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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 21:00 성령의 은사

겸손과 존중, 침묵

 

지금 미국을 여행하는 중인데,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종교인은 “전 가톨릭 신자”이며, 최근 몇 년 사이 자신이 종교가 없다고 답하는 사람이 5명 중 1명이 넘었다. 물론,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전 가톨릭 신자”다.

유럽과 호주의 교회에서 선례가 있고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는 교회로부터의 “도매급 탈퇴” 때문에, 본당과 교구들은 이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샌프란치스코의 한 교회에는 검은 담벼락에 이들을 초대하는 낡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최근에 끝난 “새복음화와 그리스도 신앙의 전수”를 주제로 로마에서 열린 주교 시노드는 이런 비슷한 노력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직 아시아교회는 이처럼 대규모 신자 감소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청년들이 참여하지 않아 점점 더 많은 수도회가 노쇠해가고 있다.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서구에서 시작된 교회의 쇠퇴는 아시아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아시아교회는 상황이 막바지에 이르기 전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의 교회가 교회를 떠난 이들을 되돌아오게 하려는 노력을 본받아 활용할 수 있을까?

반대로, 아시아교회는 서구교회에 다른 형태의 모범을 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추기경으로 선임된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의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대주교가 주교 시노드에서 밝힌 바 있는 겸손하고, 다른 이를 존중하며, 침묵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 세 가지 덕목이 어떻게 아시아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에서 작용할 수 있을까?

만일 한 치약회사가 많은 광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회사는 소비자에게 왜 자기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싫어하는지를 물어보아, 소비자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교회의 제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광고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분명 제대로 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광고는 “소비자”를 오히려 밀어내고 있다.

이들에게 교회로 다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현수막을 내거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이 현수막은 지나는 사람들은 길 잃은 사람들이고 “똑바로 살기 위해서는” 품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인식이 숨어있다.

대신, 교회는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 떠났나요?” “당신이 떠난 이유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잘못인가요?” “우리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말씀을 잘 표현하지 않았거나, 배반하거나 혹은 잘 전달하지 않았나요?” “우리가 어떤 사과를 해야 할까요?”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 같이 연구할 수 있을까요?” “다시 돌아오기 바라지만 두려운가요?”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 성탄절이나 성 금요일 전례에 우리는 이런 덕목을 강조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결국, 타글레 대주교도 곧 “추기경 전하”가 된다. 하지만, 이런 겸손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교회의 갱생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실패, 적어도 부적절했음을 인정해야 하며, 이는 공허한 말이 아니라 후회하고 회개하는 진정성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이런 겸손한 질문 뒤에, 실제로 대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이들의 대답이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거나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들의 대답에서 정확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떠난 이들을 존중해야 하며, 이들에게서 교회를 떠난 이유뿐만 아니라 이들의 교회 “바깥에서의 경험”까지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각, 또는 우리가 충성하는 단체에 대한 비판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유혹은 바로 이런 비판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고통이나 혼란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하며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고통스런 비판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침묵이다. 침묵은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대한 재빠른 답변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그런 답변이 사실상 필요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또, 침묵은 우리가 배운 것을 가슴 속에 새기고 이것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구도하는 사람들과 일치하려 한다. 침묵은 또 우리를 겸손함으로 이끈다. 타글레 대주교가 “교회는 침묵의 힘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만일 아시아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 특히 지도부에 있는 사람들은 겸손과 존중, 침묵의 가치를 배울 수 있고 이를 실행한다면, 현수막과 프로그램 등으로 교회를 떠난 이를 초대하고 장려하며, 설교하면 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갈구하는 서구 교회에 소중한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회 선교사이자 아시아가톨릭뉴스 발행인)

posted by Paul E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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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 19:30 성령의 은사

