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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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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5 교리공부
1. 예수님은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人間)이시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셨는지 그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듯이,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
1) 예수의 탄생과 성장
예수님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식민지 통치 아래서 태어난 유다인이었던 셈이다. 그분의 아버지는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분이었다(마태 1,17; 루카1,27).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약혼만 해놓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의 힘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는 것이다(루카 1,34-35).
이같이 태어나신 예수님은 목수이셨던 아버지 요셉(마태 13,55)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살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며 "슬기와 키"가 자랐다(루카 1, 40.52).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면서 자랐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목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그분도 목수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마르 6,3).
2) 예수의 공생활
이렇게 자란 예수님은 30살 쯤 되었을 때(루카 3,23) 가정을 떠나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의 가정을 떠나 당신의 새로운 가족(마태 12,48-50)을 만들고 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신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을 뽑아 그들과 함께 지내셨다는 것이다.
(1) 예수님은 가르치는 분이다.
예수님은 함께 지내는 제자들에게 여러가지의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자들뿐 만 아니라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기쁜 소식을 가르치고 설명해주신다. 예수님이 가르칠 때는 어려운 말씀을 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당시 사람들이면 누구나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다. 예를 들면 양떼와 목자, 씨 뿌리는 사람, 포도원, 겨자씨, 등잔불, 누룩, 친구 이야기, 결혼잔치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가르치신다. 예를 들면 유다인들의 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이나 회당(루카 4,16),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혼인잔치를 하는 집(마르 2,1; 루카 5,29)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같이 어떤 건물 안에서만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호숫가에서 서서(루카 5,1), 물 위에 떠있는 배 안에서 앉아서(마르 4,1), 그리고 땅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도(요한 8,5.8) 가르치셨다. 심지어는 먹고 마시는 도중에도 가르치신다(루카 6,27-39).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마르 1,15)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마태 22,37-40; 루카 10,25-28)이었다.
(2) 예수의 인간적인 언행(言行)들
예수님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통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들, 예를 들면 기쁨, 분노, 사랑, 즐거움, 감사, 동정심 같은 것을 다 느끼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싫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기도 하고, 또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에 슬픔을 보이신다(마르 3,5).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집인 성전(聖殿)을 더럽힌다고 그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들어 엎어 버리는 과격한 행동을 하시기도 한다(마태 21,12).
또 백성들 앞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이던 당신의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에 갈 심판을 피하랴?"(마태 23,33)하고 욕을 퍼부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과는 달리 어린이들을 사랑하셔서 껴안기도 하고(마르 10,16),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라는 세 남매를 사랑하셔서(요한 11,5), 라자로가 죽자 비통한 마음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3.35).
이것만이 아니다. 그분은 굶주리기도 했고(마르 11,12), 먼 여행에 지쳐 낯선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기도 하신다(요한 4,6-7).
또 배 안에서 배의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기도 하고(마르 4,38), 잔치집에 가서는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마태9,10).
3) 예수의 죽음
사람이면 누구나 죽듯이 그분도 죽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요한 19,19-22).
다시말해서 당시 로마의 지배에 도전할 위험한 인물이라는 죄 때문에, 그리고 유다인들에게는 오직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사칭했다는 죄 때문에 정치범으로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분은 죽음을 앞에 두고 무서워 떨며 번민하고, 괴로워 하신다(마르 14,33-35).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탄식을 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결국은 33살이라는 나이에 숨을 거두셨다(마르 15,34.37).
2. 예수님은 하느님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일생은 완전한 실패이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눈에 보이게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는가? 아니면 장가를 들어서 자손들이라도 많았나? 지금의 사회 기준으로 보면 그저 철이 들만한 나이가 되니까 가출해서 자기 식대로 살다가 당시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결국은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일생을 마친 불행한 청년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손수 뽑았던 제자들마저도 예수가 잡히던 그 순간에 모두 도망 가버렸다(마태 26,56). 모든 것이 말 그대로 공(空)이다.
1) 제자들의 증언 -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라는 사람이 언제 있었더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땅에 묻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마태 28,6-7).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2) 제자들의 신앙고백 - 부활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다
바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때까지 스승인 예수의 죽음으로 실망하고(루카 24,17), 자기들까지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에 질려 있던 제자들을(요한 20,19)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놓는다.
제자들의 경우와 똑같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이 죽거나,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인생을 좀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 제자들도 이제 새로운 눈,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것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나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하기 시작한다(사도 2,14).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예수를 부활시킨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라고 말이다. 이제 제자들의 고백은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간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버지 하느님과 항상 일치하고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다고 말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구세주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자신들과 함께 하시던 일들에 대해서 새로이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야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시라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은 세상의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이시라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그 분의 일생은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께서 함께 하신 일생이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전에 죄인들을 용서해주거나 병을 고쳐준 기적들과 귀신을 내쫓은 행동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3)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우리가 예수께 드려야 할 대답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참된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오빠 라자로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요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5-27).
3. 육화의 신비
1) 어떻게 둘이 하나이고, 또 하나가 둘일 수 있는가?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이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일 수 있으며, 또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 신비로운 것을 육화(肉化)의 신비 또는 강생(降生)의 신비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되셨다는 신비이다.
이처럼 신비스러운 것이지만 그래도 이것을 간단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여기 날달걀이 있다. 이 달걀을 예수님이라 생각해보자. 그럼 이 달걀을 깨서 유리그릇에 담아 보면 흰자와 노른자가 있다. 여기서 흰자를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 즉 예수님의 인성(人性)이라고 하고 노른자를 예수님의 하느님적인 면, 즉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보면 이 달걀, 즉 예수님 안에는 분명히 인성과 신성이 함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는 그 인성과 신성이 지금 보시는 흰자와 노른자처럼 눈에 보이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달걀을 휘저어 보자. 흰자도 노른자도 안 보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분명히 이 안에는 흰자가 있고 노른자가 있다. 그렇다. 지금 휘저어 놓은 달걀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시지만 그 두 가지가 떨어지지 않고 완전히 하나로 되어 있다.
2)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육화의 신비는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의 우리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의 처지가 되셨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서의 말씀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루카 2,11-12).
하느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한 갓난 아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시니까 마음대로 선택해서 잘 사는 귀족이나 왕의 아들로 호화로운 집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육화의 신비는 예수님의 일생 안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 우선 30년간에 걸친 나자렛의 가정 생활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느님이시라면 굳이 부모님 슬하에서 자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철저하게 한 인간이셨기에 보통 인간들이 겪는 성장 과정을 다 겪었다는 말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이나 권세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 좀 더 쉽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 창녀, 지체부자유자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항상 찬밥 신세이던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또 그들과 함께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선포를 시작할 때 하신 일종의 취임사 같은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이 말씀들을 실제로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셨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육화의 신비가 잘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 있을까? 아니 하느님이시라면 죽음의 고통을 당하더라도 겉으로만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셨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고통뿐만 아니라 고문과 십자가형이라는 극도의 고통까지도 실제로 다 겪으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가장 비참한 인간의 처지에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육화의 신비가 가장 잘 드러난다. 결국 예수께서는 성서의 말씀처럼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신의 가난으로 여러분이 부요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2고린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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