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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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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6 교리공부
1.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금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살아 계시던 때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은 시골의 한 예언자가 놀라운 기적을 하면서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처음 얼마 동안은 중풍병자나 나병 등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고작인 줄 알고 안심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의 병자들을 고치는데 그치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음이 병든 사람들도 고쳐 주셨다. 그것도 병든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당신이 몸소 찾아가서 그들의 병을 보살펴 주셨다. 또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소외받고 핍박받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갈릴레아 호수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겨우 수십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켰고 그때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마침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지자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은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지배를 따르면 그만이었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쫓아내고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그 불안은 더 커졌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이렇게 하는 권한이 있는지를 따지기 시작한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들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으로 예수님을 묵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찌기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의 예고에 따라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한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박해는 처음부터 고의적이고 무지막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다 듣고 나서 백성들이 보고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대답이나 부활논쟁(루가 20.20-40)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답변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고 또한 겉꾸며 길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니 조심하라고 말씀하셨고 이런 사람들은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셨던 것이다(루가 20,45-47).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트집을 잡지도 못하고 망신을 당하자 예수님을 미워한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율법의 적용을 무색하게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질투하였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한낱 시골의 예언자로만 보지 않고 자기들의 경쟁자로 보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들을 조사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트집잡을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백성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율법을 안 지킨 때가 여러 번 있는 예수님은 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었다. 그때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이 가져다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더 좋아하면서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초기의 예수님 행적을 멀리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로 치부하면서 그들은 되도록 예수님에 관한 것을 모르는 체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지금까지는 아무도 넘겨다 보지 않았던 율법학자들의 권위에 예수님이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어서 그들은 예수님을 증오하게 되었다. 곧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마치 그들의 계획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바로 이때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그들을 만난다. 이 만남으로 예수님은 며칠 후에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묻히심
이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과월절이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예루살렘의 어느 집 이층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것이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루가 22.14-20).
과월절의 본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할 때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 옛날의 조상들이 종살이 하던 것을 구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는 조상들이 고생하던 때를 생각하여 쓴 풀과 누룩없는 빵 그리고 속죄의 의미로 양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예절과는 다르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빵을 드시고는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하셨다.
또 잔을 드시고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 여러분을 위하여 쏟는 것이다" 하셨다. 그런 후에 당신이 한 제자의 배반에 의해서 곧 잡히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는 고통스러운 말이었다. 그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게 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전에도 하느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괴로워 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려 들지 않는 백성들을 보시고 무서운 예언을 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셨다(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저주하심 - 루가 10,13-15.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심 - 루가 19,41-44).
아무튼 이때의 예수님은 착잡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을 하셨다. 즉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협조자로 성령을 보내겠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맡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언을 제자들에게 하신 후에 그 방을 나와서 전에 갔던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그곳에 있는 게세마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떨어져서 혼자서 기도하신다. 이 기도를 하는 동안 예수님은 온갖 인간적인 고통과 번민을 느끼신다.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즉 아무리 중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나약한 인간의 심경으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간구한다. 즉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다가오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다가오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 후에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신다. 얼마 있지 않아서 깜깜한 밤 중인데도 유다가 성전 관리병들과 함께 올리브산에 와서 예수님을 체포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는 대제관의 집으로 갔다. 베드로는 스승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겁이 나서 도망쳤지만 이내 스승이 걱정되어서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라 대제관의 집에까지 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추궁으로 베드로는 또 겁이 나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이때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이곳에 없었다.
한편 대제관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잡혀온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면서 때렸다.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은 최고의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곳에 예수님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증명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들이 내놓은 증거나 증인들이 하는 말은 어느 것도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떻게 해도 그런 죄목은 예수님에게 맞지 않자 그들은 끝에 가서 억지를 부린다.
즉 "그러니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대제관이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대로라면 누구든 '하느님'이라는 말조차도 함부로 말해서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님처럼 시골 예언자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알고 계시지만 예수님은 "내가 '그'라고 여러분은 말한다"하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씀을 갖고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다음날 대제관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에게는 사형 권한이 없음을 이유로 하여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준다.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흔히 볼 수 있는 군인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대제관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표면적인 죄목은 '유대민족을 이간하여 황제에게 세금내는 것을 막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말한 점'이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별도로 예수님을 심문해 보고는 대제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위험 인물이 아니라고 보았다. 빌라도 조차도 대제관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알고서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을 또 다른 사람, 헤로데에게 넘겨준다. 헤로데라는 사람은 로마 총독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에 불과한 유대인의 왕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로마의 총독이 허가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아무런 권한이 없었던 헤로데이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건네 받았지만 별다른 심문은 하지 않고 그저 장난이나 치고는 다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빌라도는 짜증이 나서 축제 때마다 유대인 죄인 하나를 풀어주었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예수님을 매질이나 해서 풀어 주려고 한다. 그러나 대제관들은 빌라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예수님은 죽이고 그대신 바라빠라는 죄인을 풀어 달라고 한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요구한 예수님의 사형은 그저 단순히 칼로 목을 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요구한 사형의 방법은 그 시대에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만 언도하였던 '십자가 형'이었다. 이 형을 받은 죄인은 자기가 매달리게 될 십자가를 들고 형장으로 가기 전에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시를 돌았다. 로마의 총독은 자기들에게 반항한 죄인들에게 이런 가혹한 형벌을 주었다.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보고 로마에 반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이 사형장에 도착하는 동안 이제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조롱과 모욕을 모든 사람들에게 받았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보고 침을 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저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욕설은 듣기만 해도 보통은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쓰러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꾀를 부린다고 조롱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때린다. 그 험한 길을 걸어 오는 동안 예수님을 도와 준 사람은 키레네 사람 시몬 뿐이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죽어야 할 장소인 '해골산(골고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군인들은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예수님의 옷을 벗기우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게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눕자 그들은 예수님의 양 손목과 발등 위에 커다란 못을 들고 주저없이 박았다. 그리고 십자가를 들자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대제관들의 시기심에 의해서 예수님은 억울하게 잡혀와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게 되었다. 즉 예수님 때문에 백성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대제관들은 질투심을 못 이겨서 예수님에게 잔악한 보복을 한 것이다. 본시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작은 명패를 달았다.