머리말

지난 주 일간신문과 TV방송에 하버드 신학부 교수 캐런 킹(58)이 국제학회에서 예수가 직접 “나의 아내”라고 언급한 4세기 이집트 곱트어 파피루스 조각을 공개하고, 이에 근거해서 “예수에게 부인이 있었다”라는 예수 결혼설을 주장하여 미국 교계를 뜨겁게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예수, 부인 있었다’ vs ‘전혀 신빙성 없다’,” 조선일보, 2012. 9.20. A25). 이러한 주장은 ‘예수는 독신이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다시 오신다’는 성경적 정통 기독교 가르침을 부정하는 신성모독적 견해로, 이미 지난 10여년 전 이래 몇 차례 영지주의(gnosticism) 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역사적 예수 왜곡사(歪曲史)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여기서 필자는 최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영지주의 종교학자들의 왜곡된 주장들을 소개하고, 이러한 주장들이 1세기에 작성된 4복음서나 사도적 증거에 기반하지 않고, 훨씬 후대인 4세기에 작성된 영지주의 문서에 의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왜곡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I.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영지주의적 왜곡 사례

 

1. 예수 신화론

1999년 영국의 종교학자 디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에 의해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란 논쟁적인 책이 2002년 9월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어 논란을 야기시켰다(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지음, 송영조 역, 예수는 신화다, 동아일보사, 2002년 9월, 조선일보 2002년 9월 25일자 A12면 신간 광고). 이 책에 의하면 “‘원래적 예수’(Original Jesus)는 ‘이방 신’(a Pagan God)이었다”는 것이다(Timothy Freke & Peter Gandy, The Jesus Mysteries, Three Rivers Press 1999, 340 p.). 이 책은 서기 3세기의 부적 그림을 제시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이교도 신인(神人)인 오시리스-디오니수스(Osiris-Dioysus)였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결론에 의하면 “기독교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다른 이름에 의한 이방(異邦)종교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이야기는 역사적 메시야의 전기가 아니라 고대 지중해 지역에 수 세기 동안 퍼져 있었던 신인(神人) 오시리스-디오니수스(Godman Osiris-Dioysus) 이방신화를 유대교적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본다. 프리크와 갠디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영지주의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이야기를 역사가 아니라 우화(寓話, allegory)로 이해했고, 심지어 예수를 이방 신인(神人)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영지주의자들이 4세기와 5세기에 로마교회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박멸되었다. 그 후로 공적인 왜곡선전에 의하여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방(異邦)종교로 개종한 위험한 배교자들로 간주되었다. 프리크와 갠디는 “이들 영지주의자들이 본래 기독교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프리크와 갠디는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Josephus)에 의한 예수의 언급은 후대의 위조(forgeries)이며, 역사적 예수의 실존에 관한 증거는 거의 없다고 본다. 이들의 주장은 3-4세기에 나타난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 함마디 문서에 근거하고 있다. 영지주의 문서는 1세기에 작성된 사도들의 서신들과 복음서보다 훨씬 후대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미 초대교회 시 바울과 요한을 비롯한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영지주의를 이단(heretics)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프리크와 갠디의 예수상은 철저히 영지주의적 기독교 시각에 의하여 재구성되고 있다(이에 대한 비판 기고문, 김명혁, “기독교 왜곡 말라- ‘예수는 신화다’ 책의 출판을 보고”, 국민일보, 2002년 9월 26일자, 29면).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들인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터툴리안(Tertullian), 이레네우스(Irenaeus) 등은 당시에 문제로 부상한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 오시리스-디오니수스 신화의 유사성이란 “사단적인 모방술”(diabolical mimicry)의 결과라고 비판하였다.

 

