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존중, 침묵
지금 미국을 여행하는 중인데,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종교인은 “전 가톨릭 신자”이며, 최근 몇 년 사이 자신이 종교가 없다고 답하는 사람이 5명 중 1명이 넘었다. 물론,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전 가톨릭 신자”다.
유럽과 호주의 교회에서 선례가 있고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는 교회로부터의 “도매급 탈퇴” 때문에, 본당과 교구들은 이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샌프란치스코의 한 교회에는 검은 담벼락에 이들을 초대하는 낡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최근에 끝난 “새복음화와 그리스도 신앙의 전수”를 주제로 로마에서 열린 주교 시노드는 이런 비슷한 노력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직 아시아교회는 이처럼 대규모 신자 감소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청년들이 참여하지 않아 점점 더 많은 수도회가 노쇠해가고 있다.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서구에서 시작된 교회의 쇠퇴는 아시아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아시아교회는 상황이 막바지에 이르기 전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의 교회가 교회를 떠난 이들을 되돌아오게 하려는 노력을 본받아 활용할 수 있을까?
반대로, 아시아교회는 서구교회에 다른 형태의 모범을 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추기경으로 선임된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의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대주교가 주교 시노드에서 밝힌 바 있는 겸손하고, 다른 이를 존중하며, 침묵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 세 가지 덕목이 어떻게 아시아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에서 작용할 수 있을까?
만일 한 치약회사가 많은 광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회사는 소비자에게 왜 자기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싫어하는지를 물어보아, 소비자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교회의 제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광고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분명 제대로 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광고는 “소비자”를 오히려 밀어내고 있다.
이들에게 교회로 다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현수막을 내거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이 현수막은 지나는 사람들은 길 잃은 사람들이고 “똑바로 살기 위해서는” 품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인식이 숨어있다.
대신, 교회는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 떠났나요?” “당신이 떠난 이유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잘못인가요?” “우리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말씀을 잘 표현하지 않았거나, 배반하거나 혹은 잘 전달하지 않았나요?” “우리가 어떤 사과를 해야 할까요?”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 같이 연구할 수 있을까요?” “다시 돌아오기 바라지만 두려운가요?”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 성탄절이나 성 금요일 전례에 우리는 이런 덕목을 강조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결국, 타글레 대주교도 곧 “추기경 전하”가 된다. 하지만, 이런 겸손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교회의 갱생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실패, 적어도 부적절했음을 인정해야 하며, 이는 공허한 말이 아니라 후회하고 회개하는 진정성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이런 겸손한 질문 뒤에, 실제로 대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이들의 대답이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거나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들의 대답에서 정확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떠난 이들을 존중해야 하며, 이들에게서 교회를 떠난 이유뿐만 아니라 이들의 교회 “바깥에서의 경험”까지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각, 또는 우리가 충성하는 단체에 대한 비판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유혹은 바로 이런 비판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고통이나 혼란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하며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고통스런 비판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침묵이다. 침묵은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대한 재빠른 답변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그런 답변이 사실상 필요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또, 침묵은 우리가 배운 것을 가슴 속에 새기고 이것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구도하는 사람들과 일치하려 한다. 침묵은 또 우리를 겸손함으로 이끈다. 타글레 대주교가 “교회는 침묵의 힘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만일 아시아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 특히 지도부에 있는 사람들은 겸손과 존중, 침묵의 가치를 배울 수 있고 이를 실행한다면, 현수막과 프로그램 등으로 교회를 떠난 이를 초대하고 장려하며, 설교하면 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갈구하는 서구 교회에 소중한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회 선교사이자 아시아가톨릭뉴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