가 넘치는 곳이리라 희망하였다. 이를 위해 아주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며, 이 새로운 시작은 생명과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 새로움,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것, 연역적으로 불가능한 것, 더구나 조작될 수 없는 것, 그러기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 결국 '하느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느님의 하느님이심, 그 분의 주님이심을 뜻하며,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인간임과 세상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하느님의 다스림'은 창조 질서에 적대적인 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解放), 구원(救援)받을 길이 없을 만큼 서로 찢겨져 있는 실재 상호 간의 화해(和解)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느님 나라의 비유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 역사 체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에집트를 탈출할 때 놀라운 기적으로 당신 백성들을 건져내셨으며(출애 13,17-15,21)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도 줄곧 당신 자신을 섭리의 하느님, 길을 이끄시는 하느님으로 드러내셨다(출애 16-40).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에 이웃 나라와 많은 충돌을 하며 줄곧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작가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신앙을 명백히 종말론화(終末論化)하기 시작한다. 이 '작가 예언자들'은 과거의 출애굽이나 하느님과의 계약 체결과 같은 과거의 모든 위대한 구원위업(救援偉業)들이 미래에 가서는 더욱 거창하게 재현되리라고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새로운 계약', 어떤 '새로운 출애굽'을 희망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종말론적 희망(終末論的 希望)은 장차 일어날 사건 보도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 희망은 오히려 어떤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위로(慰勞)와 희망(希望)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결국 이 세상의 지배자로 오셔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리라는 신앙(信仰)의 확신(確信)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상태에서 새롭고도 결정적인 희망(希望)을 제시하였다. 예수님은 이 종말론적 희망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 15).
    수많은 세대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지금 다 되었다고 선포하신다.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되도다! 사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루가 10,23-24).
    예언자들이 선포하던 그 때가 다 된 것이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마르 4, 26-29).
    또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된다"(마르 4, 30-32).
    또 하느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신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비슷한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 33).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 안에 숨겨져 있고, 그 작은 것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은 가장 작은 것 안에 숨어있음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나의 감추어진 현실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현재 안에 바로 지금 이 자리에(Here and Now)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이 바로 이 세상 한 가운데로 몰래 뚫고 들어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3. 하느님 나라의 완성
    우리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매우 막막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로서 사회의 개혁 같은 엄청난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 속에 살면서 그 생활 양식을 전수받았다. 우리는 독이나 약 모두를 이 사회와 함께 마시고 살아간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한 존재인가를 통감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험지옥과 같은 입시 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자기 자식만은 될 수 있으면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한다. 소비 사회의 낭비를 반대하지만 상점에서 상품 하나를 사는 일 자체가 그러한 사회 구조에 가담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렇듯이 우리는 마치 큰 바다에 떠 다니는 해초와도 같이 사회의 가치관에 휩쓸려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는 바위에다 계란을 내리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는 무에서 천지를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시며 마침내 는 이 세상을 모두 포괄하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하였지만 '아직 아니'(Not Yet)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렇듯이 완성의 도정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맛들이고 거기에 동참하는 생활이어야 하겠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멋진 삶에 눈을 뜬 사람은 이 세상이 보장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지 숨겨 두고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장사꾼과 비슷하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물러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4. 하느님 나라를 위한 협력자의 생활양식
    예수님의 진복선언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 5장은 이 진복선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을 예수님의 산상설교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생활 양식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산상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으로써 제시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마태오복음 5장 38절에서 39절, 43절에서 45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오히려 누가 당신의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을 돌려대시오....'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계명은 참으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듯이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 양식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적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규칙과 계명처럼 억지로 사랑해야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애를 써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계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우리가 죄많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서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생활 양식과 타인에 대한 관계 양식이 변화될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생활양식이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할 때 틀림없이 이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데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 어떠한 체험을 하고 어떠한 생활 양식을 이루고 있는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각자 반성해 보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변화될 때 교회가 변화되고 마침내 세상이 변화될 것임을 굳게 믿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하느님 나라를 전해야 할 사명
    우리 모두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어두움과 악의 세력이 만연하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가난한 사람들, 즉 우리에게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모른다. 경제성장과 번영, 능률을 최대의 가치로 삼는 사회, 너무도 시끄럽고 분주하게 우리를 일로 몰아 붙여서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더욱 빼앗아 가는 사회, 자기의 이익과 성공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고 이에 필요없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말살시키려는 사회, 이런 사회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 의(義)를 찾아가는 것, 자기의 이해와 관계없이 참으로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설령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혁되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이 하느님 사랑의 도구로써 활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 스스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위해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를 관철시키셨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 역시 우리의 삶과 죽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증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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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6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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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금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살아 계시던 때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은 시골의 한 예언자가 놀라운 기적을 하면서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처음 얼마 동안은 중풍병자나 나병 등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고작인 줄 알고 안심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의 병자들을 고치는데 그치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음이 병든 사람들도 고쳐 주셨다. 그것도 병든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당신이 몸소 찾아가서 그들의 병을 보살펴 주셨다. 또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소외받고 핍박받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갈릴레아 호수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겨우 수십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켰고 그때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마침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지자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은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지배를 따르면 그만이었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쫓아내고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그 불안은 더 커졌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이렇게 하는 권한이 있는지를 따지기 시작한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들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으로 예수님을 묵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찌기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의 예고에 따라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한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박해는 처음부터 고의적이고 무지막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다 듣고 나서 백성들이 보고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대답이나 부활논쟁(루가 20.20-40)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답변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고 또한 겉꾸며 길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니 조심하라고 말씀하셨고 이런 사람들은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셨던 것이다(루가 20,45-47).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트집을 잡지도 못하고 망신을 당하자 예수님을 미워한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율법의 적용을 무색하게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질투하였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한낱 시골의 예언자로만 보지 않고 자기들의 경쟁자로 보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들을 조사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트집잡을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백성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율법을 안 지킨 때가 여러 번 있는 예수님은 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었다. 그때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이 가져다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더 좋아하면서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초기의 예수님 행적을 멀리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로 치부하면서 그들은 되도록 예수님에 관한 것을 모르는 체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지금까지는 아무도 넘겨다 보지 않았던 율법학자들의 권위에 예수님이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어서 그들은 예수님을 증오하게 되었다. 곧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마치 그들의 계획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바로 이때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그들을 만난다. 이 만남으로 예수님은 며칠 후에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묻히심
이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과월절이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예루살렘의 어느 집 이층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것이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루가 22.14-20).