2. 다빈치 코드의 예수론

2003년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역시 나그 함마디 문서의 영지주의적 가설 위에 설계됐다. 『다빈치 코드』의 내용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그 후손이 메로빙거 가문에 흡수되었다. 메로빙거 왕조는 예수의 후손을 비밀리에 보호하기 위해 시온 수도회라는 결사 단체를 만들었고, 이 시온 수도회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위인들이 수장을 맡아 왔다.”로 요약된다. 당시 미국에서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은 아마존 인터넷 판매에서 1위를 점하였고, 32주 동안 뉴욕 타임지 베스트셀러의 리스트에 올랐고 미국 ABC 뉴스 스페셜이 1시간 방영하였다. 이 소설은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과 신학적 발전에 관하여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다빈치 코드』는 기독교 역사의 진로에 있어서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된 아리우스의 주장이 옳다고 본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아리우스에 의해 주도된 아리우스파는 ‘예수는 주목할 만한 지도자였으나 육체에 나타난 하나님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다빈치 코드』는 아리우스를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에 대한 대표자로서 두둔하고 있다. 니케아 회의의 아리우스를 두둔하면서 『다빈치 코드』는 “역사에 있어서 그때까지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유한한 선지자, 위대한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인간(a man) 으로 보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4복음 그리고 사해사본은 물론이고 고대 문헌 어디에도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거나 성적인 관계를 가지거나 아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전혀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한 것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1982년에 나온 책 「성혈, 성배」(예수 후손에 관한 비밀 고문서를 조사하고 메로빙거 왕가와 성당기사단에 대해 조사하여 발표했다는 책)에 의존하고 있고, 이 책의 저자들은 1953년 사기죄로 징역살이를 했던 프랑스인 피에르 플랑타르가 제공한 문서들에 의존하고 있다(다빈치 코드는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ydkim0301/20042707510).

 

3. 콥트 문서의 예수 결혼설

예수가 “나의 아내”라고 직접 언급했다는 4세기 콥트어(語) 문서의 파편이 지난주(2012년 9월)공개됐다. 초기 기독교 연구가인 캐런 킹은 18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 콥트학회에서 이 문서 파편을 공개했다. 고대 이집트 남부에서 쓰였던 콥트어 문장을 해독했더니 “예수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내’… 그녀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내용이 드러났다고 했다. 그녀는 “정확한 입수 경로는 밝힐 수 없다”며 공개한 콥트어(이집트 토착어) 문서 파편에 스스로 ‘예수의 아내 복음(The Gospel of Jesus' Wif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명함 크기의 이 문서의 문구들은 문장으로서 완성되지 않은 형태다. “내게는 아니다. 내 어머니가 내게 생명을 주었다” 등 맥락 없는 단어가 나열된 가운데 “나의 아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는 것이다.(“예수, 부인 있었다” vs “전혀 신빙성 없다”, 이태훈 기자 libra@chosun.com, 입력 : 2012.09.20 03:06, 조선일보, 2012. 9.20. A25). 킹도 이 콥트어파편에 대하여 “예수 사후 수백 년이 지나 만들어진 문서다. 예수가 결혼했다는 결정적 증거로는 볼 수 없다”며 조심스러워했다. 성경 외의 수많은 종교 문헌이 있지만, 예수가 혼인했다는 얘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4세기 콥트어 문서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신약시대와 거리가 너무 멀어 신빙성을 얻기 어렵고, 문서 파편 하나로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

 

II. 영지주의 문서의 이단성: 나그 함마디 문서

 

예수의 삶과 관련한 영지주의적 왜곡의 역사는 오래됐다. 도마가 예수의 쌍둥이라고 확언한 ‘도마행전’, 가룟 유다가 예수의 진정한 제자였다는 ‘유다복음’, 깨달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마복음’ 등이 그렇다. 이런 주장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 중동 지역에서 새 문서가 발견될 때마다 불거졌다. 그 바탕에는 예수 사후 이집트 등을 근거로 번졌던 영지주의가 깔려 있다. 영지주의는 유대교, 기독교, 점성술, 그리스·이집트 철학·사상 등이 혼합된 일종의 이단 사상. 교리적으로 정통 기독교와는 큰 차이를 보여 3세기경 이후로는 사라졌다. 대부분의 기독교 영지주의 문서는 3~4세기 정도에 쓰였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며,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등 4대 복음서는 대개 1세기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쓰인 것들이며 기록의 연대로 봐도 복음서가 훨씬 신빙성이 있다.

