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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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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6.03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
  2. 2011.06.03 그리스도인의 죽음
2011. 6. 3. 23:21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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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에의 생활
모든 사람들은 소명을 갖고 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소명,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소명,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소명 등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소명을 갖고 있고 그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께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현재의 우리의 소명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가정과 사회에서 우리가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장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직장에서 우리가 맡은 다양한 일에 대하여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임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때 바로 즉시 응답을 하여야 한다.
이 응답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응답을 할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2. 기도의 생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분이셨다. 그분은 매일매일 선교여행을 하셨으며 그분의 그러한 여행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 늘 기도하셨다. 그분이 기도하신 것은 시간이 있으셔서가 아니었다. 그분의 주위에는 항시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녔고 사방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항시 장터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소란스럽고 분주한 선교의 여행 속에서도 항시 스스로 시간을 내셔서 하느님의 뜻을 항시 살피셨다. 루가 복음은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 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루가 5. 16)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현대를 바쁘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기도의 시간을 내어야 함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그분 자체를 만나고 그리고 그분과 기도 속에서 일치를 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러한 신앙생활은 한 겨울날의 추운 날씨처럼 차차 굳어질 것이고 급기야는 신앙에 대하여 맹숭맹숭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어렵게 얻은 신앙을 등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3. 감사와 순명의 생활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축복을 주셨다. 창세기는 이 축복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리라"(창세 1, 28).
그러나 태초의 인간은 하느님께 불순명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망각하였다. 그 이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기 위하여 너무나도 힘든 일을 하여야 했다. 이러한 일은 최초의 인간에게만이 한정된 것이 아니라 원죄로 이어져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금의 우리에게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을까? 그것은 교만한 마음, 즉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겸손하지 못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 한 연못가에 갈대가 서 있었다.이 갈대는 조그만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나부꼈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떡갈나무가 갈대를 보며 동정어린 눈길로 바로 보며 말했다.
"이봐요, 갈대. 자네는 바람이 조금만 불거나 물위에 여울이져도 머리를 숙여야 하니 자네의 가냘픈 몸집이 자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되겠는걸!" 그리고 이어서 "내 건강한 머리를 좀 보게, 햇빛을 멈추게도 하고 강한 폭풍까지도 힘차게 맞설 수 있지 삭풍이 자네에게는 폭풍이지만 나에겐 미풍만도 못하네. 자네가 내 몸 밑에라도 태어났던들 나의 그늘을 은신처로 삼아 고생이 없었을 텐데. 내 생각으로는 자연은 불공평한 것 같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갈대가 대답했다. "나를 동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다지 걱정은 마시게나. 모든 바람은 나에게보다 당신에게 더 위험스러운 것 같은데. 바람이 불어도 나는 굽혀지기는 해도 그러나 꺾이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이 말을 듣고 떡갈나무는 갈대를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얼마후 지평선 저쪽에서 북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떡갈나무는 몸을 굽히지 않고 바람에 맞섰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왔다. 가냘픈 갈대는 당장쓰러질 것같아 보였다. 그러나 갈대는 바람이 부는 대로 뭄을 기울일 뿐 아무 괴로움도 없었다.
한편 떡갈나무는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쳐들고, 발을 땅에 붙이고 서 있었다.
그러나 끝내 뿌리 채 뽑히고 말았다.
하느님 앞에서 불완전하기만 한 인간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영유하려면 겸손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신 성모님께서는 매우 겸손하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겸손되게 순명하실 수 있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모친이 되시는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모님에게서 겸손과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순명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모범을 본받아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명하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4. 공동체 생활
인간은 비록 하느님의 뜻을 거슬려 이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하였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지상 위의 모든 생물들의 주인으로서 남아있게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가운데서 구속사업을 계속 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음식과 옷, 집 그리고 그 밖의 것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땅의 주인으로 남아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이익)에 이바지하고, 이웃을 도우며 서로 사랑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하느님은 바로 지금 세계공동체, 국가공동체, 가정공동체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삶을 충실히 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사도 4 32). 지금의 우리들이 이러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하느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 더욱 완전한 공동체를 건설하여 주실 것이다.