과월절의 본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할 때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 옛날의 조상들이 종살이 하던 것을 구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는 조상들이 고생하던 때를 생각하여 쓴 풀과 누룩없는 빵 그리고 속죄의 의미로 양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예절과는 다르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빵을 드시고는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하셨다.
또 잔을 드시고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 여러분을 위하여 쏟는 것이다" 하셨다. 그런 후에 당신이 한 제자의 배반에 의해서 곧 잡히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는 고통스러운 말이었다. 그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게 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전에도 하느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괴로워 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려 들지 않는 백성들을 보시고 무서운 예언을 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셨다(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저주하심 - 루가 10,13-15.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심 - 루가 19,41-44).
아무튼 이때의 예수님은 착잡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을 하셨다. 즉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협조자로 성령을 보내겠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맡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언을 제자들에게 하신 후에 그 방을 나와서 전에 갔던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그곳에 있는 게세마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떨어져서 혼자서 기도하신다. 이 기도를 하는 동안 예수님은 온갖 인간적인 고통과 번민을 느끼신다.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즉 아무리 중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나약한 인간의 심경으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간구한다. 즉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다가오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다가오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 후에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신다. 얼마 있지 않아서 깜깜한 밤 중인데도 유다가 성전 관리병들과 함께 올리브산에 와서 예수님을 체포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는 대제관의 집으로 갔다. 베드로는 스승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겁이 나서 도망쳤지만 이내 스승이 걱정되어서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라 대제관의 집에까지 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추궁으로 베드로는 또 겁이 나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이때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이곳에 없었다.
한편 대제관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잡혀온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면서 때렸다.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은 최고의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곳에 예수님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증명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들이 내놓은 증거나 증인들이 하는 말은 어느 것도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떻게 해도 그런 죄목은 예수님에게 맞지 않자 그들은 끝에 가서 억지를 부린다.
즉 "그러니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대제관이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대로라면 누구든 '하느님'이라는 말조차도 함부로 말해서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님처럼 시골 예언자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알고 계시지만 예수님은 "내가 '그'라고 여러분은 말한다"하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씀을 갖고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다음날 대제관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에게는 사형 권한이 없음을 이유로 하여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준다.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흔히 볼 수 있는 군인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대제관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표면적인 죄목은 '유대민족을 이간하여 황제에게 세금내는 것을 막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말한 점'이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별도로 예수님을 심문해 보고는 대제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위험 인물이 아니라고 보았다. 빌라도 조차도 대제관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알고서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을 또 다른 사람, 헤로데에게 넘겨준다. 헤로데라는 사람은 로마 총독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에 불과한 유대인의 왕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로마의 총독이 허가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아무런 권한이 없었던 헤로데이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건네 받았지만 별다른 심문은 하지 않고 그저 장난이나 치고는 다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빌라도는 짜증이 나서 축제 때마다 유대인 죄인 하나를 풀어주었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예수님을 매질이나 해서 풀어 주려고 한다. 그러나 대제관들은 빌라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예수님은 죽이고 그대신 바라빠라는 죄인을 풀어 달라고 한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요구한 예수님의 사형은 그저 단순히 칼로 목을 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요구한 사형의 방법은 그 시대에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만 언도하였던 '십자가 형'이었다. 이 형을 받은 죄인은 자기가 매달리게 될 십자가를 들고 형장으로 가기 전에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시를 돌았다. 로마의 총독은 자기들에게 반항한 죄인들에게 이런 가혹한 형벌을 주었다.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보고 로마에 반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이 사형장에 도착하는 동안 이제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조롱과 모욕을 모든 사람들에게 받았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보고 침을 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저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욕설은 듣기만 해도 보통은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쓰러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꾀를 부린다고 조롱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때린다. 그 험한 길을 걸어 오는 동안 예수님을 도와 준 사람은 키레네 사람 시몬 뿐이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죽어야 할 장소인 '해골산(골고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군인들은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예수님의 옷을 벗기우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게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눕자 그들은 예수님의 양 손목과 발등 위에 커다란 못을 들고 주저없이 박았다. 그리고 십자가를 들자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대제관들의 시기심에 의해서 예수님은 억울하게 잡혀와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게 되었다. 즉 예수님 때문에 백성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대제관들은 질투심을 못 이겨서 예수님에게 잔악한 보복을 한 것이다. 본시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작은 명패를 달았다.