 

1. 나그 함마디 문서는 영지주의 문서

나그 함마디 문서(the Nag Hammdi library)는 대표적인 영지주의 문서다. 이 문서는 1945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 나그 함마디(Nag Hamma야) 지역의 자발 알 타리프 절벽에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나그 함마디 문서’라고 부른다. 13개의 파피루스 묶음(코덱스·codex)으로 구성된 이 문서에는 ‘도마복음’을 비롯해 진리복음, 빌립복음, 마리아복음, 요한비서, 베드로 행전 등 기독교에서 이단시해 온 영지주의 위경(僞經)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는 4세기의 이집트 상류에 있는 기독교 도서관에 속하는 13개의 파피루스본에 묶여 있는 52개의 콥틱(Coptic)문서이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초기 희랍문서의 번역이며 원래의 언어는 예외 없이 상실되어 있다. 그러나 1977년에는 콥트어(헬라어 알파벳으로 표현된 고대 이집트어)로 기록된 나그 함마디 문서 전체가 영역 출판돼 이제는 누구든지 볼 수 있다. 이 문서는 사해사본(쿰란 문서), 미지 복음서 단편, 비밀 마가복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서로 분류되는데, 그 이유는 영지주의적 시각에서 기독교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주의 문서라고 부른다. 영지주의 문서에 따르면 예수는 삼위일체의 성자가 아니라 신으로 가는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영지주의 교사(현자)’라는 것이다.

2003년 종교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소설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에서는 사해사본이 예수의 선교를 매우 인간적인 용어로 서술한다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사해사본에서 예수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부분은 없다. 『다빈치 코드』에서는 또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고 말하나, 사해사본은 물론이고 고대 문헌 어디에도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거나 성적인 관계를 가지거나 아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수의 결혼설 등은 대부분 전설이나 상상에 근거한 것이다. 영지주의 문서가 재구성하는 역사적 예수는 영지(靈知)의 지혜자로서 복음서에 나타난,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는 인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그러므로 3세기의 교부들, 저스틴, 오리게네스, 이레네우스 등은 그 시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영지주의 종파들을 정통 기독교의 흐름에서 벗어난 이단으로 정죄했던 것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는 이미 초대교회가 정죄한 영지주의 문서로서 이단으로 간주되어 폐기된 문서이다.

 

2. 도마복음도 나그 함마디 문서에서 나옴.

나그 함마디 문서에서 나온 일부 문서인 도마복음(Gospel of Thomas)도 예수의 어록만을 담고 있는 영지주의 복음서이다. 발견 당시 상형 문자와 그리스 문자를 겸용한 콥트어로 쓰여 있었다. 도마복음은 4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삶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예수의 가르침(어록)만을 포함하고 있는 데, 소위 겨자씨의 비유 등의 일부 내용이 복음서에도 나온다.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영지주의적으로 역사적 예수를 왜곡하고 있다. 나그 함마디에서 함께 발견된 문서에는 영지주의 문서 52편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문서들이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도리어 도마복음처럼 4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면서도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영지적 자각으로 인한 영생”으로 왜곡한다면 그러한 문서들은 도움은 커녕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이것들은 초대교회 때 벌써 정죄를 받고 사라진 문서들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문서들이 발굴될 수 있다. 발굴된 문서의 내용이 교회의 전통에 일치하느냐 않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영지주의 문서는 초대교회가 이미 이단으로 정죄한 문서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철저히 배제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사해사본 문서, 미지 복음서 단편, 비밀 마가복음 등은 우리들에게 외경적 가치를 가지고 복음서에 대한 배경적 설명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맺음말: 역사적 예수는 신화가 아니라 성육신한 말씀

요한일서에 사도요한은 1세기에 벌써 역사적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미혹의 영들이 교회 내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요일]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가 육체로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였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당시에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 유사한 것으로 부상한 오시리스-디오니수스 신화란 “사단적인 모방술”(diabolical mimicry)의 결과라고 비판하였다. 교부들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조하였다. 3-4세기에는 예수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건 대중적 관심이 높아서 가짜 문서가 만들어졌다. 사단은 이러한 대중적 호기심을 이용하였다. 이미 초대교회에서도 바울과 요한을 비롯한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영지주의를 이단(heretics)으로 간주하였다. 사도 요한은 말씀의 성육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육신으로 오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눈으로 보았고 손을 만져보았다고 역사적 예수의 가시성과 구체적인 실존을 강조하였다. 영지주의 학자들은 영지주의의 영에 사로잡혀서 신약성서 및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가 그린 역사적 예수상을 영지주의적으로 왜곡하였다. 이번 캐런 킹이 발견한 “예수의 아내”를 시사하는 콥트어 단편도 영지주의 문서 가운데 하나의 자료일 뿐이다.