I.N.R.I.(Jesus Nazarenus Rex Judaeorum) 곧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것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죄명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명패는 유대 지도자들의 보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보인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시면서 서서히 죽으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도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또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하고 하실 뿐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자 아무도 그분을 거두어서 무덤에 묻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선 대제관들이 그것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도 자신이 당당한 의회의원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빌라도에게 가서 허가를 받아서 자기가 아는 빈무덤에 예수님을 묻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는 가운데 쓸쓸히 돌아가셨다. 단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십자가 아래서 지켜본 사람은 성모 마리아와 몇 사람의 여자들, 그리고 제자로는 유일하게 요한 뿐이었다. 이들은 안식일 전날에 예수님이 빈무덤에 묻히시는 것을 지켜 보았다.
3. 예수님의 부활
그 여인들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와 향료를 발라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고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저 조용히 지냈다. 그 여자들은 안식일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 갔다. 여자들은 무덤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덤에 있었던 어떤 사람이 실의에 빠진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준다. 즉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전에 갈릴레아 계셨을 때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시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여자들은 사람들이 무서워 숨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대로 알려 주었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도 깜짝 놀라서 무덤에 와 보기는 하였지만 아직 믿지는 않았다. 얼마 후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에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4. 예수님의 수난, 고통, 죽음 그리고 부활의 구원적 의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특히 성삼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한다. 즉 성목요일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을, 성금요일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성토요일에는 부활하심을 기념한다.
가톨릭의 십자가는 개신교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이 달려 계시며 몸에 오상이 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십자고상'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처럼 처참한 죽음을 하셨을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멸망될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체험과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이룩하신 업적의 가장 중대한 측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한 구원에 대한 개념을 갖고 예수님의 행동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당신이 받은 소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셨다. 즉 가난한 사람과 소외받은 사람들을 찾아 가서 위로하셨고 억눌리고 천대받던 세리와 창녀들을 따뜻하게 대하여 인간다운 해방을 주었다. 그리고 과부와 병든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행동에서 잘못된 곳을 찾아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곳은 도무지 보이질 않다. 오히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불안과 불행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준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구원 사업은 인간의 육체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보다 인간의 정신적인 면의 구원에 더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하여 잡힌 여인의 통회하는 모습을 보시고 용서하심으로서 그녀를 구원하셨다(루가 7,48 -50). 또한 통회하고 뉘우치는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내리셨다(루가 19,9).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구원은 주어진다. 다시 말하면 먼저 자기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 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수난과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한 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은 어찌보면 모순된 말씀으로 제시되었다. 즉 스스로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될 것이다(마태 19,39; 루가 9,24; 요한 12,25).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후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지옥의 저 아래에까지 내려 가셨다가 다시 그 죽음의 힘을 물리치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중에서 첫째로 태어나신 분"으로서(사도 26,23; 골로 1,18) 구원된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첫번째로 들어가신 분이시다. 그분은 "영광의 주님"으로서(1고린 2,8)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주인이시고(사도 3,6-8 참조) 하느님의 능력을 띤 강자이신다. 이렇게 부활이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그것은 환생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이 부활이 있었기에 사도들은 신앙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부활이 주는 기쁨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기쁨보다도, 가장 순수하고 최고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구약의 빠스카와 비교될 수 있다. 본래 빠스카라는 의미는 '거르고 지나가다'이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구하기 위해서 모든 생물의 첫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집 대문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칠했는데 그것은 생명의 구원을 약속하는 표시였다. 곧 죽음의 천사는 그 표시가 있으면 거르고 다음으로 건너 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도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죽지 않고 파라오의 종살이라는 속박에서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이처럼 구약에서 양의 피가 지녔던 것을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그대로 실천하셨다. 어떠한 잘못이나 흠집이 없는 순결한 양이 죽임을 당하여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이 보게 됨으로써, 또 천사가 보게 됨으로써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나아가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해방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이 순수하고 온화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여 그 처참한 몰골을 우리들에게 보이심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단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의 시기심이나 질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의 이웃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죄의 종살이를 해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우리가 매일 범하는 시기심과 질투심이라는 죄악 때문에 당신이 빠스카의 제물인 어린 양처럼 산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대로 하셨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되는 산 제물의 봉헌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죄의 종살이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이렇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이 세우신 성체성사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시는 약속의 재현이며 그것의 실현이다.
이것은 매주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고 성찬 중에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러한 빠스카의 의미를 매일의 미사 중에 성체성사 안에서 늘 새롭게 재현한다. 빠스카의 신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에서 죽고 또 부활하여 예수님과 만남으로서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뿐 아니라 내세까지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니는 구원의 의미
성서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유언하신 것처럼 복음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이러한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은 자캐오가 한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거나 바리사이들처럼 거절하여서 멸망에 빠지거나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주저없이 복음을 받아들였으므로 구원을 선택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생활에서 노력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또 가까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생활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때 그 용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 구원이 매일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이러한 통회와 신앙의 고백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빠스카의 신비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즉 진정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여야겠다. 또한 축성된 성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나아가서 생활의 나눔을 통해서 나의 이웃과 일치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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