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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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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6.03 하느님
2011. 6. 3. 22:56 교리공부
    1. 창조주이신 하느님

    1) 질서정연한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창조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아주 간단하게 "처음으로 만듦", "신이 우주 만물을 만듦"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철학대사전에는 창조를 "전혀 새로운 것의 산출을 의미한다. 창조하는 힘은 무한한 힘이므로 마땅히 신에게만 고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창조 행위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은 어떠한 도구나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는 '제작'과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라는 질문을 한다.
    이럴 때 바로 눈을 들어 자연을 보라. 산에서, 들에서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자연을 통해 작아지는, 미소한 자임을 느끼게 될 때,무한한 신의 섭리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구름 아래 놓인 아름다운 장관을 보실 때라든지,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서, 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존재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로마서 1,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모든 만물, 우주의 창조주는 바로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창조물을 통해 우리가 믿는,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2) 창세기에 의한 천지창조
    창세기 1,1-2,4절까지는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느님은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즉, 시간의 창 조를 하시고, 둘째 날에는 창공이 생겨 공간을 형성하셨고, 세째 날에는 아래에 있던 바다가 더욱 밀쳐졌고, 그래서 견고한 땅이 생겼으며, 그 땅 위에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푸른 식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네째 날에는 태양과 달, 별의 창조로 말미암아 시간 안에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것들은 시간, 날, 년의 규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와 창공에 생물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살도록 하셨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바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물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이것을 지배하도록 하셨다.
    혹 구약성서의 우주관을 보면서 또 창세기의 내용을 보면서 신화적인 표현이 많고, 지금의 우주관과는 다르다고 의혹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저자가 근본적으로 그리는 자연관은 당시 누구든지 알고 있는 상식을 토대로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동원한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사화는 결코 저자가 물리학적으로, 과학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고대의 신화나 고대의 일을 전하려 한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태초에 투영함으로써, 그린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창세기 맨 첫 줄에 나오는 신학적인 진리, 즉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는 진리뿐 저자의 관심은 오로지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찬미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신화적인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구약성서의 세계창조는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3) 천지창조의 목적
    하느님은 과연 무엇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는가? 그분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 이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이 생겨라" 하시자 ...이 생겨났다. (창세기 1,2)
    말만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곧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로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1-5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이미 계셨으므로 이 우주만물이 없어도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시고, 스스로 무한이 행복하신 분이고 선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더 이상 소유해야 할 선이 없는데도 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있다" 고(로마 11,36참조) 간단 명료하게 창조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창조의 목적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하느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당신의 지위를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무한하신 하느님이 당신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은 오직 당신 자신의 착하심을 주고 받으실, 즉 통교하실 목적으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외쳤다. 창조의 근거는 바로 이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4) 창조에 관한 신학적 결론
    (1)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무에서 말씀을 통해 창조하셨다. 즉,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영적인 존재, 육적인 존재들이 하느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는 것이다.
    (2)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한 분이시고, 선(善)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통해 만들어진 세상의 창조물 역시 좋은 것이며 선한 것이다.
    (3) 하느님의 창조물 중 가장 으뜸인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고 영혼과 육신을 지닌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4) 창조된 세계는 창조 때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돌보시고 계시며 지배하고 있다.
    2. 구원의 하느님
    1) 구약에 나타난 구원의 하느님
    구약성서에서 구원의 사상은 옛부터 꾸준히 계속되어온 주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사상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 때문에 더욱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구약성서의 거의 전부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탈출기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파라오의 치하에서 학정에 시달리는 것을 보신 야훼 하느님은 이를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느님은 모세라는 청년을 보내어 파라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파라오는 모세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다가 하느님으로부터 여러가지 재앙을 받은 다음에야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게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에집트를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나 파라오는 다시 마음이 바뀌어 기마와 병거를 출동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추격을 펼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하나 제대로 숨길 곳 없는 광야에서 모조리 에집트 군사들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앞에는 홍해라는 바다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된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지팡이로 홍해바다를 치자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이 뚫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해서 에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고 그후 여러 해를 광야에서 방랑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에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된다.
    바로 이것이 '출애굽사건'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을 체험한 후 야훼 하느님을 자신들의 하느님으로 받들어 모시게 되었고 그 후에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들은 하느님께 기도하고 청원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최대의 역사적 체험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 번 구원의 역사를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다.
    노아를 대홍수에서 구원하시고(창세 7장 참조) 야곱의 아들들을 구원하셨고(창세 45,5) 롯의 생명을 구하시기도 하셨다.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국가를 이루기 전, 즉 부족국가의 형태로 있을 때에도 위기가 닥치면 위대한 인물들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곤 하였는데 그러한 인물들을 '판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후에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다윗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다.