 

김영한 교수(기독교학술원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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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적 외경에 대한 참고자료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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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8. 18:54 성령의 은사


 

 

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으며,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팔공 산괴의 주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유교의 전통이 강하였던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상주 등으로 피난하여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잠시동안 외부와 격리된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정부의 관여 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인 을해박해(1815)때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과 형제들이 그들과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839년 4월 정해박해 때에 체포된 신자들이 처형되기 한 해 전인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정을 비롯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850년대 말에는 큰 신자촌이 되었다. 경신박해(1860)때에 한티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박해가 끝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1862년 장 베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신박해로 김현상의 후손들이 대구로 떠난 후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성상돈 아우구스띠노 및 그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씨 가정과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 해 봄 문경 한실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월 19일 순교하니 그 조카 서상돈이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다.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한다.

1868년 음력 4월 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가롤로를 비롯한 30여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현재 한티의 순교자 묘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당시의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1868년 박해의 칼날을 받은 한티 공소는 한줌의 재로 변한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마을에 살던 박만수 요셉은 살아남은 몇몇의 사람들을 모아 공소재건에 앞장선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바람맞이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룬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 토마(당시 12세)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무렵 군위 칫솔에서 김재윤 플로리아노 가정과 김윤하 가정이 들어오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꼬 가정이 들어왔다.

1882-1883년 김보록 로베르또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때 신자수 39명, 고백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니, 김보록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참례하러 갔다. 이후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수가 8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전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공소재건의 의의

첫째, 순교자의 시신을 묻어드리고 이주해 와서 살았다. 이는 순교자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남은 것이 없는 곳에 성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여들었다.

둘째, 바람맞이 땅에 동네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속죄의 마음과 순교자를 따라 순교하겠다는 의지이다. 노출이 가장 심한 곳에 마을을 이룬다는 것은 죽음을 언제나 맞을 준비된 마음이다.

셋째, 조 가롤로 회장의 어린 아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모셨다. 이것은 순교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이며, 순교자들에 대한 예우였을 것이다.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순교자의 묘지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조 가롤로는 상주의 구두실이 고향으로 그의 집안은 1839년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기해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 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티 부락에 열심한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서익순과 서태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 대(代)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주 장원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1857년 상주에 도착한 이들은 2년간 살다가 1859년 장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1866년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리델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대구에 와서 박해에 관한 소식을 전하자 신자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는데, 서태순은 문경 한실로, 그의 형 서익순 가족과 서상돈 가족은 한티로 피난을 갔다. 서태순과 부인 김데레사와 7세된 남자아이는 1866년 문경에서 잡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조카 서상돈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서태순의 옥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한번은 서태순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옥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참혹한 광경에 이후 서상돈은 평생 쌀밥을 먹지 않았다 한다. 서태순 베드로가 1866년 12월 18일에 34세의 나이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형 서익순이 한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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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00:45 성령의 은사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빠라끌리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 16 - 17).

진리의 성령을 예수님께서는 빠라끌리또라고 부르신다. 빠라끌리또란 '위로자', '협조자' 또는 '변호인'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다른' 또는 '두 번째' 빠라끌리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첫 번째 협조자이시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은 세상에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신 하느님의 첫 번째 협조자이시고 성령께서는 '그분 다음에' 또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요청으로'오시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업을 "세상 끝날까지"(마태 28, 20) 계속 추진하시는 두 번째 협조자이시다. 협조자라고 번역된 '빠라끌리또' 라는 표현은 본래 어린이나 노약자 등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부르면 언제나 달려가 도와 줄 태세를 갖추고 곁에 있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아기에게는 엄마가 바로 협조자이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세상 한 복판에서 세상을 향하여 흔들림 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의 시작이시며 새 협조자이신 것이다. 이제 성령께서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의 스승으로서 사도들과 교회 한 가운데에 계시면서 그들의 위로자, 변호인이 되시어 함께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요한 14, 18) 않으신다. 그래서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 7) 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열어 보여 주시는 최고의 완전한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 하셨지만 그것을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빠라끌리또 즉, 진리의 성령을 파견하심으로써 계속 드러내고 증거 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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