5. 결단의 생활
우리가 만약에 어떤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위치가 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선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그 단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결단을 하나씩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이외에도 우리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앞 길에 대해 결정하는 중요한 일까지 수많은 결단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그 가르침과 실천에 있어서 의미있는 것으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 결단은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결단을 우리가 잘 내릴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되고 동시에 삶에 무한한 기쁨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올바르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때는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라는 것이 부끄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그리고 동시에 짐으로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 둘 중에 어느 곳에 우리가 속하게 되는 가는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렇게 살기로 삶 속에서 끊임없이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명하므로써 성장하는 하느님 공동체의 수많은 사람들 안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게 할 것이다.

6. 사랑의 생활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하고 사랑하고 싶어한다. 사랑은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이며 가장 깊은 갈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말로 간단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러운 것이며 동시에 우주에 가득찬 하느님의 숨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 4, 16).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구세주를 약속하셨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의 두 발로 먼지가 펄펄 날리는 땅을 디디며 걸어 다니셨고 또 당신의 두 손으로 지치고 소외된 이들을 쓸어주셨으며 그들과 함께 머물러 계셨다. 그분의 그러한 행동은 그분을 선동자로 몰리게 하였고 결국 그 죄목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하여졌다.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말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활 속에 가득찬 인간에 대한 넘치는 그분의 사랑에 근거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의미에 합당하게 살아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던 많은 성인들의 삶을 볼 수 있다. 이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신 분들이다. 우리도 이분들의 모범을 따라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생활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산상설교(마태오 5,3-10)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산상설교의 한 절 한 절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자.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은 다 가난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점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놓고 하느님만을 애타게 목말라 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부를 누리게 할 것이다.
(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마음의 근심과 가혹한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자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데 대한 비탄과 소외 당함과 그로 인한 억울함의 눈물, 그리고 실의와 "잔인한 운명"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이면에는 더욱 커다란 슬픔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헛되고 황폐한 세상에 대한 애통해함, 하느님과 하느님의 법이 지배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애통함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온갖 역경으로 점철된 자신의 운명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슬픔, 고통당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전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주위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외면한다. 그 외면하는 것이 내 자신에 해당되는 것일 때도 있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일 때도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로 작정한 이상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안에서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예수님 앞에 펼쳐놓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고통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 위로를 받으며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두번째로 하신 말씀의 뜻이라 할 수 있다.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여 불평불만을 품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람은 불만스러운 환경을 극복한다. 온유한 사람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솔개가 그 높은 하늘에서도 먹이를 금방 찾아내듯이 이러한 사람을 금방 알아보고 그 사람에게 몰려와 평화 속에 휴식을 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 동안에 항상 자신에게 와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으셨고 반기셨다. 바로 온유한 사람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옳은 일이란 정의, 거룩함, 완전함을 뜻하고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옳은 일을 갈망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주의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듯이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열심히 열망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이세상에 도래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 가득히 넘쳐흐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하염없는 만족에 젖게 될 것이다.
(5)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가진 자이고, 가진 바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남에게 물질, 힘, 시간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힘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마음 먹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힘인 것이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할까?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지향되어 있고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더 재미있어 하고 또 거기에 더욱더 마음을 두게 된다.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이 관심있어 하는 것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기울이느냐, 아니면 세상 일에 더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찰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으로 가득 찰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정의 삶을 끊어버리고 은총의 삶을 살기 위하여 침묵 가운데서 열심히 기도를 하여야 한다.