    이상의 몇 가지 예만 보더라도 구약은 그 자체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구약의 역사를 읽으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고난을 겪을 때 결코 모른체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 탄원하고 간청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탄원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2) 신약의 구원자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신약에 와서는 구약에서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계속 이어가심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여러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병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육체적 구원의 한계를 뛰어넘는 더 높은 의미의 구원을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죄 많은 여자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써 구원하시고 (루가 7,48-50) 통회하고 뉘우치는 세리 자캐오의 집안에 구원을 내리신다. 또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심으로써 구원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신다.
    이처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심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개인적인 치유나 용서가 인류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에서 알아본 예수님의 기적들은 단순히 각 개인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의 구원을 상징하는 예표라는 것과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지닌 분이셨지만 인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사는 조상들의 음덕을 기리고 자손들이 잘 되게 해 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우환이나 재난을 예방하려는 뜻도 갖고 있다. 예수님의 희생을 이러한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당신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 그 대가로 인류의 구원을 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의 고사성어중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러나 살신성인은 개인적인 의미가 강한데 비해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셨고 그 결과로 인간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되는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의 하느님이 아니고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 로마인등 다른 민족들을 경시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다)까지도 치유해 주신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3) 인간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신·구약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자로서의 모습은 인간을 극진하게 사랑하시고 인간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간청을 결코 저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조금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한다면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시라고 할 수 있다. 신·구약 성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어느 한 곳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뜻을 펼치고 계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되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예수의 탄생과 활동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에 참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작위로 인류를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의로운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세주는 인류를 해방시키고 구원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의로운 자를 뽑으시고 세상의 마지막 날에 그들을 통하여 악한 자를 벌할 심판자로서 드러나신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인류의 현세적인 해방자인 동시에 종말론적 심판자이신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늘 기도하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며 이웃을 위해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기도가 구원의 절대적이고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이렇게 인정받은 사람은 현세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맛볼 뿐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하느님의 나라, 흔히들 말하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3. 아버지이신 하느님
    1) 사랑과 인자의 아버지 하느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왜나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또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는 여기저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빠(abba,아버지)'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마르14,36;로마 8,15;갈라 4,6 등).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의기도'에서도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세번씩이나 말씀하고 계신다.
    '아빠'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아버지'라는, 어린 아이가 자기 부친을 부를 때의 매우 친근한 호칭이다. 그리고 어른들도 그들의 아버지나 노인에게 존경을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애칭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처럼 익숙하고 평범한 표현으로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께 존경을 표시하지 않는 태도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기도에서 하느님을 '자애로운 아버지'(abba)로 부르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지니고 있는 그러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유다 민족의 전통속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다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 '왕', '주', '심판자', '변호자' 등으로 하느님을 나타내고 계신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칭호들은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 속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인자하심 속에 포함된다.
    하느님의 적절한 이름은 아버지이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친밀하게,확신을 가지고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계시다. 이처럼 '아빠'라는 호칭은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마태11,27)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계시를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을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다. 자신이 하느님에게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한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2) 통애(痛愛)의 아버지 하느님
    성서의 첫 권인 창세기에는 창조의 이야기 바로 뒤이어 인간의 타락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 숨어있었고 하느님은 동산을 거니시며 그를 찾고 계셨다.
    "아담아,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의 음성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이의 애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인간을 애타게 찾는 하느님이시다. 성서 전편이 사실상 하느님이 인간을 애타게 찾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인간적 비유를 쓰자면 망나니 아들을 애타게 찾는 어버이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루카복음 15,11-32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두고 들려 주신 탕자의 비유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작은 아들이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나 타관으로 가버린 뒤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며 '애달픈' 마음으로 그를 기다린다. 인간을 찾는 하느님의 그리움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쓰라림'으로 비유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사랑과 아픔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통애'가 그것이다. '통애'라는 말은 아기를 꼬옥 끌어 안고 있는 엄마, 아기를 통째로 삼킬듯이 입 맞추는 엄마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력을 갖고 있다. 아기에 대한 엄마의 사랑,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도 크고 진해서 아픔을 느낄 지경이다. 이러한 사랑은 미움이나 노여움으로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엿볼 수 있다. 상대방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 사랑은 통애가 된다.
    통애는 노여움 때문에 미움이 되거나 미움 때문에 노여움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분노를 쏟는 수단으로 남에게 벌을 가하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 상대방은 온전한 건강을 보존케한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통애을 느낀다. 그 통애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헌신이다.