I.N.R.I.(Jesus Nazarenus Rex Judaeorum) 곧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것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죄명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명패는 유대 지도자들의 보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보인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시면서 서서히 죽으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도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또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하고 하실 뿐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자 아무도 그분을 거두어서 무덤에 묻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선 대제관들이 그것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도 자신이 당당한 의회의원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빌라도에게 가서 허가를 받아서 자기가 아는 빈무덤에 예수님을 묻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는 가운데 쓸쓸히 돌아가셨다. 단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십자가 아래서 지켜본 사람은 성모 마리아와 몇 사람의 여자들, 그리고 제자로는 유일하게 요한 뿐이었다. 이들은 안식일 전날에 예수님이 빈무덤에 묻히시는 것을 지켜 보았다.
3. 예수님의 부활
그 여인들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와 향료를 발라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고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저 조용히 지냈다. 그 여자들은 안식일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 갔다. 여자들은 무덤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덤에 있었던 어떤 사람이 실의에 빠진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준다. 즉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전에 갈릴레아 계셨을 때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시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여자들은 사람들이 무서워 숨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대로 알려 주었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도 깜짝 놀라서 무덤에 와 보기는 하였지만 아직 믿지는 않았다. 얼마 후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에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4. 예수님의 수난, 고통, 죽음 그리고 부활의 구원적 의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특히 성삼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한다. 즉 성목요일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을, 성금요일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성토요일에는 부활하심을 기념한다.
가톨릭의 십자가는 개신교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이 달려 계시며 몸에 오상이 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십자고상'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처럼 처참한 죽음을 하셨을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멸망될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체험과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이룩하신 업적의 가장 중대한 측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한 구원에 대한 개념을 갖고 예수님의 행동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당신이 받은 소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셨다. 즉 가난한 사람과 소외받은 사람들을 찾아 가서 위로하셨고 억눌리고 천대받던 세리와 창녀들을 따뜻하게 대하여 인간다운 해방을 주었다. 그리고 과부와 병든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행동에서 잘못된 곳을 찾아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곳은 도무지 보이질 않다. 오히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불안과 불행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준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구원 사업은 인간의 육체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보다 인간의 정신적인 면의 구원에 더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하여 잡힌 여인의 통회하는 모습을 보시고 용서하심으로서 그녀를 구원하셨다(루가 7,48 -50). 또한 통회하고 뉘우치는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내리셨다(루가 19,9).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구원은 주어진다. 다시 말하면 먼저 자기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 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수난과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한 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은 어찌보면 모순된 말씀으로 제시되었다. 즉 스스로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될 것이다(마태 19,39; 루가 9,24; 요한 12,25).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후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지옥의 저 아래에까지 내려 가셨다가 다시 그 죽음의 힘을 물리치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중에서 첫째로 태어나신 분"으로서(사도 26,23; 골로 1,18) 구원된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첫번째로 들어가신 분이시다. 그분은 "영광의 주님"으로서(1고린 2,8)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주인이시고(사도 3,6-8 참조) 하느님의 능력을 띤 강자이신다. 이렇게 부활이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그것은 환생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이 부활이 있었기에 사도들은 신앙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부활이 주는 기쁨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기쁨보다도, 가장 순수하고 최고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구약의 빠스카와 비교될 수 있다. 본래 빠스카라는 의미는 '거르고 지나가다'이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구하기 위해서 모든 생물의 첫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집 대문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칠했는데 그것은 생명의 구원을 약속하는 표시였다. 곧 죽음의 천사는 그 표시가 있으면 거르고 다음으로 건너 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도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죽지 않고 파라오의 종살이라는 속박에서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이처럼 구약에서 양의 피가 지녔던 것을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그대로 실천하셨다. 어떠한 잘못이나 흠집이 없는 순결한 양이 죽임을 당하여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이 보게 됨으로써, 또 천사가 보게 됨으로써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나아가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해방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이 순수하고 온화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여 그 처참한 몰골을 우리들에게 보이심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단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의 시기심이나 질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의 이웃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죄의 종살이를 해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우리가 매일 범하는 시기심과 질투심이라는 죄악 때문에 당신이 빠스카의 제물인 어린 양처럼 산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대로 하셨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되는 산 제물의 봉헌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죄의 종살이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이렇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이 세우신 성체성사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시는 약속의 재현이며 그것의 실현이다.
이것은 매주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고 성찬 중에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러한 빠스카의 의미를 매일의 미사 중에 성체성사 안에서 늘 새롭게 재현한다. 빠스카의 신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에서 죽고 또 부활하여 예수님과 만남으로서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뿐 아니라 내세까지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니는 구원의 의미
성서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유언하신 것처럼 복음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이러한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은 자캐오가 한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거나 바리사이들처럼 거절하여서 멸망에 빠지거나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주저없이 복음을 받아들였으므로 구원을 선택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생활에서 노력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또 가까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생활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때 그 용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 구원이 매일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이러한 통회와 신앙의 고백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빠스카의 신비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즉 진정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여야겠다. 또한 축성된 성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나아가서 생활의 나눔을 통해서 나의 이웃과 일치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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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5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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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人間)이시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셨는지 그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듯이,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
1) 예수의 탄생과 성장
예수님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식민지 통치 아래서 태어난 유다인이었던 셈이다. 그분의 아버지는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분이었다(마태 1,17; 루카1,27).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약혼만 해놓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의 힘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는 것이다(루카 1,34-35).