(6)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참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이 일치될 때 이루어진다. 평화는 우리 스스로 이룩하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지 평화를 바라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평화를 이룩하려 는 노력을 게을리하기 때문에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바로 그 평화를 나누어 주기 위하여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7)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어떠한 역경도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은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러나 세상의 정의는 자신의 이권에 손해가 되지 않는 범위까지만이고 그것이 그 범위를 넘을 때는 늘 힘의 논리가 지배를 하고 그것이 정의라고 강요된다. 그리고 그러한 거짓된 정의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고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참된 정의를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늘 박해를 당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꼭 승리를 하고 만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인 103위 순교 성인들은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라는 오해를 사서 모두 고향을 등지고 도망 다녀야 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관원에게 붙잡혀서 비참한 최후를 고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분들이 그렇게 무참하게 돌아가신지 200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 누구도 그분들을 박해하던 높은 관직의 조정 대신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지금은 힘없이 죄인으로 죽어갔던 사형수들의 이름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이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을 증언하는 정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분들의 삶은 십자가에서 신성모독과 반란죄로 죽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몸으로 따라 가신 것이다.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우리는 순교성인들처럼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7.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기울이고 사랑으로 응답을 하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며 동시에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은 우리가 속하여 있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가장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순간은 뭐니뭐니 해도 기도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경건하게 성체 앞에 앉아서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 혹은 길을 가며 잠깐 동안 바치는 화살기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그분의 이끄심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명하여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결단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누구도 결단을 쉽게 내리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한가지를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 외의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결단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열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충만한 은총을 주실 것이다. 우리들 은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한 순간도 하느님을 선택할 수가 없으며 또한 그분의 뜻에 맞게 살 수도 없다. 이러한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결단을 내려 응답하는 삶은 사랑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이웃과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를 할 수 있고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따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무엇이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신자생활이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자기를 통해 흘러 넘치는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요한 15, 12)라고 말씀하신 계명의 완성인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사랑 자체라고 믿고 있다(1 요한 4,8).
사랑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조건 없이 남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 아니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상대편에게 내어준다. 그는 상대편의 운명에 전적으로 동참하고 자신이 바로 그가 되어 필요하다면 상대편을 대신하여 기꺼이 죽으려고 까지 한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는다. 영악하고 타산적인 인간의 눈에는 이 사랑이 어리석은 바보짓으로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다. 강생한 성자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남에게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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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20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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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을 극복하는 희망의 삶
죽음은 단지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안에서 현재의 삶을 의미있게 해주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교우 여러분,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 (1데살. 4,13-14) -
죽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인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과 죽음의 상황들이 내 생활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면에서 이러한 문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사랑하던 가족이나 친척, 아니면 절친한 친구분의 죽음을 경험했다면 그분들의 죽음을 통해 슬픔과 함께 과연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인간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며 자문해 보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들의 죽음뿐 아니라 매일 집으로 배달되어오는 신문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대하고 있다. 오히려 너무도 자주 그리고 일상적인 죽음에 대한 사건 보도속에서 무감각해져버린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에워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을 철저하게 의문에 처하게 한다.
2. 믿음과 희망은 새로운 삶의 시작
1) 죽음의 체험
죽음과 더불어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인간은 참으로 가련한 존재일 것이다.
죽음의 비극을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죽음이란 인생의 모든 가치들을 부정해 버리는 강력한 허무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쾌락 등과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들뿐 아니라, 예술, 사상, 학문과 같은 '영원한' 정신적 가치라 할지라도 인간을 죽음의 힘으로부터 보호해 주지는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믿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도덕적 헌신과 투쟁도 종국에 가서는 죽음이 가져다 주는 회의와 허무 앞에서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한 손 안에 쥐고자 했던 그 어떤 권력자들, 진시황제, 히틀러, 스탈린 등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고,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경우 제5공화국의 권력자도 잘 차려진 술상 앞에서 마지막 술잔을 들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의 주변을 잘 살펴보면 너무도 억울한 죽음들이 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착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나 암으로 인해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조금 더 누려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외에 자유와 정의를 위해 앞장섰던 사람들이 권력의 총부리 앞에 쓰러졌던 경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아기들의 죽음은 그 어머니의 가슴을 찢는 아픔을 남겨주기도 한다.