    이러한 인간세계의 통애를 맛봄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림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교 복음의 중심 곧 하느님 아버지의 통애의 최고 표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들판을 헤메시는 분이시다(루카15,3- 7). 하느님은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다 뒤지시는 분이시다(루카15). 하느님은 잃어버린 인간, 자신을 더 이상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어둠에 빠져 있는 그런 우리를 애타게 찾으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죄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는 우리를 찾아 당신께로 데려가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3)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시는 아버지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의 처지,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게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분은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입히시는 것처럼(마태 6,24-34) 그보다 더 소중한 인간을 돌보시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고통스러워 울부짖을 때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전능한 팔로 이스라엘을 에집트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셨다. 또한 그분은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항상 도와주시고 구원해 내셨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소외받고 천대받는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을 낫게 하시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을 먹이시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행적을 통해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주신 것이다.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아시고 돌보시는"(마태10,30)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나갈 때,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루가12,31)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내려 주신다.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알려 주심으로 자발적으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르기를 원하고 계신다.
    4)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시고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함께 아파하시며 당신께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기다리고 계신 분이시다.
    "나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거슬러 반항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출애 6-7)라고 선언하신다. 그분은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아낌없이 용서하기 위해 죄인의 회개를 원하신다(에제 18,23).
    그분은 당신을 모욕해도 그를 새로 세워주시고 부서지고 거만한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그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신다(시편 51,10-14.19;시편 32,1-11참조). 그분은 죄인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죄인을 벌하시다가도 곧 뉘우치시는 분(요엘 2,13)으로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자녀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시다(시편 103,3.8,14).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전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을 전하셨다.
    당신께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죄많은 여인들 보고 용서를 베푸셨으며,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 회개하는 아들을 달려나가 목을 끌어안고 받아들이셨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시며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시고(루카15,20) 기쁨에 넘쳐 잔치를 베풀고 춤을 추시는 분이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루카15,7)
    5) 조건없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뻗어 나가고, 거저 주고, 창조하신 사랑일 뿐 아니라, 인자하고 자비로우며 동정하고 구속하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자기 안에서 자기 밖으로 퍼져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모습에 따라 없는 가운데로부터 창조하시기를 원하시고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을 우리에게 주셨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까닭에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고 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하느님은 먼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아름답고 가치있는 존재가 된 연후에 사랑하겠다는 조건을 붙이지 않으시고, 먼저 하느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당신의 사랑을 온 인류에게 보여주시고자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인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게까지 하시고, 죽기까지 희생하시도록 하셨다. 타락한 인간을 무한한 인자로 용서하시고, 동정하시며, 비참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는 최상의 기쁨이요, 영광이 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들 뿐만 아니라 원수에게까지 미치는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대의(大意)이며 사랑의 주제이며 사랑의 증명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원수와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사랑에 조건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셨다.
    4. 영원하신 하느님
    1) 하느님은 가장 진실하시다
    인생은 속음과 속임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인간은 쉴 새없이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우리가 과연 찾아야 할 불변의 진리는 무엇이며 지켜야 할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정말 모든 것이 다 허위요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뿐이라면, 진리 탐구에 전심 전력하는 인간의 피나는 노력은 온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리 탐구가 헛수고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된 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진실한 분이심은 지극히 당연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속였거나 혹은 인간에게 속으셨다는 기사는 한 군데도 없다.하느님은 우리를 속이시거나 인간을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그분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같지 않고 참되다는 것을 수차 강조하고 있다.
    2)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인간은 겨우 몇 치 밖에 안되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산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느님은 일정한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여기에 계시면서 바다 건너 외국 땅에도 계시고 하늘 높은 곳에도 계신다. 이것은 사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설명하기도 힘든 일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의 편재(遍在)라 한다.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을 피해서 세상 끝까지 (당시는 지구가 평평하여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함) 도망 가려 하나, 결국 하느님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까지 계시기에 구약은 "주의 눈은 태양보다도 훨씬 밝으사 사람들의 모든 길이나 구렁의 깊은 곳에까지도 바라보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그 은밀한 곳까지 통찰하신다"(집회 23,19) 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이렇듯 하느님이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것만을 말할 뿐 아니라, 더욱 뚜렷이 내게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선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우리 옆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디든지 안 계신 곳 없이 다 계신다고 해서 이 세상에 있는 유형 무형의 만물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드신 분과 만들어진 것들은 결코 동일할 수 없고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시지 하늘이나 땅이 곧 하느님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하느님은 악이 만연되어 있는 이 사회에도 항상 계신다.
    3)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이 가끔 하느님이란, 인간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인간 정신이 생각해 낸 가상의 절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이러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으며 고백할 수 있다.