이같이 태어나신 예수님은 목수이셨던 아버지 요셉(마태 13,55)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살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며 "슬기와 키"가 자랐다(루카 1, 40.52).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면서 자랐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목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그분도 목수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마르 6,3).
2) 예수의 공생활
이렇게 자란 예수님은 30살 쯤 되었을 때(루카 3,23) 가정을 떠나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의 가정을 떠나 당신의 새로운 가족(마태 12,48-50)을 만들고 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신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을 뽑아 그들과 함께 지내셨다는 것이다.
(1) 예수님은 가르치는 분이다.
예수님은 함께 지내는 제자들에게 여러가지의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자들뿐 만 아니라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기쁜 소식을 가르치고 설명해주신다. 예수님이 가르칠 때는 어려운 말씀을 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당시 사람들이면 누구나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다. 예를 들면 양떼와 목자, 씨 뿌리는 사람, 포도원, 겨자씨, 등잔불, 누룩, 친구 이야기, 결혼잔치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가르치신다. 예를 들면 유다인들의 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이나 회당(루카 4,16),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혼인잔치를 하는 집(마르 2,1; 루카 5,29)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같이 어떤 건물 안에서만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호숫가에서 서서(루카 5,1), 물 위에 떠있는 배 안에서 앉아서(마르 4,1), 그리고 땅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도(요한 8,5.8) 가르치셨다. 심지어는 먹고 마시는 도중에도 가르치신다(루카 6,27-39).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마르 1,15)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마태 22,37-40; 루카 10,25-28)이었다.
(2) 예수의 인간적인 언행(言行)들
예수님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통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들, 예를 들면 기쁨, 분노, 사랑, 즐거움, 감사, 동정심 같은 것을 다 느끼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싫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기도 하고, 또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에 슬픔을 보이신다(마르 3,5).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집인 성전(聖殿)을 더럽힌다고 그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들어 엎어 버리는 과격한 행동을 하시기도 한다(마태 21,12).
또 백성들 앞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이던 당신의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에 갈 심판을 피하랴?"(마태 23,33)하고 욕을 퍼부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과는 달리 어린이들을 사랑하셔서 껴안기도 하고(마르 10,16),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라는 세 남매를 사랑하셔서(요한 11,5), 라자로가 죽자 비통한 마음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3.35).
이것만이 아니다. 그분은 굶주리기도 했고(마르 11,12), 먼 여행에 지쳐 낯선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기도 하신다(요한 4,6-7).
또 배 안에서 배의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기도 하고(마르 4,38), 잔치집에 가서는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마태9,10).
3) 예수의 죽음
사람이면 누구나 죽듯이 그분도 죽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요한 19,19-22).
다시말해서 당시 로마의 지배에 도전할 위험한 인물이라는 죄 때문에, 그리고 유다인들에게는 오직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사칭했다는 죄 때문에 정치범으로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분은 죽음을 앞에 두고 무서워 떨며 번민하고, 괴로워 하신다(마르 14,33-35).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탄식을 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결국은 33살이라는 나이에 숨을 거두셨다(마르 15,34.37).
2. 예수님은 하느님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일생은 완전한 실패이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눈에 보이게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는가? 아니면 장가를 들어서 자손들이라도 많았나? 지금의 사회 기준으로 보면 그저 철이 들만한 나이가 되니까 가출해서 자기 식대로 살다가 당시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결국은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일생을 마친 불행한 청년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손수 뽑았던 제자들마저도 예수가 잡히던 그 순간에 모두 도망 가버렸다(마태 26,56). 모든 것이 말 그대로 공(空)이다.
1) 제자들의 증언 -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라는 사람이 언제 있었더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땅에 묻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마태 28,6-7).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2) 제자들의 신앙고백 - 부활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다
바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때까지 스승인 예수의 죽음으로 실망하고(루카 24,17), 자기들까지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에 질려 있던 제자들을(요한 20,19)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놓는다.
제자들의 경우와 똑같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이 죽거나,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인생을 좀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 제자들도 이제 새로운 눈,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것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나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하기 시작한다(사도 2,14).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예수를 부활시킨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라고 말이다. 이제 제자들의 고백은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간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버지 하느님과 항상 일치하고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다고 말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구세주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자신들과 함께 하시던 일들에 대해서 새로이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야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시라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은 세상의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이시라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그 분의 일생은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께서 함께 하신 일생이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전에 죄인들을 용서해주거나 병을 고쳐준 기적들과 귀신을 내쫓은 행동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3)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우리가 예수께 드려야 할 대답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참된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오빠 라자로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요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5-27).
3. 육화의 신비
1) 어떻게 둘이 하나이고, 또 하나가 둘일 수 있는가?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이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일 수 있으며, 또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 신비로운 것을 육화(肉化)의 신비 또는 강생(降生)의 신비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되셨다는 신비이다.