죽음이 우리를 아픔과 슬픔 그리고 허무로 몰아세운다고 하지만 죽음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옛 그리이스인들은 인간의 죽음을 다음의 네 가지 범주에서 설명하였는지도 모른다.
첫째로, 누구든지 홀로 죽는다. 같은 죽음은 이 세상 어디도 없다는 것이다. 같이 죽으려고 약을 같이 먹어도 홀로 죽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대신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도 부모가 대신 죽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째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네째로, 반드시 죽는다. 즉, 죽음의 보편성이다.
그러기에 철학자 하이데거(M.Heidegger)는 "인간은 죽음에로의 존재"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죽음은 생명 안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존재의 조건으로 스며들어 있다.
분명 인간은 죽음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전도3,2)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 앞서 인간은 죽음이 지금 까지 가꾸어오고 지켜온 삶의 지속을 단절 시키기 때문에 저항의 몸부림을 치게 된다.
누구든 지금의 삶을 지속하고 싶고 또한 자신이 가꾸어온 노력의 결실들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한다. 죽기 싫은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싫은 것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 또한 두려움을 낳게도 한다.
그밖에 실증적인 죽음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죽음 이후의 사실에 대한 어떤 증인도 접할 수 없다는데서 불안, 혹은 공포는 더해간다. 단지 죽음 뒤에 남는 차고, 굳어진 시체와 그것이 한 줌 흙으로 남는다는 '주검'의 현상이 어떠한지 우리는 알 뿐, 죽은 어떤 생명도 죽음 뒤의 삶의 지속이 어떠하리라고 나에게 증언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의 체험이 과중하고 때로는 고통스런 문제들을 야기시키기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몹시 꺼리며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즉각 거부 반응을 보이기가 예사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간혹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게 되더라도 '나'는 아닌 타인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죽음의 필연성 앞에서 자신을 감추어 버리거나 도피하게도 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회피와 함께 착하고 열심한 많은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의 불의한 죽음, 그리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삶의 회의마저 안겨 준다. 그래서 우리들은 한번쯤 "왜?" 라는 항변과 함께 신(神)은 인간에게
죽음을 허락했는지 신(神)을 미워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곁을 떠났을 때….
그러나 성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지혜서 1,13-14)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루가14,14)라고 약속하셨다.
죽음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답은 그저 위안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으로 말미암아 이미 패배당한 악을 거슬려 투쟁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믿지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패배요, 멸망이며, 허무일 수 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삶의 완성이요 새로운 생명에로의 시작이 된다.
2) 신앙은 생명의 열쇠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은 거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크다. 죽은 이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끝없는 생명을 향한, 인간이 풀 수없는 열망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죽음의 길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이 희망은 하나의 사건 즉 예수부활 사건을 통해서 증명된다. 그것은 동시에 죽은 자의 소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암시이기도 하다.
부활을 마치 전에 살아 활동했을 때처럼 어떤 방법으로든지 잠에서 깨어나는 것같이 인생살이를 하는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바다로 되돌아가는 물줄기에 비교되듯 불멸의 영혼에 관한 내용도 아니다.
우리가 죽은 이의 부활을 믿는다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예수의 영안에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육체와 더불어 부활하고 영속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게 발생한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완성하시고자 오실 때,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여기서 신약성서의 부활증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것은 상처를 간직하고 계신 예수의 몸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부활하신 분으로서 어떻게 먹고 마시며 드시는지 보도하고 있다. 바로 이사실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전 인간 존재로서의 '몸'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영광 받은 육체로써 하느님의 생명 안에 빛나는 거룩한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우리의 육체적이고 죽어갈 생명은 보호를 받아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안에서 불멸한 것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죽은 이의 부활을 마치 하나의 씨앗처럼 설명하고 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4).