    4) 하느님은 신령한 분이시다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계신다.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지만, 하느님은 육체가 없다. 순수한 영체(靈體)로 계시는 신령한 분이시다. 물론 순수 영체가 어떤 것인지 우리 인간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를 통해서만 어떤 것을 보고 깨닫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이해가 가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신령함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5) 하느님은 전능한 분이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임은 예수님에 의해서도 드러나고 그분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갖가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님은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마르 10,46-52참조) 한 마디 말씀으로 문둥병 환자를 깨끗이 고쳐 주시고(마태8,1-4참조),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가 하면 (요한 11,1-16참조), "잠잠하라"는 말씀 한 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멈추게 하시는 분이셨다(마태 4,35-41참조).
    예수님은 또한 말씀으로도 하느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마태19,26).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행적을 보든지 세상 만물을 보고 그 지으신 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쉽게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이해할 수 있다.
    6)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토록 인간에게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인간은 아는 데 있어서도 매우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존재해 있기에 그분은 우리처럼 배우거나 깨닫거나 궁리하거나 기억해서 아시는 분이 아니다.
    "야훼,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을 낱낱이 살펴 보신다. 사람들의 마음을 몸소 빚어 주신 분이시라 사람이 하는 일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시편 33, 13.15).
    이렇듯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하느님의 전지하심은 이상의 성경 말씀으로도 입증된다.
    그럼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특히 곤란에 부딪쳤을 때에도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것이다.
    7) 하느님은 무한히 선하시다
    하느님이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다는 것은 마태오 복음 7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가를 보여 준다.
    인간은 착하면서도 악의를 품는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전히 선하신 분이시다. 악이란 자신의 부족함에서 생기는 것인데,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모자람이 없이 가장 완전한 분이시므로 그분에게는 악이란 있을 수도 없다.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으로서 선 자체이시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함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렇듯 선 자체이신 하느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니시니 거룩하시기 이를 데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선을 지녀야만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함을 나누어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에 들어오라 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따라 우리 힘대로 우리의 선함을 키워가며 거룩한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8) 하느님은 공의로우시다
    공의하다 함은 옳은 것을 옳게 그른 것은 그르게 판단하고 선한 일에는 상급을 베풀고 악한 일에는 벌함을 뜻한다. 하느님이 공의로운 분이라 함은 우리 인간의 행실을 심판하시어 상벌을 주시는 데 있어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억울함을 당할 때가 가끔 있다. 이럴 때 우리의 속까지 다 보시고 아시는 공의로운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다 알고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의 억울한 설움을 언제나 삭혀주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도록 위로해 주신다.
    9) 하느님은 초월적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당신이 만드신 세계 안에 언제나 현존하시지만, 하느님은 이 세상과는 아주 다른 분이시다. 모든 종류의 범신론(汎神論)과 하느님을 이 세상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경향, 그리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세계의 어떤 차원이나 모습으로 보려는 모든 경향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파악하지 못한다.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만드신 하느님의 위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에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인간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다.
    모든 사물이 하느님을 증거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과는 다른 분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시고, 그분이 만드신 변화하는 사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하느님은 만물을 초월하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만물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함이 없고 영원한 하느님의 실재는 그 자체가 완전한 것으로서 유한한 실재와는 완전히 구별된다.
    또한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사야 5,24)이시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어떤 악에도 물들지 않은 자유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과는 달리 죄를 범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강렬한 선성(善性)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한다. 그것은 희망과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뛰어난 존경심이다.
    5.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깊이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몸을 맡기고 있는가?
    신문에 나온 한 이야기를 읽고 이를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 어떤 집에서 한밤중에 프로판 가스가 폭발하여 화재가 발생했다. 양친과 두 어린이는 어떻게든 밖으로 달려 나왔으나 혼란 속에서 제일 밑에 있는 5세의 남자 아이가 2층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양친은 광란 상태가 되었다.그 남자 아이는 2층의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쳐다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창에서 뛰어 내려라!'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연기와 화염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나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아버지의 얼굴도 보이지 않아요!' 어린이는 그렇게 대답하였다.'아빠가 너를 보고 있으니 염려 없다, 자 뛰어 내려!' 아버지의 목소리에 따라 어린이는 창에서 뛰어 내렸다. 아버지는 창 밑에서, 창에서 뛰어 내리는 어린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어린이는 찰과상 하나도 없이 무사했다.
    우리들도 하늘의 아버지께 이 어린이처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자신은 결점 투성이로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으나 노력하여 자신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의 사랑은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신다. 이것은 결코 독선적인 생각이 아니라 깊은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만 신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은 사랑 자체이시고 나에 대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하늘의 아버지는 나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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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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