이처럼 신비스러운 것이지만 그래도 이것을 간단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여기 날달걀이 있다. 이 달걀을 예수님이라 생각해보자. 그럼 이 달걀을 깨서 유리그릇에 담아 보면 흰자와 노른자가 있다. 여기서 흰자를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 즉 예수님의 인성(人性)이라고 하고 노른자를 예수님의 하느님적인 면, 즉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보면 이 달걀, 즉 예수님 안에는 분명히 인성과 신성이 함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는 그 인성과 신성이 지금 보시는 흰자와 노른자처럼 눈에 보이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달걀을 휘저어 보자. 흰자도 노른자도 안 보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분명히 이 안에는 흰자가 있고 노른자가 있다. 그렇다. 지금 휘저어 놓은 달걀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시지만 그 두 가지가 떨어지지 않고 완전히 하나로 되어 있다.
2)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육화의 신비는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의 우리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의 처지가 되셨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서의 말씀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루카 2,11-12).
하느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한 갓난 아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시니까 마음대로 선택해서 잘 사는 귀족이나 왕의 아들로 호화로운 집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육화의 신비는 예수님의 일생 안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 우선 30년간에 걸친 나자렛의 가정 생활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느님이시라면 굳이 부모님 슬하에서 자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철저하게 한 인간이셨기에 보통 인간들이 겪는 성장 과정을 다 겪었다는 말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이나 권세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 좀 더 쉽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 창녀, 지체부자유자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항상 찬밥 신세이던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또 그들과 함께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선포를 시작할 때 하신 일종의 취임사 같은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이 말씀들을 실제로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셨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육화의 신비가 잘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 있을까? 아니 하느님이시라면 죽음의 고통을 당하더라도 겉으로만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셨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고통뿐만 아니라 고문과 십자가형이라는 극도의 고통까지도 실제로 다 겪으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가장 비참한 인간의 처지에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육화의 신비가 가장 잘 드러난다. 결국 예수께서는 성서의 말씀처럼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신의 가난으로 여러분이 부요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2고린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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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3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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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시란 무엇인가?
1) 종교학적인 의미
(1). 어원 - '계시(啓示)'-'revelatio'(라틴어)라는 말은 라틴어 'revelare'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의 뜻은 '드러나다','나타나다', '열어 밝히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계시(啓示)'란 어떤 '감추어져 있는 것', '가려져 있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고, 나타내고, 열어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종교학적으로 볼 때 '계시'는 '거룩한 것(聖)'이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히는 것이다.
(2)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이고 자신을 감추어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거룩한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 체험할 수 없다.
(3) 그러나 '거룩한 것'은 가끔 예외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거룩한 것'이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어떤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때)'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럴 때에는 언제나 '속(俗)된 것'을 매개로 하여 드러낸다.
'장소', '사물'을 통한 체험 - '거룩한 것'은 때로는 일정한 사물, 즉 나무,바 위,하늘 등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이때 인간은 이러한 사물을 통하여 거룩한 것을 체험한다.
따라서 인간이 커다란 바위나 오래된 나무 앞에서 절하는 것, 하늘을 두려워 하고 경천사상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나무, 바위, 하늘을 통하여 '거룩한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주위에는 사적이든지 공적이든지 특별히 생각하는 '공간'이 있다. 그 예가 도심 속에 존재하는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룩한 장소는 '신들에로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창세기 28,12-19에서 야곱이 꿈에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천사를 본 그곳인 것이다. 종국적 인간은 '존재'를 갈망하고 그 종교적인 인간의 심원한 향수는 '신적인 세계'안에 거주하려는 것이며 자기 집이 성전처럼 표현되어 신들의 집을 닮고 싶어한다.
즉, 태초에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났을 때의 그대로 순수하고 거룩한 우주에서 살려는 욕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건'을 통한 체험 - '거룩한 존재'는 때로는 일정한 사건과 그 사건과 관계된 인간을 통하여 자신을 열어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 성인이나 예언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거룩한 존재'를 만나기 때문이다.
(4) 이와같이 '거룩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안에 자신을 드러낸다. 즉, '사물'과 '사건'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사건'이 '거룩한 것'을 만나게 되면 그 '장소'와 '역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고, 구체적으로 '거룩한 장소와 사건' 을 띠게 되는 것이다.
결국, 종교학적인 의미에서 '계시(啓示)'란 '거룩한 것'이 자신을 '열어 보이거나,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다. 또한 그 '계시'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2) 성서적인 의미
성서적 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거룩한 존재자인 인격신이 자유로이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에 있다. 즉, 성서는 계시자이신 '거룩한 존재'가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으로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계시의 성서적 특징은 역사적 행위 안에서 완성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룩한 하느님이 시간의 제약 안으로 들어 오셔서 천천히, 점진적으로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가) 구약성서
(1) 성서 : 탈출기 3,1-7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모세야"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
이 장면은 '거룩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즉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사무엘의 현시(visio)는 사무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루어지지만 불타는 가시덤불에서는 하느님이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이 장면의 특징은 모세가 하느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에 있다. 또 하느님이란 '거룩한 분'을 만난 장소도 곧 '거룩한 장소'가 되어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야'할 정도로 구체적인 거룩한 장소, 거룩한 공간이 된다. 그리고 모세가 '거룩한 분'을 만났을 때의 행동을 보자.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는 모세의 행동에서 일반적으로 인간이 어떤 신비한 존재를 체험할 때 느끼는 그 어떤 두려움의 체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비스러운 존재 앞에서 인간은 '경외심'을 갖게 된다.