3) 육신의 부활
여기서 하나의 새로운 물음이 제기된다.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믿어 고백하고 있는 '육신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고 또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육신의 부활이란 단지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진 육신이 종말에 가서 새로운 살과 뼈로 재생되어 영혼과 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현세에서 육신의 불구로 말미암아 고통과 소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도 그들의 불편한 육신을 갖고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많은 돈을 들여가며 성형수술로 기껏 얼굴을 고쳐 놨는데 모두가 꽝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영혼과 육신이라는 성서적 이해와 구원은 전인(全人)에 결부된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간과한데 기인한다.
본래 인간을 영혼과 육신이라는 두개의 본질로 양분화하여 표현한 것은 희랍 문화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그리스도교가 희랍 문화권 속에서 적응하며 선교하고자 할 때 결부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성서적인 개념도 그리스도교적인 개념도 아니다.
성서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개 혹은 세 개의 본질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단일체이다. 성서는 '육신', '영혼', '영', 등의 개념을 써서 인간존재의 다양한 면모들을 구별하여 고찰할 때에도 역시 인간존재의 단일성을 고수하였다.
성서에서의 '육신'과 '영혼'은 자연적 차원의 전인을 가리키는데, 육신이 개인에 있어서의 육체적인 면모와 인간이 동물계와 땅과 맺고 있는 관계와 가견적 조건 및 소멸될 인간조건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영혼은 유독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모든 요소를 통틀어 인격으로서의 인간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다."(요한5,25)는 희망은 살이 썩어버린 육신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니며, 또한 육신과는 관계없이 불멸하는 영혼만이 하느님께 귀환하는 것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죽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죽음을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을 선사한다고 희망할 때, 우리는 이제 새로운 생명이 단순한 영혼, 즉 순전히 정신적 주체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 구체적 인격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아마 누가 생명의 완성이란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을 경우, 그가 세상에서 겪는 간난고초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 지상에서의 삶이 새 생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와 부활의 육체와에 대한 신앙은 하나의 놀라운 희망을 안겨 준다. 지나가는 세상은 장차 변화될 것인데, 선의의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 나간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의 의무로 부과된 윤리적 동기를 수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믿고 부활을 희망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최소한 이 세상이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상당한 꼴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힘만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령, 위독한 병을 앓고 있을 때라 하더라도, 단념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이 지상 존재로서의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한계를 견디어 낼 능력이 있다. 그들은 평정을 잃지 않고 고통과 불합리한 것들을 거스려 온 힘으로 저항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의 재난을 보고 눈을 감아버리는, 그리고 그러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와는 다르다.
우리들의 인격체는 세계와의 교제를 통해서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즉,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구조에는 육신과 물질세계가 항상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연로한 얼굴의 주름살 속에 온갖 삶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듯이 인간은 자신이 현세에서 이룩한 '시간의 수확'은 그의 죽음 속으로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다. 육신과 세계와 역사가 죽음 속에서 탈피되지 않고 인간 속에서 내적으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희망은 전인적 부활로써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육신의 부활이란 사멸하는 시체의 이적적(異蹟的) 종말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역사적인 정신적 자아로서 충만에 이를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와 역사가 그의 전체 삶과 함께 하느님께로 귀환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4) 믿는 이들의 죽음
믿는 이들은 진리를 그 자체로 알아듣지만, 그는 인간이 완성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마무리 지으시리라는 것을 희망한다. 노력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시리라는 사실에 대한 명백하고 철저한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어느 시대에나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이 죽지만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란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해서 인생을 뜬 구름 같다느니 하는 허무주의도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이 세상에서 죽으면 다시 다른 생명체로 넘어가게 된다고 주장하는 윤회설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음은 어떤 한 사람이 드디어 완성되는 순간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현대의 가톨릭 신학자들이 많이 쓰고 있다.