(2)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실질적인 삶이었으며, 생존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 (탈출 3,13-15;이사 64,1 이하), '권능'(예레 16,21), 당신이 하신 '위대한 일'(하바 3,2)을 계시하신 것이다.
(3) 역사 : 그런데 하느님의 계시는 '역사'안에서 발생하므로,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의 역사는 하느님 계시의 대상과 수단이 된다.계시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행동하신다는 의미이다.
(a) 인물 : 하느님은 특정한 사람들,즉 아브라함·모세·예레미아·에제키엘,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
(b) 사물 : 또한 자연사물을 통한 계시를 보면, 하느님은 폭풍, 구름기둥, 불기둥, 나무소리, 바람소리 등의 자연사물의 형태 안에 자신을 드러내시어 인간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c) 특정한 장소 : 그리고 계약의 궤, 천막, 성전, 하느님의 지팡이, 희생제물 등도 계시의 특정한 장소가 되는 곳이다.
특히 구약성서 탈출기,신명기 등을 읽어 보면, 어떤 특별한 사건, 일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들안에 하느님이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수많이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계시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이사40,5;60,2), 당신의 정의(이사56,1), 당신의 사랑(시편85,8)을 드러내심으로써 나타나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동시에 인간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나) 신약성서
"때가 다 되어"(마르 1,14) 다가온 하느님의 계시는 나자렛 예수의 인격안에 현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신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신 자기 계시의절정이자 완성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의 공적 계시는 완결되었다.
히브리서 1,1-2을 읽어 보자.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위의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가지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이제 '이 마지막 시대'에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시대'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도 바오 로의 말씀에 비추어 요한 복음 1,1-4.9-14.18을 살펴보자.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말씀이 곧 참 빛이셨다. ...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는 이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고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거룩한 존재'인 하느님이 사람으로 '육화(肉化)'(Incarnatio) 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거룩한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자리하셨다는 사실에서 "말씀은 영원하나 그 말씀이 육화할 때에는 언제나 역사를 입는 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 거룩한 존재인 하느님은 "임마누엘(Emmanuel)"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마태 1,23)으로 드러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계시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요한복음 안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특징은 "나는 ... 이다"라는 선언이다. "나는 착한 목자, 문, 빛, 하늘로 부터 내려온 빵이며, ... 부활, 길, 진리, 생명이다". 이러한 "나는 ... 이다"(요한 8,28)라는 절대적 선언은 하느님의 공현인 자기 계시의 절정이다. 더 나아가 요한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해서 표현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 안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분(요한5,39)"이시며,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요한 11,27)",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고 말씀하시는 분,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7,11)"이신 분 ..., 이러한 증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삶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사도 바오로의 계시 체험
- 사울의 개종(사도 9,1-19) -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희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 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울은 자신의 과거 껍질이 벗겨지고 삶이 새로와 졌다. 예수를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구원이란 이처럼 삶의 양식이 바뀐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계시는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3) 교의신학적인 의미
교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계시는 초세계적인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열어 보이시는 것으로 성서적인 입장과 같다. 계시는 능동적 계시(revelatio activa)와 수동적 계시(revelatio passiva)가 있지만,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이 스스로 당신을 열어 보이셨다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천명하고, 이 초자연적 계시가 역사적 행위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공의회는 말한다.
한편 공의회는 하느님 계시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 자연적 방법의 계시 - 하느님의 창조물인 피조물 안에서 자연적 방법으로 하느님의 계시가 파악되기도 한다.(지혜 13,1-5; '자연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
-집회 42,15-25)
(2) 초자연적 말씀계시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일 때 그 계시를 '공적계시'(revelatio publica)라 부르고, 한 개인에게 해당될 때에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라고 부른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공적 계시의 절정이고 종결임을 선포했으며, 계시의 확실한 선포는 마지막 사도가 죽으면서 끝났다고 말한다.
당신 제자들에게 예수 님은 모든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당신 외아들을 주셨으므로(요한 3,16)"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이상 하실 말씀과 보내실 분이 없으시다. 따라서 계시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나자렛 예수의 인격적인 현존 그 이상을 넘어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공의회는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는 아무런 공적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임을 천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계시가 담긴 성서와 성전의 해석은 교회의 교도권에 있다
교회는 계시의 "장소"(place)이다. 사도들은 교회의 증거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 또한 교회는 계시의 성서적인 증거를 계속 현실화시키면서 계시를 새롭게 '전하여' 준다.
전례, 설교, 성서의 말씀, 주교들의 가르침, 공의회와 교황의 가르침, 전승, 교부들의 저서, 신경과 참회, 신학자들의 업적-등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현실화 시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계시가 전수된 성서와 성전의 올바른 해석은 교회의 교도권에 있다.(계시헌장 2,10)
3. 성령의 빛으로 계시 인식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고 하느님의 공적인 계시이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자기 계시로 알아본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가?
심지어 3년동안 동거동락을 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여 예수님이 잡히자 모두 도망쳐 버렸다.
제자들이 예상한 그리스도는 화려한 왕관을 쓰고 굳센 능력으로 로마인들을 쫓아 내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처럼 영화로운 시대로 변화시켜주는 그러한 세속적인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으로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 이점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제대로 인식한 때는 언제였을까?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 안에 성령이 임하실 때였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한14,20)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임하셔야 만이 하느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령에 의하여 사도들은 수십년이 흐르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실 때에 이해하지 못했던 계시의 내용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계시'의 인식을 위하여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엠마오'로 가는 길(루카 24,13-35)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을 깨닫을 수 있었던 것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며,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음을 열고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인식을 위하여 언제나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 된다.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로마 10,8;신명 30,14)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집회 51,26)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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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3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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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별로 본 이스라엘의 역사
1) 성조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셈족의 일부로 기원 전 19 - 17세기에 시리아 초원을 유랑하며 목축을 하던 유목민이었다.
그들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사악,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의 시대를 성조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를 탈출하게 된 그 뒷 배경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으며, 아울러 그들의 이주를 신앙적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1)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있던 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그가 지금까지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땅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것은 고향과 친척등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전폭적이고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약할 수 없는 앞 날을 믿음과 순종으로 하느님께 맡기고 살던 곳을 떠났다. 이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의 번영을 약속하시고, 계약을 맺으셨다(창세기 12 - 15 참조)
(2) 이사악
이사악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느님 약속의 살아 있는 표시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결실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과 그에 따르는 의무와 축복은 이사악에게 계승된다. 그리고 이사악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에사오가 장자 상속권을 야곱에게 넘김으로써 계약과
의무와 축복은 야곱에게 계승된다(창세기 25,19 - 34)
(3) 야곱
하느님께서는 더욱 구체적인 축복을 야곱에게 주셨다. 야곱이 야훼와 대결함으로써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창세기 32,23 - 28)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을 두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원을 이룬다. 그러나 혈육간의 질투로 인해 요셉이 에집트로 팔려가고 후에 야곱의 가문도 에집트로 이주 하게 된다(창세기 37 - 47).
2) 모세와 출애급
야곱과 그의 아들이 에집트로 이주한지 약 400년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은 에집트의 고센 땅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새 왕조가 에집트에서 일어나 이스라엘을 억압하기 시작했다(출애급 1장 참조). 이 때 모세가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히브리 男兒는 태어나는 즉시 죽이라는 명이 내려져 있었으므로 어머니와 누이의 기지로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파라오의 궁전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을 박해하던 한 에집트인을 죽인 문제로 에집트를 탈출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였다(출애급기 2,11 -22). 그곳에서 그는 조상들의 하느님 야훼를 뵙고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자기 민족을 구해내야 할 사명을 게 된다(출애급 3장 참조).
그로 인해 에집트로 돌아간 모세는 야훼의 도움으로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민족을 이끌고 에집트를 탈출한다. 이 에집트 탈출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임을 체험케 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해방절' 혹은 '빠스카'라는 축제를 대대로 지내게 되었다.
이 축제는 '거르고 지나가다', '건너뛰다'라는 '빠스카'의 의미 그대로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거르고 지나갔다는 사실과,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넘으로써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었음을 기리는 것이다(출애급기 12,1-14, 21-27 참조).
3) 광야 생활과 시나이산의 계약
에집트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고난의 여행을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시나이산에 도착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이 계약은 아브라함이 맺었던 계약을 새롭게 한 것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 예배드리기로 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이 계약을 잊지 않도록 가축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는 예식을 거행하라고 명하시고, 당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을 주신다. 사십 년이라는 긴광야 유랑을 통하여 에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온갖 영적 부패를 씻고 단련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에 정착한다(여호수아서 1 - 21).
4) 판관시대
판관이란 왕정이 실시되기 전 이스라엘을 영도하던 정치, 군사, 종교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 열 두 지파 족장이 땅을 분할하여 통치하고 종교의식에서만 유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이스라엘은 민족적 특성과 종교적 사명을 망각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면서 심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판관으로는 삼손, 사무엘, 기드온, 입다, 에후, 드보라 등을 들 수 있다.
5) 왕정시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인근 이민족들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자 판관의 영도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왕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은 정의를 수호하고 전쟁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왕정시대의 대표적 왕으로는 사울, 다윗, 솔로몬이 있었다.
(1) 사울왕
사울은 왕이라기 보다는 전시대의 판관 보다는 약간 더 힘을 가진 지도자에 불과했다. 사울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점차 야훼의 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2) 다윗왕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된 다윗은 국가조직을 정비하여 완전한 군주국가 체제를 확립한다. 그는 남쪽과 북쪽의 세력을 합치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필리스테인들에게 빼앗겼던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킴으로써 명실공히 예루살렘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다윗에게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통해 "다윗 왕가의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게 되고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은 다윗 왕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빼앗고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다. 그 죄로 다윗 가문에 는 가정불화, 근친상간, 모반등의 수치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기원전 775년경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윗은 눈을 감게 된다.