각 개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 점차 자라면서 성숙한다. 자라고, 성숙하고, 깨닫고, 결심하고, 그러면서 수 많은 시간을 이어가는 한 인간의 죽음은 결국 그 결과는 완전을 향한 길이어야 한다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삶 자체는 죽음과 연결하여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삶이란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므로 생의 완숙을 이루는 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철학자는 신앙인의 삶이란 '살기 위한 삶, 곧 절대자를 찾는 추구'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면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자기 인간성의 완성 또는 자기실존의 마지막 성숙으로, 이 성숙은 죽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향한 삶 안에서 매 순간순간 나의 모든 태도 여하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인간의 아픔과 꺼져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두려워한다.(사목 헌장 18항)"고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표현하면서 가톨릭 교리는 이 죽음의 문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요한 11,25)' 안에서 해결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5) 생명의 하느님
사도들의 설교는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다는 사실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그들을 파견하시는 분도 부활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 예수의 부활에 있다. 예수의 부활이야 말로 그분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보증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고린 15,14-17)라고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당신 스스로를 죽음을 쳐 이기는 힘이시요,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으로 증명해 주신 것이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보장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이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을 위해서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시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요, 무(無) 자체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더불어 새로이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초대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각자도 내 인생이 죽음으로써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내가 겪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어 누리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3.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아픔과 꺼져 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기술의 모든 노력이 제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는 없다.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은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고차적(高次的) 생명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어떠한 상상도 죽음 앞에서는 맥없어지지만, 하느님의 계시를 들은 교회는 인간이 지상 불행의 한계를 넘어서 행복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도 인간이 범죄치 않았던들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죄로 잃었던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세주의 은덕으로 인간이 다시 회복할 때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로써 당신과 영원히 결합하여 당신 불멸의 생명을 나누어 갖도록 인간을 이미 부르셨고, 거듭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 친히 당신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다시 부활 하심으로써 거두신 승리이다.
4.부활 - 생명의 나라
이성적인 인간인 우리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죽음이다. 죽음이나 죽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 혹은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과 죽음에 연관된 모든 것 -고통, 질병, 억압, 가난, 굶주림 등-을 멀리할수록 그만큼 더 좋은 것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인간적 태도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 실존을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 미치지 않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죽음이나 소멸보다 더 강하고 위대하다는 당신 자신의 체험에 바탕하여 보게 하신다.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의 제자였던 글레오파와 그의 친구가 그의 스승의 죽음 뒤에 자신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던 중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이들은 오래동안 고대하던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희망하던 스승이요, 메시아인 예수님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로 자신들의 큰 기대가 깨어졌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채, 비탄에 빠져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허무함을 뚜렸히 실감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겪었던 기이한 사건들도 끝났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별 볼일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 두 제자와 함께 동행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분은 먼저 그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귀 담아 들으신다. 예수님은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그분은 온전히 그들의 처지에, 그들의 실망 상태에 서신다.
그분은 그들이 느끼는 기분에 동참하신다. 그분은 그들이 있는 곳에 함께 계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체험을 통해 인간적 절망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며, 죽음과 무덤을 아시고,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를 아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이 죽으신 후 곧바로 부활하셨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무덤에 사흘간 계셨다. 이것은 그분이 억압의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그분의 몸 또는 여느 사람들처럼 부패의 과정을 거쳤음을 뜻한다. 무덤은 부패의 장소이며 예수님은 사흘간 무덤 속에 계셨으니 부패라는 인간의 절망의 표지를 체험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죽음과 생명체의 소멸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해방에 대한 그들의 염원을 부정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하신 말씀 중에 죽음과 소멸뿐 아니라, 그들의 자유에 대한 염원도 진지하게 가납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 참으로 죽고 묻혔던 예수, 이 예수가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이상하게 여긴 예수의 죽음과 부패는 자유로 가는 길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즉"모든 것이 너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시고 오히려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고통스로우며,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너희가 그다지도 동경해 마지 않는 자유에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이 그들 안에 머물 것이고,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하는 것이 왜 옳지 않은지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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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