(3) 솔로몬왕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외교, 국방, 무역, 개화정책 등으로 국가를 부강하게 하지만 정략결혼으로 인한 이교도의 우상숭배의 만연, 지나친 건설사업 등으로 인한 강제 노동과 무거운 세금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고, 그의 이러한 행실 등으로 인해 그의 사후에 왕국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6) 왕국의 분열과 예언자들의 활약
이스라엘은 점차 하느님을 저버렸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위세를 떨치려는 현세적 야망이 무너져감을 깨달았다. 차츰 이스라엘 내부에 잠재해 있던 상호 대립 의식이 되살아 나면서,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기대에 못미치자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 주도하에 열개 지파가 분리되어 나가서 북부 왕국(이스라엘)을 세워 남부 왕국(유다)과 갈라지게 되었다(1열왕기 12).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등의 예언자가 활약하였다.
이들은 백성들이 방탕할 때는 하느님의 경고를, 시련기에는 하느님의 약속에 의한 희망을 전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였다.
남부의 유다에서 활약했던 예언자는 이사야와 예레미아를 들 수 있다. 특히 이사야는 나라가 망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새 이스라엘을 안배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 중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메시아 사상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
7) 유배시대
예루살렘이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함락되자 많은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 갔고 유다에는 이민족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지도자들을 잃은 백성들이 이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이교 풍습을 따르게 됨으로써 야훼 신앙은 잊혀져 갔다. 한편으로 유배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에 대한 당연한 징벌이요,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정화의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따라서 야훼의 구원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희망을 갖고 할례와 안식일 등의 전통과 율법을 엄격히 고수하는 유다이즘이 발생하였다.
유배 말기의 위대한 예언자로는 제2 이사야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죄없이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제물이 되어 고난을 당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라는 노래를 통해 절망과 좌절에 빠진 유배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이스라엘을 정신차리게 하고, 이방 민족들에게는 빛을 보여주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의 수난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8) 구약말기
이스라엘 민족은 기원 전 539년 바빌론 제국의 멸망 이후 그 이듬 해에 유배지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그곳에서 생활터전을 잡은 상태이므로 귀환하지 않고 자기네 나름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외의 일부 야훼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과 고국을 그리워 하던 이들은 귀환하였다. 이 귀환자들의 지도자는 즈루빠벨이었다다. 즈루빠벨은 귀환 즉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위하여 힘썼고 그 외의 여러 예언자들이 신앙의 쇄신과 종교개혁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고 단지 율법을 근거로 하는 새로운 율법 공동체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시킴에 따라 이스라엘은 다시 희랍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안티오쿠스 4세는 유다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는 유대인들을 헬레니즘화 시키기 위해 안식일과 할례를 폐지하게 하고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던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게 만든다. 이같은 박해에 대항하여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적 항쟁이 발생한다.
마침내 유다 마카베오는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기원전 142년에 자주독립을 성취하지만, 기원 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유다지방은 다시금 이민족에게 짓밟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기원 후 70년에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났으나 예루살렘의 파괴를 가져왔고, 다시 135년의 유다인의 마지막 폭동의 실패로 이스라엘은 1,800여년 동안 지구상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한 항쟁과 마카베오 가문의 몰락이 계속되면서 유대인들은 극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을 격려하던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다니엘서를 보면 이제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사상 대신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실 것"이라는 사상이 팽배하였고, 그 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는 다시 가증스러운 외적을 물리치고 다윗 왕과 같이 위대한 나라를 재건하여 줄 세속적 메시아를 고대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종말론적 사상이 팽배하였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뒤엎으시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이룩하시리라는 '종말적 사상'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사상들이 유포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아주 뜻밖의 방법으로, 성령을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인 마굿간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 하였지만 후에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의 감도로 용기를 얻고 복음을 전파 하였던 것이다.
2.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구원의 하느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판관들의 영도 아래 부족 연맹체로 지내다가 인접 국가들과 맞설 수 있도록 왕을 세우려 하였다. 이에 하느님은 사무엘을 시켜 왕을 세워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그들의 주인으로 나타나신다. 왕들이 백성을 불의하게 다스리거나, 당신께 의지하지 않고 다른 왕국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를 지키려 할 때에도 역시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릇된 것을 알려주고 이교인들의 신을 섬기게 될 위험에서 건져주시려 하셨다. 이스라엘이 당신과 맺은 계약에 충실치 못하고 계명에 어긋나는 생활을 할 때에는 몇 번이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깨우쳐 주시어 다시 당신께 돌아오도록 하신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느님을 그들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거듭 체험하면서 차차 그분을 알게 된다. 에집트 종살이에서 구해 주신 그 하느님이 바로 그들의 하느님이시며(신명기 5,6참조), 유일하신 하느님 그 분 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신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어길 때마다 책망하시고 벌을 주시지만 결국은 그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마음으로 통하는 사이가 되도록 하신다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특히 바빌론 유배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존망이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왕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야훼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절감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그들의 조상과 계약을 맺은 이래 그 후손들에게 축복을 주신다고 하신 당신 언약대로 늘 그들의 역사 속에 함께 계시어,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인 어른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3. 하느님의 구원경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백성과 구원계약(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맺으시고, 역사에 참여하시므로써 당신의 뜻을 인류에게 펴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하시려는 역사 참여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집단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새롭고 완전한 계약과 계시의 준비요,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인 것이다. 하느님은 오늘도 인류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가고 계신다.
하느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하느님만을 중심으로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항상 하느님의 속성을 따라 살아 나가야 하며, 인간들의 변화무쌍한 원리들을 따라가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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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